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송(墓地頌) - 박두진
by 송화은율묘지송(墓地頌) -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죽음의 내도 풍기리. //
살아서 살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
<후략>
<핵심 정리>
이 시의 시적 공간이 되고 있는 ‘묘지’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명이 다하여 시신을 묻는 소멸의 공간이다. 하지만, 묘지송에서는 인간의 죽음이 상징하는 슬픔의 이미지나 허무의 관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주로 죽음과 외로움, 그리고 서러움을 긍정적 인식의 시어들로 환치(換置)함으로써 성취된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유의하며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의 머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심상이나 시어들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새롭게 인간의 망연한 죽음을 형상화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성격 : 의지적, 찬미적, 상징적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청각적 심상
▶운율 : 각운
▶특징 : ① 전 연에 걸쳐 죽음과 생명의 역설적 표현을 통해 삶에의 강렬한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② 전반부 2연(죽음의 세계)과 후반부 2연(삶의 세계)이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③ 음성 상징어의 사용 및 규칙적인 강약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구성 : ① 기 : 시적 공간(묘지)의 묘사(제1연)
② 승 : 영원한 생명을 얻은 주검(제2연)
③ 전 : 죽음이 삶보다 행복하다는 역설(제3연)
④ 결 : 자연과 행복하게 어우러진 주검(제4연)
▶제재 : 묘지
▶주제 : 영원한 생명에의 의지와 주검에 대한 희망적인 찬양. (죽음과 허무의 극복 의지)
<연구 문제>
1. 제4연의 의성어가 주는 정서적 효과를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맷새의 울음 소리는 독자들에게 죽음의 인식을, 어둡고 불안한 것에서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주로 청각적 심상을 통해 성취되는데, 영원한 자연의 생명력과 신생(新生)의 이미지를 추구한다.
2. 이 작품은 첫 연부터 마지막 연까지 점점 그 길이가 길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거둘 수 있는 시적 효과를 2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시의 리듬이란 음악적 효과를 거두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시적 의미의 흐름을 돕고 강화시키는 데도 필요하다. 마지막 4연은 앞 연의 반복을 넘어 길어진 형태를 취하는데, 이는 자신이 믿는 시적 진실과 정서가 확신적이고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는 형태라 볼 수 있다. 정서적인 내용을 심화하고 감정을 상승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정서를 환기시키도록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3. ㉠은 매우 논리적이면서도 역설적이다. 그 까닭을 100자 내외로 설명하라.
☞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죽음이 더 편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관념으로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이 이 시에서는 완전히 전도되어 있으므로 역설적이다.
< 감상의 길잡이 1 >
일반적으로, 묘지라면 음산하고 무섭고 허망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통념을 뒤집어, 묘지를 밝고 환하게 빛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주검에 대한 찬미가 이 시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검에 대한 찬미가 어디서 연유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주검에 대한 찬미라면 자칫 삶의 포기를 뜻할 수도 있어, 궁극적으로 염세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시에 있어서의 주검의 찬미는 삶의 포기나 체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삶의 폭 넓은 긍정,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제1연은 공동 묘지의 묘사이다. 무덤을 덮은 잔디를 금잔디로 미화함으로써 묘지의 음산하고 외진 느낌을 제거하고 있다.
제2연에서는 어두운 무덤 속에서 하얀 백골이 빛나고, 향기로운 시체의 냄새도 풍기리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 함축되어 있다. 삶이 뜻 있었으므로 ‘하이얀 촉루’가 빛나고, 삶이 값졌으므로 ‘향기로운 주검’의 내가 풍긴다는 뜻이 되겠다.
제3연에서는 이 시인의 생사관이 드러나 있다. 여기 나오는 ‘주검’의 주인공은 살아서 서럽게 살다 간 사람으로 되어 있다. 살아서 서럽게 살았으니 죽어서인들 무엇이 서럽겠느냐는 뜻이지만, ‘서럽게 사는 것이’ 반드시 값어치 없는 삶은 아니라는 데 이 구절의 맛이 있다. 여기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은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종교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의 두 뜻을 함께 지닌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부활을 뜻하며,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세상의 도래를 뜻한다.
제4연은 이 시의 주제가 되는 연이다. 금잔디 사이에 할미꽃이 피었고 맷새도 우는, 봄볕이 포근한 무덤이 더 없이 따뜻하고 정겹게 그려져 있다. 거기 누워 있는 주검들은 차라리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의 의성어의 효과적인 활용은 주검에 생명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 감상의 길잡이 2 >
<묘지송>은 <향현(香峴)>과 더불어 정지용에게 추천된 작품으로 당시 문단에서는 경이로움과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묘지’에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 통념을 뒤엎었을 뿐 아니라, ‘죽음’을 ‘부활’의 높은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박두진의 탁월한 시작 능력이 발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은 대개 비애감․공포감․허무감 등을 주조로 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정반대의 시각으로 시인의 종교적 신념을 통해 부활의 이미지로서 형상화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생의 종착점이 아닌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는 영생지(永生地)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죽음은 결코 두려움이나 무상감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밝고 환하고 빛나는 곳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삶의 폭넓은 긍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주검에 대한 찬미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멧새의 의성음(擬聲音)으로써 전체의 분위기를 밝고 활기찬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산문 율조 또한 이 시의 건강한 호흡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1연은 시적 공간인 공동 묘지의 묘사 부분으로, 무덤의 잔디를 금잔디로 미화함으로써 묘지의 일반적 느낌을 제거시키고 있다.
2연에서는 무덤 속의 촉루와 주검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촉루와 주검을 ‘하이얀 촉루’와 ‘향기로운 주검’으로 표현함으로써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강렬한 긍정적 인식을 엿보게 한다.
3연은 시인의 생사관이 드러난 부분으로, 살았을 때 서러웠던 삶이니 죽어서 서러울 것이 없고, 오직 무덤 속을 환하게 비출 태양만이 그리울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러운 삶이 끝났기에 오히려 슬프지 않다.’는 역설이 진실로 받아 들여지는 것은 일제 치하의 암흑기를 살던 당시 우리 민족의 힘겨운 생존과 무관하지 않으며, 주검이 태양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은 시인이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보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무덤 속을 비출 태양’은 현실적으로는 자유의 태양, 즉 보다 나은 세상의 도래를 뜻하고, 종교적으로는 영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신생(新生)의 갈망’으로 대표되는 시인의 미래 지향적 초극의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4연은 주제연으로 봄날의 무덤의 모습을 더할 수 없이 따뜻하고 정겨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주검들이 오히려 행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의 의성어의 효과적 활용은 주검에 생명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 감상의 길잡이 3 >
이 시의 문체와 표현의 특징으로 시각적인 안식감과 화려함이 시의 초반부에서 죽음을 미화하다가, 끝 연에서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동원한 입체적 감각 속에서 죽음의 미화를 마무리하고 있는 기법이 특이하다.
이 시는 구조면에서 제 1연과 4연이 무덤의 외부를 묘사하고, 제2연과 3연이 무덤의 내부를 묘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제 1연과 제 4연의 무덤의 외부 묘사에서는 인간의 주검이 영원한 자연의 품에 일체화되고 포용되어 자연의 일부로 재생하여 있는, 그러한 ‘밝음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제2연과 3연의 무덤의 내부 묘사는 그처럼 자연에 동화되어 있으면서도 의지적인 희망과 확신을 지닌(어떤 이의 설명에 의하면 구약적인 메시아를 기다리는 재림에의 갈망을 지닌) 그러한 ‘어둠의 세계’이다.
박두진은 기독교적인 이상과 윤리 의식을 바탕으로 시를 지었다. 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 죽음은 생의 종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죽음을 이해할 때, 자연은 이러한 섭리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은 곧 자연이 되는 것이다. 고래로 자연은 인간에게 외경의 대상이었다. 자연의 영원한 순환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생의 근거를 얻고자 하였다. 이 시의 생사관은 바로 그러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묘지송」과 「해」와의 관계 : 「묘지송」의 제작 연대는 1939년, 「해」의 제작 연대는 1945년, 시대적으로 볼 때, 「묘지송」은 일제 말기의 암담한 수난기를, 「해」는 그 수난에서 풀려 난 뒤의 벅찬 변혁기를 대표한다.
그만큼 「묘지송」이 모든 시대적 수난과 고초와 절망을 보다 더 내적이고 초시간적이고 종교적인 전체 우주적인 질서와 그 섭리에서 불멸의 생명 의욕으로써 이를 초극하려 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해」는 그러한 어둠, 죽음, 어떤 종말에서 풀려 나와 새로운 비약, 모든 것의 모두의 바램, 현실적이며 지상적이며 현세적인 모든 것의 모두의 벅찬 기대와 희망, 그 확실성에 대한 신념이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의 영원, 완벽한 이념이고자 활개치고 그리고 그 이미지를 보다 더 유연하고 힘찬 가락으로 형상화하려 하고 있다. 보다 외적 지향적인 시적 자세가 오래 벅차있던 내적, 정신적, 체질적인 전통적 가락과 진취적 이상 같은 것으로 나대로는 하나의 절대 영원의 이상 세계를 현실--초현실의 원융․무애․궁극․절대적인 세계와 같은 것으로 일원화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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