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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 대하여 / 본문 및 요점정리, 해설 / 몽테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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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 대하여 / 몽테뉴

회화(會話)

우리들의 정신을 단련하는 가장 유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사람과의 대화이다. 나는 이 방법의 사용을 우리 인생의 다른 무슨 행위보다도 감미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이래서 나는, 만약에 지금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아마도 듣기와 말하기를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보기를 빼앗길 것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아테네인들과 더욱이 로마인들은 아카데미에서 대화의 연습을 극히 명예로운 위치에 놓고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인들이 다소 그 흔적을 간직해서 크게 그 덕을 보고 있는데, 그것은 가령 우리들의 오성(悟性)과 그네들의 오성을 비교해 보면 나타난다. 책에 의한 공부는 맥이 풀리고 약한 운동으로, 조금도 열을 돋궈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변론은 단번에 공부와 운동을 시켜 준다. 만약에 내가 어느 굳센 영혼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와 변론을 트는 경우에 그는 나의 측면을 공격하고, 좌로 우로 찔러댄다. 그의 사상은 나의 사상을 약동(躍動)케 한다. 질투심, 명예심, 경쟁위기가 나를 충동해 실력 이상의 나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합의 일치한 변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권태로운 요소이다. 우리의 정신은 힘차고 잘 가다듬어진 정신들과의 교류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처럼, 저속하고 병적인 정신들과의 계속적인 교제와 왕래에 있어서 얼마나 손실을 보고 얼마나 타락하는지, 그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처럼 잘 퍼지는 전염병은 없다. 나는 어지간히 많은 경험에 의해 그 손실의 정도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반박하고 변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하고나 하며, 나를 위해서 하는 것에 한한다. 세도가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경쟁 삼아 자기의 재치와 말 주변 자랑을 해 대는 것은 점잖은 사람에게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 무슨 명제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고 무슨 신념도 내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다. 비록 아무리 부정 없고 황당 무계한 생각이더라도, 나에게 인간 정신의 소산으로서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들 회의주의자는 우리들의 판단에 일체의 결정을 내릴 권리도 주지 않고 있는 터라, 상반되는 의견들을 물렁물렁하게 바라다본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 판단은 가하지 않지만, 쉽사리 귀는 기울여 준다. 저울 한쪽 접시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을 때에는, 나는 일개 노파의 꿈이라도 올려놓아 다른 쪽 접시가 흔들거리도록 해 놓는다. 그리고 내가 짝수보다 오히려 홀수를 택하더라도, 금요일보다는 목요일을 택하더라도, 식탁에서 13번보다는 12번이나 14번을 더 좋아하더라도, 내가 길을 갈 때에 토끼가 내 앞길을 질러 건너가는 것보다는 옆에 나란히 가 주는 것을 보고 싶어하더라도, 신을 신을 때에 오른발보다 왼발을 먼저 내 놓는다 해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믿어지고 있는 이런 등속의 맹랑한 생각들도, 모두 최소한 한 번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내 생각으로 그것들은 어쨌든 공허보다는 더 무거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속간의 종없는 잡설도 본시 무(無)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양보하려 들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미신이란 악덕을 피하려다가 완고라는 악덕에 빠져 들지도 모른다.

훌륭한 토론상의 질서

결국 나는 모든 종류의 공격을, 그것이 정로(正路)를 통해 직통으로 가해져 왔을 때에는, 비록 아무리 미약한 것일지라도 받아들이고, 패배를 고백한다. 그 대신 형식을 몰각한 공격에는 좀체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내용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는 의견이란 모두가 한가지이다. 그리고 어느 주제가 이기느냐에는 거의 무관심이다. 논쟁의 진행이 질서있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하루 온종일이라도 천하 태평으로 토론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힘이나 재간보다도 오히려 질서이다. 목동이나 어린 점원들의 말다툼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그 질서를 우리들 사이에서는 영영 구경할 수가 없다. 그들은 혹 탈선을 하더라고, 그것은 예절을 무시하는 면에서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소란과 격정은 그들을 그들의 주제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화제는 여전히 저 갈 길을 이어 간다. 그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도 전에 말을 하는 수가 있어도 적으나마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 격에 맞게만 답변한다면 나로서는 언제나 그것이 휼륭하고도 남음이 있는 답변이다. 그러나 토론이 혼란하고 질서가 없어지면, 나는 토론을 저버리고 울화와 무절제한 형식에만 매인다. 그리고 고집스럽고, 심술궂고, 안하 무인의 논쟁 방식에 빠져 버려, 그 뒤에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바보를 데리고 진심으로 토론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생떼거리 양반의 손에 걸리면 나의 판단력만이 아니라 양심까지도 썩어 버린다.

우리들의 논쟁도 다른 언어상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금지되고 처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무슨 악덕인들 불러일으켜 쌓아 놓지 못하겠는가. 늘 분노에 지배되고 명령받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직 반박하기 위해서만 토론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제각기 반박하고 반박당하기로만 일관하니, 결국은 토론의 성과란 진실을 잃어버리고 전멸시키는 일이라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래서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에서 무능하고 못 되게 태어난 정신들에게 이 논쟁의 훈련을 금하고 있다.

요점 정리

작자 : 몽테뉴(M.E.de Montaigne)/손우성 옮김

갈래 : 수필, 교술 문학

성격 : 논리적, 개방적

제재 : 대화의 여러 면모

주제 :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對話)의 올바른 방법에 대한 생각, 대화의 중요성과 바람직한 대화의 기법

의의 : ① 대화의 의의와 방법에 대한 작자의 생각을 자유분방하게 서술하였다.

② 교훈적이면서 자기 고백적인 에세이 형식의 첫 시도이다.

출전 <수상록(隨想錄)>

구성

정신 단련의 가장 유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사람과의 대화

대화의 중요성

회화(會話)

남의 의견에 귀기울일 수 있는 토론

토론의 중요성

토론에 있어서는 힘이나 재간보다는 질서가 중요.

토론상 질서의 중요성

훌륭한 토론상의 질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논쟁이 종식됨.

논쟁의 무익함.

내용 연구

 

회화(會話)(이 소제목은 몽테뉴의 '수상록'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에 편집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것이다.)

 

우리들의 정신을 단련하는 가장 유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사람과의 대화이다. 나는 이 방법의 사용을 우리 인생의 다른 무슨 행위보다도 감미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이래서 나는, 만약에 지금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아마도 듣기와 말하기를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보기를 빼앗길 것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대화를 할 수 없는 상태보다는 맹인이 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 아테네인들과 더욱이 로마인들은 아카데미에서 대화의 연습을 극히 명예로운 위치에 놓고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인들이 다소 그 흔적을 간직해서 크게 그 덕을 보고 있는데, 그것은 가령 우리들의 오성(悟性 : 이성과 감성과의 중간에 위치한 논리적인 사고 능력)과 그네들의 오성을 비교해 보면 나타난다. 책에 의한 공부는 맥이 풀리고 약한 운동으로, 조금도 열을 돋궈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변론(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단번에 공부와 운동을 시켜 준다. 만약에 내가 어느 굳센 영혼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와 변론을 트는 경우에 그는 나의 측면을 공격하고, 좌로 우로 찔러댄다.(대화의 상대가 될 만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나의 논리를 공격하고 반박하면서 나의 논리를 격파하려 한다.) 그의 사상은 나의 사상을 약동(躍動)케 한다. 질투심, 명예심, 경쟁위기가 나를 충동해 실력 이상의 나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합의 일치한 변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권태로운 요소이다(논쟁거리가 없는 변론은 논쟁 당사자들이 서로 결론에 대해 합의를 본 상태이기 때문에 따분하고 시들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정신은 힘차고 잘 가다듬어진 정신들과의 교류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처럼, 저속하고 병적인 정신들과의 계속적인 교제와 왕래에 있어서 얼마나 손실을 보고 얼마나 타락하는지, 그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처럼 잘 퍼지는 전염병은 없다. 나는 어지간히 많은 경험에 의해 그 손실의 정도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반박하고 변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하고나 하며, 나를 위해서 하는 것에 한한다. 세도가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경쟁 삼아 자기의 재치와 말 주변 자랑을 해 대는 것은 점잖은 사람에게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 무슨 명제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고 무슨 신념도 내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다. 비록 아무리 부정 없고 황당 무계한 생각이더라도, 나에게 인간 정신의 소산으로서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들 회의주의자는 우리들의 판단에 일체의 결정을 내릴 권리도 주지 않고 있는 터라, 상반되는 의견들을 물렁물렁하게 바라다본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 판단은 가하지 않지만, 쉽사리 귀는 기울여 준다. 저울 한쪽 접시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을 때에는, 나는 일개 노파의 꿈이라도 올려놓아 다른 쪽 접시가 흔들거리도록 해 놓는다. 그리고 내가 짝수보다 오히려 홀수를 택하더라도, 금요일보다는 목요일을 택하더라도, 식탁에서 13번보다는 12번이나 14번을 더 좋아하더라도, 내가 길을 갈 때에 토끼가 내 앞길을 질러 건너가는 것보다는 옆에 나란히 가 주는 것을 보고 싶어하더라도, 신을 신을 때에 오른발보다 왼발을 먼저 내 놓는다 해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믿어지고 있는 이런 등속의 맹랑한 생각들도, 모두 최소한 한 번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내 생각으로 그것들은 어쨌든 공허보다는 더 무거운 것이다(아무런 대화가 없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속간의 종없는 잡설도 본시 무(無)보다는 나은 것이다(헤아려 짐작할 수가 없는 쓸데없는 세속의 이야기일지라도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양보하려 들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미신이란 악덕을 피하려다가 완고라는 악덕에 빠져 들지도 모른다.

훌륭한 토론상의 질서

결국 나는 모든 종류의 공격을, 그것이 정로(正路)를 통해 직통으로 가해져 왔을 때에는, 비록 아무리 미약한 것일지라도 받아들이고, 패배를 고백한다. 그 대신 형식을 몰각한 공격에는 좀체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내용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는 의견이란 모두가 한가지이다. 그리고 어느 주제가 이기느냐에는 거의 무관심이다. 논쟁의 진행이 질서있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하루 온종일이라도 천하 태평으로 토론하고 있을 것이다(토론이나 논의를 할 때 질서와 주제를 벗어나거나 격에 맞지 않은 말은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힘이나 재간보다도 오히려 질서이다. 목동이나 어린 점원들의 말다툼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그 질서를 우리들 사이에서는 영영 구경할 수가 없다. 그들은 혹 탈선을 하더라고, 그것은 예절을 무시하는 면에서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소란과 격정은 그들을 그들의 주제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화제는 여전히 저 갈 길을 이어 간다. 그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도 전에 말을 하는 수가 있어도 적으나마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 격에 맞게만 답변한다면 나로서는 언제나 그것이 휼륭하고도 남음이 있는 답변이다. 그러나 토론이 혼란하고 질서가 없어지면, 나는 토론을 저버리고 울화와 무절제한 형식에만 매인다. 그리고 고집스럽고, 심술궂고, 안하 무인의 논쟁 방식에 빠져 버려, 그 뒤에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바보를 데리고 진심으로 토론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생떼거리 양반의 손에 걸리면 나의 판단력만이 아니라 양심까지도 썩어 버린다.

우리들의 논쟁도 다른 언어상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금지되고 처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무슨 악덕인들 불러일으켜 쌓아 놓지 못하겠는가. 늘 분노에 지배되고 명령받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직 반박하기 위해서만 토론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제각기 반박하고 반박당하기로만 일관하니, 결국은 토론의 성과란 진실을 잃어버리고 전멸시키는 일이라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래서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에서 무능하고 못 되게 태어난 정신들에게 이 논쟁의 훈련을 금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의 작가인 몽테뉴는 근대 수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그의 '수상록'에서 자신의 생활 경험들에 대한 다각도의 성찰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글도 몽테뉴의 글이 지닌 새로운 형식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생활 체험으로부터 다양한 예시를 들어 바람직하지 않은 대화나 토론의 방법을 비판함으로써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바람직한 대화나 토론의 방법 내지 태도를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작가는 글의 서두에서 대화야말로 정신 단련의 유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라는 전제 하에 대화나 토론시에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들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고 있으며,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일상적인 생활 체험에서 끌어옴으로써 딱딱해지기 쉬운 글의 방향을 수필답게 주정적(主情的)인 방향으로 유도했다.

이해와 감상1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자신의 생활을 해부(解剖)하여,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화제가 그 자신으로부터 출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상록'은 일종의 고백록(告白錄)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단지 개인의 생활과 의식을 드러내는 데 끝나지 않고 인간 전체로 확대된다. 자기 해부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성 전체를 해부하고 비판한다.

 

이 글은 대화와 토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정돈된 줄거리나 논리적인 흐름을 의식하지 않고, 아주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특히, 적극적인 대화의 의의와 토론의 바람직한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대화와 토론에 대하여 '자기 고백→일반화'를 기본적인 틀로 하여 전개된다. '자기 고백'의 단계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즉 즐거움과 괴로움을 분명히 말하고, '일반화' 단계에서는 대화와 토론의 그릇된 태도를 비판하고 훈계한다. 그리고 곳곳에 적절한 비유를 구사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체화시키고 있다.

심화 자료

- 몽테뉴, '슬픔에 대하여'/ 손우성(孫宇聲) 옮김

나는 이 감정에서 가장 면제된 자들의 축에 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여기 정가를 매겨 놓은 것처럼 특별한 기호(嗜好)를 가지고 이 심정을 존중하는 면이 있지만 나는 이것을 좋아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예지(叡智), 도덕(道德), 양심(良心)에 옷을 입힌다. 어리석고 망측스런 장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럴 듯하게 이 낱말에 괴악(怪惡)하다는 뜻을 붙였다. 왜냐 하면 이 심정은 언제나 해롭고 언제나 철부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이것을 겁 많고 비굴한 소질이라고 보며, 그 파의 학자들에게 이 심정을 금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집트의 왕 프삼메니투스가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잡혔을 때, 사로잡힌 자기 딸이 노예복을 입고 물을 길러 가느라고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는, 그 친구들의 주위에서 모두 울부짖는데도 그는 땅만 내려다보며 말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자기 아들이 죽음의 길로 끌려 가는 꼴을 보고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하 하나가 끌려가는 포로들 속에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치며 대성 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최근에 우리 나라 태공 한 분이 트리엔트에 있을 때에, 자기 맏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 그 형은 온 집안의 기둥이며 영광이던 인물이다. ――그리고 얼마 뒤에 둘째로 희망을 두던 동생의 부고를 듣고도 이 곡경(曲境)을 모범적인 굳은 마음으로 버티며 견디어 냈는데, 며칠 뒤에 하인 하나가 죽으니까, 이 마직막 변고에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아까워하는 꼴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가 이 마지막 충격에만 마음이 동한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는 슬픔이 차서 넘치게 된 형편에 있다가 그 위에 더 일이 덮쳐 오니, 그의 참을성의 한계가 무너졌던 것이다.

우리 이야기도 다음 말을 첨가하지 않아도 똑같이 판단된다. 그것은 캄비세스가 프삼메니투스보고 어째서 그가 아들딸의 불행에는 마음이 격하지 않고 있다 부하의 불행은 참아 내지 못했느냐고 묻자 "이 마지막 불행은 눈물로 마음속이 표현되지만, 첫번의 두 사건은 마음 속을 표현할 모든 한계를 넘은 것이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저 고대 화가의 착상도 이런 경우와 부합될 것이다. 그는 이피게니아가 희생되는 장면에 참석한 인물들의 슬퍼하는 표정을, 각자가 이 죄 없는 예쁜 소녀의 죽음에 대해서 가지는 관심의 정도에 따라 그의 예술의 극치를 다하여 그린 다음에, 이 소녀의 부친에 이르러서는 마치 어떠한 표정으로도 슬픔의 정도를 표현할 수 없는 것같이 그 얼굴을 덮어서 그려 놓았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시인들은 저 가련한 어미, 니오베가 아들 일곱을 먼저 잃고 나서 연달아 같은 수의 딸을 잃었을때에, 이 가혹한 참척(慘慽)을 당하고는 그만 바윗돌로 화하고 만 것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녀는 슬픔에 젖어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이는 한 참변이 사람이 참아 낼 수 있는 한도를 넘게 충격적일 때, 우리가 겪는 저 멍청하니 말문이 막히고 귀가 먹도록 넋을 잃은 심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진실로 비참한 일을 참는 것은,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 전체를 뒤집어 엎고, 그 행동의 자유를 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에 몸이 얽매어 얼어붙듯 하며, 모든 동작이 오그라져 붙었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 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나와 얽매었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이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 준다.' (베르길리우스)

페르디난트 왕이 부다 시 주위에서 헝가리 왕 요한네스의 미망인과 싸울 때의 일이다. 독일 장수 라이샤크는 어느 기사의 시체를 가져오는 것을 보았다. 그 기사가 이 전투에서 지극히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심상(尋常)하게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런데 이 장군은 사람들과 함께 그가 누구인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보았더니 바로 자기 아들이었다. 모두가 기 광경에 울부짖는데도 혼자만은 소리도 눈물도 없이 서서 눈 하나 까닥 않고 아들의 주검을 응시하다가 끝내는 슬픔의 힘이 그의 정신을 굳혀서 그대로 빳빳이 죽어 땅에 쓰러지게 하였다.

'얼마나 속이 타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미지근하게 속 태우는 것이다' (페트라르카)

이는 견디지 못할 격정(激情)을 표현하고자 자는 애인드의 말이다.

'가벼운 신세로다!

사랑은 내 감각마저 빼앗는도다. 그대를 한번 보자

레스비아여. 나는 얼이 빠져

그대에게 할 말도 나오지 않는도다.

혀는 굳어지고 미묘한 불길이 온몸에 퍼져

귀가 울리고 눈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카툴루스)

이와 같이 격렬하게 불타 버리는 것 같은 정열의 발작에는 비탄이나 말을 늘어놓기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때에는 마음은 심각한 생각으로 무거워지고 몸은 치우쳐 사랑에 녹아 버린다.

어떤 때는 그래서는 안 될 시각임에도 우발적인 무기력 상태가 생겨나며 극도에 달한 열기에 사로잡힌 애인들을 얼리어 재미를 보려는 좋은 기회를 허사가 되게 한다. 실컷 마음놓고 맛보게 하는 정열은 범상한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가벼운 심려는 요설(饒舌)이고, 큰 심려는 망연 자실(茫然自失)케 한다.' (세네카)

뜻밖의 기쁨이 불시에 닥쳐 와도 똑같이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내가 가까이 하자, 트로이 병사들이 사방에서

내게 쇄도해 옴을 보자 그녀는 혼비백산,

황천의 환상에 억눌린 듯,

이 광경에 몸은 얼어 붙고 체온은 그녀의 골격을 버리며

그녀는 실신하여 쓰러졌다가 얼마를 지난 뒤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

저 로마의 여인이 칸네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기쁜 나머지 놀라 죽은 일이나, 너무 좋아서 숨을 거둔 소포클레스와 폭군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로마 상원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표창했다는 소식을 듣고 코르시카에서 죽은 저 탈바의 이야기는 제쳐놓고라도, 지금 이 시대에도 교황 레오 1세가 그렇게 소원하던 밀라노 함락의 보도를 듣고는 기뻐 날뛰다 열병으로 죽은 예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용렬하다는 두드러진 예로 변증법 학자 디오도르스는 학교에서 그리고 민중들 앞에서 남이 내놓은 논법을 전개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극도의 수치감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린 일이 옛사람들에 의해서 주목되고 있다.

나는 이런 맹렬한 격정에 사로잡히는 일이 드물다. 나는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다. 그리고 날마다 사변(思辨)으로 거적을 씌워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 베이컨(Bacon), '학문에 대하여' /이종근 옮김

학문은, 즐거움과 장식(裝飾)과 능력(能力)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 주로 즐거움으로서의 학문의 효용(效用)은 혼자 한거(閑居)할 때 나타나고 장식으로서의 그것은 담화(談話)를 할 때 나타나며, 능력으로서의 효용은 일에 대한 판단과 처리에서 나타난다. 일에 숙달한 사람도 일을 하나 하나 잘 처리하고, 개별적(個別的)인 부분을 잘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에 대한 전반적(全般的)인 계획(計劃), 구상(構想), 정리(整理)에 있어서는 학문있는 사람이 제일 낫다.

학문에 지나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태만(怠慢)이다. 그것을 지나치게 장식으로 쓰는 것은 허세(虛勢)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학문적인 법칙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학자들의 버릇이다.

학문은 사람의 천품(天稟)을 완성하지만, 사람의 경험(經驗)에 의하여 학문 자체도 완성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의 천부적(天賦的)인 능력은 마치 천연 그대로의 식물과 같아서 학문으로 전지(剪枝)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학문도 사람의 경험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으면, 그 제시(提示)하는 방향이 너무 막연하게 되기 때문이다. 약삭 빠른 사람은 학문을 경멸(輕蔑)하고, 단순한 사람은 숭배하며, 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이용(利用)한다. 곧 학문의 용도(用途)는 학문 자체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문을 떠나 학문을 초월(超越)한 관찰로서 얻어지는 것으로, 이는 사람의 지혜에 속하는 문제인 것이다.

반대하거나 논박(論駁)하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라. 또는, 믿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혹은 담화나 논의의 밑천을 마련하기 위하여 독서하지 말라. 오직 재량(裁量)하고 고찰(考察)하기 위하여 독서하라. 어떤 책은 그 맛을 볼 것이고, 어떤 책은 그 내용을 삼켜버릴 것이고, 어떤 소수(少數)의 책은 씹어서 소화할 것이다. 이는 곧 어떤 책은 다만 그 몇 부분만을 읽고, 어떤 소수의 책은 정성껏 주의해서 통독(通讀)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책은 또 대리(代理)로 하여금 읽게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발췌한 것을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내용, 저급한 종류의 책에 한한 이야기다. 이 밖의 경우, 개요(槪要)만을 추출(抽出)한 책은 마치 보통의 증류수와 같아서 무미 건조한 것이다.

독서는 충실한 사람을 만들고, 담화는 재치있는 사람을 만들고, 문필(文筆)은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그러므로 글을 적게 쓰는 사람은 기억력이 강해야 하고, 담화를 별로 않는 사람은 임기 응변(臨機應變)의 재치가 있어야 하고, 독서를 적게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도 아는 것처럼 보일만한 간교(奸巧)한 꾀가 있어야 한다.

역사는 사람을 현명하게 하고, 시(詩)는 지혜롭게 하며, 수학은 치밀하게 하고, 자연 과학은 심원하게 하며 윤리학은 중후(重厚)하게 하고, 논리학과 수사학(修辭學)은 담론(談論)에 능하게 한다.

학문은 발전하여 인격이 된다. 뿐만 아니라 적당한 학문으로 제거할 수 없는, 지능의 장해(障害)란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육체의 질병에 대하여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적합한 운동이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투구(投球)는 결석병(結石病)에 좋고, 사격은 폐(肺)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만일 머리가 산만하면 수학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실제로 수학을 풀 때 머리가 조금이라고 헛갈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식별력(識別力)이 없고 차이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스콜라 철학자(哲學者)들을 연구하게 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머리털 하나라도 갈라보려고 하는 치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고 한가지를 증명 또는 예증(例證)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제시할 능력이 불충분하다면, 법(法)의 판례(判例)를 연구하게 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이 모든 정신적 결함(缺陷)에는 거기에 알맞는 각각의 특수한 요법이 있는 것이다.

참고 문헌

몽테뉴(손석린 역), <몽테뉴 수상록> (서문당, 1996)

베이컨(최혁순 역), <베이컨 수상록> (범우사, 1999)

이해하기

1. 이 글에서 작가가 말하는 '책에 의한 공부'와 '변론'의 차이에 대해서 말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이 글에서 작가는 듣기와 말하기를 보기보다 중시할 만큼 대화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작가가 어떤 점에 착안하여 변론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그 논지를 파악하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책에 의한 공부는 글쓴이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므로 맥이 풀리고 약한 운동에 불과하여 조금도 열을 돋우어 주지 못하는 반면, 변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그것이 만일 저속하고 병적인 정신들과의 교제와 왕래인 경우 손실의 경험을 당할지라도 단번에 공부와 운동을 시켜 준다. 변론은 그러한 점에서 공허함보다는 낫다.

2. 이 글에서 작가가 강조하고 있는 대화와 토론의 바람직한 태도를 정리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작가는 대화와 토론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바람직한 대화와 토론 방법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이 글의 문장 에 담긴 속뜻을 찾아내게 한 후 이를 정리해 보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글에서 작가는 대화에 있어 경쟁 삼아 자기의 재치와 말주변 자랑을 해대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며, 아무리 상대방이 맹랑하게 말하더라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보다 나은 견해가 나타났을 때 자신의 견해를 양보하지 않으면 완고함이라는 악덕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우에는 나의 실패를 고백함이 더 현명한 처사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토론에 있어 소란과 격정은 피해야 하며 논쟁의 진행은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다음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수필의 소재와 주제의 특성을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수상록' 서문에서 몽테뉴는 수필이 개성이 강한 일종의 고백적 문학이라는 점, 시에서는 개성을 용해시키고 소설과 희곡에서는 개성을 표현 뒤에 숨기지만 수필은 겉으로 그것을 드러낸다는 점, 작가 자신의 체취나 마음을 송두리째 맛보게 하는 글이라는 점,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며 자기 표현의 문학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제시된 글의 내용을 이미 학습한 수필의 제재와 주제가 지닌 특성과 연관지을 수 있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터놓고 보여 줄 수 있는 한도에서 천품(天稟) 그대로의 내 형태를 내놓는다.' 라고 표현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필은 그 제재를 대체로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에서 취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으며, 주제 또한 보통 일상과 현실에서의 깨달음이나 소박한 견해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필은 글쓴이의 경험과 지식, 취향과 이상, 인생관과 가치관 등이 그대로 노출되는 고백 문학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수필의 주제는 형상화된 정서 속에 용해되거나 스토리 속에 잠재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으리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김진섭, '생활인의 철학'

주제 : 생활인의 예지와 통찰력 속에 빛나는 철학

 

작품해제

이 글은 먼저 철학이 필요 없게 된 현실을 철학자들의 측면과 생활 그 자체의 복잡 다단함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글쓴이는 자신이 거론하는 철학이 학문적 철학이 아닌, 삶이나 사물에 대한 판단력과 통찰력임을 제시하고 모든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가져야 함을 역설한다.

작가 소개

김진섭(1903∼) : 수필가. 해외 문학파의 한 사람으로 1927년 <해외 문학> 창간에 관여했고 1931년에는 '극예술 연구회'를 조직하는 데 힘썼다. 주로 관념적이고 지적인 취향의 수필을 통해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캐내는 중수필적 경향을 보인 작가이다. 수필집에<인생 예찬>, <생활인의 철학>, <청천 수필 평론집> 등이 있다.

(1) 이 글을 수필로 볼 수 있는 근거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제시된 글을 수필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때 근거를 밝힘에 있어서 내용적 측면과 형식적 측면 중 어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고 세부적인 기준까지 생각해 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이 글은 논증의 과정을 거치고 있어서 수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철학은 '속인(俗人)' 곧 일상생활인의 철학이라는 점, 철학에 대해 새로운 안목으로 접근했다는 점, 일상생활에 대한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교훈을 직접 전달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수필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이 글과 '대화에 대하여' 에 나타나는 진술 방식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수필을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경우 혹자는 주관성이 강한 '몽테뉴' 형(型)의 개인적 경수필(輕隨筆)과 대외적 객관성이 강한 '베이컨' 형의 중수필(重隨筆)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대화에 대하여'는 전자에 속하나 '생활인의 철학은'은 후자에 속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대화에 대하여'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써 가고 있지만, '생활인의 철학'은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논증적인 글쓰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수필의 기원

 

동양의 경우 '수필(手筆)'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12세기 남송(南宋)의 홍매(紅梅)로 그가 쓴 <용재수필>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게으른 버릇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뜻한 바를 수시로 기록하니 앞뒤 차례가 없으므로 이름 붙여 '수필'이라 이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일신수필'에서 '수필'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다.

 

동양의 '수필'은 서양의 '에세이(essay)'에 해당하는데, 이는 프랑스의 문인인 몽테뉴가 자신의 책 이름을 'Essais(Essay)의 프랑스어)'를 내세운 데서 유래한다. 동양의 '수필'이라는 말은 축자적(逐字的)으로 해석하면 '붓을 따라', 또는 '붓 가는 대로'의 의미를 갖는데, 'essay'나 'essai'는 '시험하다'또는 '시도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라틴어 'exigere'에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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