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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론 - 박경리 문학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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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론 - 박경리 문학에 대하여

 

1. 박경리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현대 소설 중 가장 높이 솟아오른 산맥의 하나로 우리는 박경리의 <<토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토지>>1, 2, 3, 4부만으로도 이 작품은 한국 현대소설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을 이루고 있다. 앞으로 이 작품이 5부를 비롯하여 얼마나 계속될지는 아직 모른다. ‘마지막 작품 하나를 위하여 나는 끊임없이 습작할 것이다. 그 마지막 작품이 완성되는 날 나는 문학과 인연을 끊을 것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박경리는 지금까지 토지 이 한편을 위하여 많은 작품을 습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 문학사에서 하나의 정점에 위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루어진 박경리의 작가론 및 작품론은 염무웅, 정명환, 김병익, 김병걸, 서정미, 천이두, 유종호, 김정숙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토지>>가 연대기 소설, 운명소설, 농민소설, 역사소설이라는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는 그의 작가적 명성에 비하여 매우 엉성한 편이다. 이는 아직까지 작가의 창작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과 <<토지>> 1969년에 연재된 후 2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완결되지 못한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토지>>가 지닌 문학사적 의미망은 매우 넓고도 깊다. 이는 우선 <<토지>>라는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인간 유형의 형상화 및 개항기에서 30년대 말까지에 이르는 폭넓은 시대의 전개 그리고 한민족 삶의 터전인 공간의 확대로 요약된다. 그러나 다양한 인물의 형상화와 시공간의 확대만으로 이 작품이 성공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확대는 서사 구조로서의 소설이 지닌 완결성을 해치기 쉬운 함정에 빠지기 쉽다. 실제로 3부와 4부에 이르러서는 1부와 2부에 나타난 구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토지>>의 구성은 작가의 말대로 1, 2부 그리고 3, 4부는 그 나름대로 구두점이 찍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토지>>가 지닌 문학적 위대성은 분량이나 시공간의 확대에서 보기보다는 박경리 문학이 지닌 생명력과 이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논의되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2. 모계 중심의 가족사

박경리 소설의 주된 테마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에 대해, 그것은 가족제도에 대한 탐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우리의 가족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유교 사상을 토대로 그리고 이면에서는 무교에 기초한 집단 무의식적 차원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가문의 유지와 번창이라는 문제는 인물의 사회적 행위를 규제하는 가치관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소설에서 혈연 혹은 가족의 문제는 작품의 중심 핵을 이루고 있다. 박경리 소설 역시 이러한 가치관의 장력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박경리가 탐구한 가족제도는 )-()로 이끌려지는 가족 관계보다 -()로 이어지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조선조 유교 사회가 지닌 남성우위적 세계관에 대한 정면적 도전이다. <<토지>>에서 최참판 댁 가문은 남자보다는 여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간난 할멈에 따르면 최참판 댁이 살림을 이룬 내력은 다음과 같다.

 

하모. 예사 정성 가지고는 못하제. 일 년에 여섯 분 하는데 안 묵는 기사 말할 것도 없고 한분이라도 꼬박 자불기만(졸면) 하믄 뒤꼭대기서 신관이 지키고 있다고 하늘에 고해 바치니께 다 허사제. 수울한 짓이라믄 안할 사람이 없게? 그래 그랬던지는 몰라도 살림이 일기 시작했는데 참판어른 어무님이 대단한 분이든갑데. 피가 나게 살림을 모았다더마. 한 대를 뛰어서 참판어른 며누님, 그러니께 중풍으로 돌아가신 노마님 그 어른이 또 남자 못지않은 배포로 모은 살림을 늘어섰고 또 한 대를 뛰어서 지금 아씨, 아니 마님이, 하기사 친정에도 짓덕도 많이 가지오셨지마는 영민한 분이라 인심 안 잃고도 살림은 더 많이 컸지. 한 대씩 섞바꾸어감서, 그러니께 참판 어른 어무님 때하고 며누님 때하고 증손주며누님, 이렇게 세 분인데 우찌 그리 한결겉이 청상이고 외아들이신고, 생산은 더 못하신 것도 아닌 모양이지마는 자손이 기리질 못했는갑더라.

 

여기에서 피가 나게 살림을 모은 이는 하나같이 청상이 된 며느리들이다. 그리고 이는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서희로 이어진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 남성은 단지 혈연을 잇는 숫벌 구실만을 할 뿐 최참판 댁 역사에서는 멀리 떨어져 요절한다. 반면 여인네들은 한결같이 청상이거나 보통 여인네를 뛰어넘는 강인한 기질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토지>>는 크게 보아 여왕벌의 가족사적 의미를 그리고 있다 할 수 있다.

 

한편, 농경 사회에서 그 많은 재물을 쌓기 위해서는 죄악의 행위가 있기 마련이다. 최참판 댁의 부는 굶주린 농부들의 전답문서가 몇 말의 곡식으로 둔갑함으로써 이루어져 왔다. ‘ 토지는 그 외연적 의미로 볼 때에는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으나, 함축적 의미로 볼 때에는 현격한 의미차를 지니고 있다. 땅이란 농경사회에서 노동의 어머니이자 부의 아버지이다. 또한 인간은 땅을 토대로 하여 공동체 사회를 건설해 왔다. 그러나 토지란 소유와 계약을 의미한다. 토지라는 말에는 지주와 소작인 간의 관계가 들어가고, 여기에서는 공동체적 관계가 아닌 물질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 계약관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작품 제목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얼핏 농민소설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농민소설이란 농민의 농민다운 생활상이나 곤경 또는 집념과 세계관이 구체적 현실적으로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준에 드는 작품으로는 우리는 이미 1930년대에 이기영의 고향을 가지고 있다. ‘고향은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지닌 생활 및 의식공동체로서의 농촌을 탐구함으로써 다양한 농민의식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농민의 가지가지의 슬프고 비참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고 해서 농민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항기에서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담은 농민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인, 빈농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관계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토지>>는 농민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는 전통적 가족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혈연과 재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사적 운명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박경리 소설에서 혈연 혹은 가족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또한 박경리 소설에서는 왜 유독 여성이 남성보다 혈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가. 이는 박경리 소설의 핵심이자 한국민의 무의식적 원형을 드러낸 단초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자신에 따르면 창작을 하는 까닭은 슬프고 괴롭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위대한 문학자가 되느니보다 차라리 인간으로 행복하고 싶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박경리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슬픔과 외로움에 떨고 있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인생에 대하여 사회에 대해 그리고 우주 속에서 외로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다. 외로움과 슬픔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며 가장 정화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왜 작가 자신이 유독 외로움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작가 생애에 대한 전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얘기를 하다보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담 비슷하게 되었으나 의도는 실상 내 문학 속에 잠재되어 있을 골수(骨髓) 같은 것을 찾고자 하는 방황이랄까. 해서 장황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하나 더 첨가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6.25때 피난간 고향에서의 아버지는 몹시 불우했다. 만주에서 빈손으로 나온 데다가 상처(喪妻)까지 했으니,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떠난 것은 내가 피난간 지 얼마 안 되어서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집을 나와 내게로 왔다. 새로 얻은 마누라와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던 것 같았다. 둘째를 데리러 온 아버지는 들어서자마자 매부터 찾는 것이었다. 동생은 기겁을 하며 내 등뒤에 숨었다.

 

아버지, 멀쩡하게 차려 입으시고 아이들 공부는커녕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화살을 쏘았다.

외면 경위 다 아는 년이 애비보고 비난해?”

나는 묵묵히 아버지를 쏘아보았다. 아버지는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내 뺨을 때릴 적에도 이놈자식 했었는데 뺨을 맞았을 때보다 내 충격은 더 컸다. 면전에서, 역시 어머니를 제외하면 년짜소리를 들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한 일, 학비를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아버지의 임종에도 가지 않을 만큼 깊었던 상흔. 여기에다 6.25때 남편의 죽음과 그 후 세 살된 사내 아이의 죽음. 이러한 작가의 생애에서 우리는 가족관계의 끈이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대는 화려하나 무대 뒤의 쓸쓸하고 착잡한 바람을 받고 서 있는 나, 다 뿌리치고 어디론지 도망치고 싶은 충격, 이 상태에서 터지지 않았던 것, 파괴하지 못했던 것, 그것은 가족이라는 너무나 강한 지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해 본다. 옛날에는 그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몸부림쳤던가를. 아득히 먼 곳에서 내 영혼의 자유를 위해 무엇인가 손짓하고 그곳으로 가려고 울타리를 흔들며 발광하던 일을. 그러나 지금은 고요하다. 겨울 밤 구름 없는 하늘의 달처럼. 그리고 스스로 그 굴레에 얽매이기를,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다. 내 세계는 온통 그들 속에 있다. 아니 시초에 내가 없었던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 작품 속에는 윤색된 내 가족들이 충만해 있다. <표류도>가 그렇고 <불신시대>가 그렇고 <영주와 고양이>가 그렇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 가족이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자가가 극도의 가난 속에서 가족을 위하여 창작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창작과 생활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예술가의 고통과 수난 그리고 궁핍에서 위대한 문학의 싹이 배태된다는 작가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시 말해 작품이란 작가의 뼈아픔을 형상화하는 것이고, 한 작가의 파괴 위에 구축되는 것이어서 작가 자신을 객관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민족의 가족 관계는 제도에 있어서 남성 중심의 유교 문화와 관련된다. 그리고 이는 토지에서 김훈장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김훈장은 아들 삼 형제를 차례로 잃고 아내마저 잃는다. 김훈장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집안의 궁핍이 아니라, 한 집안이 끝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토지에 나타난 가장 큰 중심 구조는 남성에 의한 가문의 계승이 아닌 여성에 의한 가문의 계승이다. 그리고 이는 한 국민의 정신의 심층에 내재해 있는 여성의 가족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토지에서 가장 중심되는 인물은 윤씨 부인과 서희이다. 윤씨 부인은 평사리와 그 마을의 큰 산인 최참판 댁을 대표하고 있다. 따라서 최참판 댁의 하인들과 평사리의 농민들, 우관과 혜관으로 대표되는 절과 김개주로 대표되는 동학 그리고 월선 어미로 대표되는 무교는 윤씨 부인을 매개로 하여 생명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최참판 댁에서 이루어지는 비극적인 사건, 별당 아씨와 구천이의 탈주, 최치수의 살해 그리고 극심한 가뭄과 호열자의 창궐은 모두 윤씨 부인과 직접적 혹은 간접적 관계를 맺으면서 이루어진다. 한편 최서희는 사실상 최참판 댁의 마지막 후손이지만 그녀가 결혼함으로써 최참판 댁과는 떨어져 있어야한다. 그러나 그녀는 길상과 자신 사이에서 생긴 환국과 윤국에게 최씨를 고집함으로써 윤씨 부인이 죽고 난 후의 최참판 댁을 대표하고 있다. 서희는 최참판 댁의 마지막 혈통으로 고집 세고 의심 많고 포악스럽고 교만한 소녀로 성장한다. 그녀의 행위는 증조모의 외척인 조준구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김으로써 원한과 복수심에 지배되고 있다. 평사리에서의 어린 시절은 그녀에게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증오와 원한이 맺힌 세월이었다. 그러나 서희는 하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만주 용정촌에서 그녀는 흰콩을 매점 매석하고, 땅 투기를 함으로써 많은 재산을 모은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독립군의 군자금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녀에 따르면 나라를 찾겠다는 행동은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친일파 절인 운흥사에 시주하기도 하고, 일본 관공리와 거상의 부인네들과 교제를 하며 공개적인 친일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그녀의 한에 의해 합리화된다. ‘살을 찢고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고초를 겪는 한이 있어도 그녀는 최참판 댁의 사당과 재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

 

내 원수를 갚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할까보냐. 내 집 내 땅을 찾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할까보냐. 삭풍이 몰아치는 이 만주벌판에까지 와 가지고, 그래 독립운동에 부화뇌동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될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어. 내 넋을 이곳에 묻을 수는 없단 말이야!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내 친일인들 아니할손가. 아암요. 이부사댁 서방님, 친일파 절에다가 나는 시주를 했소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게지요? 내 돈을 악전이라구요? 그렇구말구요. 우리 조상님네는 이부사댁 조상님네처럼 청백리는 아니었더란 말씀 못 들으셨소? 악전이면 어떻고 친일파면 어떻소? 내 일념은 오로지 잃은 최참판 댁을 찾는 일이요. 원수를 갚는 일이요. 태산보다도 크고 바다보다. 깊은 이 원한을 풀지 못한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요. 당신네들은 싸우시오. 나는 이 손톱 마디마디에 피를 흘리며 기어서라도 돌아가야 할 사람이요.

 

이처럼 그녀의 모든 행위는 최참판 댁 가문의 회복이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러한 그녀의 의도는 그녀의 결혼에까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녀가 고래로 청백리 가문으로 내려온 이상현과 혼인하지 않고 노비 신분인 길상과 결혼하는 것도 가문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한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토지에서 서희의 남편 기상은 최참판 댁의 역사와는 무관하다. 그의 관심은 어렸을 때 종으로서 서희를 돕는 일이었으나 결혼을 하고 난 후, 그는 최참판 댁과는 무관한 인물이 된다. 그는 서희가 아들들을 데리고 고향에 다시 돌아올 때 만주에 남는다. 계명회 사건 때문에 피검된 후, 그는 평사리에 칩거하나 이는 독립 운동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는 아들의 성을 최씨로 한 것에 대해 서희에게 한 마디도 항의를 하지 않을 뿐더러 관심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다. 이처럼 박경리의 작품에서 남성은 가문 유지를 위한 단순한 보조 인물(생식과 관련된)에 불과 하다. 우리의 가족 제도가 여성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는 점은 박경리 소설이 이룩해놓은 위대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토지뿐만 아니라 박경리 작품은 거개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불신시대(不信時代)>에서 진영의 남편은 9.28수복 전야에 폭사하고, 그 후 5년이 지나서는 사내 아이가 죽게된다. 30대의 청상과부인 진영은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통해 비극을 체험하고 모든 타인을 적으로 생각한다. 고독과 그리움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녀의 적대감은 마지막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인 반항의 자세를 견지한다. <영주와 고양이>의 민혜는 사변 때 아버지를 잃고 작년 여름에는 사내 동생을 잃은 소녀이다. 이 작품은 <불신시대>의 후편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할머니와 외동딸인 민혜 그리고 외동딸인 영주로 이어지는 숙명 같은 여인에 의한 3대 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박경리의 초기 단편에 나오는 여인의 불행은 가장의 죽음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가장이 없는 가족관계, 여성에 의한 대물림, 이는 작가가 탐구한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다. 작가에 따르면 <암흑시대>는 자신의 아이를 화장한 후 쓴 것이며 <불신시대>는 아이를 잃은 후 느낀 사회악과 위선의 탈을 쓴 종교 등 인간 정신이 사라지는 현실을 보며 쓴 작품이다.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의 객관화, 이는 박경리 소설에서 여인에 의한 대물림이란 문제의 탐구로 나타나고 있다.

 

3. 가족, 멀고도 가까운 사회

 

인간 집단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로서의 가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가족이 구성원이 된 가정이란 피를 나눈 혈연 공동체를 의미하고, 이는 포근함과 안온함의 느낌을 자아낸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결혼을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있다. 일반적으로 고전소설의 결말은 행복한 결혼으로 특징지워진다. , 모든 문제와 갈등은 결혼을 성취하기 위한 일종의 시련이다. 그런데 현대 소설의 시작은 결혼과 함께 이루어진다. 결혼은 문제의 제시이자 갈등의 원인이다. 이는 현대소설의 테마가 사랑보다는 가족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족이란 계급 혹은 돈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가족. 행복의 원천인가 혹은 불행의 근원인가.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당위론적 관점과 불만과 원망을 숨기고 있는 존재론적 관점 중 어느 쪽이 보다 진실된 것일까. 가정이란 긍정정적인 면에서 볼 때 따뜻하고 포근한 제1차 집단으로서의 공간이다. 그리고 가정은 비도덕적 사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도덕적 사회이기도 하다. 한편, 가정은 부정적인 면에서 볼 때 가장 냉정하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가족 관계를 가장 최초로 부정적인 면에서 깊이 있게 다룬 작가는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작품<날개><지주사회>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이들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이다. 이는 우리 문학에서 가족관계를 낯설게 한 최초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럼 박경리의 작품에 나타난 가족관계는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가.토지는 가족간의 거리를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다. 최참판 댁 가문의 비극은 소설이 시작(1897)되기 약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의 명복과 가문의 복락을 빌기 위해 윤씨부인은 천음사에 가게되고, 그곳에서 동학군 접주이자 우관 선사의 친동생인 김개주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야심만만하고 체제에 대해 반항하던 김개주는 젊고 아름다운 양반집 청상인 윤씨 부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이 비록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들 사랑의 결실로서 환이를 낳게 된다. 절에서 환이를 몰래 낳고 온 윤씨 부인은 자식에 대한 죄의식과 버린 자식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애스럽던 어머니에서 먼 사람이 되어 버린다. 치수에게 있어 어머니의 변화는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결국 치수는 어머니의 비밀을 눈치채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냉소와 무관심 그리고 방황과 방탕으로 보낸다. 심지어는 자신의 딸인 서희에게조차 애정을 보여주지 못하고 항상 싸늘하게 대한다. 여위고 창백하고 선병질적인 최치수. 따라서 최참판 댁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처음부터 음산하다. 여기에 별당 아씨와 머슴 구천이(김환)의 도망은 온 집안을 죽음같이 조용하게 만든다. 치수가 구천이를 죽이기 위해 사냥을 떠나는 데서 어머니와 아들 관계는 회복될 수 없는 단절을 맞게 된다. 윤씨 부인에게는 치수도 자식이며 환이도 자식이다. 치수가 자신의 동생을 살해하기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듣고 그녀는 아들에게 증오감 같은 것을 느낀다. 우관이 최치수에게 흉금을 털어놓고 한 사나이의 구명을 애걸한다. 하여도 그가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수 역시 암자로 달려가서 진상을 실토하라고 우관에게 다그치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이 확실한 목소리가 되어 제 귀에 들어오고 마는 날 치수는 자신이 취할 행위가 어떻게 무너질 것이며 생각을 어떻게 모을 것이며, 그것은 혼란이요 제자신의 목을 누르고 마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 죄악의 씨라면 어떠냐? 내 계집을 채간 간부만으로 죄목은 충분하거늘, 그놈의 핏줄을 밝혀 어쩌겠다는 게지? 핏줄, 핏줄? 핏줄이라고? 무슨 핏줄! 누구의 핏줄!)

 

가마를 타고 돌아온 어머니의 백랍 같았던 모습, 험악했던 눈초리,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몸짓. 그 몸짓을 본 최치수는 풀지 못할 수수께끼를 지님으로써 아들로서의, 남편으로서의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포기한다. 이처럼 토지의 심층에는 불륜에 의한 가족 관계의 단절이 놓여 있다. 토지에서 가족 사이의 거리는 평사리의 농민인 용이 집에도 나타나고 있다. 용이의 처 강청댁에게 있어 질투는 영원한 업화였으며, 또한 남편과 그녀 사이에 핏줄기 하나 없다는 것은 질투에 기름이었다. 그런데 용이의 첫사랑은 무당의 딸 월선이었다. 어렸을 때의 사랑은 이들에게 영원한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무당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월선과 용이는 맺어질 수 없었고, 또한 월선의 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결혼 생활에 실패한 월선은 읍에서 주막을 차리게 되고, 용이는 이러한 월선을 볼 때마다 그 비극이 자신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보고 절망한다.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하다가 용이는 울었다. 월선이는 비실비실 도망치려 했다. 매를 치켜든 아버지 앞에서 달아나려는 계집아이처럼. 울음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용이 이빨 사이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월선의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온 용이는 갓을 벗어 던지고 등잔불을 껐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여자의 나머지 한 손을 꼭 잡고 방바닥에 주질러 앉는다. “어느 시 어느 때 니 생각 안한 날이 없었다. 모두 다 내 죄다. 와 니는 원망이 없노!”

 

사랑의 정화된 모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에서만 존재하는가. 용이와 월선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강청댁과 용이의 관계란 껍데기 부부일 뿐이다. 용이와 월선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은 강청댁이다. 한편, 평사리에 호열자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데, 이때 강청댁은 마지막까지 남편에 대한 원한을 지닌 채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는 중에도 아들 홍이가 태어난다. 홍이라는 인연에 의해 용이는 다시 임이네를 아내로 맞이하고, 월선이는 장날마다 용이를 기다린다. 그런데 홍이의 모친인 임이네는 탐욕과 식욕만이 있을 뿐이고, 아내에 대한 용이의 무관심은 집안을 애정이 없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강한 식욕과 물욕 그리고 성욕의 화신인 임이네는 풍요한 생산을 상징한다. 만주에서 임이네는 월선의 국밥집에 나 앉게 되면서 더욱 포악해지고, 남편 없이도 돈만 있으면 산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홍이에게 준 월선의 돈을 받는 대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자리를 버리겠다고 한다. 이는 현대 인간이 지닌 탐욕과 속물 근성의 표본을 보여주고 있다. 아내가 그리고 어머니가 아귀로 바뀐 상황에서 가정이란 바로 지옥 자체이다. 이와 같은 용이와 임이네의 관계는 홍이를 불행으로 이끈다. 홍이는 임이네에게서 어머니의 비정함을, 월선에게서 어머니의 따뜻함을 배운다. 이외에도 토지에서의 가족 관계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탐구되고 있다. 윤씨 부인과 김개주와의 분륜의 씨앗인 김환이 자신의 형수와 달아남으로써 이루어진 혈연에 대한 복수는 섬뜩하기조차 하다. 또한 병신이었기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병수는 어머니에 대해 두려움과 혐오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죄업 때문에 평생 동안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거복이와 한복이는 가족 제도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토지에서는 가족 관계에 나타난 냉엄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가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있다. 박경리 작품에 짙게 나타나는 한의 근원은 바로 가족에서 시작되고 있다.

 

4. 결어를 대신하여

 

박경리의토지는 그 분량의 방대함과 다양한 인물의 제시 그리고 긴 시간의 폭과 넓은 공간의 확대에 의해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연대기 소설(대하소설), 농민소설 혹은 역사소설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는 각각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 시대의 계층을 대표하는 많은 인물의 운명을 보여줌과 더불어 사회의 풍속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토지는 연대기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연대기 소설이란, 개개 인물을 통해서는 개인의 운명을 그리고 인물과 인물이 마주치는 사회를 통해서는 사회의 풍속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토지는 연대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토지에서는 몇몇의 중심 인물(윤씨 부인과 서희, 상현, 용이, 관수, 송장환, 조용하, 김두수, 오가다 등)을 핵으로 하여 그 주위에 많은 인물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중심 인물들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이 구조적 총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 핵을 지녀야 한다. 여기에서의 핵이란 소설 구조의 완결성을 의미한다. 토지는 작가의 말처럼 각 부가 완결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1부와 제2부는 평사리 그리고 간도라는 지형학적 공간에 의하여 비교적 구조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제3부와 제4부에 이르면 그 완결성이 해체되고 만다. 따라서 토지를 연대기 소설로 보기 위해서는 구조적 총체성에 대한 조망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토지 평사리라는 상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여기에 최참판 댁을 비롯한 양반 하인 농부 아낙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윤보 김개주 혜관 강포수 같은 바깥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묘사함으로써 한국적인 농촌 마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토지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농민소설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주와 마름 소작인 빈농간에 이루어진 조선 말기 및 식민지 치하의 경제 관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농민소설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토지는 개항기에서 1930년대 말에 이르는 시간 속에서 한민족의 다양한 계층을 형상화하고, 이들이 지닌 세계관과 역사의식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소설로 볼 수 있다. 평사리에서 간도 그리고 서울과 동경에 이르는 다양한 인물의 삶은 역사의 지평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런데 역사소설이 되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와 역사적 현실 사이에 상동성이 존재해야 한다. 1부에서 양반지주의 몰락이 역사적 대응이었다면 서희와 같은 새로운 지주의 형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또한 토지에 등장하는 각 계층(양반 지주 농민 빈농 동학군 독립군 학생 지식인 친일파 일본인)을 대표하는 인물들은 역사적 사건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들이 아는 시국이란 풍문과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역사소설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생동감 있는 형상화를 추구한다고 볼 때, 이 작품에서의 역사적 사실이란 단지 원경으로 희미하게 나타날 뿐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 지니고 있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에 대한 비중이 지주와 개화 지식인 그리고 친일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토지가 지닌 소설 장르적 특성의 탐구는 이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보다 유익한 방법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 글은 토지나아가서는 박경리 문학의 심층에 놓여 있는 핵을 가족이라고 설정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박경리 문학에서 가족이란 그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하여 여기에서는 박경리 소설에 나타난 가족제도의 특징을 모계중심의 가계로 파악했다. 이는 표피적으로만 나타나고 있는, 유교에 토대를 둔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대한 새로운 충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박경리 소설에서 가족이 지닌 현실적 의미는 -子 夫-婦 母-간의 단절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은 생명의 원천이자 한의 근원이다. 토지는 농촌사회와 시대 역사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한국적인 가족제도에 대한 탐구이며, 가족 구성원들이 지닌 한에 대한 탐구가 놓여 있다. 따라서 박경리 소설은 크게 보아 가족사 소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박경리론 - 가족, 그 한의 뿌리, 김용구(국문학, 강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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