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 / 본문 일부 및 해설 / 최남선
by 송화은율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 / 최남선
(전략)
캄캄한 속에서 빛이 나온다.
닫혀진 것이기에 열릴 것이다.
명랑(明朗)한 것이면 회색(晦塞)할 것이 염려되지만 꼭 막힌 바에는 남은 일은 열림이 있을 뿐이니, 이제는 하나님도 아주 잠가 두시려는 것이 도리어 난사(難事)일 것을 생각하면 나의 할 도리는 언제까지나 터질 때까지 지키고 서서 움직이지 않을 뿐임을 결단하였다.
가장 싹싹한 맛은 딱딱한 사람에게 있는 것처럼 영원한 흑막(黑幕)인 듯한 저 운무(雲霧)의 바다가 벗어지려 함에 박사(薄紗) 한 조각이 날려가듯 함이 그래 신통하지 아니하랴. 동자(瞳子)도 굴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은즉, 두리뭉슬이 같은 저 혼돈(混沌)에 문득 훤한 구멍이 하나 뚫어지면서 그 속에서 자금광(紫金光)이랄밖에 없는, 달리는 형용(形容)할 수 없는, 일종의 영묘(靈妙)한 광파(光波)가 뭉싯하게 수멀거리는데, 빛이 넓어지기 때문에 창이 커지는지? 창이 커지기 때문에 빛이 넓어지는지? 여하간 광파와 창구멍이 손목을 한데 잡고 영역을 마구 개척함이 마치 태평양 군도(群島)의 축일생장적(逐日生長的) 천지 개벽(天地開闢) 설화를 실지로 보는 듯하다가 남은 구름이 바람에 쫓기는 연기처럼 이때껏 쳐져 있음이 몹시 무안스러운 것처럼 줄달음질하여 흩어져 버림에 이에 딴 세계 하나가 거기 나오는구나!
신비만의 세계 하나가 문득 거기 넙흐러져 있구나!
자광(紫光)으로, 금색(金色)으로, 오색(五色)으로, 칠채(七彩)로 그것이 다 기인환적(起人 的)으로 특이(特異)한 미태 정조(味態情調)로 가진 도약 무도(跳躍舞蹈)를 다하다가 홱 젖혀지고 와짝 열려지는 것은 어느 틈에 환화(幻化)한지도 모르게 얼른 전생(前生)해진 새파란 늪이 둥그러니 움푹 파인 아득한 발 아래 신비한 물결이 괸 것이다. 억천만겁(億千萬劫)의 과거가 영원 무궁한 미래와 손목을 잡고 일대(一大) 원환(圓環)을 지어서 저 늪에 가서 곤두박혔는데, 침묵(沈默)의 구분(九分)은 묵직하게 깊숙이 잠겨 있고 현재의 작은 한 동강이가 겨우 등을 수면으로 나타난 위에서 묘미의 아지랑이와 신비한 그림자가 얼크러져 뛰노는 여기서만 보는 기절(奇絶)한 하나의 세계이다. 구름이 흩어지는 대로 처녀처럼 자라나는 미(美)의 소식이 햇빛이 쏘이는 대로 장사(壯士)처럼 활개를 치고 몸부림을 치면서 최대한의 뇌성(雷聲)을 지른다. 푸르다 하자니 거덕지고, 누르다 하자니 까부러지고, 검다기에는 맑고, 희다기에는 진한 저 빛을 무엇이라야 옳은지? 억지로 말하자면 연록(軟綠)을 예각(銳角)으로 한 일절(一切) 종색(種色)의 물과 그 늪을 빌려서 우리 어머니의 진신(眞身)이 그 편린(片鱗)을 잠깐 내어놓으신 것이라고나 하겠다.
'거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직각으로 저 늪을 형언(形言)하기 위하여 생긴 말임은 의심이 없을 것이다. 크게 불면 크게, 작게 불면 작게, 바람부는 대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저 호면(湖面)을 보아라. 물결이 이는 족족 색외(色外)의 색(色)으로만 변전 무상(變轉無常)하고 심(甚)하면 한꺼번에 일어난 물결이 천(千)이면 천, 만(萬)이면 만이 제각각 한 가지 색채씩을 갖추어 가졌음을 좀 보아라! 똑똑히 보아라. 저 조화가 도무지 어디서 나는지 저 속에 무엇이 들고, 저 위에 무엇이 노는지를 좀 생각해 보아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대지(大池)의 물은 오색이라 하고, 오색 고기가 산다고도 하고, 그 속에는 신룡(神龍)이 들어 있다고도 함이 모두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일절 종자의 고장(庫藏)이라 하여 천지(天池)라고 일컬었음도 과연 우연이 아니다. 천(天) 아니시고야 누가 저 조화를 마음대로 부릴 것이냐?
(후략)
작자 : 최남선(崔南善 1890-1957)
형식 : 기행 수필
성격 : 영탄적
문체 : 만연체
경향 : 민족주의
제재 : 백두산
주제 : 백두산의 장관과 민족주의
출전 : 백두산 근참기(1927)
근참(覲參) : (존경하는 이나 높은 이름) 찾아가서 뵘
회색(晦塞) : 캄캄하게 아주 콱 막히는 것
난사(難事) : 어려운 일
축일생장적(逐日生長的) :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나서 자라는
무안(無顔)스러운 : 볼 낯이 없는
기인환적(起人 的) : 사람과 하늘이 일어나는
미태정조(美態情調) : 형상을 음미하는 느낌
도약무도(跳躍舞蹈) : 뛰어오르며 춤을 춤
환화(幻化) : 우주 만물이 덧없는 현상과 같이 변화하는 일
연록(軟綠) : 옅은 녹색
편린(片鱗) : 사물의 아주 적은 일부분
변전무상(變轉無常) : 모든 것이 이리저리 자꾸 달리 바뀜
고장(庫藏) : 창고에 저장해 놓은 것
빛이 넓어지기 때문에 - 빛이 넓어지는지? : 캄캄하게 천지(天池)를 뒤덮었던 운무가 흩어지면서 햇빛이 쏟아져 내렸을 때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이 내리 비치는지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는 뜻이다. 설의법을 구사하여 그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신비만의 세계 하나가 문득 거기 넙흐러져 있구나! :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는데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갑작스레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 별천지를 보는 듯한 감격을 표현한 말. 만연체와 영탄법으로 그 황홀함을 표현했다.
물결이 - 변전무상(變轉無常)하고 : 천지의 물결이 규정할 수 없는 신비의 색깔을 띠면서 무수히 바뀜을 표현한 말이다.
'백두산근참기'는 1926년에 처음 백두산을 참배하고 그 느낌을 신문에 연재한 글이다. 다음 해에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다. 최남선은 이 글에서 당시의 그가 품고 있었던 '조선주의'라는 민족주의 정신을 힘차게 토로하였다.
'백두산 근참기'는 1926년에 신문에 연재한 글로, 다음해에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다. '백두산 근참기'는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보고 민족 정신을 강조한 기행 수필로, 본문은 그 기행 수필 중 천지(天池)를 처음 대면하는 감격스러움을 적은 대목이다.
최남선은 이 글에서 백두산의 경이로운 모습을 관찰과 감상을 위주로 그의 박학 다식(博學多識)함과 화려한 만연체식의 문장으로 다채롭게 표현하였다. 한편 이 글에는 민족주의 정신이 힘차게 토로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수필이 백두산에 대한 예찬만을 목표로 한 글은 아니다. 최남선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 속에서 웅혼한 민족 정신과 강건한 민족 긍지를 표현하려 한 것이다. 3·1 운동 직후 점차 쇠진해 가는 민족 정기를 고취하기 위한 최남선의 이 글은 나름대로 '민족 문학'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최남선은 시조 부흥 운동을 전개한 이은상 등과 함께 '국민문학파'로 분류된다.
문학사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이광수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1924), 그 자신의 '심춘순례(尋春巡禮)'(1926)와 함께 1920년대의 기행 수필의 백미로 손꼽힌다.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최남선 ( 崔南善 )이 지은 백두산 기행문. 1926년 7월 24일부터 ≪ 동아일보 ≫ 에 연재되었고, 1927년 한성도서주식회사 ( 漢城圖書株式會社 )에서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은 국토순례에서 얻어진 나라 사랑의 마음을 잘 말해준 책이라고 하겠다. 전 40항으로 되어 있는 이 기행문은 우리 나라의 국토 전체가 백두산으로 형성된 듯이 묘사하는 데서 시작된다.
경원선을 타고 함경도를 지나며 그 산천과 평야와 해안선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그 지역에 얽힌 역사적 내력도 알려준다. 기행의 여정을 보면 풍산을 향해 후치령을 넘는데, 이 과정에서 함경도의 산속 생활의 여러 모습을 설명하고, 갑산과 단천에서 집마다 ‘ 제석동의 ’ 를 숭배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우리 나라 고유의 민간신앙이 단일한 천신족의 신화인 단국천왕에서 전래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풍산을 지나 응덕령을 향하는 도중에는 북국산악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기록한다. 혜산진을 출발해서는 압록강의 이국적 풍물도 언급하며, 백두산 아래의 산중 촌과 태산리의 사정을 묘사하고, 허두령을 지나는 밀림의 도정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문장은 사물과 그 내력과 감상을 말하는 데 막힘이나 궁색함이 없으며 긴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펴 나가며, 풍부한 어휘와 세밀한 관찰을 역력히 드러낸다.
신무치 · 무두봉 · 연지봉을 지나면서 이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정계비에 관한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국사학자로서 학술적 고증을 기술하기도 한다. 백두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감격은 대단한 것으로 29항에서 39항까지가 정상과 천지의 웅자와 신비를 예찬하는 기록이며 노래로 쓰여 있다. 기행문의 날짜 표시로 볼 때 7월 26일부터 하산일인 8월 4일까지의 백두산 등반기행을 기록한 책이다.
〈 심춘순례 尋春巡禮 〉 (1925) · 〈 금강예찬 金剛禮讚 〉 (1928) 등과 함께 우리의 역사적 터전을 순례하는 인문지리 내지 역사지리의 현장을 탐색하는 기행문인 이 책에서 역사적 내력과 지방의 풍습과 옛 유물에 비친 선조의 창조적 역량을 발굴하려는 저자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 참고문헌 ≫ 六堂全集(玄岩社, 1975), 崔南善과 李光洙의 문학(趙淙鉉 解說, 새문社, 198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남선(崔南善)
1890(고종 27) ∼ 1957. 문화운동가 · 작가 · 사학자.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 한샘 · 남악주인(南嶽主人) · 곡교인(曲橋人) · 육당학인(六堂學人) · 축한생(逐閑生) · 대몽(大夢) · 백운향도(白雲香徒).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인 헌규(獻圭)이며,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6년 3월 사비생(私費生)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이 학교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 ( 新文館 )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 소년 少年 ≫ 을 창간하고, 창간호에 〈 해에게서 소년에게 〉 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다.
이후 1919년 3 · 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문학과 문화 · 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관의 설립 · 운영과 ≪ 소년 ≫ · ≪ 붉은 저고리 ≫ · ≪ 아이들 보기 ≫ · ≪ 청춘 靑春 ≫ 등의 잡지 발간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 · 교도를 꾀하는 한편, 창가 · 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 새로운 시가 양식이 발붙일 터전을 닦았다. 당시까지 창가 · 신체시를 제작, 발표한 사람은 이광수 ( 李光洙 )가 있었는데 양과 질에서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
둘째, 그때까지 쓰여온 문장들이 대개 문주언종(文主言從)의 한문투가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새 시대에 맞도록 구어체로 고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말 위주가 되게 하여 여러 간행물과 잡지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선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전까지 우리 주변의 지배적 경향인 문어체 문장이 지양, 극복되고, 아울러 낡고 고루한 말투가 없어지는 등 문장개혁이 이루어졌다.
셋째, 민족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 · 민속 · 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 · 정리 · 발간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바닥에는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나아가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 조선정신(朝鮮精神) ’ 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업적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한국사에 대한 연구로, 이는 ≪ 청춘 ≫ 1918년 6월호에 발표한 〈 계고차존 稽古箚存 〉 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당시로 보아서는 상당 수준의 논문으로 그 내용이 단군시대에서부터 부여 · 옥저 · 예맥 등에 걸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 조선역사통속강화 朝鮮歷史通俗講話 〉 · 〈 삼국유사해제 三國遺事解題 〉 · 〈 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 〉 · 〈 단군신전(檀君神典)의 고의(古義) 〉 등을 발표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 ≪ 역사일감 歷史日鑑 ≫ · ≪ 고사통 故事通 ≫ 등 방대한 규모의 작업을 이룩하였다.
② 문화유산의 발굴 · 정리 및 그 평가 시도로 이는 다시 조선광문회 ( 朝鮮光文會 ) · 동명사 ( 東明社 ) · 계명구락부 ( 啓明俱樂部 )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 춘향전 〉 · 〈 옥루몽 〉 · 〈 사씨남정기 〉 · 〈 흥부놀부전 〉 · 〈 심청전 〉 · 〈 장화홍련전 〉 · 〈 조웅전 〉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 동국통감 東國通鑑 ≫ · ≪ 열하일기 熱河日記 ≫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 조선어사전 ≫ 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 이때 한글 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 ( 朴勝彬 )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 삼국유사 ≫ 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 금오신화 ≫ 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
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 심춘순례 尋春巡禮 ≫ · ≪ 백두산근참기 白頭山勤參記 ≫ · ≪ 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 · 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
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 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
이것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 백팔번뇌 百八煩惱 ≫ 이다. 또한, 〈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 · 〈 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 〉 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 동국세시기 ≫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 단군론 檀君論 〉 · 〈 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 불함문화론 〉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
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 · 1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 · 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수행 과정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 관계를 가졌고, 이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과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면 유능한 계몽운동자였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죽은 뒤 1958년 말년에 기거한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 육당최남선전집 ≫ 이 간행되었다.
≪ 참고문헌 ≫ 六堂崔南善(趙容萬, 三中堂, 1964), 六堂崔南善全集(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玄岩社, 1975), 韓國의 民俗學硏究(李杜鉉, 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韓國近代詩史(金容稷, 학연사, 198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두산(白頭山)
함경남도 ·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東北地方 : 滿洲)의 길림성(吉林省)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높은 산. 높이 2,744m(중국측 발표는 2,749.6m)이다.
최근에까지 활동을 하였던 휴화산(休火山)으로 북위 41 ° 31 ′ ∼ 42 ° 28 ′ , 동경 127 ° 9 ′ ∼ 128 ° 55 ′ 에 걸쳐 있고, 그 총면적은 약 8,000 ㎢ 에 달하여 전라북도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
산의 북쪽으로는 장백산맥 ( 長白山脈 )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며,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여 동남쪽으로는 마천령산맥 ( 摩天嶺山脈 )이 대연지봉(大 密 脂峰, 2,360m) · 간백산(間白山, 2,164m) · 소백산(小白山, 2,174m) · 북포태산(北胞胎山, 2,289m) · 남포태산(南胞胎山, 2,435m) · 백사봉(白沙峰, 2,099m) 등 2,000m 이상의 연봉(連峰)을 이루면서 종단하고 있다.
한편, 동쪽과 서쪽으로는 완만한 용암대지 ( 熔岩臺地 )가 펼쳐져 있어 백두산은 한반도와 멀리 북만주지방까지 굽어보는 이 지역의 최고봉이다.
백두산의 이름은 먼 옛날부터 여러 가지로 불리어 왔다.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 산해경 山海經 ≫ 의 〈 대황북경 大荒北經 〉 에 “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고 이름한다. 숙신 땅에 속한다(大荒之中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 라고 기재되어 있다.
‘ 불함 ’ 에 대하여 최남선 ( 崔南善 )은 ‘ 冠 韜 ’ 의 역음으로 보고 그 뜻을 천주(天主)인 신명 ( 神明 )으로 해석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몽고족의 ‘ 불이간(不爾干) ’ , 곧 신무(神巫)의 뜻으로 보아 백두산에 신이 있다는 데서 연원한 것으로 보았다. 양측의 해석이 모두 ‘ 신(神) ’ 으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한대(漢代)에는 백두산을 ‘ 단단대령(單單大嶺) ’ 이라고 부른 바 있으며 남북조의 위(魏)시대에는 ‘ 개마대산(蓋馬大山) ’ 이라 하였고 또는 ‘ 도태산(徒太山) · 태백산 ( 太白山 ) ’ 이라 불렀다.
≪ 북사 北史 ≫ 에 “ 말갈국 남쪽에 종태산이 있는데, 중국말로 태황이라 하며, 세상사람들은 이 산을 받들어 모셨다. 사람들은 산상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산에 오르는 자는 용변을 본 뒤 그릇에 담아갔다. 산에는 곰 · 범 · 이리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하지 않고, 사람 역시 감히 죽이지 못했다. ” 라고 하였다.
≪ 위서 魏書 ≫ 와 ≪ 수서 隋書 ≫ 에 모두 도태산(徒太山)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 북사 ≫ 의 종태산(從太山)은 도태산의 오자일 것이다. 당나라 때는 태백산이라 불렀고, 금(金)나라 때에 이르러 장백산(長白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우리 나라의 기록으로는 ≪ 삼국유사 ≫ 의 고조선조에 백두산을 ‘ 태백산(太伯山) ’ 이라 칭하였다. 또한 ≪ 고려사 ≫ 의 광종 10년조에 “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 쪽에서 살게 하였다. ” 라는 기록이 있다.
‘ 백두산 ’ 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의 명칭은 불함산으로부터 시작하여, 단단대령 · 개마대산 · 도태산 · 태백산 · 백산 · 장백산 · 백두산 등으로 불리어왔으나, 한대 이후 불리어진 명칭의 공통점은 백(白), 즉 희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백(白)을 굳이 ‘ 冠 ’ 의 차음(借音)으로 보고 있으나, 백두산의 모습으로 보아 그대로 백(白)자 자체의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두산 산정은 거의 사계절 동안 백설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산정부는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눈 〔 雪 〕 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이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 ( 開國 )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영산 ( 靈山 )이었다.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천지 ( 天池 )를 비롯한 절경이 많은 데다가 독특한 생태적 환경과 풍부한 삼림자원이 있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로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는 산이다.
백두산(문학·예술에 나타난 모습)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고려시대 이전에 백두산을 등반한 기행문은 찾아볼 수 없고, 1764년(영조 40)에 함경북도의 실학파 선비인 박종(朴琮)이 직접 백두산을 탐승하여 순한문 기행으로 남긴 〈 백두산유록 白頭山遊錄 〉 이 처음이 될 것이다.
이 유록은 그의 유저(遺著)인 ≪ 당주집 規 洲集 ≫ 속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이 사실적으로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200여년 전의 백두산의 실황을 살피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764년 5월 14일 경성군 ( 鏡城郡 )에 살던 박종이 자기 집을 떠나, 부령(富寧) · 무산(茂山) · 임강대(臨江臺) · 풍파( 淵 坡) · 천평(天坪) · 천동(泉洞)을 거쳐 23일에 최고봉에 오른 뒤 하산하여 6월 2일에 집에 돌아왔다. 비록 말을 이용하였으나, 18일 동안 왕복 1,322리를 다녀서 백두산을 탐승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 백두산유록 〉 의 내용에 의하면, 박종에 앞서 2년 전인 1762년 조영순 ( 趙榮順 )이라는 사람이 백두산을 등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여행기를 찾아볼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다.
또한 이 유록 중에, 홍계희 ( 洪啓禧 )가 이미 1742년에 어명을 받들어 갑산 · 무산으로 들어오면서 백두산을 편람한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 영조 때 서명응 ( 徐命膺 )의 ≪ 보만재집 保晩齋集 ≫ 속에도 〈 유백두산기 遊白頭山記 〉 가 있다.
근래의 자료로는 1927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 백두산근참기 白頭山覲參記 ≫ 가 있고, 1931년에 간행된 안재홍(安在鴻)의 〈 백두산등척기 白頭山登陟記 〉 가 있다.
두 저자가 모두 백두산을 직접 등반하면서, 백두산의 실경을 매우 소상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백두산에 얽힌 전설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여 민족 정기를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두산에 대한 기행문학으로서는 최남선의 ≪ 백두산근참기 ≫ 가 처음이 될 것이다.
근래 외국인의 백두산에 대한 탐사기록으로는 우선 1900년에 러시아에서 간행된 ≪ 한국지 韓國誌 ≫ 를 들 수 있다. 〈 한국의 지리 〉 속에 인용된 스트렐비츠키의 백두산등정기에서는 백두산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6일 동안 우리는 빽빽한 타이가를 통과하였다. 드디어 탄바이에서 60 ㎞ 떨어진 부르토파라고 불리는 자연경계선 뒤에서부터 숲은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도를 더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우리 앞에는 8 ∼ 10 ㎞ 정도 떨어진 곳에 백두산의 거대한 모습이 드러났다. 화산은 넓은 기저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기저는 커다란, 그러나 완만히 상승되는 지반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산기슭에는 몇 개의 작고 둥그런 언덕들이 있었는데 그 언덕들은 주봉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백두산과 비교하여 볼 때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더욱 더 선명하게 백두산의 높이를 부각시켜 주었다. 우리들이 그곳에서 보기에 백두산은 바위가 많고 외떨어져 있는 산이었다. 백두산 기슭에서 약 2,000피트 솟아 있었으며 평평한 책상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윗부분이 약간 잘려져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지점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분화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지 않았다. 대체로 산의 빛깔은 회색빛이 나는 희뿌연 색이었으나 햇빛이 미치지 않은 깊은 골짜기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는 옆면의 경사를 따라 가늘고 밝은 하얀 산들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았다. ”
또 일본의 백두산탐구등행대 대장인 시로야마(城山正三)의 ≪ 비경백두산천지 煉 白頭山天池 ≫ 라는 탐행기록이 1970년 6월, 동경에서 발행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실제로 백두산을 등반한 것은 제1차 탐행이 1942년 여름이었고, 제2차 탐행은 1943년 여름이었다. 제1차에는 총 75명의 대원으로 혜산(惠山)에서 출발하였고, 제2차에는 총 85명의 대원으로 주대(主隊)는 무산에서 출발하고, 지대(支隊)는 혜산에서 출발하여 신무성(神武城)에서 합류하여 백두산을 등반하였다.
이 책의 제1부는 해설과 탐행기록, 제2부는 사진, 부록에는 대만 · 천도(千島쿠릴열도) · 캄차카의 산들로 나누어 편찬되어 있다. 비록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영토확장의 목적으로 탐행한 기록이지만, 광복 전에 백두산을 탐사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기 때문에 백두산 연구에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산의 높이, 폭포의 높이 등 부정확한 기록이 발견되며, 기행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1982년 북경에서 간행한 정흥왕(丁興旺)의 ≪ 백두산천지 ≫ 는 백두산에 대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조사, 연구한 기록으로서 백두산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백두산에 대한 특이한 기행문으로는 조선중앙일보 ( 朝鮮中央日報 ) 기자였던 이관구(李寬求)가 비행기로 관찰한 백두산의 비경을 〈 백두산탐험비행기 白頭山探險飛行記 〉 라는 제목으로 ≪ 조선중앙일보 ≫ 에 1935년 10월 11일부터 그 해 11월 10일까지 연재하였다.
비록 필자의 표현대로 주마간산도 아닌 비행간산(飛行看山)이지만, 필자의 유려한 필치로 과거 어떤 백두산 기행보다도 기행문학으로서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역대 시 속에 나타난 백두산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몇 작품만 보면 고려시대 이색 ( 李穡 )의 ‘ 송동북면한만호득월자(送東北面韓萬戶得月字) ’ 라는 시제 속에 “ 솟아오른 장백산과 험준한 철령관이 수천 리에 가로놓여 있으니 하늘이 만든 험한 땅이라 가히 넘나들 수 없다 … (長白山穹 綠 嶺關峰山 魄 亘幾千里天險不可越 … … ) ” 라는 한시가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시조로는 김종서의 “ 장백산에 기 肩 곳고 두만강에 耿 을 싯겨 서근 져 션뵈야 우리 아니 嗜 나희냐 엇덧타 인각화상( 漏 閣 怜 )을 누고 몬져 悧 리오. ” 가 있다.
또 남이(怡)의 시로 “ 장검을 弄 혀들고 백두산에 올라보니 대명천지에 성진(腥塵)이 徠 겨셰라. 언제나 남북풍진을 헤쳐볼고 悧 노라. ” 라고 무인의 기개를 읊은 시조가 있다.
현대시로 백두산을 읊은 시는 최남선의 〈 조선유람가 〉 와 〈 귀명가 〉 를 비롯하여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참전시인 장호강(張虎崗)의 〈 내가 쓰러지거든 〉 을 보면 “ 끝내 바라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채/ 이름도 없는 싸움터 산마루에 내가 쓰러지거든/ (중략)/ 정녕 그 어느날이고/ 바스러진 해골 가루가루 싸락눈처럼 휘날리어/ 천고에 깊은 천지 속으로 영원히 잠들 것이리라. ” 로 되어 있는데, 같은 민족으로서 분단된 국토에서 동족상잔의 아픔과 한이 여실히 표현된 작품이다.
진태하(陳泰夏)는 1984년 7월, 국토분단 이후 한국 국적으로서는 최초로 민족의 성역 백두산을 등정한 감격을 ‘ 백두산 ’ 이라는 시로써 토로하였다.
“ 민족도/ 국토도/ 분단된 슬픈 역사 속에/ 통일의 그 날을 기다려/ 하마하마 사십년/ 세월의 기만(欺瞞)에/ 분노는 열화처럼/ 이역(異域)길 돌아 돌아/ 아득한 신비의 빛을 따라/ 신들린 걸음으로/ 민족의 성지(聖地), 국토의 시원(始原)/ 백두산을 찾아/ 장강(長江)을 넘고 황하(黃河)를 건너/ 잃어버린 우리의 땅/ 만주(滿洲)벌 수만리(하략). ”
최근의 백두산에 대한 장편시로서는 1987년 발행한 고은(高銀)의 ≪ 백두산 ≫ 이 있다. 이 시는 전체 4부로서 8권을 출간할 예정인데, 현재 1부 2권이 발간되었다.
머리말에서 “ 그런데 시의 시발인 백두산은 정작 자료와 상상의 세계로서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 라고 말한 것처럼, 저자는 백두산을 등반해 보지 못하고 작자의 상상과 동경 속에서 백두산을 묘사하였다.
이 시의 서시를 보면 “ 장군봉 망천후 사이 억겁 광풍이여/ 그 누구도 다스리지 못하는 광풍이여/ 조선 만리 무궁한 자손이 이것이다/ 보아라 우렁찬 천지 열여섯 봉우리마다/ 내 목숨 찢어 걸고 욕된 오늘 싸워 이 땅의 푸르른 날 찾아오리라. ” 라고 쓰여 있다.
북한에서도 〈 백두산 〉 이라는 장편 서사시가 발표된 바 있으나 백두산을 무대로 한 김일성의 행적을 미화한 것으로, 문학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근래 백두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안수길 ( 安壽吉 )의 〈 북간도 北間島 〉 를 들 수 있다. 1959년 4월 ≪ 사상계 思想界 ≫ 에 제1부가 발표되면서 시작하여 1967년에 제5부로서 완료되었다.
문학평론가 백철 ( 白鐵 )은 이 소설에 대하여 “ 해방 뒤 10여 년 내의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 북간도 〉 가 아니던가 느껴진다. 그만큼 〈 북간도 〉 는 근래의 우리 문학사를 대표한 작품인 줄 안다. ” 라고 평하였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북간도가 배경으로 되어 있으나, 백두산 일대의 묘사와 그에 얽힌 전설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삶의 강인한 정신력이 등장인물 중 한복이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한복이는 백두산의 혼을 닮아 있다. 그 밖에 이미륵 ( 李彌勒 )도 그의 저서 ≪ 압록강은 흐른다 ≫ 에서 백두산 주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백두산은 민족 발상의 성지로서 이에 대한 전설도 적지 않다. 백두산에 대한 전설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탓이겠지만, 특히 만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 많이 전래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수집하여 발간한 전설 고사집 속에 백두산에 관한 전설로, 〈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 〉 · 〈 백두산의 사냥군과 호랑이 〉 · 〈 오늘날 왜 호랑이가 보기 드문가? 〉 · 〈 백두산의 화마 〉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 백두산의 목동과 선녀 〉 는 우리 민족의 발상과 재미있게 연관을 시켰으며,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마치 신앙처럼 숭상하고 좋아하는 이유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단군의 개국신화 외에도 고려 태조 왕건 ( 王建 )의 탄생설화와 관계가 있다. 이 설화의 줄거리는 왕건의 아버지 융(隆)이 백두산 기슭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승려 도선 ( 道詵 )을 만나 성자를 낳을 집터를 얻음으로써 왕건을 낳고, 그 성자가 자라서 고려의 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 민족을 수시로 괴롭히던 이민족의 집단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래비가 내리어 그 지역을 덮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도 백두산 밑 무산땅 최가령 동쪽에 표면은 흙이지만, 파보면 5 ∼ 6척이나 모래가 덮여 있고 그 속에는 또 흙이 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에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의 발상설화도 얽혀 있다. 청나라에서는 자기들의 조상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상하여,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覺羅式穆訥)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탐사하였으며,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옹정제(雍正帝) 이후는 길림장군(吉林將軍)의 관리하에 춘추로 중월(仲月)에 제사를 지냈다.
≪ 개국방략 開國方略 ≫ 이라는 책에 청제(淸帝)의 탄생설화가 있다. 곧 백두산에 포륵호리지(布勒湖 聾 池)라는 천지가 있는데, 선녀 세 자매가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열매를 물고 와서 셋째선녀의 우의(羽衣) 위에 놓았다.
셋째선녀는 이 열매를 먹고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 聾 雍順), 성을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곧 청제실(淸帝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형태로, 두만강변에 지암이라는 바위 근처에 이좌수가 살았는데, 지암 물가에 사는 수달의 일종인 노라치라는 짐승이 좌수의 딸과 관계를 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커서 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되었다는 설화도 있다.
백두산은 높이 2,155m의 고원에, 곧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바다처럼 깊고도 넓은 호수인 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거듭 폭발한 화산의 분화구로 만들어진 산세 또한 기승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발상의 성지이기 때문에 그 실경 자체가 미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많은 화가들이 백두산의 신비를 화폭에 담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동양화가 김기창(金基昶) · 민경찬(閔庚燦) 등의 대작이 있다.
사진 작품으로는 진태하가 1985년 3월에 ≪ 조선일보 ≫ 에 보도하면서 전국에 백두산의 천연색 사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백두산에 대한 음악은 우리의 국가(國歌)로부터 적지 않은 노래들이 있다.
이 가운데 〈 조선 유람가 〉 는 1947년에 최남선이 작사하고 김영환이 작곡한 것으로 당시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애창하였던 노래다. “ 대지의 거룩한 힘 기둥이 되어/ 한울을 버틔고 선 백두의 성산/ 맹호의 수파람이 울리는 거기/ 성인이 나셨고나 영웅 길럿네 … . ”
박영만이 작사하고, 한유한이 작곡한 〈 압록강 행진곡 〉 은 제목과는 달리 주로 백두산을 노래하였다. 또한 1985년 진태하가 작사하고 황문평이 작곡한 〈 아! 백두산 〉 이라는 노래가 있다.
“ 홍익인간 터잡은 백두산 이지구의 정수리/ 단군왕검 태나신 천지연 오색으로 넘치고/ 바위마다 새겨진 배달의 민족역사 드높다/ 아 아 민족의 성역 백두산에 모여서/ 남북의 아들딸아 민족의 정기를 높이자/ … … . ”
이처럼 우리 나라에 있어서 백두산은 단순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배달겨레의 가슴마다 깊숙이 아로새겨 존재하는 민족의 영산이요, 국토의 성역(聖域)이요, 통일된 신앙이다.
단군왕검으로 줄잇는 민족의 생명이 이곳에서 시원하고, 바다 멀리 제주도 · 울릉도까지도 국토의 맥이 이곳으로 줄닿고, 민족 역사의 뿌리가 이곳에 터잡고 있음을 믿어 왔기 때문에, 반만 년 애환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면면히 동경의 성산(聖山)으로 숭상하여 온 것이다.
우리의 개국신화로부터 시작하여, 전설 · 설화 · 시 · 소설 · 수필 등 우리 민족의 전통문학과 관련지어지지 않은 작품이 없을 만큼 유구한 역사의 맥을 잇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을 ‘ 백두산족 ’ 이라고 자처할 정도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의 가슴 속에 백두산의 혼이 잠재되어 있다.
최남선은 〈 조선의 산수 〉 에서 “ 비유컨대 조선 사람이 백두산 속에 있음을 잊어버린 것은 물 속의 고기가 물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할까요. ” 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한민족이 세계 도처에 퍼져 살면서, 때로는 이미 국적을 달리하고 있으면서도 ‘ 백두산 ’ 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국을 생각하게 되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글썽이게 되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하였던 민족항일기에도 백두산은 곧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곧 VOA(미국의 소리) 우리말 방송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될 때, 그 방송의 시작을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를 세 번 낸 다음 아나운서가 “ 백두산 호랑이 ” 하면서 “ 여기는 자유의 소리 우리말 방송입니다 … … . 조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 이라고 방송하였다.
일제침략하에 방송도 마음대로 못 듣던 시절, 백두산 호랑이의 포효 소리로 시작되는 이 방송은 우리 동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 독립심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 방송에서 ‘ 백두산 ’ 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면 그처럼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가사는 아직도 확실한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민족이 고난에 처하여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불리어진 것이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곧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때에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 ’ 이라고 가사를 지은 것은 단순히 조국의 영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민족혼을 잃지 말자고 피를 토하듯 외친 것이다.
백두산은 일찍이 그 명칭이 ‘ 불함(不咸) ’ , 즉 신(神)의 산으로 일컬어 온 것처럼 한결같이 우리 민족 누구에게나 신성시되어 있는 점이 세계 어떤 산과도 다른 점이다.
그 실증으로 ≪ 북사 ≫ 와 ≪ 봉천통지 奉天通志 ≫ 에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은 신성한 백두산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자신이 배설한 일체의 오물을 준비해 간 그릇에 담아 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처럼 외경(畏敬)받는 산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 때, 편찬된 ≪ 괄지지 括地志 ≫ 에는 백두산의 조수초목(鳥獸草木)은 모두 백색이라고 기록할 만큼 상서로운 산으로 추앙하였다. 또한 예로부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백두산 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서명응의 ≪ 유백두산기 ≫ 에 실려 있는 제문을 보면 “ 높다란 백두산은 우리 나라의 진산으로 온 백성들이 우러러 봅니다. 진작부터 전모를 근참하려고 벼르다가 이제야 왔으니, 이는 실로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찬 바람 찬 이슬 맞으며 갖은 고초를 겪고 왔습니다. 산신령께서는 이런 정성을 살피셔서 구름과 안개를 거두시어 마음대로 근참하게 하소서. 하늘에는 해와 별이 환하여 감추는 게 없사온데, 산만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야 되겠습니까? ” 라고 하였다.
백두산을 등정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제문에 공감할 것이다. 백두산 일대에는 천변만화로 삽시간에 변모하는 가공할 날씨에 누구나 인간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하늘에 의지하여 빌 수밖에 없음을 체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백두산은 우리 민족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수난의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을 잃지 않도록 민족혼을 고취하였고, 언제나 백두산을 중심으로 화합 단결하고, 하늘과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앙심을 낳게 하였으며, 미래의 밝음으로 지향하는 우리 한민족의 내일을 있게 하였다.
백두산기(白頭山記)
조선 중기에 홍세태 ( 洪世泰 )가 지은 기행문. 그의 문집인 ≪유하집 柳下集≫ 권9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가 직접 백두산을 답사하고 쓴 것이 아니고, 김경문(金慶門)이라는 역관 ( 譯官 )으로부터 전해들은 국경선 확정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백두산기〉는 처음에는 백두산과 청나라와의 문제가 있었음을 말하였다. 이어서 김경문이 국경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역관으로 참여한 사실을 밝힌 다음에 그가 자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부르는 백두산을 청나라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 한다. 그런데 이 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두 강을 가지고 국경을 삼아왔지만 그 지역이 험하고 멀어서 제대로 경계를 알기 어려웠다.
1712년 청나라의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에 표석(表石)을 세우기 위하여 파견된다는 통지를 받고, 우리 조정에서는 박권 ( 朴權 )으로 정계사(定界使)를 삼아 청나라 관원들과 함께 가서 경계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 분수령을 찾아 사람 인자(人字)처럼 생긴 지형 가운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행이 왕복한 거리는 약 2,000여 리로서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이다.
〈백두산기〉는 글 끝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김경문을 장하게 여기고 자신이 직접 가보지 못함을 원망하여 다만 글로써 발휘해본다고 말하였다.
〈백두산기〉는 문장에 능했던 홍세태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기행문이다. 그러나 필체의 유려함 만을 중시할 것이 아니고 기록문학으로서 백두산정계비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는 데에도 주목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柳下集, 白頭山定界碑와 間島問題(劉鳳榮, 白山學報 13, 백산학회, 1972), 柳下洪世泰硏究(李相鎭, 成均館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8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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