백석의 작품들 / 여승 및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해설
by 송화은율백석의 작품들
여 승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 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시는 1936년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으로 시집 ‘사슴’의 작품 세계는 풍속적 소재를 동원하여 풍요롭고 충족된 공간을 형상화한 장형의 작품군과 대상과 거리감을 두고 정경을 묘사하여 하나의 스케치를 제시하는 간결한 작품군으로 대별된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시 ‘여승’은 이 시집에서는 다소 돌출되는 작품이지만, 인간애와 현실 인식을 주조로 하는 백석 후기시의 특성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시 ‘여승’은 시간상 역행적 구성을 취하면서 여승의 이미지를 일제의 수탈로 인해 파괴된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 연결짓게 한다. 1연은 여승의 현재 모습이며 2-4연은 한 여인이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더듬고 있는 부분이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 시에는 개인의 운명과 한 시대의 아픔이 함께 들어 있다. 아내와,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부모 형제와도 떨어져 바람 센 쓸쓸한 거리를 헤매이는 시인의 고달픔은 1936년 이래, 백석 시인의 여정을 통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기에 백석은 이 시의 첫머리에 “어느 사이에”라는 말을 써서 자신의 운명이 점점 낯선 슬픔의 거리로 내몰리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이 시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대를 추정해 보면 일제 말기임을 알 수 있고, 그 시대를 견디어 내야 하는 한 지식인의 고뇌가 낮은 신음 소리처럼 귓가에 울린다.
이 작품은 1948년, <학풍(學風)>10월호에 실렸지만, 그의 친구 허준이 해방 전부터 보관해 오던 시라고 부기되어 있다. 이 詩에 보이는 주인공으로부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슬픔이며 어리석음을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한 개인의 슬픔이 그 시대의 아픔을 대리하는 비극성으로 공명처럼 울려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극 자체로 끝나지 않음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슬픔과 한탄을 차츰 앙금처럼 가라앉히고, 어느 먼 산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하얀 눈을 맞는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갈매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시련의 운명관을 초극하는 의지이며, 여기에서 한국인이 강인한 정신으로 꾸려온 공동체적 삶의 철학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긴 제목은 남신의주에 있는 유동이라는 지역에 사는 박시봉이네 집에 세들어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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