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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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윤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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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거장 월탄(月灘) 박종화는 그의 말년까지도 왕성한 창작 생활을 지속하였다.
누구보다도 달을 좋아해서 문학에 투신했다는 월탄은 20세기 벽두--정확히 1901년 10월 29일--서울에서 태어났다.
근 60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하면서, 문화계와 예술계의 원로로서 예술원 회장으로 추대되어 다양한 사회 활동을 계속해 왔었다. 조금도 쉼 없고 지칠 줄 모르는 그의 경력을 창작 생활과 사회 활동으로 연소했었다.
지난날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조로하고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가장 진 연대를 문학에만 집념하고 투신했던 작가로는 오직 월탄 박종화가 기록될 것이다.
20세의 젊은 시절에 <우유빛 거리>(1921) 란 시를 써서 비롯된 그의 작가 생활은 이 땅의 신문학이 펼쳐진 초창기의 백조파의 동인이 됨으로써 더욱 본격화되었다. 말하자면 20년대의 개화기에서부터 오늘에까지 반세기 이상의 장구한 시간을 현역으로 일관하면서 엄청난 창작을 해 왔던 것이다.
'월탄 박종화 선생은 현존에 계시는 한국의 문학사다. 우리 나라 신문학 개척자의 한 분이다. 뿐만 아니라, 시에 있어서나 소설에 있어서나 신문학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오시면서 놀랄만한 업적을 남기셨다.'
작가 정비석의 이같은 말은 월탄의 작가적 업적을 천명하는 것으로서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바로 우리의 현대 문학사요, 우리의 최근세사이기도 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풍운 감도는 구한말에 태어나 3·1운동과 때를 같이해서 불붙는 민족적 의분에서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한 그는 몹시 다양한 문학 분야에 손을 대어 왔다. 시에서부터 소설, 수필, 평론 등 거의 모든 장르에 붓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족적 사명감에서 역사 소설에 일관해 온 작가인 것이다.
'나는 역사 소설의 형태를 빌어서 문학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나는 현대 인간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 땅에 조국을 아름답게 건설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30 이후에 시와 평론에서 소설을 쓰게 하고 소설 중에서도 신변 잡사의 소설을 떠나서 역사 소설을 쓰게 하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나의 관뚜껑을 덮을 때까지 역사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을 갖데 한 동기다.( 《월탄 박종화 대표작 성집》)
월탄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오로지 역사 소설을 위해서 살아왔고 또 그것으로 시종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실로 이 땅의 역사 소설은 월탄에 의해 비롯되고 다져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그를 톨스토이와 비교했듯이 그는 대하 역사 소설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썼고 가장 폭 넓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지금까지 3권의 시지, 18편의 장편, 12편의 단편, 그리고 3권의 수필집, 평론 등이 그의 소산이다. 18편의 장편이 2권 내지 6권의 분량으로 구성된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작품량은 한국 문학사상 최고의 기록이 된다.
더욱이 그는 가장 많은 작품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의 풍성한 낭만 문학으로 가장 많은 독자의 인기를 거두고 있다. 또한 그는 단순히 문필에만 전념한 작가는 아니었다. 역사 의식에 투철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주의를 고수하였고 해방 후 줄곧 문단의 지도자로 또는 대학 교수로서 사회에 앞장 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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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윤 씨를 조부로 박대혁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월탄은 일찍이 한학을 배웠다. 아버지는 구한말에 상당한 벼슬까지 했던 유학자였지만 그의 문학 수업을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오직 나의 아버지만이 나의 문학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내버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아껴 주었다. 아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독해 주었다.'(<나의 문학과 아버지>)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월탄은 17세에 그보다 한 살 위인 김창남씨와 결혼했고, 20세에 외아들 돈수씨(현진건씨와 외동딸과 결혼)를 낳았다.
신문학을 배우기 위해서 휘문의숙을 나온 뒤 문학 동인지 《문우(文友)》를 낸 때부터 습작기가 비롯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유시의 선구자로 표방했던 시 동인지 《장미촌(薔薇村)》 창간호에 발표한 <오뇌(懊惱)의 청춘>과 <우유빛 걸히> 두편의 시가 처녀작이 된다.
파하려는 제단의 황촛불 같은/낫겨운 도장(屠場)의 담빛과 같은/삶을 떠나서/빛 없고 바람 없는 삶을 떠나면./우유빛 거리의/죽음 나라로/선선한 가벼운 휘장을 헤치어/새벽빛 고움을/가슴에 안아/고요한 마음 미소로 돌아보리라.(<유유빛 거리>의 일절)
절망 속에 깊숙히 파묻혀 울부짖었던 민족적 비애를 상징적으로 노래한 것이 처녀작 <우유빛 거리>의 시상이었다. 월탄이 문단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은 이땅의 신문학 초창기에 낭만주의 문학의 본산이었던 《백조》의 일원이된 때부터이다. 여기의 동인으로는 홍사용, 나도향,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노춘성, 김기진 등 20년대 베테랑 작가들이었다.
《백조》 창간호에 <밀실로 돌아가다>란 시와 <명호 아문단>이란 비평을 썼다. 다시 그 3호(1923)에 <목 매이는 여자>란 단편을 발표했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역사 소서에 해당된다. 그 주인공은 신숙주의 아내다. 여기서 신숙주를 단순한 변절자로 낙인하는 상식론에서가 아니라 그가 폭군 세조의 위협 밑에서 어떻게 고민했는가 하는 진실한 인간상을 파헤쳐 보자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표면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도 그 현실 속에서 생생히 살아간 신숙주와 그 아내를 리얼하게 추구한 것이었다. 1924년에는 처녀 시집 《흑방비곡》을 내놓았다.
웁니다. 웁니다/저녁의 종이 울려 옵니다./해는 떨어지고 바람은 이는데/거리로 가는 모든 형제야/당신의 갈 곳은 어느 데 마을?/ 단신의 잘 곳은 어느 데 집?)(흑방비곡의 일절)
《흑방비곡》에는 월탄이 19세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썼던 <우유빛 거리> <밀실로 돌아가다><정밀> 등 낭만의 시들이 수록되었다. 낭만적이라고 하지만 그 이미지는 몹시 우울한 민족적 감정이 복받쳐 비애를 되씹게 하는 것이었다.
그후 월탄은 소설평을 쓰기도 해서 김억과 다소의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주로 시와 단편에 몰두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아들> <순대국> <시인> <삼절부> <부세> <여명> 등을 쓰면서 소설로 전신하게 되었다. 이들 단편들은 모두 생생한 현실을 다룬 현대물이었다. 개화기에서부터 20년대를 향한 격동기의 현실 속에서 복잡해진 모럴을 추구해 간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1924)은 부자간의 세대적 갈등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대대로 약국을 하는 '원주부네 집'의 아버지와 아들이 주인공이다. 아들 태훈은 의업을 억지로 이어 주려는 아버지 원주부와 끝끝내 맞선다. 미술에 뜻을 둔 태훈은 집을 뛰쳐 나와 미술협회로 달려갔다. 고민 속에서 유일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였다. 친구들에게 가출의 변을 털어놓았다. 여기에 대해 동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훈을 고무시켜 준다.
구도덕과 과감하게 싸운 태훈을 자기들의 은인이요 용감한 개척자라고 찬양했다. 태훈은 바로 백조파의 일원이었던 나도향이었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경손이란 이름까지 지어서 아꼈던 도향이 대대로 이어 온 가업인 의업을 박차고 문학으로 투신했던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같이 문단의 센세이셔널한 사건을 취재한 작품으로는 횡보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와 함께 상당한 화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한편 <순대국>은 이른바 프로 작가들이 서민들이 즐겨 먹는 순대국이란 이름조차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들이 프로 문학을 운운한다는 것이 얼마나 넌센스인가를 꼬집고 있다.
그리고 <여명>(장편(여명)과 동명이작)에서는 무질서한 애정 윤리를 비판했다. 춘원의 <무정>으로부터 벌어진 이혼 붐에 제동을 건 것이 <여명>이었다.
자유 연애를 주장하게 된 이태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옥순-그는 실심 끝에 자결하고 만다. 이 같은 비극에 대해서 작가는 무한한 동정과 함께 맹목적인 연애 지상주의에 대해서 반발한다.
뒤에 쓴 <은애전>(1938)에 있어서도 <여명>과 흡사한 낭만적인 분위기로 주인공을 그렸다. 그것이 하나의 전설에서 빌어온 것이라 하더라도 은애를 미화하고 동정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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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월탄은 <대전이후의 조선의 문예운동>(1929)이란 문제 비평을 《동아일보》에 발표했지만 그는 서서히 역사 소설로 붓을 옮기고 있었다.
1935년 장편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그는 본격적인 역사 소설로 역량을 과시해 갔다.
<금삼의 피>는 폭군 연산군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이었다. '폭군 연산'이란 제명으로 영화화되어 널리 알려진 이 작품에는 작가는 연산을 하나의 광인으로만 처리하지 않았다 연산의 횡포적인 망발은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비참한 최후를 알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말하자면 연산을 하나의 광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이면에 비친 인간상을 리얼하게 추구해 본 것이었다.
한편 소설에 정력을 쏟으면서도 시작에 있어서 많은 수작을 발표했다.
선은/가냘핀 푸른 선은--/아리따웁게 구울러/보살같이 아담하고/날씬한 어깨에/4월 훈풍에 제비 한 마리/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청자부>의 첫머리>
고운지고 보살의 손/돌이면서 백어같다./신라 옛 미인이/저렇듯이 거룩하오?/무픞 꿇어 우러러 만지면/훈향내 높은 나렷한 살 기운/당장 곧 따스할 듯하구나(<십일면 관음보살>의 3절)
그의 시제들이 말하듯이 신라에서부터 고려와 이조에 걸친 한국의 고유한 유물들을 지극한 민족애로 환기시키면서 낭만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석굴암 대불>에서는 일제하에서의 민족 시인의 비애가 강인하게 노출되어 독자에게 저항 정신을 고취시켜 주기까지 했다.
월탄의 민족 의식은 시에서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역사 소설 속에서 형상화 되고 있다. 그후 발표된 단편 <아랑의 정조>(1940)와 장편<대춘부>(1937) <다정불심>(1940) 등에서 역력히 찾을 수 있다.
<아랑의 정조>는 일종의 단편 역사물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기록된 <도미전>에서 취재한 것이었다. 백제의 미인 아랑이 주인공이다. 개루왕의 명령에도 끄떡하지 않고 끝까지 깨끗한 정절을 지키는 도미의 아내 아랑을 그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극한 상황 속에서 정조만을 고수하고 끝내는 도미를 찾아 탈출하는 아랑의 아름다운 부덕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미인 아내를 둔 탓으로 생눈알을 뽑히면서도 자기의 아내만은 변심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는 목수 도미, 장님이 된 남편을 찾아 헤매는 아내 아랑의 사랑은 더없는 귀감으로 승화되고 있다.
<아랑의 정조>와 같은 무렵에 쓴 <대춘부>는 더욱 역사 소설의 심도와 중량이 가산되어 갔다.
전후편으로 된 <대춘부>는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 중의 하나였던 병자호란을 제제로 한 것이었다. 처참하게 벌어지는 전쟁을 묘사하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주제다. 이를테면 침략군 호병들에 짓밟히는 무수한 생명들, 그러나 끝까지 그들과 백수 공권으로 대항하는 의병들의 애국심을 파노라마처럼 그려간 것이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제명이 암시하듯이 봄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뜻에서 침략자에 대한 열화 같은 적개심이다. 동시에 민족을 위해 희생된 무명의 인물들에게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오로지 민족을 위해 살고 민족을 위해 죽는 것만이 진·선·미란 것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에 대해서 월탄은 '민족 문학과 창작 태도'란 제목 밑에--주로 <대춘부>에 대하여--서 다음처럼 강조했다.
'역사 소설이 현대 소설보다 가장 편의한 점이 가령 민족혼을 은근히 일으킨다든지 정의감을 부채질해서 현실의 불의를 응징할 때라든지 이런 때 나는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소설로는 도저히 현실의 추악성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곧 현대의 권력자 또는 권력자의 불의를 선양함으로써 당로의 비위를 거슬리는 때문입니다. 댜행히 양심 있는 부류라면 이것을 너그럽게 받아 들이는 아량도 보여 주는 편도 있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촉노(觸怒)를 받게 되는 때문입니다. 정의파 작가가 이러한 역사적 방법을 쓰는 것은 결코 도피가 아니올시다.'
역사 소설은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대 소설보다도 더 강한 것이라 역설했다. 그래서 시작 생활에서 잠시 휴식한 그는 역사 소설로 붓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술회한다. 이 때부터 월탄은 민족의 치욕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제에 적개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임진왜란을 장편 소설화하려는 결심을 했다고 전한다.
어쨋든 <대춘부>는 <금삼의 피>와 함께 월탄이 역사 소설로 전신하는 획기적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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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춘부>에 이어 세 번째로 발표된 장편 <다정불심>은 월탄의 초기 역사 소설 중에서 상당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었다.
이것은 1940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어 어느 작품보다도 독자들의 열렬한 애독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공민왕이 주인공으로 된 <다정불심>은 하나의 애틋한 애화로 이어졌다. 그는 원나라에 끌려갔다가 노국 공주와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공자 왕기의 노국 공주에 대한 연정은 극한을 치달아 둘이 결혼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돌연히 고려 국왕을 봉한다는 칙명이 내렸다. 이리하여 공자 왕기는 왕자에 앉기 위해 노국 공주와 더불어 금의 환국하게 된다.
그러나 돌연한 노국 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정사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백성들을 동원해서 노국 공주의 영전을 짓게 독려했다. 그로 해서 날로 백성들과 신하들의 원성이 높아 갔다. 섭정왕이었던 신돈도 영전 역사를 중지하도록 간하다가 왕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신돈이 죽고 유탁이 죽은 뒤에 북벌남정의 큰 뜻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노국 공주의 호화로운 마암 영전은 다시 짓기 시작했다. 누구 한 사람 감히 영을 거절할 사람 없었다.
그후 나약한 공민왕은 정사를 맡길 후계가 없어 낭패하게 되고 성격 파탄을 일으킨다. 그는 여러 후궁들을 멀리 하고 미동(美童)들 자제위를 상대로 변태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미동 홍윤과 내시 최만생이란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만뢰가 고요한 이날 밤 축시! 수령궁 지밀엔 왕의 취한 콧소리가 드높다. 좌우에 모신 놈들은 모두 다 홍 윤의 일당인 자제위였다.
내시 최만생과 자제위 홍윤이 검은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칼을 들고 들어왔다. 누구 한 사람 '도적이야'하고 외치는 사람도 없었다.
삽시간의 일이었다. 왕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넋은 날아 그리운 공주를 찾았으리라!
다정이 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뒷 사람은 왕을 가리켜 공민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극적인 종말이 고려 왕조 5백 년의 종언을 고하게 되고 <다정불심>은 대단원이 된다. 한마디로 공민왕이 오랑캐 땅에서 맺은 한 번의 사랑이 끝내는 나라를 망치고 어마어마한 씨앗을 낳았다는 역사적 교훈이 리얼하게 그려졌다.
여기서 작가가 보여 준 것은 우리 역사에 숨겨진 오점을 끄집어 내어 독자와 함께 비판하고자 한 점이다. 그리고 이 주인공인 왕을 하나의 인간으로 환원해서 한 여성을 그토록 병적으로 사랑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슬픈 것인가를 재현시켰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다정불심>은 그 제명이 풍겨 주듯이 낭만적인 표현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특히 공민왕의 뜨거운 사랑을 극적으로 그려 가면서 이어진 낭만적인 대화들은 독자들을 충분히 매혹시켜 준다 하겠다.
한편 월탄은 시, 소설 뿐 아니라 수필집 《청태집》(1942)을 내놓아 수필가의 관록을 드러냈다.
월탄은 <금삼의 피>에서부터 <대춘부>와 <나정불심>을 쓰는 동안 역사소설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굳혀왔다. 더욱이 그는 일제의 침략 전쟁이 가열되고 이른바 암흑 시대에 처해서도 민족 문학을 고수해 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붓을 꺾거나 일제에 동조해서 이른바 친일 문학을 하고 있을 때 월탄은 끝내 자기의 문학 세계를 지켜왔다.
이 무렵 많은 나약한 작가들이 재빨리 창씨 개명을 하고 일본과의 동조 동근설을 펴면서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의 앞잡이로 변절해서 전쟁 문학에 가담했던 것은 우리 문학사의 일대 오점이었다. 그런데도 월탄은 창씨 개명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항일을 주제로 한 민족 문학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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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전야>(1942)와 <여명>(1942)은 일제 말기에, <민족>(1946)은 해방 직후에 써서 3부작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다.
이 역사적 배경은 19세기 전반에서부터 후반기에 이른 근대 한국에 나타난 인물과 풍속들을 실감 있게 추구해 갔다. 특히 한국 민족의 얼을 되새기면서 그 자주성을 부각시켜 보려는 작업이었다.
<전야>는 제명대로 대원군의 집권 이전까지를 그린 것이다. 전 5장으로 구성된 전야는 은둔의 나라--근대 한국을 파헤쳐 보았다. 근세의 돈키호테인 대원군의 생활 주변을 묘사하면서 외척 세력과 투쟁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폭로해 주고 있다. 누대를 통하여 암이 되어 온 외척들을 몰아 내고 왕실 중심의 세도 청치를 위해서 이하응 즉 대원군이 벌이는 온갖 계략이 노출된다.
그런가 하면 <여명>에 있어서는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벌어지는 근대화의 복잡한 양상이 그려지고 있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국 세력과 천주교의 포교가 팽창한 가운데 대원군의 집정은 시작된다. 고루한 쇄국 정책만을 고집한 대원군의 주변에 두 기생이 따랐다. 섬월과 초운이었다. 섬월은 대원군을 사모하고 잘 모신 데 비해 초운은 콧대가 세고 천주교를 따랐다. 한편 초운은 자기가 연모하던 남승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의 학살이 도화선이 되어 리텔, 페른 신부 등의 계교로 초래된 프랑스 함대의 침범을 보고 초운은 정신적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다는 애틋한 얘기다. 그리고 이것은 대원군의 집정에서부터 병인양요에 걸친 어지러운 현실을 통해서 종교도 한국적인 것이어야 하고 민족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펴 주는 것이었다.
한편 <민족>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서부터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민비와 대원군과의 암투를 리얼하게 그렸다.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때 탐관오리들의 난무, 그리고 갑오경장서부터 동학혁명까지 이어지는 최근세의 파노라마를 엮어 갔다.
월탄은 8·15의 감격을 <민족>을 터뜨렸다. 유규한 역사를 통해서 이어 온 우리 민족은 오직 하나였고, 둘이 아니요, 민족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확실히 민족에 이르러 월탄의 민족 문학은 정상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다시 월탄은 <청춘 승리>(1947)와 <홍경래>(1948)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홍경래>는 홍경래의 난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근대사의 영웅 홍경래의 일생을 그렸다. 물론 홍경래의 의거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이상 세계를 위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유토피아를 낭만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홍경래>였다.
한편 <청춘 승리>는 월탄의 수많은 역사물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최근세사를 다루었던 작품이다. 더욱이 <청춘 승리>가 말해 주는 역사적 사실이나 그 주인공들의 피어린 생은 곧 우리 민족의 수난사요 해방사이기 한 것이다. 작가는 <청춘 승리>를 통해서 일제의 식민지에서 불행하게 태어났던 젊은 세대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그 얼마나 용감히 싸웠으며 그 얼마나 비통했던가를 상세히 증언해 준다. '회고편' '수난편' '치욕편' '해방편' 등 네 편으로 된 <청춘승리>는 반세기에 걸친 이 민족의 비극을 구체적 사실을 통해서 형상화시켰다.
주로 광주 학생 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8.15와 함께 해피 엔딩된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록 일파와 옥란 등과 같이 가명이긴 하지만 실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현대 독자들에게 좀더 생생한 역사물이기도 하다.
8.15해방과 함께 장편 <민족> <홍경래> <청춘 승리> 등 일련의 최근세를 배경으로 민족 문학의 대낭만을 폈던 월탄은 시 <대조선의 봄>과 <회천송> 등으로 8.15의 감격을 줄기차게 노래했다.
정의의 날은 드디어 온다/자유와 해방/우리는 이 두마디에/얼마나 목말랐더냐!(회천송 서장)
그런가 하면 단편 <논개>(1946)를 통해서도 민족적 의분을 서정없이 터뜨렸다. 임진란 때의 갸륵한 비화로 엮어진 <논개>는 우리 여성의 아름다운 귀감으로 승화되었다. 의기 논개는 민적적 의분과 사랑의 보복에서 왜장 게다니무라 로꾸스께를 끌어 안아 남강 푸른 물 속에 처박고 희생된 얘기다. 전편에 일관된 낭만은 하나의 서사시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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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 서울신문 사장의 바쁜 공직에서 물러난 월탄은 <임진왜란>을 쓰기 시작했다. 전란과 공무로 장시 중단되었던 창작 생활이 새로이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조선일보》에 전 946회가 연재됨으로써 신문사상 이때까지 유례없는 가장 긴 장편으로서 기록을 세웠다.
장장 3년에 걸쳐 발표된 <임진왜란>은 작가의 필생의 대원을 성취한 역작이기도 했다. 암담한 일제하에서도 도저히 소설화할 수 없었던 임진왜란을 그것과 역사상 흡사한 6.25동란을 체험하고 나서 형상화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한국 민족사상에 일대 수난이었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면서 침략자와 우리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선악의 대결을 대하 소설로 엮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애국 애족의 상징으로 이순신, 계월향, 논개 등 세 주인공의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호국 정신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어쨌든 임진왜란의 민족사상 스펙터클한 사건을 소설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월탄이 아니고는 감당키 어려운 작업이기도 했다. 일찍이 유례없는 이 소설의 방대함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비교될 수 있는 거작이었다.
한편 월탄은 <임진왜란>을 역사적 사실에 편중하면서도 예술성을 돋구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쏟았다. 실제로 역사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을 그는 대담하게 자결한 것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것은 작가의 말대로 민족적 대영웅 이순신 장군의 최후가 그토록 패주하는 유탄쯤에 싱거웁게 죽을 수 없었다고 믿었던 까닭에서였다.
'이순신 장군은 해와 달과 함께 만고에 빛을 다투며 겨레들 가슴 위에 억만년을 살아 있었다.'
<임진왜란>의 종장에서 성웅 이순신 장군을 추모한 문장이다.
아무튼 월탄의 <임진왜란>은 역사 소설의 훌륭한 전형을 이룩했고,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역작이기도 했다. 이런 뜻에서 훈히 월탄의 대표작으로 <임진왜란>을 꼽기도 한다.
월탄의 창작 활동은 더욱 왕성해 갔다. <임진왜란>을 쓰는 동안에도 한편 <황진이의 역천>(1955)을 《새벽》에 발표했다.
다시 장편 <벼슬길>(1958)과 <삼국풍류>(1958) 그리고 <여인 천하>(1959) 등을 거의 같은 무렵에 함께 연재했다. <삼국풍류>는 조선일보에, <여인 천하>는 한국일보에, 그리고 <벼슬길>은 세계일보에 각기 발표함으로써 가장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는 작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월탄의 역사 소설은 신문에 있어서 가장 인기 높은 연재물로 평가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1년에 월탄은 회갑을 맞았다. 그 기념으로 《월탄시선》을 내놓았다. 시집 《흑방비곡》과 《청자부》 그리고 해방 후 시편에서 추려진 것이었다.
다음 해 월탄은 《조선일보》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그리고 《부산일보》에 <제왕삼대>를 각각 연재했다.
다시 1964년에는 <월탄 삼국지>를 《한국일보》에 싣기 시작해서 독자들의 애독물이 되었다. 장장 4년 동안에 걸쳐 연재된 이 <월탄 삼국지>는 확실히 번안 문학의 새로운 전진과 비약이기도 했다.
그 후 수상록 《달과 구름과 사상과》(1965)를 내놓았다. 첫 수필집 《청태집》(1942)이 나온 지 20여 년만에 출간한 것이었다. 제명에 대하여 '달은 내가 평새에 좋아하는 것, 구름은 흘러가는 시대를 뜻한 것이다'라고 작가는 풀이했다.
이것은 '조수루 산고' '난중초' '추억'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 '편상단장' '청산백운첩' '평론' 등 7장 속에 다양한 엣세이와 비평을 포함하고 있다.
계속 월탄은 왕성한 필력으로 <아름다운 이 조국을>(1965)을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한편 <양녕대군>(1966)의 집필도 함께 해 갔다.
칠순을 맞는 1970년에는 제 3 수필 평론집에 해당되는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고희 기념 사화집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아 범문단적 기념 출판회가 베풀어지기도 했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세종대왕>은 장장 8년간에 걸쳐 2,456회란 우리 나라 신문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남겼다. 우리 나라 역사상 최대 현군이었던 세종 대왕의 일대기를 대하 소설로 엮어 원고량만도 2만장이 넘는 엄청난 대작을 수확한 것이다.
어쨌든 <세종대왕>은 <임진왜란>과 함께 월탄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우리 문학사상에 길이 빛날 대표작임을 자타가 공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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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의 감격과 흥분과 혼란은 월탄을 그대로 서재 속에만 묶어 두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원만한 성품과 고결한 인격은 문단과 사회의 사표로 추앙되어 왔다.
'월탄의 성품은 본시 따뜻하고, 부드럽고, 순하고, 진중하며, 극단을 싫어하고 중용을 즐겨하는 그러한 경향이면서 쾌활하고, 명랑하다. 그러길래 젊어서부터 그를 아는 친우들은 한 사람도 그를 좋아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또 그가 20세 전부터 가슴에 품어 온 민족주의 사상이 조금도 변색됨이 없이 꾸준히 그 한 갈래의 길을 걸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부터 문단 생활을 같이 해 온 김팔봉의 월탄에 대한 인상평이다. 애초에 전 조선 문필가 협회 부회장으로 비롯된 월탄의 문학 활동과 사회 참여는 다양한 폭으로 뻗어갔다. 한국 문학회 협회장, 전국 문화 단체 연합회 회장, 예술원 회장, 한국 문인 협회 이사장, 한국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회장, 민족 문화 추진회 회장, 문화예술 윤리위원회 위원장 등 언제나 문단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또 월탄은 6.25를 전후한 5년 동안 서울 신문사 사장으로 언론계의 일선에서 활약했다. 그 시적 《신천지》를 주재하고 많은 출판물을 출판하는 데 기여한 바 크다.
한편 동대, 연대, 서울대 등의 강사를 거쳐서 20여 년 동안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많은 후진과 작가들을 육성했다. 그 공로로 1957년 명예 문학 박사 학위와 1962년에 문화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또 예술원 제1회 문학 공로상(1955)과 제1회 5.16 민족상(1966) 등 대상을 수상했다.
월탄은 5.16 민족상의 상금을 월탄 문학상 기금으로 출연했다. 그래서 매회 우수한 작가 중에서 우수작을 선정해서 시상제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11명의 시인과 작가와 평론가들에게 부상(30만 원)과 함께 월탄 문학상을 수여했다.
월탄 박종화는 그의 60년에 걸친 창작 생활을 통해서 감히 어느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시에서부터 단편과 장편 그리고 수필, 평론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 왔다.
더욱이 월탄 문학의 특이성은 《백조 》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시종여일하게 민족 문학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월탄 박종화는 198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창작 생활을 그침없이 지속하여 왔다. 그의 문학은 우리 현대 문학사의 거성으로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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