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골라 것거
by 송화은율묏버들 골라 것거
산에 있는 버들가지를 골라 꺾어 보내오니 임에게
주무시는 방의 창가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
(행여) 밤비에 새 잎이라도 나면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
요점 정리
지은이 : 홍랑(紅娘, 연대 미상)
갈래 : 평시조
성격 : 감상적, 애상적, 여성적
표현 : 상징법, 도치법
제재 : 묏버들
주제 : 임에게 보내는 사랑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산에 있는 버들가지[시적 화자의 분신 / 임에 대한 사랑]를 골라 꺾어 보내오니 임에게[도치법]
주무시는 방의 창가[임이 계신 곳]에 심어 두고 보시옵소서.[임 곁에 심어 둠. / 항상 임 곁에 있고 싶은 심정]
(행여) 밤비에 새 잎[청순한 이미지(화자 연상)]이라도 나면 (마치) 나를 본 것처럼 여기소서.[나를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 / 연모의 정]
이해와 감상
홍랑(紅娘, 연대 미상) 조선 선조 때의 함경도 경성(鏡城) 기생으로 시조 1수가 전하고, 삼당시인(三唐詩人) 최경창(崔慶昌)과 정이 깊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는 님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는 시조로, 초장(初章) 후반부에 도치법을 써서 산(山) 버들을 보내는 뜻이 강조되어 있으며, 비에 젖은 촉촉한 가지에 파릇파릇 움터 나오는 새 잎을 통해 시각적으로 청순 가련(淸純可憐)하고 섬세한 여인의 이미지가 풍긴다.
이 시조의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 6년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북해 평사(北海評事)로 경성(鏡城)에 가 있을 때 친해진 홍랑이, 이듬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영흥(永興)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러 저문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 노래와 버들가지를 함께 보냈다 한다.
심화 자료
홍랑(洪娘)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기생. 홍원 출생. 1573년(선조 6) 가을에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던 최경창(崔慶昌)이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에 갔을 때, 그녀도 따라가 그 막중(幕中)에 있었다.
이듬해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7주야 만에 상경하였다. 그 때 양계(兩界 : 평안도·함경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관직이 면직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시조와 최경창의 한역가가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택절양류기천리 인위시향정전종 수지일야생신섭
≪참고문헌≫ 國文學全史(李秉岐·白鐵, 新丘文化社, 195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경창(崔慶昌)
1539(중종 34)∼1583(선조 16).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 전라도 영암 출생. 충(食)의 18대손이며 자(滋)의 13대손이다. 수인(守仁)의 아들이다. 박순(朴淳)의 문하인이다.
최경창은 백광훈(白光勳)·이후백(李後白)과 함께 양응정(梁應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55년(명종 10) 17세 때에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있다. 1561년 23세 때부터 상상(上庠)에서 수학하였다.
1568년(선조 1)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예조·병조의 원외랑(員外郎)을 거쳐 1575년에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76년 영광군수로 좌천되었다. 이 때에 뜻밖의 외직 발령에 충격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에 가난에 시달렸다. 다음해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최경창은 1582년 53세에 선조가 종성부사(鍾城府使)로 특수(特授)하였다. 그러나 북평사의 무고한 참소가 있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갑작스러운 승진을 문제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성균관직강으로 명을 고쳤다. 최경창은 상경 도중에 종성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최립(崔凌) 등과 무이동(武夷洞)에서 수창(酬唱 ; 시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부름)하였다. 또한 정철(鄭澈)·서익(徐益)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였다.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이·송익필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서화에도 뛰어났다. 숙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 ≪고죽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孤竹崔慶昌論(崔明煥, 東岳語文論集 17, 1983), 崔慶昌의 詩世界와 삶의 安定性에 대한 懷疑(安炳鶴, 泰東古典硏究 2,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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