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 금파(百里金波)에서 / 본문 및 해설 / 김상용
by 송화은율백리 금파(百里金波)에서 / 김상용
고개를 넘어, 산허리를 돌아 내렸다. 산 밑이 바로 들, 들은 그저 논뿐의 연속이다. 두렁풀을 말끔히 깎았다. 논배미마다 수북수북 담긴 벼가 연하여 백리금파를 이루었다.
여기저기 논들을 돌아다니는 더벅머리 떼가 있다. '우여, 우여' 소리를 친다. 혹 '꽝꽝' 석유통을 두드리기도 한다. 참새들을 쫓는 것이다.
참새들은 자리를 못 붙여 한다. 우선 내 옆에 있는 더벅머리 떼가 '우여' 소리를 쳤다. 참새 떼가 와르르 날아갔다. 천 마리는 될 것 같다. 날아간 참새들은 원을 그리며 저편 논배미에 앉아 본다. 저편 애놈들은 날아 앉은 새 떼를 보았다. 깨어져라 하고 석유통을 두들긴다. 일제히,
"우여!"
소리를 친다. 이 아우성을 질타할 만한 담력(膽力)이 참새의 작은 심장에 있을 수가 없다. 참새들은 앉기가 무섭게 다시 피곤한 나래를 쳐야 한다. 어디를 가도 '우여 우여'가 있다. '꽝꽝'이 있다. 참새들은 쌀알 하나 넘겨 보지 못하고 흑사병(黑死病) 같은 '우여, 우여', '꽝꽝' 속을 헤매는 비운아(悲運兒)들이다. 사실 애놈들도 고달플 것이다.
나와 내 당나귀는 이 광경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
나는 나귀 등에서 짐을 내려놓고 그 속에서 오뚝이 하나를 냈다.
"얘들아, 너들 이리 와 이것 좀 봐라."
하고, 나는 '오뚝이'를 내 들고 애놈들을 불렀다.
애놈들이 모여들었다.
"얘들아, 이놈의 대가리를 요렇게 꼭 누르고 있으면 요 모양으로 누운 채 있단 말이다. 그렇지만 한 번 이놈을 쑥 놓기만 하면 요것 봐라, 요렇게 발딱 일어선단 말이야."
나는 두서너 번 오뚝이를 눕혔다 일으켰다 하였다.
"이것을 너들에게 줄 테다. 한데 씨름들을 해라. 씨름에 이긴 사람에게 이것을 상으로 주마."
애놈들은 날래 수줍음을 버리지 못한다. 어찌어찌 두 놈을 붙여 놓았다. 한놈이 '아낭기'에 걸려 떨어졌다. 관중은 그 동안에 열이 올랐다. 허리띠를 고쳐 매고 자원하는 놈이 있다. 사오 승부(勝負)가 끝났다. 아직 하지 못한 애놈들은 주먹을 쥐고 제 차례 오기를 기다렸다. 승부를 좋아하는 저급한 정열은 인류의 맹장(盲腸) 같은 운명이다.
결국 마지막 한 놈이 이겼다. 나는 씨름의 폐회(閉會)를 선언하고 우승자에게 오뚝이를 주었다. 참새들은 그 동안에 배가 불렀을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천석꾼이의 벼 두 되를 횡령(橫領)하고 재산의 7전(錢) 가량을 손(損)하였다. 천 마리의 참새들은 오늘 밤 오래간만에 배부른 꿈을 꿀 것이다. <무하 선생 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작자 : 김상용
형식 : 경수필
성격 : 서사적. 해학적. 자연 친화적
제재 : 가을 들판의 참새떼와 몰이꾼
주제 : 자연을 사랑하고 약자를 생각하는 마음
출전 : 무하 선생 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
구성 : 3단 구성
서두 : 고개를 넘어 - 고달플 것이다(참새들이 겪는 곤경)
전개 : 나와 나귀 - 맹장 같은 운명이다(승부욕을 이용한 기지)
결말 : 결국 - 꿀 것이다 (일의 결과와 감상)
백리금파 : '벼가 누렇게 익은 황금 들판'의 비유적 표현
논배미 : 논과 논 사이를 구분해 놓은 곳
여기저기 논들을 - 더벅머리 떼 : 참새를 쫓는 소년들.
질타 : 크게 소리쳐 꾸짖음.
참새들은 쌀알 하나 - 비운아들이다 : 쫓기는 참새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낸 구절로서, 작가가 오뚝이를 꺼내 아이들에게 승부욕을 부채질하는 동기가 된다.
날래 : '빨리'의 평안도 방언
승부를 - 맹장 같은 운명이다 : 이기고 지는 것을 즐기는, 질이 낮은 정열은 인류에게 쓸모가 없으면서도 반드시 겪어야 하는 미련이자 말썽인 것이다.
천석꾼이 : 천 석의 추수를 거두는 부자.
재산의 7전 가량을 손하였다 : 작가가 7전짜리 정도의 오뚝이를 씨름에 이긴 아이에게 준 것을 가리킨다.
<무하 선생 방랑기>는 서정 시인으로 알려진 김상용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이 수필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소설, 특히 콩트식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생활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은근하고 기지가 넘치는 웃음으로 요약된다.
이 글에서 약한 참새들을 위해 주인공인 작가가 부린 꾀는 엄밀하게 따져 보면 속임수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자연을 사랑하고 약자를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선의의 속임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와 세상을 유쾌하게 해 주는 속임수에 이 수필의 재미와 감흥이 깃들여 있다.
이 작품은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쉽게 지나쳐 버리기 쉬운 생활의 단상을 재치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과 선의의 속임수로 참새떼들을 배불리 먹이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미소를 머금게 된다. 여기에서 수필의 해학이나 기지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김상용(金尙鎔)
1902 ∼ 1951. 시인 · 영문학자. 본관은 경주 ( 慶州 ). 호는 월파(月坡). 경기도 연천 출생. 아버지는 기환(基煥),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丁氏)이며, 시조시인 오남(午男)은 여동생이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듬해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강되어, 1943년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군정하에서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복직하였다(1945).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하고 1949년에 돌아왔다.
최초의 문단활동은 1926년 ≪ 동아일보 ≫ 에 시 〈 일어나거라 〉 를 발표하면서 출발하였고, 그 뒤 〈 이날도 앉아서 기다려 볼까 〉 · 〈 무상 無常 〉 · 〈 그러나 거문고 줄은 없고나 〉 등을 계속 발표하였으나, 이때 발표한 창작시는 미숙한 것들이었다.
그의 시가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5년 ≪ 시원 詩苑 ≫ 에 〈 나 〉 · 〈 무제 無題 〉 · 〈 마음의 조각 〉 등 몇 편의 가작을 발표하고 나서부터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을 가까이하려는 단면을 드러내며 그와 함께 대상을 따뜻한 마음씨로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1939년 시집 ≪ 망향 ≫ 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서는 일본의 탄압과 수탈에 대하여 소극적인 대응태세로 보이는 자연귀의의 정신경향이 나타난다. 대표시 〈 남으로 창을 내겠소 〉 에서는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 속에서 생을 관조하는 단면이 엿보인다. 대표작으로는 〈 노래 잃은 뼈꾹새 〉 · 〈 어미소 〉 · 〈 향수 〉 를 꼽을 수 있다.
광복 후 수필집 ≪ 무하선생방랑기 無何先生放浪記 ≫ 를 간행하여 과거의 관조적인 경향보다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보여주었다.
또한, 영문학자로서 포(Poe,E.A.)의 〈 애너벨리 〉 (新生 27, 1931.1.), 키츠(Keats,J.)의 〈 희랍고옹부 〉 (新生 31, 1931.5.), 램(Lamb,C.)의 〈 낯익던 얼굴 〉 (新生 32, 1931.6.), 데이비스(Davies,W.H.)의 〈 무제 〉 (新生 55, 1933.7.) 등을 번역하여 해외문학의 소개에도 이바지하였다.
≪ 참고문헌 ≫ 金尙鎔全集(金 軟 東 編, 새문社, 1983), 九人會硏究(金時泰, 제주대학논문집 7, 1976), 金尙鎔解說(李昇薰, 韓國現代詩文學大系 10, 知識産業社, 1984), 현대시인연구 Ⅱ (김학동, 새문사, 1996), 韓國現代詩史 1(金容稷, 한국문연, 199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학(humour)와 기지(wit)
기지는 원래 인간의 오관(五官), 특히 상상, 기억 등의 내적 오관을 지칭하던 말이었는데, 중세기에 이르러 천부적으로 타고난 지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동하는 지능, 날카로운 지혜라는 뜻의 기민한 지능이 곧 '기지'라는 견해가 생겼다. 한편, 기지는 '차이 속에서 재빨리 동질성을 찾는 지적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웃음을 유발하되, 기지는 번득이는 지능, 해학은 감정적인 공감으로 서로 구별된다. 해학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욕구 불만이나 괴로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데서 그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곧, 기지가 보다 지적이며 냉철한 속성을 지닌 것이라면, 해학은 인정 있는 속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황금 들판 / 조은
농부들 짚단을 깔고 베고 잠이 들었다
햇빛 곡식들을 따라 부드럽게 휘고
지평선엔 가축들이 음표로 흐른다
농부들 짚단을 깔고 베고 잠들어 있다
그들의 꿈이 알갱이를 턴 짚단처럼
함께 묶이며 가지런해지는가
가지런해지며 평화로워지는가
바다에 닿아 하늘이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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