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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文學)과 인생(人生) / 본문 및 해설 / 최재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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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文學)과 인생(人生) / 최재서

 

 

 인생 오십 고개에 올라서, 그 사이 한 말이 많은 것 같지만, 돌아다보면 실오라기만한 외길이 보일 둥 말 둥, 줄거리 잡아 이렇다 할 아무 일도 없다. 나는 인생의 허무(虛無)와 무가치(無價値)를 느낀다. 나는 좀더 충실하고, 좀더 가치 있는 생(生)을 체험(體驗)하고 싶다. 그럴 때에 나는 베토벤의 교향악(交響樂)을 듣고, 혹은 밀턴의 시(詩)를 읽고, 혹은 셰익스피어의 희곡(戱曲)을 읽는다.

 

 이 글을 읽어 줄 독자는 대개 20 전의 청년들임을 나는 알고 있다. 여러분은 아직 인생을 회고(回顧)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앞을 내다보며 기쁨과 슬픔을 다같이 희망의 품안에 포옹(抱擁)하면서 전진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간혹 문학 작품을 읽어, 인생에 대해서 그 무엇을 반성하게 될 때에, 이 글이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붓을 든다.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模倣)"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演劇)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비교적 현대에 발달한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자주 되풀이된다. 그만큼, 모든 문학 작품이 자연과 인생을 모방하고 반영(反映)하여, 현실의 이모저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의 일면이고 전면은 아니다. 어느 작품을 보아도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 있지 않다. 마치 사진기가 풍경이나 인물을 촬영(撮影)하듯이, 문학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模寫)하지는 않는다. 문학에서 현실을 모사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또 필요한 일도 아니다. 문학의 목적은 좀더 별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생에서 소재를 선택해다가 그들의 모양을 다소 수정하고 혹은 다시 결합해서 한 예술품(藝術品)을 만들어 내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문학 작품은, 현실적이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다. 작품 세계는 현실 세계는 현실 세계와 따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해 있다고 생각해소도 안 된다. 인생을 떠나서 예술이 독립할 수는 없다. 예술가(藝術家)는 그의 소재들을 인생 체험 속에서 구해 올 뿐만 아니라, 만약 그가 진정한 천재(天才)라면 그 소재들을 결합하고 조직하는 독특한 방법과 원리까지도 자연에서 배워 온다. 그러니까,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를 기반(基盤)으로 해서만 성립된다. 예술이 현실과 동일하지도 않고 독립되어 있지도 않다면, 그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竝立)의 관계다. 현실 세계가 있고, 그 곁에 혹은 그 위에 예술 세계가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하면서도, 독자적(獨自的)인 원리 밑에서 자체의 세계를 창조하여 독특한 목적을 수행(遂行)한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한도에서는 기록이지만, 새 세계를 창조하는 한도에서는 예술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나 기록면(記錄面)과 예술면(藝術面)을 가진다. 이 두 면 중에서 우열(愚劣)을 가릴 수는 없다. 기록과 예술의 두 면을 구비(具備)함으로써만 작품은 완전하다. 예술적인 면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기록적(記錄的)인 면만을 말하려 한다.

 

 문학은 현실의 기록으로서 볼 때에,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을 쓴 사람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인생을 체험했으며, 또 그 체험을 얼마나 진실하고도 아름답게 표현했는가에 달려 있다. 자기 자신이 성실하게 인생을 실천해 보지 못한 사람의 글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구를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은 뻔한 이치(理致)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일평생 성실하게 진리를 실천해 나가는 사람은 퍽 드물다. 진실한 생활 체험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더욱 희귀(稀貴)하다. 우리는 밀턴에게서 그런 희귀한 실례(實例)를 본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턴은 부유(富裕)한 집에서 태어나서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어린 밀턴은 줄곧 음악적인 분위기 속에서 지냈다. 이것은 그가 장래에 시인이 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시와 음악을 결합하는 일이 그의 소년 시절의 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문학적 소질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정 교사의 지도(指導)로 특별히 교육했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열 두 살 이후로 그는 자정(子正) 전에 자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아직 조명(照明)이 불완전하던 그 시대에 어린 사람이 그렇게까지 밤늦도록 공부했다는 것은 건강에 좋았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만년(晩年)에 실명(失明)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면(勤勉)의 덕택으로,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문학을 비롯하여 철학, 천문학, 물리학 등의 학문에 상당히 깊게 들어가 있었다.

 

 밀턴의 대학 시절에는 순결(純潔)한 생활로 일관(一貫)되어 있었다. 그는 그가 믿는 퓨리터니즘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그의 생활 감정이 여러 편의 시 속에 남아 있다. 대학에 들어갈 때에 밀턴은 목사(牧師)가 될 예정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에 문학으로 전향(轉向)했다. 그 당시 교회들의 타락(墮落)을 분개(憤慨)했다는 것도 목사 지망(志望)을 단념한 이유의 하나였다. 대학을 나온 뒤에, 그의 앞에 유망(有望)한 길이 있었지만,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독서와 시 창작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의 장래를 염려하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문학에 대해서 얼마나 투철(透徹)한 신념과 열렬한 정신(精神)을 품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스물 아홉 살 되던 해에, 밀턴은 더욱 견문(見聞)을 넓히고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곳에서 여러 문인, 학자들과 상종(相從)했고, 또 직접 이탈리아 말로 시를 발표하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갇히어 살던 과학자 갈릴레이와 만난 것도 이 때였다. 이 여행 중에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그가 영국을 대표할 만한 장편 서사시(長篇敍事時)를 쓰고자 결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타소의 서사시 <예루살렘이 해방>과 경쟁해 볼 생각이었다. 전기(前記)의 서사시는 16세기 말에 발표되어 근세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시(國民詩)로서 온 유럽에 이름이 놓았었다. 밀턴도 그런 애국적인 시를 써 보고 싶었다. 그래서 주제를 영국 역사에 유명한 아서왕의 전설에서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려 할 때, 본국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있어, 그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왕실과 의회(議會) 사이에 계속해 오던 알력(軋轢)이 마침내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그 때의 심정을 밀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포(同胞)가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쾌락을 위해서 외국에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언제나 양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밀턴의 면목(面目)이 여기에 여실(如實)히 나타나 있다.

 

본국에 돌아온 뒤에, 밀턴은 형세(形勢)를 살피면서 여전히 문학에 정진(精進)하고 있었다. 그 때에 그의 머리를 점령했던 문제는 여전히 장편시(長篇詩)의 창작이었다. 그 때의 그 포부(抱負)는 다음 말들에서 엿볼 수 있다.

 

"고심 노력(苦心努力)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일은 나의 팔자라 생각하는데, 그 위에 또 강한 천품(天稟)이 결합된다면, 후세(後世)사람들을 위해서,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그는 열심히 작품의 재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때의 계획들을 적은 원고가 99편 보존(保存)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성경(聖經)에 관한 것이 66편, 영국 역사에 관한 것이 33편이다. 마지막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선택되면서 실락원(失樂圓)이라는 제목이 결정된 것은 1642년이었다.

 

 바로 이 때에, 교회를 장로제(長老制)로 고쳐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민주화(民主化)하려는 법안(法案)이 의회(議會)에 제출되어 국내(國內)가 물끓듯했다. 밀턴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팜플렛을 써 가지고 서재(書齋)에서 나왔다. 그 후 20년 동안, 그는 내란(內亂)에 직접 참가해서 투쟁했다. 여러 해 연구해 오던 그는 장편시는 어찌 되었는가? 물론 포기(抛棄)되었다. 그렇게 알뜰한 그의 시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는 서슴치 않고 붓을 꺾는 밀턴이었다. 내란 중에 그는 크롬웰 호민관(護民官) 밑에서 라틴 말 비서(秘書)로 있으면서, 국왕 찰스 1세를 단두대(斷頭臺)로 보내라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여 온 유럽을 진동(震動)시켰다. 그는 그의 온갖 지력(知力)과 정력(精力)을 바쳐 자유 진영을 위하여 싸웠다. 그러므로 문학에서는 멀어졌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실을 폐지(廢止)하고 공화국(共和國)을 만들려고 일으킨 내란은 밀턴과 그의 동지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1660년에, 파리로 망명(亡命)했던 찰스 2세가 다시 영국왕으로 영접(迎接)되어, 영국은 왕정(王政)으로 복고(復古)했다. 혁명 투자들은 모두 붙잡혀서 처단(處斷)되었고, 밀턴도 투옥(投獄)되었으나 목숨만은 보존되었다. 그의 문학적 재질(才質)을 아깝게 생각하는 국왕이 특별히 그를 사(赦)해 준 것이다.

 

 이 때에 밀턴의 나이 50, 그의 이상(理想)과 더불어 지위와 권세를 잃고, 사면(四面)의 적(敵)들 속에서 고독과 빈궁(貧窮)에 빠졌다. 그의 가정 생활(家庭生活)도 특별히 불행했다. 첫 번 결혼에 실패했고, 둘째번 부인은 사망했고, 그 자신은 완전히 시력(視力)을 잃어 맹인(盲人)이 되었다. 실락원에서 밀턴은 암담(暗澹)한 그 자신을,

 

고약한 시대 험(險)한 구설(口舌)을 만나
암흑(暗黑)과 위험(危險)과 고독에 둘러싸여

 

 라고 읊고 있다. <실락원>은 이런 환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눈먼 늙은 시인이 한 구절 구술(口述)하는 것을 그의 어린 딸이 받아쓰면, 그것을 낭독시키어 틀린 데를 고치고, 이리하여 12권 장편시를 읊어 나가는 장면을 참담(慘憺)하고도 엄숙하였다. 무엇이 맹목(盲目)의 시인을 몰아서 시를 읊게 했던가? 그것은 그가 젊었을 때 약속했던, 만만히 죽어 없어지지 않을 만한 불후(不朽)의 작품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불붙는 열정(熱情)이었다.

 

 밀턴은 이 작품 속에다 그의 지식과 학문과 사상과 신념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 특히 왕정 복고(王政復古) 이후에 그가 겪은 가지가지의 쓰라린 감정 ―실망과 분만(憤?), 권세에 대한 반항과, 아첨(阿諂)에 대한 멸시(蔑視), 하느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회한(悔恨)― 요컨대, 그의 인생 전체를 털어 넣었다. 뿐만 아니라, 밀턴은 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일생을 살고 싸우고 고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실락원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불후(不朽)의 작품이 되었다. 밀턴은 양서(良書)를 정의(定義)하여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길이 전하고자, 대가(大家)의 생명 고혈(膏血)을 향약(香藥)으로 처리하여 보존한 것이라 말했는데, 이 말은 그대로 그 자신의 책의 성질을 설명한다.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普遍的)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다만, 그런 사상과 감정은 밀턴의 경우에서처럼 성실하고도 열렬한 인생 체험에서만 우러나올 수 있다. 러스킨은 그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雄辯的)으로 말하고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이것을 진실하고도 유익하다' 또는 '유익하고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말해야 할 그 무엇을 가진다. 그가 알기로는, 과거에 아무도 그것을 말할 사람이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사람이 없다. 그는 그것을 분명하고도 음악적(音樂的)으로, 적어도 분명하게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인생을 총결산(總決算)하는 마당에서,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명백한 사실이라 함을 그는 자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이 세상에 생을 받아 태양의 혜택을 입음으로 인연(因緣)해서,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알게 된 참다운 지식이며, 참다운 의견이었다 함을 자각(自覺)한다. 그는 그것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바위에 새겨 두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그 나머지는 나도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람하고 미워했다. 나의 인생은 수증기(水蒸氣)처럼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것만은 나의 눈으로 보았고, 나의 마음으로 알았다. 나에게서 그 무엇이 가치 있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들이 기억해 줄 만한 가치 있는 나의 일부다.'

 


 작자 : 최재서(崔載瑞)
 형식 : 수필
 성격 : 사색적, 예증적
 주제 : 문학과 인생의 진실성

 

 모사(模寫) : 그대로 본 뜸. 베낌.
 퓨리터니즘 : 금욕주의, 금욕과 절제와 도덕을 중시하는 사상.
 상종(相從) : 서로 좇아 따름, 만남.
 국민시(國民詩) : 한 나라의 국민이 모두 즐기는 시.
 알력(軋轢) : 수레 바퀴가 삐걱거림, 자주 다툼.
 팜플렛을 써 가지고 서재에서 나왔다 : 학문이나 문학의 세계에서 사회와 정치 일선으로 나왔다. 여기에서 팜플렛은 정치적 강령을 말함.
 사(赦)하다 : (왕이 어떤 죄목에 대하여) 용서해 주다.
 대가의 생명 고혈을 향약(香藥)으로 처리하여 보존한 것 : 대가가 자신의 평생의 심혈을 다 기울여 완성한 사상이나 문학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용해시켜 표현한 것.
 태양의 혜택 : 살아있는 행복.
 천재일우(千載一遇) : 천 년에 한 번 일어날 정도로 매우 희한한 일.

 

 우리 문학의 현대적 성격을 과학적 방법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뒷받침을 세우고 또 논리적인 면에서 주도한 글을 썼는데,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천황제 군국주의가 가열될 때, 구미류의 생활을 자처했다고 고백하는 친일적인 행각을 하면서, 1929년 <인문평론>을 경영하면서 <건설과 문학><국책과 문학><문학의 자숙> 등의 권두언을 싣고 차차 황도문학을 위한 신체제문학에 야합하여 <인문평론>에 <전형기의 문화이론> 등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국민문학을 창간하고 '조선문인회' 및 1943년의 제 2차 '대동아문학자대회' 에 참가, 일본문으로 평론 및 창작 활동을 하면서 비평기준이 결국은 연구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신념의 문제라고 <국민문학> 창간호에서 선언했고, 이것은 바로 그가 그토록 주장했던 과학적인 글쓰기 방법의 종언을 가져 오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과 인생'이라는 글도 글 자체야 좋은 글이지만 문학 작품이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다는 관점에서 그의 글은 결국 문학이 가져야 할 진실성과는 어긋나는 글이었고, '문학과 인생'을 논한 그의 글은 문학과 작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글이다.

 

 최재서(崔載瑞)  

1908 ∼ 1964. 문학평론가 · 영문학자. 황해도 해주 출신. 호는 석경우(石耕牛). 필명은 학수리(鶴首里) · 상수시(尙壽施). 1931년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거쳐, 1933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뒤 모교 강사 및 보성전문학교 ( 普成專門學校 ) · 법학전문학교(法學專門學校) 교수를 거쳐 광복 이후 연세대학교(1949 ∼ 1960), 동국대학교 대학원장(1960 ∼ 1961), 한양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비평가로서 그의 문단 활동은 1931년 ≪ 신흥 新興 ≫ 5호에 브래들리(Bradley,A.C.)를 소개하는 〈 미숙한 문학 〉 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고, ≪ 조선일보 ≫ 에 〈 구미현문단총관-영국편- 歐美現文壇總觀 英國篇 〉 (1933) · 〈 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의 건설-영국평단의 주류- 〉 (1934) · 〈 현대주지주의문학이론 〉 (1934) 및 〈 비평과 과학 〉 (1934) 등의 글을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논문을 통하여 흄(Hulme,T.E.) · 엘리어트(Eliot,T.S.) · 리드(Read,H.) · 리처즈(Richards,I.A.) 등의 문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영문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비평 방법과 태도는 한국 문학사에서 비평의 학문화의 모델, 또는 강단비평(講壇批評)의 원조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김환태 ( 金煥泰 ) · 김문집(金文輯) · 이헌구 ( 李軒求 )와 더불어 이른바 프로비평의 방법론을 극복하려 하였다. 문학을 이데올로기의 전파 수단으로 보거나 또는 작가와 작품을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설명하려는 프로비평의 태도를 뛰어넘기 위하여 김환태와 김문집은 인상주의비평(印象主義批評)을, 최재서는 신고전주의를 중심으로 한 주지주의문학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당시의 문단에 올바른 비평 자세를 정립시켜보려는 뜻에서 〈 비평의 형태와 기능 〉 (조선일보, 1935.10.) · 〈 취미론 趣味論 〉 (조선일보, 1938.1.) 등 비평의 본질과 방법론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취미론 〉 에서는 개인의 취미에 근거를 둔 주관비평과 도그마의 통제를 받는 객관비평 모두를 비판하였는데, 후자에 대한 비판이 더욱 강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주지주의 문학론을 중심으로 한 영문학의 동향을 소개하는 한편, 당시의 한국 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한 평가와 해석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리얼리즘의 확대와 심화 〉 (조선일보, 1936.10.) · 〈 빈곤과 문학 〉 (조선일보, 1937.2 · 3.) · 〈 단편작가로서의 이태준(李泰俊) 〉 (朝光, 1937.11.) 등의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이상 ( 李箱 ) · 박태원 ( 朴泰遠 ) · 이태준 · 김기림(金起林) · 채만식 ( 蔡萬植 ) · 임화 ( 林和 )를 주목하였다.

 

이 밖에도 ‘ 지성 ’ · ‘ 풍자문학 ’ · ‘ 모럴 ’ · ‘ 취미 ’ 의 문제에 다대한 관심을 표시한 글도 여러 편 남겼다. 1938년에는 이러한 글들을 모아 ≪ 문학과 지성 ≫ 이라는 평론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한편, 1939년 ≪ 인문평론 人文評論 ≫ 을 창간, 경영하면서 〈 전형기(轉形期)의 평론계 〉 와 같은 친일의 색채가 짙은 글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또한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리고 1941년 ≪ 인문평론 ≫ 이 폐간된 뒤 친일문학지 ≪ 국민문학 ≫ 의 주간을 맡았으며, 또 일본어로 친일적인 평론을 다수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에 가담하여 황도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 비평사에 있어서 영미 주지주의문학론을 바탕으로 하여 비평의 학문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저서로는 ≪ 문학과 지성 ≫ 외에, ≪ 전환기의 조선문학 ≫ (1943) · ≪ 문학원론 文學原論 ≫ (1960) · ≪ 최재서평론집 ≫ (1961) · ≪ 영시개설 ≫ (1971)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 햄릿 ≫ · ≪ 아메리카의 비극 ≫ · ≪ 주홍글씨 ≫ · ≪ 포우 단편집 ≫ 등이 있다.

 

≪ 참고문헌 ≫ 親日文學論(林鍾國, 평화출판사, 1966),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金允植, 한얼문고, 1973), 韓國文學思想史試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9), 文學과 歷史的人間(金興圭, 創作과 批評社, 1980).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淸敎徒革命)

 

1640∼60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

 

【혁명 전의 영국】

영국의 절대주의는 튜더왕조 최후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 치세 중에 이미 청교도의 국교회 비판이나 의회에서의 절대주의 비판 등이 있었지만, 당시의 절대주의는 별다른 파탄을 보이지 않고 다음의 스튜어트왕조로 넘어갔다. 그런데 제1대 왕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서 영국의 의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회 그 자체를 부정하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창하였다. 한편 국민측에서는 법률가 E.코크가 ‘법의 우월’을 주장함으로써, 왕은 법 위에 선다는 제임스 1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의회는 양측의 충돌 장소로 되어 어수선하였다.

 

 다음 왕 찰스 1세는 절대주의를 한층 더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선박세를 부과하였으며, 헌금과 공채(公債)를 강제해서, 응하지 않는 자를 투옥하였다. 또한 병사를 민가에 무료 숙박시키고, 군법을 일반인에게까지 적용시켰다. 의회에서는 1628년 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인민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권리청원’을 기초하여 왕에게 제출하였다. 이 때문에 29년 의회가 해산되고, 왕은 40년까지 11년간이나 의회 없는 정치를 하여야만 하였다. 왕은 측근에 W.로드 대주교와 Th.W.스트래퍼드백(伯)을 두고 성실재판소(星室裁判所)와 고등종무관(高等宗務官) 재판소 등을 이용하여 청교도를 탄압하고, 의회 없이 수입을 얻기 위하여 국왕의 대권을 남용하였다. 그런데 왕은 장로파가 우월한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려 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를 자초하고, 전비를 얻기 위하여 40년 소위 장기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혁명】

 이와 같은 사정으로 의회에서 왕을 지지한 자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므로 1641년 의회의 3년 회기법, 스트래퍼드백의 사권(私權) 박탈법, 성실재판소 및 고등종무관 재판소의 폐지법, 선박세의 위법성 선언, 직할림 제한법, 기사강제금 금지법 등이 잇따라 가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회의 압도적 다수가 희망한 것은 국왕의 대권에 대해 의회제정법에 따른 제한을 가하려 한 정도였다. 그 후 의회에 대간의서(大諫議書)가 제출, 심의되었으나 그 안에 국왕의 대권에 대한 의회주권 확립의 요구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의회 안에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는 얻지 못하고, 11표라는 근소한 차로 겨우 가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왕당파[騎士黨]와 의회파[圓頂黨]의 분열이 결정적으로 되었으며, 왕은 42년 의회에서의 5명의 의원 체포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런던을 빠져나와 요크로 도주하였다. 의회는 국왕 대권의 포기와 의회 주권을 요구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여 내란이 일어났다.

 

 의회파와 왕당파는 지리적으로는 전자가 동부·남부를, 후자가 서부·북부를 지반으로 하였으나, 모직물 공업지대는 의회파에 속하였다. 전자에는 청교도가 많았고, 후자는 대부분 국교회에 속했으며, 일부 로마가톨릭교도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의회파에 가담한 것이 귀족·젠틀맨의 일부와 자유농민·상공업자들이었고, 왕당파에 가담한 것이 귀족·젠틀맨의 대부분과 그 밑의 소작농민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귀족과 젠틀맨이 한 집단이 되어 한 진영에 가담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현실적인 지방적 이해나 친족관계가 크게 영향을 끼쳐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초기의 2년간은 국왕군이 우세하였으나, 의회군에 O.크롬웰이 나타남에 따라 청교도인 자유농민을 중핵으로 하는 기병대를 조직하여, 44년 국왕군을 마스튼 무어에서 격파하였다. 그는 이 ‘철기대(鐵騎隊)’를 본떠서 45년 ‘신형군(新型軍)’을 편성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국왕군에 이겨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 왕을 생포하였다.

 

 그러나 제1차 내란의 종료와 함께 종래부터 문제를 내포하고 있던 의회파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먼저 그 주류인 장로파와 크롬웰 등의 독립파와의 대립이다. 양파는 다같이 청교도파에서 유래하였지만 정치상의 장로파와 독립파가 종교상으로 꼭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장로파가 국왕과의 화평을 고려한 데 반하여, 독립파는 항전을 주장하였다. 장로파에는 런던의 대상인이나 귀족층에 지지자가 많았고, 독립파는 장로파보다 밑의 계층에 의존하였다. 양파의 개혁노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의회주권·제한군주제(制限君主制)의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이들 양파에 대한 제3의 세력이 수평파(水平派)로서 런던의 수공업자·직인층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사상은 청교도 중의 여러 교파의 흐름을 담은 것을 주류로 하고, 공화제·인민주권·보통선거·기본적 인권 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립파가 군간부를 지반으로 한 데 반하여, 이들은 병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폐 중인 왕은 이같은 장로파와 독립파의 대립, 군부의 분열을 틈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또 스코틀랜드와 결탁한 장로파가 책동을 시작하여 제2차 내란이 시작되었다. 독립파는 수평파와 손잡고 대항한 끝에, 48년 승리를 얻고 왕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 뒤 장로파 의원이 의회로부터 추방되고, 독립파만으로 구성된 ‘잔부의회(殘部議會)’가 국왕 재판을 감행하여 49년 왕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군주제와 귀족원이 폐지되고,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실락원'의 '서시'에서

 

인류최초의 불순종, 그리고 금단(禁斷)의 나무열매여
그 너무나 기막힌 맛으로 해서
죽음과 더불어 온갖 슬픔 이 땅에 오게 하였나니
에덴을 잃자 이윽고 더욱 거룩한 한 어른 있어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또한 복된 자리를
다시금 찾게하여 주셨나니
하늘에 있는 뮤즈(Muse)여 노래하라
그대 호렙산이나 시내산 은밀한 정상에서
저 목자의 영혼을 일깨우시어
선민에게 처음으로 태초에 천지자
혼돈(混沌)으로부터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나이까.
아니 또한 시온(Zion) 언덕이 그리고 또한
성전 아주 가까이 흘러 내리고 있는
실로암 시냇물이 당신 마음에 드셨다면
이 몸 또한 당신에게 간청하노니
내 모험의 노래를 붇돋아 주소서
이오니아(Ionia) 산을 넘어서 높이 더 높이
날고자 하는 이 노래이니
이는 일찍이 노래에서나 또 글에서나 아직
누구나 감히 뜻하여 본 일조차 없는 바를 모색함이라.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대 아 성령이여
어느 궁전보다 앞서
깨끗하고 곧은 마음씨를 좋아하셨으매, 당신이여
지시하시라, 당신은 알고 계시지 않으시나이까.
처음부터 당신은 임석하시어 거창한 날개를 펴고
비둘기와 같이 넓은 심연을 덮고 앉으사
이를 품어 태어나게 하셨나이다. 내게 날개 편 어두움을
밝히소서, 낮은 것을 높이고 또 받들어 주소서
이는 내 시의 대주제의 높이에까지
영원한 섭리를 밝히고자 함이요, 또한
뭇사람에게 하느님의 도리를 옳게 전하고자 함이라.

 

 뮤즈(Muse) : 학예, 무용, 음악을 관장하는 여신
 시온 : 예루살렘 성지의 언덕

 

 이해와 감상

 전12권의 대장편 시이다. 눈이 먼 뒤에 딸에게 구술하여 완성된 대작으로, 20년에 걸쳐 구성하였으며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취재하였다. 이야기는 사탄 및 인간의 반역과 몰락이며, 하느님과 그리스도, 아담과 이브, 천사와 타락한 천사, 특히 사탄의 비극적이며 영웅적 성격을 공상의 세계에 자유 자재로 구사하여 악에 대한 하느님의 형벌, 하느님이 창조하여 낙원에 살게 한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키려는 사탄의 복수, 인류의 시조와 그 인과, 속죄의 희망 등을 지옥과 천국과 지상의 대무대에 전개시킨다. 작자 자신이 말하듯 '영원한 섭리를 말하고 신의 인간에 대한 도리가 옳은 것임을 밝히려는 것'에 그 모랄이 있으며, 이것이 작품 전체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출처 : 최재서 수필 <문학과 인생> '밀턴의 인생'에 대한 언급 中에서)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12권(초판은 10권). 1667년 간행. 구약성서를 소재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하여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하고 있다. 작자는 1640년경부터 일대 서사시를 쓸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치적 위기로 집필할 기회를 잃고, 근 20년 동안 청교도혁명에 휩쓸려 시국적인 논쟁에 정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 공화제가 실패하고, 그 자신도 실명(失明)하여, 불운에 빠지게 되자, 다시 시작(詩作) 활동을 결심, 이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구술(口述)로써 완성하였다. 서사시라는 일정한 형식에 인간의 원죄와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내용을 담는다는 어려운 과제를 작자는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1,2권에서는 신에 반역하여 지옥에 떨어져, 낙원에 사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복수하려는 ‘사탄’을 그렸고, 3권에서는 천상(天上)의 소식, 4권에서는 에덴 낙원의 축복을 노래하였다. 5∼8권에서는 천사 라파엘이 아담에게 사탄의 반역과 천지창조의 전말을 이야기하여 경고하지만 인류의 시조 하와는 9권에서 뱀으로 변신한 사탄의 유혹에 지고 만다. 10권에서는 죄를 진 후에 찾아오는 재화(災禍), 11∼12권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구원의 예언에 관한 것이 묘사되며, 아담과 하와는 신의 섭리를 믿으며 낙원을 떠난다.

 

 전편을 통하여 작자의 강렬한 상상력이 충만되고 섬세 ·정확 ·장중한 무운시(無韻詩)를 마음껏 구사하고 있다. 작자는 이 작품에 의하여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대시인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밀턴은 이 작품에 이어 《복낙원:Paradise Regained》을 썼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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