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문설(文說)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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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설(文說)

객이 나에게 물었다.

“당세에서 고문(古文)에 능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를 최고로 칩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이 비록 넓고 커서 한량이 없는 것 같지만 대체로 상용(常用)의 말을 사용하여 글이 붙고, 글자가 순탄하고,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해득하는 자나 해득하지 못하는 자를 막론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고문을 전공하는 사람이 과연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내가 대답했다.

“이런 것이 바로 고문입니다. 우하(虞夏)의 전모(典謨)와 상(商)의 훈(訓)과 주(周)의 삼서(三誓)·무성(武成)·홍범(洪範) 등의 글을 보십시오. 모두가 글귀로서는 극치이지만, 여기에 장구(章句)에 갈고리를 달고 가시를 붙여 어려운 말로써 공교롭게 꾸민 곳이 있었던가요? 공자가‘문사(文辭)는 의사를 전달할 따름이다.’ 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글로써 군신 상하의 의사를 소통하고 글로써 그 도를 실어 전하였던 까닭에, 명백(明白)·정대(正大)하고 지성스럽고 정중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분명하게 그 가리키고 뜻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 글의 효용(效用)입니다.

삼대(三代)의 육경(六經) 및 성인의 글과 도가서(道家書) 등 제자백가(諸子白家)의 말에 있어서는 모두 그들의 도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알기가 쉽고 저절로 고상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서는 글과 도가 두 갈래로 분리되어 장을 끌어오고 구를 따내고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공교롭게 꾸미는 일이 생겨났으니 이것은 글의 화액(禍厄)이지, 극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사는 의사의 전달을 위주로 하여 평이하게 지을 뿐입니다.”“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좌씨(左氏)·장자(莊子)·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 및 근대의 한창려(韓昌黎:한유)·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을 보셨는지요? 그들의 글이 일상 용어만 사용했었던가요? 더구나 그대의 글은 옛것을 본받지 않고 넓고 큰 것만을 일삼으니 자만한 데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닐런지요?”“그 몇 분의 글 또한 상용어와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보건대, 비록 간결한 듯도 하고 웅대하여 막힘이 없는 듯도 하며, 심오한 듯도 하고 분방한 듯도 하고 굳세고 기이한 듯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당시의 상용어를 가지고 바꾸어서 고상하게 만든 것이니, 참으로 쇳덩이를 달구어서 황금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날의 글을 볼 적에 어찌 오늘날 사람이 그 옛날 몇 분들의 글을 보는 경우와 같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하물며 넓고 크게 한 것은 진정 웅대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옛것을 본받지 아니한 것 또한 나름대로 우뚝 솟고자 한 것인데 무슨 자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대는 그들 몇 분을 자세히 보셨습니까?

좌씨는 스스로 좌씨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반고는 스스로 사마천·반고이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 역시 스스로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어서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각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을 배웠으면 하는 것이고, 지붕 밑에 거듭 지붕을 얹듯이 남의 문장을 답습하여, 표절했다는 꾸지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그대의 글이 평이하고 유창하니 이른바 옛것을 본받는 것은 어디서 구하시렵니까?“그야 당연히 편법(篇法)·장법(章法)·자법(字法)에서 구할 것입니다. 편(篇)에는 한 뜻으로 곧바로 내려간 것도 있고, 혹은 서로 걸어서 연결하여 여닫는 것도 있고, 혹은 마디마디 정감을 내보이는 것도 있고, 혹은 늘어놓다가 냉정한 말로 끝을 맺는 것도 있고, 혹은 사소하고 번잡하면서도 법칙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장(章)에는 조리가 정연하여 헝클어지지 않는 것도 있고, 뒤섞이되 잡되지 않은 것도 있고, 극히 짧은 것도 있고, 말을 끝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자(字)에는 올리는 곳, 돌리는 곳, 잠복하는 곳, 수습하는 곳, 거듭하되 어지럽지 않는 곳, 강하되 억지로 하지 않는 곳, 끌어당기되 힘을 부리지 않는 곳, 열고 닫는 곳, 부르고 소리치는 곳이 있습니다.

자가 밝지 못하면 구가 고상하지 못하고, 장이 안정되지 못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편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글은 단지 이것을 깨달은 것일 뿐이며, 고문 또한 이것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글을 이해하는 사람도 반드시 이것을 엿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객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허균,‘문설(文說)’

요점 정리

작자 : 허균

형식 : 수필(설)

성격 : 대화적, 구체적, 논리적, 예증적, 교훈적, 설득적

구성 : 객과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글

(1)객의 비판적 질문 : 글쓴이의 고문은 상용어를 사용하여 너무 쉽게 읽힌다

글쓴이의 대답

- 고문의 성격 : 글은 쉽고 진졸하게 뜻을 전하여야지, 어렵게 꾸미려 해서는 글의 효용을 다 할 수가 없다.

- 현실의 창작 방법 비판 : 성인은 그들의 도를 쉽게 나타내었으나, 후세에 와서 교묘하게 꾸미려는 그릇된 풍조가 일어났다.

(2) 객의 반박과 글쓴이에 대한 비판

- 옛 고문은 일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 글쓴이는 옛 글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

글쓴이의 반박

- 옛 고문도 그 당시에는 일상어를 고상하게 만든 것이다.

- 남의 것을 답습하거나 표절해서는 안 된다. 나의 글 역시 나름대로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3)객의 질문 : 그러면 고문에서는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가

- 글쓴이의 대답 : 한 편의 글을 이루어 가는 방법이다. 가장 기본적인 어휘(字)부터 바르게 써서 구와 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글 전체의 뜻이 분명하고 쉽게 밝혀진다.

(4)객의 깨달음과 인정

주제 : 바람직한 글쓰는 방법(남의 글을 답습하지 말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글쓰기 강조)[당대에 문학 창작 방법의 모범으로 여겨온 법고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창작 방법론을 제시한 반법고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특징 :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득력을 높이고, 문답의 구조를 통해 글쓴이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글쓴이의 체험에서 우러난 주관적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상대의 도전적 태도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여 인식의 전환을 이끌면서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글이다.

 

내용 연구

객이 나에게 물었다.

“당세에서 고문(古文 : 전아하고 모범적인 옛글)에 능하다고 일컫는 자들은 반드시 그대를 최고로 칩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글이[글쓴이의 글] 비록 넓고 커서 한량이 없는 것 같지만 대체로 상용(常用)의 말[일상어]을 사용하여 글이 붙고, 글자가 순탄하고[글의 내용이 연결되어 있고 선택된 어휘가 쉽고], 그것을 읽으면 마치 입을 벌리고 목구멍을 보는 것과 같아서[거침이 없이 쉬움] 해득하는 자나 해득하지 못하는 자를 막론하고 아무런 걸림이 없으니 고문을 전공하는 사람이 과연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 객의 비판적 질문 : 글쓴이의 고문은 상용어를 사용하여 너무 쉽게 읽힌다.

내가 대답했다.

“이런 것이 바로 고문입니다. 우하(虞夏)의 전모(典謨)와 상(商)의 훈(訓)과 주(周)의 삼서(三誓)·무성(武成)·홍범(洪範 : 고문에 뛰어났던 옛 문사들의 이름) 등의 글을 보십시오. 모두가 글귀로서는 극치이지만, 여기에 장구(章句)에 갈고리[어렵고 교묘하게 수식된 말]를 달고 가시[글을 어렵게 꾸민 말(은유)]를 붙여 어려운 말로써 공교롭게 꾸민 곳이 있었던가요?

공자가‘문사(文辭)는 의사를 전달할 따름이다.[글은 우선 그 뜻이 명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옛날에는[예전의 고문은] 글로써 군신 상하의 의사를 소통하고 글로써 그 도를 실어 전하였던 까닭에, 명백(明白)·정대(正大)하고 지성스럽고 정중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분명하게 그 가리키고 뜻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 글의 효용(效用)입니다.[글의 효용은 우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삼대(三代)의 육경(六經) 및 성인의 글과 도가서(道家書) 등 제자백가(諸子白家)의 말[훌륭한 고문의 대표적인 예들]에 있어서는 모두 그들의 도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알기가 쉽고 저절로 고상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서는 글과 도가 두 갈래로 분리되어[표현(글)과 내용(도)을 일치시키려 않고] 장을 끌어오고 구를 따내고 어렵고 교묘한 말로 글을 공교롭게 꾸미는 일이 생겨났으니 이것은 글의 화액(禍厄 : 불행과 액운)이지, 극치[아주 아름다운 경지]가 아닙니다[현실의 창작 방법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 그러므로 문사는 의사의 전달을 위주로 하여 평이하게 지을 뿐입니다.” - 나의 대답 : 1) 고문의 성격 : 글은 쉽고 진솔하게 뜻(도)을 전하여야 한다. 2) 현실의 창작 방

 

비판 : 후세에 와서 교묘하게 꾸미려는 그릇된 문풍이 일어났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는 좌씨(左氏)·장자(莊子)·사마천(司馬遷)·반고(班固) 및 근대의 한창려(韓昌黎:한유)·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식(蘇軾)[훌륭한 고문의 대표적 작가 한창려는 한유를 가리킴]을 보셨는지요? 그들의 글이 일상 용어만 사용했었던가요? 더구나 그대의 글은 옛것을 본받지 않고 넓고 큰 것만을 일삼으니 자만한 데에 빠져 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객의 반박과 나에 대한 비판 1) 옛 고문은 일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2)글쓴이는 옛 글을 본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 몇 분의 글 또한 상용어와 무엇이 다릅니까? 내가 보건대, 비록 간결한 듯도 하고 웅대하여 막힘이 없는 듯도 하며, 심오한 듯도 하고 분방한 듯도 하고 굳세고 기이한 듯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 당시의 상용어를 가지고 바꾸어서 고상하게 만든 것이니, 참으로 쇳덩이[당시 사용하던 일상적인 용어]를 달구어서 황금[고상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날의 글을 볼 적에 어찌 오늘날 사람이 그 옛날 몇 분들의 글을 보는 경우와 같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후세인들이 오늘의 일상어를 사용한 글을 보아도 오늘의 일상어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

하물며 넓고 크게 한 것은 진정 웅대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옛것을 본받지 아니한 것 또한 나름대로 우뚝 솟고자 한 것[표절하지 않고 내 나름의 주체성을 발휘하여 글을 쓴]인데 무슨 자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대는 그들 몇 분을 자세히 보셨습니까? 좌씨는 스스로 좌씨[좌씨의 글에는 좌씨만의 개성이 드러나 있고]이고, 장자는 스스로 장자이며, 사마천·반고는 스스로 사마천·반고이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 역시 스스로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어서 서로 답습하지 않고 각각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을 배웠으면 하는 것이고, 집[뛰어난 문사들의 글] 아래에 거듭 집[남의 글을 표절한 글]을 짓듯이 남의 문장을 답습하여, 표절했다는 꾸지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나의 반박 1) 옛 고문도 그 당시에는 일상어를 고상하게 만든 것이다. 2)남의 것을 답습하거나 표절해서는 안 된다.

“그대의 글이 평이하고 유창하니 이른바 옛것을 본받는 것은 어디서 구하시렵니까?"

“그야 당연히 편법(篇法 : 한 편의 글을 정연하게 완성하는 방법)·장법(章法)·자법(字法 : 어휘를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에서 구할 것입니다. 편(篇)에는 한 뜻으로 곧바로 내려간 것도 있고, 혹은 서로 걸어서 연결하여 여닫는 것도 있고, 혹은 마디마디 정감을 내보이는 것도 있고, 혹은 늘어놓다가 냉정한 말로 끝을 맺는 것도 있고, 혹은 사소하고 번잡하면서도 법칙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글의 다양한 표현 방법]. 장(章)에는 조리가 정연하여 헝클어지지 않는 것도 있고, 뒤섞이되 잡되지 않은 것도 있고, 극히 짧은 것도 있고, 말을 끝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자(字)에는 올리는 곳, 돌리는 곳, 잠복하는 곳, 수습하는 곳, 거듭하되 어지럽지 않는 곳, 강하되 억지로 하지 않는 곳, 끌어당기되 힘을 부리지 않는 곳, 열고 닫는 곳, 부르고 소리치는 곳이 있습니다.

 

자가 밝지 못하면 구가 고상하지 못하고, 장이 안정되지 못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부분이 제대로 되어야 전체가 바르게 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편(篇 : 작가의 뜻이 바르게 드러난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글은 단지 이것을 깨달은 것일 뿐이며, 고문 또한 이것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글을 이해하는 사람도 반드시 이것을 엿보지[깨우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집필 동기] - 나의 대답 (한편의 글을 이루어 가는 방법) 가장 기본적인 어휘(자)부터 바르게 써서 구와 장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그래야 글 전체의 뜻이 분명하고 쉽게 밝혀진다.

객이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객의 깨달음]

이해와 감상

 

이 글은 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적과 대화를 나누는 글이고,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유명한 문인들을 예로 들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고, 글쓰는 법에는 편법, 장법, 자법이 있다고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으며, 공자의 말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글쓰는 방법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글쓰기 태도로 남의 글을 답습하지 말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만의 향기가 느껴지는 글로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문설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은 문장에 관한 논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螺藁≫ 권12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장에서 상어(常語)의 사용과 고문(古文)과의 비교, 문장의 독자성, 문(文)과 도(道)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문은 전달목적만 이루면 된다(辭達而已).”라는 주장을 편 다음에 편법(篇法)·장법(章法), 문자와 용어, 구와 문장이 밝고 아담하고 타당하여야 뜻이 흐려지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문답체 형식의 글이다.

언어·문장의 목적은 자기의 의사를 충분히 나타내면 족하다. 글의 작용은 정을 통하고 그 도를 전달하면 그 뿐이다. 따라서 글은 정정당당하고 곡진하게 만들어 읽는이로 하여금 그 뜻하는 바를 알도록 하는 데 있다.

삼대(三代)·육경(六經)과 성인의 서(書)와 황로(黃老 : 老莊學)·제자백가(諸子百家)의 말은 모두 다 그 도를 논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쉽고 고아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로 내려오면서 문장과 도가 둘이 되면서 비로소 읽기 어려운 문장이 되었다. 어려운 말과 교묘한 말로 기교만 부리게 되니 이것이 문장의 흠이다. 그러므로 사달(辭達)위주로 평이하게 글을 지어야 한다.

허균은 선인들의 글이 당세(當世)의 상어를 다 구사하면서도 변화무쌍해서 우아하고 핍진(逼眞)하다고 하였다. ≪좌씨춘추≫를 지은 좌씨(左氏)의 글은 좌씨의 독자적인 글이요, ≪장자 莊子≫는 장자의 독자적인 글이요, 유종원(柳宗元)과 구양수(歐陽脩) 또한 유종원·구양수의 독자적인 방식이어서 서로 답습하지 않았고,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따라서 남의 것을 표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끝으로, 그는 고문에서 실천되고 있는 편법과 장법을 잘 갖춘 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문설〉은 문에 대한 적극적 논의로서 종래의 성리학적 규범을 넘어서는 대담한 발언으로서 주목할 만한 글이다.

≪참고문헌≫ 許筠全書, 한국문학사상사시론(조동일, 지식산업사, 1978),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金東旭, 새문社,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봉(燈)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螺藁≫를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에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馬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惺所覆螺藁, 허균의 생각(이이화, 뿌리깊은 나무, 1980),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김동욱편, 새문社, 1981), 許筠論(李能雨, 숙대논문집 5, 1965), 許筠硏究(金鎭世, 국문학연구 2, 서울대학교, 1965), 許筠論 再攷(車熔柱, 亞細亞硏究 48, 1972), 許筠(鄭泄東,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72), 蛟山許筠(金東旭,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75), 許筠(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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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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