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 페이터
by 송화은율모나리자 / 페이터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으로서 그의 사상과 예술 양식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가 된다. 상징성에 있어서 이 작품과 비교될 만한 것으로는 듀러의 작품 '우울'이 있을 뿐이다. 거친 상징이 조용하고 우아한 신비의 효과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다. 환상적인 바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원형 극장의 모양이 있고, 마치 바닷속의 엷은 광선 속에서처럼 그 안에 놓인 대리석 의자 곁에 서 있는 아름다운 자태의 얼굴과 손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든 옛 걸작품 중에서 이 작품만이 세월이 흐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이리라.
창작이 그 절정에 달한 것같이 보이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작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에 부여된 어떤 요인이 있다. 한때 바자리의 소유물이었던 반절판의 소묘화 중에 베로키오의 스케치가 있었는데, 이것이 퍽 인상적인 초상화였기에 레오나르도는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이것을 모방하였다. 레오나르도의 모든 작품에 담겨 있는 것, 그리고 뭔가 불길한 징조가 들어 있는 뜻모를 미소를 연장한 옛 스승의 그림과 근원적인 기준으로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그림은 초상화이다. 그의 어릴 때부터의 이 영상이 그의 꿈속에 들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역사적인 증명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드디어는 형상화되어 표현된 그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실제 생존하던 플로렌스의 어느 여인과 그의 마음 속에 그리던 인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떤 신비스러운 친화력에 의하여 이상의 여인과 실제의 여인이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까이 함께 자랄 수 있었는가? 그 여인은 처음부터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에 무형의 상태로 자라하고 있다가 베로키오의 그림에서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게 되었고 드디어는 라 지오콘다의 집에서 그 완전한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이 그림이 대부분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광대와 플루트 연주가들을 등장시키는 인위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흐르도록 만들었다는 전설도 증명된다. 그러면 이 영상은 실로 끊일 줄 모르는 재기의 노력으로 4년에 걸쳐 완성된 것인가, 아니면 마력의 일필로 4개월 만에 완성된 것인가?
기묘하게도 물가에 드러낸 이 자태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원해 온 것을 보이고 있다. 그녀의 머리는 그 위에 '세상의 모든 종말이 다가온' 듯한 머리이며 눈꺼풀은 다소 피곤해 보인다. 이 여인은 내면으로부터, 신기한 사상과 환상적인 공상과 세밀한 정열이 세포마다 조금씩 축적되어 살로 만들어진 미인이다. 잠시 이 여인을 결백한 어느 그리스 여인이나 옛 미녀와 나란히 세워 본다면, 모든 고뇌를 안은 영혼이 그 속에 스며든 이 미녀에 의하여 그들은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게 될까? 세상의 모든 사상과 경험이 외형을 순화시키고 표현성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는 한, 이 그림에는 그리스의 동물성, 로마의 음탕성, 영적 야망과 상상적 애정을 겸비한 중세의 신비성, 중세기 말경의 이교도의 재현, 그리고 보지아 가문의 죄악들이 부각되어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앉아 있는 주변의 바위보다도 더 노련하다. 그녀는 중세 신화에 나오는 흡혈귀처럼 수많은 죽음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무덤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깊디깊은 바다의 잠수부였으므로 심해의 암영을 잊지 않고 있다. 그녀는 진귀한 비단을 얻기 위해 동방의 상인들과 거래했고 리다처럼 트로이의 헬렌의 어머니도 되었었고 성(聖) 안느처럼 마리아의 어머니도 되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체험이 그녀에게는 한낱 하프와 플루트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변화하는 용모도 만들어지는 섬세함 속에 살아 있으면서 눈꺼풀과 손을 물들였다.
온갖 경험을 함께 끌어 모으면 영원한 생명체가 된다는 상상은 오래된 생각이다. 그리고 현대 철학은 인간이란 모든 양식의 사상과 생명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 자체 속에서 종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확실히 모나리자야말로 오래 쌓이고 쌓인 공상의 구상체요, 현대 철학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요점 정리
지은이 : 월터 페이터(W.Pater)/ 민동선 옮김
갈래 : 수필
성격 : 심미적, 주관적, 분석적
주제 : '모나리자'의 영원한 아름다움
특징 : 작가의 유미주의(唯美主義)적 예술 태도가 돋보이고, 분석을 통해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을 설명함.
내용 연구
(가)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걸작으로서 그의 사상과 예술 양식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본보기가 된다. 상징성에 있어서 이 작품과 비교될 만한 것으로는 듀러의 작품 '우울'이 있을 뿐이다. 거친 상징이 조용하고 우아한 신비의 효과를 어지럽히는 일도 없다. 환상적인 바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원형 극장의 모양이 있고, 마치 바닷속의 엷은 광선 속에서처럼 그 안에 놓인 대리석 의자 곁에 서 있는 아름다운 자태의 얼굴과 손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든 옛 걸작품 중에서 이 작품만이 세월이 흐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작품이리라.
(나) 창작이 그 절정에 달한 것같이 보이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작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어떤 요인이 있다. 한때 바자리의 소유물이었던 반절판의 소묘화 중에 베로키오의 스케치가 있었는데, 이것이 퍽 인상적인 초상화였기에 레오나르도는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이것을 모방하였다. 레오나르도의 모든 작품에 담겨 있는 것, 그리고 뭔가 불길한 징조가 들어 있는 뜻모를 미소를 연장한 옛 스승의 그림과 근원적인 기준으로 연관짓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그림은 초상화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증명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드디어는 형상화되어 표현된 그의 이상적인 여인상이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내용 전개
(가) '모나리자'의 예술적인 우수성
(나) '모나리자'의 제작 배경 - 스승 바자리의 영향
걸작(傑作) : 매우 훌륭한 작품
원형 극장(圓形劇場)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극장 형식. 관람석을 원형의 계단식으로 한 것
바자리(G.Vasari) : 16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겸 조각가
소묘(素描) : 단색, 특히 흑색의 선이나 점으로 대상물의 형상만을 그린 그림. 데생(dessin)
베로키오(A. Verrocchio) : 15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겸 조각가.
징조(徵兆) : 미리 보이는 조짐.
이해와 감상
이 지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예술적 우수성과 그것의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페이터는 치밀한 분석과 예술적 감각에 의해 모나리자의 미적 탁월함을 설명하고 있다. 페이터는 '상징', '우아한 신비의 효과', '아름다운 용모' 등을 이 작품의 뛰어난 요소로 보고, 이 작품을 '걸작'으로 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계속하여 페이터는 '모나리자'의 창작 배경을 설명한다. 그는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예술적 감상과 더불어 그의 전기적(傳記的)요소가 혼합되어 탄생된 것이라고 말한다. 페이터는 다 빈치가 스승의 그림에서 받았던 어린 시절의 예술적 영감이 그의 꿈 속에 남아 있다가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마침내 '모나리자'라는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꽃피우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가) 실제 생존하던 플로렌스의 어느 여인과 그의 마음 속에 그리던 인물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떤 신비스러운 친화력에 의하여 이상의 여인과 실제의 연인이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서도 가까이 함께 자랄 수 있었는가? 그 여인은 처음부터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에 무형의 상태로 자리하고 있다가 베로키오의 그림에서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내게 되었고 드디어는 라지오콘다의 집에서 그 완전한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이 그림의 대부분 초상화 기법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은 광대와 플루트 연주가들을 등장시키는 인위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흐르도록 만들었다는 전설도 증명된다. 그러면 이 영상은 실로 끊일 줄 모르는 재기의 노력으로 4년에 걸쳐 완성된 것인가, 아니면 마력의 일필로 4개월 만에 완성된 것인가?
(나) 기묘하게도 물가에 드러낸 이 자태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원해온 것을 보이고 있다. 그녀의 머리는 그 위에 '세상의 모든 종말이 다가온'듯한 머리이며 눈꺼풀은 다소 피곤해 보인다. 이 여인은 내면으로부터, 신기한 사상과 환상적인 공상과 세밀한 정열이 세포마다 조금씩 축적되어 살로 만들어진 미인이다. 잠시 이 여인을 결백한 어느 그리스 여인이나 옛 미녀와 나란히 세워 본다면, 모든 고뇌를 안은 영혼이 그 속에 스며든 이 미녀에 의하여 그들은 얼마만큼의 고통을 받게 될까? 세상의 모든 사상과 경험이 외형을 순화시키고 표현성을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는 한, 이 그림에는 그리스의 동물성, 로마의 음탕성, 영적 야망과상상적 애정을 겸비한 중세의 신비성, 중세기 말경의 이교도의 재현, 그리고 보지아 가문의 죄악들이 부각되어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앉아 있는 주변의 바위보다도 더 노련하다. 그녀는 중세 신화에 나오는 흡혈귀처럼 수많은 죽음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무덤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깊디깊은 바다의 잠수부였으므로 심해의 암영을 잊지 않고 있다. 그녀는 진귀한 비단을 얻기 위해 동방의 상인들과 거래했고 리다처럼 트로이의 헬렌의 어머니도 되었었고 성(聖) 안느처럼 마리아의 어머니도 되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체험이 그녀에게는 한낱 하프와 플루트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변화하는 용모로 만들어지는 섬세함 속에 살아있으면서 눈꺼풀과 손을 물들였다.
(다) 온갖 경험을 함께 끌어 모으면 영원한 생명체가 된다는 상상은 오래된 생각이다. 그리고 현대 철학은 인간이란 모든 양식의 사상과 생명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 자체 속에서 종합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확실히 모나리자야말로 오래 쌓이고 쌓인 공상의 구상체요, 현대 철학의 상징이 아니겠는가.
내용 전개
(가) '모나리자'의 제작 배경-이상의 여인과 실제 여인의 결합
(나) '모나리자'의 형상과 그 아름다움-다양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의 조화물
(다) '모나리자'의 영원한 아름다움 강조(결론)
순화(純化) : 불순한 것을 덜어 버림. 순수하게 함.
음탕(淫蕩) : 주색(酒色)에 빠져 방탕함.
이교도(異敎徒) :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간 교회를 믿고 받드는 교도.
보지아 가문 : 르네상스 시절의 이탈리아에 있었던 집안으로 갖가지 추문을 일으키는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음.
암영(暗影) : 어두운 그림자. 어떤 일의 성사에 지장을 주거나 방해가 될 징조.
리다 : 그리스 신화에서 스파르타의 왕인 틴다리우스의 아내
트로이의 헬렌 : 리다와 제우스(백조의 형태로 리다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강간함)가 결합해서 태어남. (예이츠의 시 '레다와 백조' 참조)
구상체(具象體) : 실제로 있거나 또는 그렇게 상상될 수 있는 사물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을 치밀한 분석력과 예술적인 미감(美感)에 의해 서술 하고 있는 수필이다. 페이터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사상과 예술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페이터는 '모나리자'로부터 몇 가지 상징적 요소들을 끌어내어 자신의 박식한 예술사적 안목으로 그 요소들의 미적 가치들을 파악한다.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 시절의 전기적 사실뿐만 아니라 '모나리자'의 사회,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세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이 작품에는 작가의 '유미주의'(唯美主義)적 태도가 잘 나타난다.
이 지문에는 모나리자의 창작 배경과 그것의 형상화 과정, 특징에 대한 설명이 연이어 나온다. 페이터는 '모나리자'가 다 빈치의 머리 속에 있었던 이상적 여인상의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마침내 '미묘한 표정', 즉 신비로운 미소를 띤 여성으로 구체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모나리자'는 이상적 인물과 개성적 인물의 조화 있는 균형이 그 특징이고, 그녀의 미소 역시 순간적인 기분의 반영과, 시간을 초월한 상징적 표현이라는 평을 받는다. 또한 '모나리자'는 분명히 다 빈치에게 여성의 본질이었던 모성적인 상냥함을 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페이터는 이탈리아 여성상의 변모 과정을 서술하면서, 그 모든 여성상이 '모나리자'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페이터의 세밀한 통찰은 '모나리자', 더 나아가 하나의 훌륭한 예술 작품의 영원함을 강조하며 끝을 맺는다.
영국 수필의 전통
17세기는 18세기의 전통적 에세이로 이어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산문의 제재가 극도로 확산되어, 그 장르는 전례없이 확대되었다. 18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저널리즘의 대두는 에세이를 크게 자극하였다. 18세기는 '이해와 계몽'의 시대였으므로 이 당시에 시작된 신문 연재 에세이들은 영국 특유의 에세이 문학을 이루는 하나의 원천이 되었다. 이 당시 베이컨에서 시작한 영국의 에세이는 19세기 찰스 램, 코울리지 등에 의하여 한 전통이 세워진다. 오늘날, '개성적', '일상적', '비형식적'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에세이들은 이들에 의해 완성된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들어 와서 영국의 에세이는 비평적인 것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수필가로는 월터 페이터, 아놀드 등이 있다. 그 뒤를 이어 '3인의 에세이스트'로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가디너, 밀른, 린드가 나란히 등장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신문 잡지의 편집을 맡거나, 고정 에세이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였으며, 모든 세상사를 수필의 소재로 삼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 피렌체 공화국 빈치~1519. 5. 2 프랑스 클루.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로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자 지주였던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엠폴리 근처의 빈치에 있는 부친의 가족 소유지에서 1452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카테리나는 젊은 시골 여인으로, 출산 후 곧 그 지역 출신의 공예가와 결혼했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적자 대우를 받으며 그당시의 초등교육에 속했던 읽기·쓰기·산수를 배우며 자랐다. 정통 학문의 주요 언어였던 라틴어는 훨씬 나중에야 본격적으로 공부했으며 30세가 되자 비록 초보단계에 머물렀지만 고급 기하학과 수학이론에 전념했다.
15세 때 레오나르도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도제가 되어 그의 공방에서 회화와 조각 및 여러 가지 회화 기법 등 다방면의 훈련을 받았고, 이웃해 있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의 공방에서도 일하면서 처음으로 해부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472년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화가 길드에 받아들여졌으나 5년을 더 스승의 공방에 머물렀다. 그의 뛰어난 회화적 기량은 베로키오가 그린 〈그리스도의 세례 Baptism of Christ〉(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와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제작된 2점의 〈수태고지 Annunciation〉(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에 그가 그린 천사와 풍경에서 부분적으로 이미 드러나며, 그의 초기작 〈카네이션을 든 성모 Madonna with the Carnation〉·〈브누아의 성모 Madonna Benois〉·〈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Portrait of Ginevra de' Benci〉에서도 나타난다. 이같은 재능은 미완성으로 남은 2점의 그림 〈성 히에로니무스 St. Jerome〉와 〈동방박사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Magi〉에서 절정을 이룬다.
천재성의 발현, 첫번째 밀라노 시절(1482~99)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났다. 그가 피렌체를 떠난 이유는 메디치가(家)가 통치하던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풍조가 경험지향적인 그의 정신과 상반되고 좀더 현실적이고 학구적인 밀라노의 분위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화려한 대저택과 그곳에서 맡게 된 일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밀라노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대공의 전속 화가이자 토목기사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로 또 궁정 연회의 기획자로서 활동했다. 또한 토목 건축 및 군사 문제의 기술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수력과 기계에 관한 공학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지낸 17년간 단지 6점의 회화작품만을 남겼다.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족제비털을 두른 여인 Lady with an Ermine〉을 비롯해 〈악사 Musician〉, 제단화로 그린 2점의 〈암굴의 성모 The Virgin of the Rocks〉,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 Supper〉(1495~97), 밀라노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에 있는 살라 델레 아세의 천장을 장식한 그림(1498)이 그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초청된 진짜 이유로 추측되는 대규모의 조각기획은 스포르차 가문을 세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해 거대한 청동기마상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중도에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으나 이 일에 12년을 바쳤고 이것을 위한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그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 20세기 중엽에야 마드리드에서 발견된 레오나르도의 노트 2권인데, 이를 통해 그의 구상이 얼마나 장엄하고 비현실적이리만치 대담한가를 알 수 있다. 1493년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할 때에 말의 점토원형이 공개되었는데, 높이가 5m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박한 전쟁의 위험 때문에 주조용 금속이 대포를 만드는 데 대신 사용되어 그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고, 루도비코가 1499년 권좌에서 내려옴으로써 15세기의 가장 큰 기념비적 사업이었던 이 기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또 점토원형은 전쟁의 참화로 파괴되고 말았다.
거장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커다란 공방을 가지고 견습공들과 제자들을 키웠다. 그들의 활동은 레오나르도의 위작 여부에 관한 논란을 초래하게 되었는데, 〈이마에 아름다운 장식을 두른 여인 La Belle Ferronniere〉(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루크레치아 크리벨리 Lucrezia Crivelli〉(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소장)·〈리타의 성모 Madonna Litta〉(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슈 미술관 소장) 등을 비롯한 작품들의 제작에 그들이 참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레오나르도의 제자 가운데는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 베르나르디노 데 콘티, 프란체스코 나폴레라노, 안드레아 솔라리, 마르코 도조노, 살라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해둘 필요를 느꼈다. 이는 당시에 나왔거나 구해볼 수 있었던 몇몇 예술 논문들에서 자극받은 것이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이 1485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건축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Architecture〉은 필사본으로 나왔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사본을 저자로부터 직접 선물받았다. 또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회화에서의 원근법에 관하여 De prospectiva pingendi〉는 원근법이론에 관한 모범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와 아는 사이였던 수학자 루카스 파치올리는 1494년 〈산술집성 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 ita〉 이어 〈신성한 비례 Divina proportione〉를 출판했는데, 거기에 레오나르도는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삽화로 그려넣었다.
이런 환경에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예술이론을 글로 옮기고 싶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으며, '회화학' (science of painting)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떠올렸다.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원근법과 비례법에 대한 그들의 분석에서 이미 회화의 수학적인 토대를 입증하여 학문으로서의 회화 개념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주장은 훨씬 더 진전된 것으로서 '보는 것'과 '인지하는 것'을 동일시하여 대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화가는 관찰을 통해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다시 확실하게 그림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질을 부여받은 최고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1490~95년 레오나르도의 거대한 집필계획은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필생의 중요한 4가지 주제가 포함되었는데, 회화에 관한 논문, 건축에 관한 논문, 기계학의 원리에 관한 글, 인체 해부에 관한 개요가 그것이다. 그밖에도 지구물리학·식물학·수리학·기상학에 관한 연구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레오나르도가 어렴풋이 생각해낸 '눈에 보이는 우주론'(visible cosmology)의 일부를 이룬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에서 직접 보고 터득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받아들여 기록했다. 이 모든 연구와 스케치는 수천 장에 이르는 노트와 낱장의 종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어떤 화가가 남긴 것보다도 분량이 가장 많은 문학적 유산으로 옛 문헌에 언급된 40편 남짓한 사본들 가운데 21편이 남아 있으며, 이중에는 원래 분리되어 있던 것이 합본된 노트와 함께 모두 31편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처음 이러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낱장의 종이나 허리띠에 찬 조그만 스케치북에 관찰한 것들을 재빨리 스케치한 뒤 그것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순서대로 노트에 끼웠다. 이당시에 작성된 노트 가운데에는 회화론을 위한 첫 자료집(MSS. A와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종교적인 건축과 범속한 건축의 전형적인 스케치 모음집(MS.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기계학 기초이론서(MS. 8937,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인체에 관한 논문의 첫번째 부분(해부학 MS. B, 윈저 성의 왕실도서관 소장)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특히 거울에 비치는 상(像)처럼 글씨를 뒤집어 쓴 것과 글자와 그림의 관계에 있어서 독특하다. 왼손잡이였던 레오나르도가 글씨를 반대로 쓴 것은 그로서는 쉽고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은밀하게 남기려는 필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글은 거울에 비춰보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때때로 그가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쓴 예로 보아(제3자에게 건네줄 편지나 메모 또는 논평의 초안들), 그는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쓰는 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모 가운데 대부분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씌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글로 쓴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결국 이 글들은 출판을 위한 예비단계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노트의 또다른 특색은 도해와 본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다. 레오나르도는 명확하고 표현이 풍부한 말을 쓰는 데 열심이었으나, 교수법에서는 글보다 도해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했다. 그는 스스로 ' 실물교수'(dimo-strazione)라 부른 실물묘사법에서 현대 과학적 도해의 선구자였다.
이렇게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2가지 '활동영역'이었던 예술과 과학은 훗날 그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 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고무시키고 또 자극하는 일종의 '창조적 이원론'이었다.
2번째 피렌체 시절(1500~06)
프랑스인들이 밀라노에 입성한 지 3개월 후인 1499년 12월에서 늦어도 1500년 1월 사이에 레오나르도는 루카스 파치올리와 함께 밀라노를 떠났다. 맨 처음 만토바에 머물렀고, 그를 맞아들인 마르키오네스 이사벨라 에스테의 초상화를 그곳에서 1500년 2월 그렸다. 그후 3월에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 의회로부터 위협적인 터키의 프리올리 침공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의뢰받고 위협을 받는 지역에 물이 범람하게 하라고 조언했다. 베네치아에서 오랫만에 피렌체로 귀향하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를 맞았으며 명망높은 동향인으로 존경했다. 바로 그해에 그는 산프란체스코 알몬테 교회의 기반과 골조의 손상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건축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산타아눈치아타 수도원에서 세르비테 수도회의 손님으로 머물면서 〈성모자와 성 안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한 1501년에 〈실타래를 든 성모 Madonna with the Yarn-Winder〉를 그렸는데, 현재는 모작만이 남아 있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듬해(1502) 여름 그가 피렌체를 떠나 '군사 건축 및 기술 전반 고문'으로 체사레 보르자를 위해 일하기로 한 것은 오직 그의 무한한 '삶에 대한 욕구'로 볼 수 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악명높은 아들인 보르자는 교황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교황령의 영토를 무모하게 많이 확장하려 했다. 당시 27세였던 그는 그 시대에서 가장 위압적이고 가공할 만한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보다 2배나 나이가 많았지만 그의 개성에 끌렸을 것이다. 그 밑에서 일하는 동안 레오나르도는 현대 지도작성법의 기초를 닦은 도시계획도와 지형도 여러 점을 남겼다. 체사레 보르자의 대저택에서 레오나르도는 당시 피렌체의 정치고문으로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기도 했다.
1503년 봄에 그는 피렌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피사가 바다를 접하지 못하도록 그 도시 뒤로 흐르는 아르노 강의 물줄기를 돌리려는 계획안의 전문위원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13세기에 처음 구상되었던 이 계획은 배가 다닐 수 없는 아르노 강의 지류를 피해 피렌체에서 물길을 따라 바다와 연결되는 거대한 운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이 계획을 위해 예술적으로 뛰어난 풍경 스케치이기도 한 강둑의 개관도를 그렸으며 그 지형을 정확히 측정하여 뱃길이 나타나 있는 지도를 만들었다. 그 계획은 몇 세기에 걸쳐 고려되었으나 결코 실현되지 못하다가 수세기가 지난 후 그가 지도에 그린 뱃길을 그대로 따라 피렌체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같은 해(1503)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베키오 궁에 있는 '500 홀'에 벽화를 그리는 엄청난 주문을 받았다. 그것은 가로 17m에 세로 7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역사적 장면으로 〈최후의 만찬〉보다 2배나 더 컸을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이 〈앙기아리 전투 Battle of Anghiari〉에 매달렸는데, 훗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 전투 Battle of Cascina〉와 같이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무렵 〈모나 리자 Mona Lisa〉와 서 있는 〈레다 Leda〉도 그렸는데, 〈레다〉는 미완성인 채 모작들로만 남아 있다. 피렌체에 머문 이 시기는 집중적인 과학 연구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산타마리아 누오바 병원에서 인체를 해부했으며, 그 실험을 신체기관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폭넓은 연구로 발전시켰다. 또한 새들의 비행을 조직적으로 관찰했고, '물의 성질과 움직임'에 대한 그의 수리학적인 연구는 물의 물리적인 특성, 특히 기류법칙과 비교연구한 수류법칙에 관한 연구로 확장되기까지 했다.
2번째 밀라노 시절(1506~13)
프랑스 왕이 파견한 밀라노의 통치자 샤를 당부아즈가 1506년 5월에 피렌체 의회로부터 허락을 얻어 그는 잠시 밀라노로 가게 되나, 애초에 한정된 체류기간은 양국간의 정치적 긴장 상황 때문에 영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대작 〈앙기아리 전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물감에 대한 기법적인 실험에 실패하자 이 대작을 중단한 것 같다. 그는 1507~08년의 겨울을 피렌체에서 지낸 것 외에는 밀라노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그의 후원자인 샤를 당부아즈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으며, 연봉 400다카트 받고 일했는데 그 일이란 고작 건축일에 관한 조언이었다. 밀라노에서 그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그는 피렌체에서 가져온 〈성모자와 성 안나〉와 〈레다〉를 계속 그렸다. 그리고 주변에 다시 제자들을 불러들였는데, 옛 제자인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암굴의 성모〉 2번째 판(1508)을 그렸다. 그의 공방에는 옛 제자들 가운데 베르나르디노 데 콘티와 살라이가 다시 왔고, 새로운 학생으로는 체사레 다 세스토, 잠페트리노,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및 젊은 귀족 프란체스코 멜치가 들어왔다. 멜치는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가장 절친했던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이무렵 레오나르도는 조각을 해달라는 중요한 청탁을 받았다.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적수로 밀라노에 온 프랑스 군대의 원수 잔 자코모 트리불치오가 그에게 자신의 묘를 조각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이 기념 조각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준비작업을 한 결과 중요한 스케치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트리불치오가 그 계획을 포기해버리자 이 조각 계획 역시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이 일로 레오나르도는 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작업에 또 한번 크게 실망했을 것이 틀림없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예술 방면의 일에 비해 그의 과학 활동은 꽃을 피웠다. 해부학 연구는 파비아 출신의 유명한 해부학자 마르칸토니오 델라 테레와 함께 협력하여 새로운 차원을 이룩했다. 그는 인체와 그 기관의 정확하고 상세한 도해뿐 아니라 비교해부학과 생리학 전반에 걸친 작업 계획을 세웠다. 그밖에도 수학·광학·기계학·지리학·식물학 연구로 가득한 필사본을 제작했는데, 이는 〈지각의 우주론 perceptual cosmology〉을 위한 자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말년(1513~19)
1513년 프랑스인들이 밀라노에서 당분간 축출되는 정치적인 사건들로 인해 60세가 된 레오나르도는 또 이사를 해야 했다. 그해말 그는 새 교황 레오 10세의 형제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를 통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로마로 갔다. 줄리아노는 바티칸에 있는 그의 저택 벨베데레 궁의 방들을 그에게 주었고 월급도 많이 주었으나 큰 일은 맡기지 않았다. 3년 동안 레오나르도는 도나토 브라만테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짓고 라파엘로가 교황의 새 저택의 방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로마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묘를 완성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페루치, 티모테오 비티, 소도마 같은 젊은 화가들이 거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공방에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기술적인 실험을 하고 도시를 거닐며 고대 건물들을 살펴보곤 하는 등 낙담해서 나날을 보냈다. 그는 브라만테와 사귄 듯하나 브라만테는 1514년에 죽었고, 다른 예술가들과는 사귄 것 같지 않다. 그런 고독함 때문에 6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랑스로 갔던 것 같다. 1516년말 그는 가장 충실한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와 함께 이탈리아를 영원히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3년간을 루아르 강변의 앙부아즈에 있는 왕의 여름 궁전 근처 클루(후에 클로뤼세라 부름)의 작은 집에서 보냈다. 그는 '왕의 수석 화가·건축가·기술자'라는 자랑스런 칭호를 부여받았다. 이무렵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고 불가사의하며 신비스런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을 그린 것이 전부였다.
레오나르도는 그의 과학 연구를 분류하고 편집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또 회화에 관한 논문의 마지막 초고와 해부학에 관해서도 몇 장 썼다. 〈떠다니는 인물 Floating Figure〉(윈저 성 왕실도서관 소장)과 같은 마지막 소묘들은 소멸하지 않는 그의 천재성을 입증해준다. 〈세상의 종말 Visions of the End of the World〉이나 〈대홍수 Deluge〉(윈저 성 왕실도서관 소장) 같은 소묘에서 그는 엄청난 상상력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힘을 묘사했다.
151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는 클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생플로랑탱이라는 궁정교회에 안치되었으나 19세기초 그 교회가 완전히 철거되어 그의 무덤 또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작품과 과학적 유산은 프란체스코 멜치가 물려받았다.
레오나르도의 업적에 대한 분석과 평가
회화
레오나르도가 남긴 회화작품의 수는 실제로 많지 않다.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17점만이 그의 작품으로 확인되었으며 그것들 중 몇 점은 미완성이다. 그의 주요작품 〈앙기아리 전투〉와 〈레다〉는 둘 다 미완성인 채 모작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얼마 안 되는 작품만으로도 레오나르도는 유례없는 명성을 얻었는데, 바사리는 자신이 쓴 〈미술가 열전 Lives〉에서 미술사를 3시기로 나누면서 레오나르도를 마지막 '예술의 황금시대'에서 기술했다.
레오나르도가 추구했던 것은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1474경~75)에 그린 부분인 천사와 풍경의 일부분에 이미 나타나 있다. 여러 방향으로의 움직임에 기초해 자연스럽게 구조화한 천사의 몸과 이완된 자세 및 일어나는 일에 눈길을 주나 동시에 안으로 쏠리는 시선에서 그러하며, 풍경 부분에서는 '체험한 자연'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보여주었다. 1473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그린 습작풍경화(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는 그 투명한 대기의 처리에서 인지된 현상을 설득력 있는 회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브누아의 성모〉(1478)에서는 성모가 들고 있는 꽃에 사랑스럽게 손을 뻗치는 아기예수를 통해 전통적인 회화 형식에 새롭고 표현이 풍부하며 아주 매력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1475경~78)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독특하게 연결해 그리는 초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성 히에로니무스〉(1480경)에서 성인의 야윈 몸은 그의 진지하고 객관적인 해부학 연구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진리로 표현되었다.
많은 인물들이 포함된 그의 첫번째 대작 〈동방박사들의 경배〉(1481)는 완성되지는 못했으나 대가의 섬세한 작업방식을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그림에서 성모와 아기예수의 주된 처리와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차적인 처리는 거장다운 구성감으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갖가지 심오한 놀라움을 나타낸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첫번째 〈암굴의 성모〉는 레오나르도 회화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산프란체스코 교회 예배당을 위한 대작의 중앙 패널로 1483~85년경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림이 처음에 계획했던 장소에 놓이지 않게 되자 레오나르도는 제자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와 함께 같은 주제로 2번째 그림을 그렸다. 〈암굴의 성모〉는 어린 예수가 이집트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같은 또래의 요한과 광야에서 만난다는 경외서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그림의 신비스런 특성은 몽상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기법을 총동원했다. 그의 유명한 스푸마토에 의한 부드러운 색조, 어두컴컴한 동굴로부터 빛을 가득 받고 드러나는 인물들, 그들의 조용한 자태, 하느님의 아들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요한을 가리키는 천사의 의미있는 몸짓 등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잘 조합되어 최고의 표현 효과에 이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대가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레오나르도는 배신자 유다를 묘사하는 통상적인 전통적 표현을 따르지 않고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라는 신약의 구절과 관련된 고도로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이 그림은 주제의 심오한 개념에서 완벽하면서도 간단한 인물배치에서, 몸짓을 통해 강조된 사도들의 기질에서, 극적이면서 동시에 장엄한 화면처리에서, 같은 주제의 그림들의 모범이 되는 표현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수많은 후대 화가들과 문인들의 경탄을 자아낸 이 그림은 수많은 복제화와 인쇄물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복제판은 1800년에 라파엘로 모르겐이 출판한 것들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벽화를 위해 쉬지 않고 재빨리 그려야 하는 프레스코 기법 대신 돌 벽 위에 자신이 만든 바탕에다 템페라 화법을 썼다. 이 제작기법은 바탕이 곧 벽에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해 실패로 드러났다. 그러한 손상은 16세기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16세기 중엽에 이미 이 그림은 유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훗날 부적절한 복구작업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현대적인 복구작업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부식되었다.
1500~06년에 걸친 피렌체 시절에 레오나르도는 그의 명성을 더 높여준 대작에 착수했다. 〈성모자와 성 안나〉(루브르 박물관 소장)·〈모나 리자〉·〈앙기아리 전투〉·〈레다〉가 그것이다. 완성되기도 전에 피렌체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성모자와 성 안나〉는 인물들간의 유연성과 구성에서 역동감과 긴장감을 자아내는 계산된 효과로 인해 고전주의자들과 마니에리스모 화가들에게 모두 모범이 되었다. 〈모나 리자〉는 초상화의 이상형이 되었는데, 젊은 라파엘로가 작업중인 작품을 스케치하여 〈마달레나 도니의 초상 Portrait of Maddalena Doni〉을 위한 모델로 삼았다. 〈레다〉 역시 당시 많이 그려진 굴곡이 많은 인물상의 모델이 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주의 화가들뿐 아니라 자코포 폰토르모와 같은 마니에리스모 화가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앙기아리 전투〉(1503~06)는 레오나르도 미술의 최고봉에 이르렀다. 현재 대부분 보존되고 있는 습작 소묘들은 '회화학'에 나타난 그의 고상한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1507년 이후 밀라노·로마·프랑스에서 지내면서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밀라노에 있을 때는 〈레다〉의 주제를 다시 다루기 시작해 습작으로 〈무릎 꿇은 레다 Kneeling Leda〉를 그렸다. 그의 말년 양식을 보여주는 소묘들은 괴상하고 불가사의한 감성을 갖고 있다. 로마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프랑스에서 완성한 듯한 〈세례 요한〉에서는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요한을 신비한 신탁의 전달자로 묘사하면서 평범한 회화 전통의 한계를 초월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표현의 마지막 발로는 〈세상의 종말〉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세상의 종말을 주제로 한 일련의 스케치들이다. 여기서 레오나르도의 상상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우주 속의 영적인 힘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으며 움직이는 물체 속에 나타난다. 소용돌이치는 물과 공기, 암석의 형태, 식물의 성장 등 그가 관찰했던 것이 이제 구름이 되고 푹풍우가 되어 거대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세상의 틀이 산산조각나더라도 그 파괴조차도 자연의 모든 피조물의 생사를 주관하는 자체적인 질서·조화·균형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이는 '보는 법을 안다'는 그의 인지에 기초한 예술이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조각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회화론〉도입부에서 회화를 조각보다 우위에 두었으나 이 둘을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레오나르도가 전심전력으로 몰두한 2개의 거대한 조각계획은 불행하게도 성취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조각계획을 위해 그가 남긴 글과 소묘는 청동 주조기법에 대한 그의 폭넓은 경험을 알려주는 동시에 거의 비현실적인 조각계획의 본질을 밝혀준다. 그는 단 한번에 말을 주조해내길 원했으나 말의 거대한 크기는 기법상 불가능한 여러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이 두 조각을 위한 소묘 계획안들을 보면 레오나르도의 거대한 조각 개념을 알 수 있다. 소묘를 하기에 앞서 살아 있는 말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소묘들은 레오나르도의 예술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예가 되며, 개념에 있어서는 16세기 기마상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
레오나르도는 평생 건축일에 관여했으나 건축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고문의 역할에 그쳤다. 밀라노 대성당에 둥근 지붕을 세우기 위한 공모(1487~90)에서만 오직 한번 그는 실제로 건축일에 참여하려 했으나 그가 제출한 모형이 거절당하자 그 생각을 포기했다. 그밖에도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일반적 건물들의 스케치를 낳게 되는데, 어느 밀라노 귀족의 저택(1490경)을 비롯해 밀라노 주재 프랑스 총독 관사(1507~08), 피렌체의 메디치가 저택(1515), 프랑스 로모랑탱의 저택과 정원에 대한 설계도(1517~19)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연구를 진정 특징짓는 것은 건축에 대한 그의 폭넓은 이해에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연구를 전파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이며 건축에 관한 글들을 모아 건축론으로 집대성하길 원했다. 현재 프랑스 학술원에 MS. B로 분류·소장되어 있는 그의 〈건축론〉은 건축의 형태와 양식뿐 아니라 건축 전반에 걸쳐 다룬 것으로, 도시계획도와 같은 항목들과 종교적인 건축과 범속한 건축 및 둥근 천장, 계단, 창문 등의 중요한 세부 요소들에 대한 개요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건축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연구는 그 개념의 풍부함에서 그 시대 건축의 성과에 대한 폭넓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과학적 연구
회화학
레오나르도의 왕성한 과학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평생 자신을 예술가로서 자랑스럽게 여긴 한 인간의 이지적인 산물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회화론을 쓰는 데 몰두하면서 처음으로 과학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 읽혀지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회화 연구서는 그의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가 그의 여러 원고에서 선별·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멜치판(版) 논문집은 1651년 파리에서 라파엘로 뒤 프레스에 의해 호화 장정본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그러나 1817년에야 멜치판의 완성본이 처음 출간되었고, 2가지 표준 현대판으로는 1882년 에밀 루트비히가 3권으로 출간한 독일어 번역본과 1956년 프린스턴의 A. 필립 맥마흔이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주제를 훨씬 폭넓게 다루려 했다. 논문에는 회화와 소묘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설명 외에도 그가 깨닫고 체험한 모든 것이 다루어져 있다. 그것은 3가지 중요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데, 회화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의하는 것, 기하학·원근법·광학 등 회화의 수학적 기초이론 및 명암·색채·대기원근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보는 법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화가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기 위한 것으로 유기적·무기적 자연 형태들과 작용들에 관한 이론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회화론〉에 삽입된 소묘는 첫번째 밀라노 시절에 그린 것부터 말년에 프랑스에서 그린 것들까지 포함되며 주제가 점점 폭넓게 심화되어 있다. 본문의 옆에 많은 소묘들이 그려져 있는데, 유명한 비내리는 풍경(윈저 성 소장)이나 〈잎 Foliage〉(윈저 성 왕실도서관 소장)과 같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수많은 자연 탐구는 곧 〈회화론〉의 삽화이기도 하다. 〈회화론〉에는 그밖에도 명암대조표라든가 그의 유명한 기괴한 두상들이 실려 있는데, 이 두상들은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고상한 것과 천한 것 사이에 등급을 매긴 여러 가지 인물 유형이다. 신체와 그 비례 및 기관, 기능뿐 아니라 육체적·정신적 운동에 의한 자세 등 인간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게 다루어져 있다.
해부학 연구와 소묘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연구는 처음에는 예술가로서의 훈련을 위해 시도되었다가 곧 독립적인 연구 영역으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의 기계적 면모'(figura istrumentale dell'omo)에 매료되어 인간을 자연의 피조물로 연구하고 제시하려 했다. 초기에는 주로 해골과 근육을 연구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해부학과 생리학 연구를 함께 했다. 그는 결국 내장 및 뇌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감각과 생명의 '원동기'로 뇌와 심장 및 폐를 심층 분석했다. 그는 자신의 입회하에 일생 동안 30구의 인체를 해부하면서 경험의 폭을 넓혔고, 이 경험은 르네상스의 가장 뜻깊은 과학적 업적에 속하는 유명한 해부도를 낳았다. 인체에 대한 위대한 도표는 레오나르도가 '소우주론'(Comsmografia del minor mondo)으로 계획했던 것으로, 현대 과학의 도해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기계학과 우주론
레오나르도는 기계학도 역시 예술적 실습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에 아주 능통해져 건축가이자 토목기사가 되었다. 그는 당대의 기계학 법칙에 아주 정통해 있었고, 그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힘썼다 (→ 색인 : 고전역학). 그가 쓴 기계학 입문서는 밀라노에서 1490년대말에 나왔는데, 마드리드 사본에서 발견되었다 (→ 색인 : 마드리드 사본 8397). 이 책의 의의는 구체적인 기계나 작업도구의 묘사에 있다기보다는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기계원리와 작동을 설명해주는 실증적인 예를 제시하는 데 있었다 (→ 색인 : 제도). 이 책에서도 도해가 본문보다 선행하는데, 해부도에서처럼 여기에서도 물체를 정확히 실증해주는 명확한 도해 원칙을 발전시켰다.
순수기계학에 대한 흥미는 점차 응용기계학에 대한 관심과 합쳐져 그는 기계학의 기본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의 힘이 유기적·무기적 세계 모두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결국 '에너지'는 레오나르도에게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는 그 힘이 '영적인 속성'(virtu spirituale)으로 우주를 형성하고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현상을 입증하는 곳마다 우주를 형성하고 작동시키는 원초적인 역학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이렇듯 각기 분리된 개별적인 그의 지식 영역들은 그의 과학이 제공해주는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관, '보는 법을 아는 것'에 입각한 우주창조론으로 통합된다.
예술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를 시각적 관찰에서 얻은 진실하고 정확한 체험의 자료들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그 고귀한 소명을 깨닫고 자연의 방대한 영역에서 그 비밀을 캐냈다. 이렇게 얻은 지식을 사전적인 형태로 전달한 그의 유토피아 사상은 여전히 중세의 스토아 학파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연구 결과는 최초의 위대한 새 시대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아주 참신한 방법의 경험 원칙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끝까지 시각적 관찰에 의한 경험주의자로 남았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천재성에 힘입어 예술과 과학을 종합시킨 자신의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L.H. Heydenreich 글 | 金錦美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모나리자(Mona Lisa)
'라 조콘다'라고도함. 이탈리아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의 작품(1503~06경). 다 빈치가 성기 르네상스 시대에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 살던 한 상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라고 전해진다. 색의 깊이, 명암의 부드러운 처리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완숙하게 사용된 것으로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준다. 가지런히 모은 손과 온화한 미소는 그리스의 이상적인 여인을 묘사한 것 같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유미주의(Aestheticism /唯美主義)
탐미주의(耽美主義)·심미주의(審美主義)라고도 함. 미적 가치를 가장 지고한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적인 견지에서 평가하는 태도 및 세계관.
대개 생에 대한 수동적·체념적·관조적 태도라든가 쾌락적 감각주의, 또는 모순적이고 적대적인 현실로부터 미적 현상세계로 도피하려는 생각에서 연유한 까닭에, 종종 반사회적·비정치적 허무주의로 귀착하기도 한다. 이런 유미주의의 경향은 이미 고대(특히 헬레니즘)·중세·르네상스(매너리즘)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근세에 와서 예술과 문학에서 더욱 발전하여 19세기말 유럽에서는, 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신조 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유미주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 예술을 위한 예술'은 1830~70년대 프랑스에서 풍미하던 예술이론의 표어로서 1818년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쟁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나 예술 자체를 예술의 목적으로 선언하고 예술을 종교·정치·도덕·세계관 등 어떤 다른 목적이나 관심에서 분리시켜 어떠한 효용성도 거부하는 예술지상적 유미주의를 제일 먼저 강력하게 내세운 사람은 테오필 고티에였다(1835년에 쓴 소설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의 서문). 여기서 드러나는 비정치적 태도는 콩트의 실증주의 미학에 근접하는 측면도 있으나, 특히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변호론적 문학에 대립한다는 점에서 반실증주의적인 예술지상주의는 '순수'문학(상징주의운동)을 촉진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환상을 비판하는 문학(공쿠르 형제, 귀스타브 플로베르)이 나오는 배경이 되었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는 사실주의 소설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을 쓰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입장에서 자연주의로 떨어질 위험에 저항할 수 있었다.
예술의 자율성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아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실용주의적 사회철학과 산업시대의 추악성 및 속물근성에 대한 반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에서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유로운 예술'과 다른 목적을 지녀 노동 및 수단이 되는 '임금 예술'을 구별하고, 미학적 기준은 도덕성·실용성·쾌락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미주의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런 예술의 자율성 사상은 독일에서는 괴테와 J. L. 티크 등을 통해 바이마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로 이어졌고, 영국에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토머스 칼라일 등을 통해, 프랑스에서는 스탈 부인과 고티에, 쿠쟁을 통해 보급되었다.
영국에서는 라파엘 전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1848년부터 유미주의의 씨를 뿌렸고,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에드워드 번 존스, 앨저넌 찰스 스윈번 등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중세 취미를 선택하여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유미주의의 표본이 되었다. 오스카 와일드와 월터 페이터의 작품들, 오브리 비어즐리가 잡지 〈옐로 북 The Yellow Book〉에 그린 삽화들에서도 유미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 세련된 감수성의 계발이라는 유미주의 운동의 이상을 가장 높이 끌어올린 사람은 아마도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 외에도 샤를 보들레르, 샤를 르콩트 드 릴, 테오도르 드 방빌, J. K. 위스망스 등 상징주의와 고답파 시인들도 유미주의의 신봉자들로 꼽히며, 독일에서는 나중에 게오르게파에 속하는 시인들이 유미주의의 영향을 보인다.
당대의 유미주의 비판자로는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 등을 들 수 있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을 떠난 예술이 무슨 가치를 지니겠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유미주의 운동은 예술의 형식미학에 관심을 집중시켜, 로저 프라이와 버나드 베렌슨의 예술비평이 나오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됨으로써 어떤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되었고, 미술과 공예 운동을 촉진했으며,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을 일으켜 20세기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페이터[Walter (Horatio) Pater]
1839. 8. 4 런던 섀드웰~1894. 7. 30 옥스퍼드.
영국의 비평가·수필가·인문주의자로 그가 주창한 '예술을 위한 예술' 옹호론은 심미주의로 알려진 운동의 원칙이 되었다. 페이터는 캔터베리의 킹스 스쿨과 옥스퍼드대학교의 퀸스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퀸스 칼리지에서는 벤저민 조윗 밑에서 그리스 철학을 배웠다.
그후 옥스퍼드대학교에 머물며 자신의 문하생들과 함께 연구활동을 했고, 1864년에는 브레이스노스대학의 펠로로 뽑혔다. 이무렵 고전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 때문에 목사가 되고자 했던 어린시절의 생각이 점차 흐려졌다. 그후 페이터는 평론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피코 델라 미란돌라, 미켈란젤로 및 그밖의 인물에 관한 평론을 모아 1873년 〈르네상스 역사에 관한 연구 Studies in the History of the Renaissance〉(후에 〈르네상스 The Renaissance〉로 불렸음)를 출판했다. 이 수필들에 나타난 섬세하고 꼼꼼한 문체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감각적인 평가로 그는 학자이자 심미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에는 그를 숭배하는 소규모 집단까지 생겼다. 그는 〈르네상스〉의 맺음말에서 예술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을 위해 존재하며, 예술의 존재 이유에 도덕적 기준이나 실용적인 기능이 끼여들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 때문에 페이터는 찰스 스윈번이나 라파엘 전파(前派) 화가들과 연관되기도 했다.
〈쾌락주의자 마리우스 Marius the Epicurean〉(1885)는 그의 사상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다. 이 글은 철학적인 로맨스로, 심미적이면서 종교적인 삶에 대한 페이터의 이상이 정확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글의 배경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로마이지만, 이것은 19세기 후반의 특성을 나타내는 주인공의 정신적 발달사를 그리기 위해 위장한 것일 뿐이다. 〈상상의 초상화 Imaginary Portraits〉(1887)의 양식 역시 이와 똑같지만 길이가 짧은 철학 소설을 모아놓은 것이다. 〈감상 Appreciations〉(1889)에서는 다시 비평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주로 영국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1893년의 〈플라톤과 플라톤주의 Plato and Platonism〉는 플라톤 철학의 논리적·변증법적 측면은 무시하고 철저히 문학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상을 다루었다. 〈그리스 연구 Greek Studies〉(1895)·〈다방면에 걸친 연구 Miscellaneous Studies〉(1895)·〈'가디언'지에 실렸던 평론 모음 Essays from The Guardian〉(자비 인쇄 1896, 1901)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으며, 미완성 로맨스 〈가스통 드 라투르 Gaston de Latour〉(1896) 또한 그의 유작이다.
페이터의 정신에 주된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고전연구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경건함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고전연구에 그대로 적용했으며, 고전연구를 극히 세련된 예술적 감각의 근원으로 여겼다. 말년의 비평에서도 페이터는 도덕적·교육적 가치에 기초해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당대의 일반적 경향과는 대조적으로 계속해서 예술작품 고유의 특질에 초점을 맞추었다. 초기에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소집단에만 영향을 끼쳤으나, 점차 문단의 다음 세대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카 와일드, 조지 무어, 1890년대의 심미주의자들도 그의 추종자로서 그의 문체와 사상의 흔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페이터의 예술 철학
페이터의 작품은 그 형식미 면에서 고전주의를 따르고 있으나 그는 낭만적 시각에 관심이 더욱 컸다. 실제로 그는 낯설고 신비로운 미(美)의 형식에 대한 추구를 통해 고전적 삶과 예술에 있는 낭만적 특성뿐 아니라 낭만주의 시대의 고전적 요소들까지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집합점으로서의 르네상스는 그가 가장 흥미를 가진 시기였다. 그는 또한 이교도와 기독교적 요소의 접목에도 관심이 있었으나, 수필가로서의 그의 위대함은 역시 그가 보여 준 고도로 섬세한 관찰, 폭넓은 비평적 시야, 다양한 예술 작품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 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페이터의 수필 세계
페이터는 수필이 시만큼 어려워야 한다고 믿었고, 자신만의 정교한 문장들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존경하던 프랑스 소설가 플르베르처럼 문장의 리듬에 각별히 신경을 썼고 문장에 들어갈 가장 적절한 단어가 무엇인가를 항상 고민했다. 수필가로서의 페이터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빅토리아 시대 중기부터 1890년대의 데카당스 시기까지의 전환기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관심이었고, 두 번 째는 인상주의적 비평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는 수필을 통해 다른 예술가 혹은 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영향 받은 소위 "특별하고 독특한 즐거움의 감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관심은 셰익스피어의 희극들, 플라톤의 대화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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