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의 피리
by 송화은율박연의 피리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은 영동(永同)의 유생이다. 젊었을 때에 향교(鄕校)에서 학업을 닦고 있었는데 이웃에 피리 부는 사람이 있었다. 제학은 독서하는 여가에 겸하여 피리도 배웠다. 온 고을이 그를 피리의 명수(名手)로 추중(推重)하였다.
-박연이 피리를 배우게 된 동기
제학이 서울에 과거보러 왔다가 이원(梨園)의 피리 잘 부는 광대를 보고 피리를 불어 그 교정(校正)을 청하니, 광대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에도 맞지 않으며, 옛 버릇이 이미 굳어져서 고치기가 어렵겠습니다. "고 하였다. 제학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고 하고, 날마다 다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듣고는 말하기를, "규범(規範, 법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수일 후에는 광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제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고 하였다.
- 배움에 대한 박연의 성실한 태도
그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 거문고·비파의 여러 악기를 익혀서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세종(世宗)에게 지우(知遇)를 얻어 드디어 발탁 등용(拔擢登用)되었다.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가 되어서 음악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專擔)하였다.
세종이 일찍이 석경(石磬)을 만들고 제학을 불러 교정하게 하였더니, 제학이 말하기를, "어느 음률(音律)이 일분(一分) 높고, 어느 음률이 일분 낮습니다."고 하였다. 다시 보니 음률이 높다고 한 곳에는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세 종이 찌꺼기의 일분을 떼어내라고 명령하였다. 또 음률이 낮다고 한 곳에는 다시 찌꺼기 일분을 붙였다. 제학이 아뢰기를, "이제 음률이 바르게 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다 그의 신묘(神妙)함을 탄복하였다.
- 음악에 뛰어난 감수성과 감식력
그의 아들이 계유의 난(亂)에 관여하여 제학도 또한 이 때문에 벼슬이 파면되고 시골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한 벗들이 한강 위에서 전별하였는데 제학은 필마(匹馬)에 하인 한 사람을 거느린 쓸쓸한 행장이었다. 함께 배 안에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다가 소매를 잡고 장차 이별하려 할 즈음에 제학이 전대에서 피리를 꺼내어 세 번 불었다. 그리고 떠났다. 듣는 이가 모두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 피리 하나를 생의 반려자로 삼고 표연히 떠나는 모습
요점 정리
작자 : 성현
갈래 : 경수필, 서정적 수필
성격 : 교훈적, 사실적, 서정적
표현 : 문단법의 사용과 예시적, 설명적임
구성 : 추보식 구성
특징 : 서술자가 주관적 해석을 가하지 않고 자기가 본 그대로 간결하고 사실적으로 서술
주제 : 피리에 얽힌 박연의 맑고 고매한 삶
출전 : 용재총화
내용 연구
제학(提學) : 박연이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음.
유생(儒生) : 유교의 도(道)를 닦는 선비.
추중(椎重) : 추앙하여 존중히 여김.
이원(梨園) : 조선 때의 장악원(掌樂院)의 별칭.
절주(節重) : 음의 높낮이와 관계 있는 연극 요소.
정묘(精妙) : 정밀하고 오묘함
지우(智愚) : 학식이나 인격을 남이 알아줌.
발탁등용(拔擢登用) : 뽑히어 관직에 천거됨.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 : '관습도감'은 향악과 당악을 가르치는 일을 맡은 관아이며, '제조'는 그 관아의 일을 다스리던 사람.
석경(石磬) : 아악기의 한가지. 돌로 된 타악기.
계유의 난 : 조선 단종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난(계유정난).
필마(匹馬) : 한 필의 말.
행장(行裝) : 길을 떠나는 차림.
광대를 보고∼그 교정(校正)을 청하니 : 광대 앞에서 자신이 피리를 불어 보고는 광대에 게 잘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니. 비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박연의 배움에 대한 성실한 자세가 엿보인다.
세종에게 지우를∼발탁 등용되었다 : 세종에게 자신의 인격과 실력을 인정받아 드디어 관습도감제조라는 중책에 오르게 되었다.
친한 벗들이 한강 위에서∼쓸쓸한 행장이었다 : 친한 벗들이 잔치를 베풀고 박연과의 이별을 고하는데,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야인의 차림에 하인 한 사람밖에 거느리지 않은 쓸쓸한 모습이었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은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제 8권에 실려 있는 수필이다. 원래 제목이 없는 글로써, 박연이라는 15C에 살았던 한 예술인의 삶을 한 자루의 피리로 압축시켜 놓은 것으로, 세 개의 삽화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박연의 배움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를, 둘째는 음악에 대한 그의 뛰어난 감수성과 감식력(鑑識力)을, 셋째는 피리 한 자루를 삶의 반려로 삼고 홀홀히 떠나는 박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한 폭의 그림과 같으면서도 지성인의 고매하고도 깨끗한 성격이 간결히 표현되어 여운이 감돌고, 이 작품은 성실한 배움의 태도와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서 맑고 깨끗한 삶을 지향한 박연의 모습을 서술자의 주관적 해석이나 의사 표현이 아닌 객관적이고 간결하며 꾸밈없이 제시하고 있는 글이다.
이 작품에 드러나는 피리는 간단한 생김새이면서도 청아(淸雅)한 음색을 가진 악기이지만, 이러한 소재를 통하여 음악가인 박연의 맑고 고매(高邁)한 삶을 표현함으로써 소재와 주제의 조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피리는 간단한 만큼 그 소리와 가락을 절주(節棄)에 맞춰 익혀 연주하기란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처음 특별한 지도 없이 잘못 익혔던 습관을 바로잡아 마침내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과정을 통하여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부각시킬 수 있었고, 청빈(淸貧)한 그의 생활 역시 피리의 맑은 가락과 잘 어우러짐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속을 초월한 듯한 박연 의 삶의 자세에서 연상되어지는 당시 예술가들의 삶의 태도 는 오늘날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게 함으로써 깊은 감동과 더 불어 교훈적 효과를 상승시키고 있으며, 이 글은 소재와 주제가 잘 어울리는 글이다.
심화 자료
성현(成俔/1439~1504)
조선 전기의 명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경숙(磬叔). 호 용재(齋)·허백당(虛白堂). 시호 문대(文戴).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68년(예종 즉위) 예문관(藝文館) 수찬(修撰)을 지냈다. 형 임(任)을 따라 명(明)나라에 가는 도중 기행시를 지어 《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88년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했으며 관상감(觀象監)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왕명에 따라 유자광 등과 《쌍화점(雙花店)》 등 고려가사(高麗歌詞)를 바로잡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문집 《용재총화(齋叢話)》는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허백당집(虛白堂集)》 《풍아록(風雅錄)》 《부휴자담론(浮休子談論)》 《주의패설(奏議稗說)》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서가 있다.
박연(朴堧/1378~1458)
조선 전기의 문신·음률가(音律家). 본관 밀양(密陽).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然). 영동(永同) 출생.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27년(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 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 특히 저[大x]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 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용재총화(齋叢話)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활자본. 3권 3책.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 그 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책록되어 널리 알려졌다. 내용은 문담(文談)·시화(詩話)·서화(書畵)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人物評)·사화(史話)·실력담(實歷談)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문장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이다. 전편이 《대동야승》에 실려 있고, 시화(詩話) 부분은 《시화총림(詩話叢林)》에도 들어 있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에서 간행한 《조선야사전집(朝鮮野史全集)》에 한글로 토를 달아 실었다. 64년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국역하여 《파한집(破閑集)》과 합본(合本)으로 간행한 바 있다.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변화된 민간 풍속이나 문물제도·문화·역사·종교·예술 등 문화발전을 다루고 있어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중요하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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