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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 철학(命名哲學) / 본문 및 해설 / 김진섭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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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 철학(命名哲學) / 김진섭

 

 

 "죽은 아이 나이 세기"란 말이 있다. 이미 가 버린 아이의 나이를 이제 새삼스레 헤아려 보면 무얼 하느냐, 지난 것에 대한 헛된 탄식을 버리라는 것의 좋은 율계(律戒)로서 보통 이 말은 사용되는 듯하다.

 

 그것이 물론 철없는 탄식임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부닥쳐 문득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어 봄도 또한 사람의 부모 된 자의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애정에서 유래하는 눈물겨운 감상에 속한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올해 스물, ――아, 우리 철현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달픈 원한이, 그러나 이제는 없는 아이의 이름을 속삭일 수 있을 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추억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만일에 우리의 자질(子姪)들에게 한 개의 명명(命名)조차 실행치 못하고 그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을 때, 우리는 그 때 과연 무엇을 매체로 삼고 그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법률의 명명하는 바에 의하면 출생계는 이 주 이내에 출생아의 성명을 기입하여 당해 관서에 제출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 여기 조그만 공간이라도 점령했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고고의 성을 발하며 비장히도 출현하는 이러한 조그만한 존재물에 대하여 대체 우리는 이것을 무어라고 명명해야 될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그의 존재를 작은 형식으로서라도 주장한 이상엔 그 날로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명목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두말 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듯이 아이들도 또한 한 개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만일에 그가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전연히 아무것도 아닌 생물임을 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니, 한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성장치 못한 아이의 불행한 죽음이, 한 개의 명명을 이미 받고 그 이름을 자기의 명의로서 알아들을 만큼 성장한, 말하자면 수일지장(數日之長)이 있는 그러한 아이의 죽음에 비하여 오랫동안 추억될 수 없는 사실――이 속에 이름의 신비로운 영적 위력은 누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장차 나올 터인 자녀를 위하여 그 이름을 미리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찍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人)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일군대를 적지에 파견함에 제하여 그의 병사들에게 말하되 "나는 너희에게 내 사자(獅子)를 동반시키노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수중지대왕(獸中之大王)이 반드시 적지 않은 조력을 할 것임을 확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자가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였을 때 마르코만 인들은 물었다. "저것이 무슨 짐승인가?" 하고. 적장이 그 질문에 대하여 왈 "그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 하였다. 여기서 마르코만 인들은 미친 개를 두드려 잡듯이 사자를 쳐서 드디어 싸움에 이겼다.

 

 마르코만 인의 장군은 확실히 현명하였다. 그가 사자를 개라 하고 속였기 때문에 그의 졸병들은 위축됨이 없이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그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의 내용은 물론 그 이름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서만 그치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그 이름조차 알 바가 없다면 그것은 더욱 애달픈 일이다.

 

 가령 사람이 병상에 엎드려 알 수 없는 열 속에 신음할 때 그의 최대의 불안은 그 병이 과연 무슨 병이냐 하는 것에 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그 병명이 지적될 때에 그 병의 반은 치료된 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파리라는 도회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파리라는 이름을 기억함으로 의하여 파리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요, 사옹(沙翁)이라는 인물을 그 내용에 있어서 전연히 이해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불후의 기호를 통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예술을 알고 있다고 오신(誤信)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 이름을 내가 잊을 때, 나는 무엇에 의하여 이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될까?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태반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

 


 작자 : 김진섭(金晋燮 1903-?)
 갈래 : 중수필
 성격 : 지적(知的)이고 중후함
 문체 : 만연체. 수사적(修辭的) 문체
 제재 : 이름
 주제 : 이름의 위력과 중요성, 실질을 드러내는 이름의 가치   
 특징 : 이름이라는 일상적인 소재가 지니는 심오한 의미를 사변적으로 풀어내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주제 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현학적인 문체와 번역투의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출전 : <조선문학>(1936)

 

"죽은 아이 나이 세기"란 말이 있다. 이미 가 버린 아이의 나이를 이제 새삼스레 헤아려 보면 무얼 하느냐, 지난 것에 대한 헛된 탄식을 버리라는 것의 좋은 율계(律戒)로서 보통 이 말은 사용되는 듯하다.

 

 그것이 물론 철없는 탄식임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부닥쳐 문득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어 봄도 또한 사람의 부모 된 자의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애정에서 유래하는 눈물겨운 감상에 속한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올해 스물, ――아, 우리 철현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달픈 원한이, 그러나 이제는 없는 아이의 이름을 속삭일 수 있을 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추억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만일에 우리의 자질[子姪 : 아들과 조카. 자여질(子與姪)]들에게 한 개의 명명[命名 : (어떤 대상을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실행치 못하고 그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을 때, 우리는 그 때 과연 무엇을 매체로 삼고 그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우리가 만일에 -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 우리의 자식이나 조카들이 이름도 지어서 불러 보기 전에 죽게 된다면, 우리는 그 때 과연 이름을 떠올리지 않고서 무엇으로 어떻게 그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법률의 명명하는 바에 의하면 출생계는 이 주 이내에 출생아의 성명을 기입하여 당해 관서에 제출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 여기 조그만 공간이라도 점령했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어떠한 것이 - 단순한 일이 아니다 : 관공서의 출생 명부의 조그만 빈 칸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고고의 성을 발하며 비장히도 출현하는 이러한 조그만한 존재물에 대하여 대체 우리는 이것을 무어라고 명명해야 될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그의 존재를 작은 형식으로서라도 주장한 이상엔 그 날로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명목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두말 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듯이 아이들도 또한 한 개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만일에 그가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전연히 아무것도 아닌 생물임을 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니, 한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성장치 못한 아이의 불행한 죽음이, 한 개의 명명을 이미 받고 그 이름을 자기의 명의로서 알아들을 만큼 성장한, 말하자면 수일지장(數日之長 :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성장한 것을 이름)이 있는 그러한 아이의 죽음에 비하여 오랫동안 추억될 수 없는 사실――이 속에 이름의 신비로운 영적 위력은 누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장차[앞으로. 미래의 어느 때에] 나올 터인 자녀를 위하여 그 이름을 미리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세상의 모든 - 좋을 것이다. : 이름도 갖지 못하는 불행한 일을 만들지 말라는 의미이다]

 

 일찍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人)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일군대를 (敵地 : 적의 세력 아래에 있는 땅)에 파견함에 제하여 그의 병사들에게 말하되 "나는 너희에게 내 사자(獅子)를 동반시키노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수중지대왕(獸中之大王 : 동물의 왕인 사자를 한자로 표현한 말)이 반드시 적지 않은 조력(助力 : 힘을 도와 줌. 도와 주는 힘)을 할 것임을 확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자가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였을 때 마르코만 인들은 물었다. "저것이 무슨 짐승인가?" 하고. 적장이 그 질문에 대하여 왈 "그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 하였다. 여기서 마르코만 인들은 미친 개를 두드려 잡듯이 사자를 쳐서 드디어 싸움에 이겼다.[여기서 마르코스만 - 싸움에 이겼다. : 사자를 개라고 생각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물리쳤다는 것으로 이름의 위력을 보여 주는 예이다.]

 

 마르코만 인의 장군은 확실히 현명[(賢明) :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하였다. 그가 사자를 개라 하고 속였기 때문에 그의 졸병들은 위축[(萎縮) : 두려워서 움추림]됨이 없이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그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를[그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를 : 사람이나 사물 등의 실제적인 모습을 제대로 알기 전에, 먼저 그 이름에 의해서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사람이 - 있었던 것이다. : 사람이나 사물의 실제 모습(실체)을 정확히 알기도 전에 명명되는 기호(이름)에 의해서 먼저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그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의 내용은 물론 그 이름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지만[이름은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는 도구], 그러나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서만 그치고 만다는 것[빛 좋은 개살구로 이름이 실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우]은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그 이름조차 알 바가 없다면 그것은 더욱 애달픈 일이다.

 

 가령 사람이 병상에 엎드려 알 수 없는 열 속에 신음할 때 그의 최대의 불안은 그 병이 과연 무슨 병이냐 하는 것에 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그 병명이 지적될 때[이름을 통해 인식될 때]에 그 병의 반은 치료된 병이라 할 수 있다.[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 치료된 병이라 할 수 있다. : 병명을 알게 되면 환자의 불안이 조금 덜어지고, 또 치료책도 마련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파리라는 도회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파리라는 이름을 기억함으로 의하여 파리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요, 사옹(沙翁 :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한자식 표기법, 가차식 표기)이라는 인물을 그 내용에 있어서 전연히 이해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불후[(不朽) : 훌륭하여 그 가치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음]의 기호를 통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예술을 알고 있다고 오신[(誤信) : 잘못 믿음]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불후의 기호를 - 오신(誤信)하는 것이다. : 이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이름, 즉 사옹(셰익스피어)이라는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사람됨과 예술을 알고 있는 것처럼 믿는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 이름을 내가 잊을 때, 나는 무엇에 의하여 이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될까?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태반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 : 이름이란 그 대상에 대한 기억을 좌우하는 것이며 대상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즉 이름은 사물을 본질을 드러내므로 매우 중요하다.]

 

 

 김춘수의 '꽃'과 '명명 철학'의 작가 사상

 '꽃'에는 자신에게 무의미한 존재였던 것이 이름을 불러 주자 꽃과 같이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우리가 '이름'을 통하여 대상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여 그 대상과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의미로 '명명 철학'에 나타난 작가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김진섭의 초기 수필 가운데 하나이다. 수필 문학의 진정한 향기는 우리의 삶과 경험에 대한 관조적 성찰을 수반한다는 데 있다. 관조적 성찰이란 사물을 충동이나 감각에 의해서 보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유를 통해 파악한다는 것이다. 작자는 우리가 이름을 가지며, 그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심히 넘기지 않고, 이름과 우리 존재의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고 발휘되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삶의 의미를 작은 것에서부터 의미화하려는 지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자는 또 우리가 이름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인식되고 기억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가 대상에 대한 이름을 안다면 그것은 곧 대상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통찰과 사유의 결론을 성급히 서두르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열어 놓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에게는 새로운 사색의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수필 문학의 진정한 향기는 우리의 삶과 경험에 대한 관조적 성찰을 수반한다는 데 있다. 관조적 성찰이란 사물을 충동이나 감각에 의해서 보지 아니하고 지적(知的)인 사유(思惟)를 통해 파악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이름을 가지며, 그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심히 넘기지 않고, 이름과 우리 존재의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고 발휘되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삶의 의미를 작은 것에서부터 의미화하려는 지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수필은 통찰과 사유(思惟)의 결론을 성급히 서두르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열어 놓는다. 그것이 곧 독자에게는 새로운 사색의 제목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호흡이 길고 세련된 수사(修辭)의 문체적 특성에도 유의하면서 이 작품을 감상해 보면 수필을 읽는 맛이 훨씬 더할 것이다.

 

 이 작품은 '이름'을 제재로 하여 그 기능(機能)과 의미, 위력(威力)을 밝히고 있는 수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 쉬운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삼아 지적(知的)인 사유(思惟)를 동원하여 관조적(觀照的)으로 성찰(省察)하고 있다. 김진섭의 다른 수필에서도 그렇듯이 풍부한 지식에 의한 예시(例示)가 적절히 활용되고 있으며, 일상인들의 심금(心琴)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예로 내용을 풀어 나가, 설득력을 강화하고 있다. 표현에 있어서도 만연체를 구사하여 중후(重厚)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제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에 문체가 호응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1930년대 우리 나라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한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자주 사용되고, 자신의 박학다식(博學多識)함을 내세우는 현학적(衒學的)인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김진섭(金晋燮 1903-?)

 수필가·독문학자. 호 청천(聽川). 경북 안동(安東) 출생. 양정고보(養正高普)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法政]대학  독문학과를 나왔다. 26년 손우성(孫宇聲)·이하윤(異河潤)·정인섭(鄭寅燮) 등과 해외문학연구회에 참가하여 《해외문학(海外文學)》 창간에 참여,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대결하여 해외문학 소개에 진력하였다. 평론 <표현주의 문학론>을 비롯하여 독일문학을 번역 소개하고, 귀국 후에는 경성제대(京城帝大) 도서관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항석(徐恒錫)·이헌구(李軒求)·유치진(柳致眞)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생활인의 철학을 재치 있게 표현하는 수필문학의 새 영역을 개척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 도서관장, 서울대학·성균관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46년에 《독일어교본》을 엮어냈다. 47년에 첫 수필집 《인생예찬》, 48년에는 수필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힌 본격적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을 간행하였다. 50년에 논문집 《교양의 문학》을 출판사에 남겨 놓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55년에 《교양의 문학》이 간행되었고, 58년에는 유작 40편이 수록된 《청천수필평론집(聽川隨筆評論集)》이 출간되었다. 깊이 있는 생활관찰과 인생사색을 꾸밈없는 소박한 문체로 엮어낸 그의 수필은 한국 수필문학의 한 모델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수필을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수필과 다른 글과의 관계

(1) 광의의 수필 : 수필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글을 가리킨다. 따라서, 서간문, 일기문, 기행문 등은 본질적으로는 실용문의 한 갈래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용적인 효용을 벗어나서 예술성을 띠게 되면 수필의 영역에 속한다.

 

(2) 수필과 관계 있는 글

① 감상문 : 감상문은 감상이 중심이나, 수필은 감상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전숙희), '나의 고향'(전광용)
② 기행문 : 여정에 감상이 있으면 수필로 본다.  '산정무한'(정비석)
③ 일기, 편지 : 감상과 사색이 있는 일기나 편지는 수필로 볼 수 있다. '한 눈 없는 어머니'(이은상)
④ 평론문 : 작품 비평, 원리 소개를 수필 형식으로 쓴 글도 수필로 본다. '수필'(피천득)
⑤ 서문 : 책의 머리말도 넓게는 수필로 본다. '대가를 기다리며'(최현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정식 이름은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본명은 Marcus Annius Verus(~161).

 

121. 4. 26 로마~180. 3. 17 판노니아 빈도보나(지금의 빈) 또는 시르미움.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스토아 철학이 담긴 〈명상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 서양에서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상징해온 인물이다.

 

초기생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로마의 콘술(집정관)을 연임하는 중이었고 프라이펙투스(장관)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것은 원로원에 들 수 있는 특권을 뜻하는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고모는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결혼했고 언젠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제위를 계승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로마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집안의 상속녀였다. 이처럼 마르쿠스는 플라비아누스 황제(69~96)를 구심점으로 하여 사회·정치 권력이 집결되어 있던 새로운 로마 체제에서 가장 이름난 몇몇 집안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이 체제의 기풍은 그의 태도와 행동에 배어들었다. 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지배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공화국 말기의 지배계급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사람을 경멸하고 거만하며 냉소적이고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도회지 로마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 체제는 도시와 지방출신의 황제들이 고루 다스렸으며, 진지함과 훌륭한 일을 개발하고 경건과 신앙심을 더욱 진작시켰다.

 

어린 마르쿠스가 장차 특출한 정치적 인물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는가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때부터 L.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 불림)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같은 해 어린 마르쿠스는 콤모두스의 딸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약혼했다. 그러나 138년초 콤모두스가 죽고 그후 하드리아누스 황제마저 세상을 떠나자 파혼했다. 콤모두스가 죽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마르쿠스의 고모부였던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나중에 자신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도록 하고(나중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됨), 대신에 안토니누스에게 콤모두스의 아들과 마르쿠스 두 젊은이를 양자로 삼으라고 명령했다. 이때 마르쿠스의 이름은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로 바뀌었다. 이리하여 마르쿠스는 17세 이전에 공동 황제에 즉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40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즉위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으로 콤모두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장차 황제가 될 한 젊은이 또는 두 젊은이 모두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안토니누스 황제 아래에서 마르쿠스가 쌓은 오랜 기간의 예비황제 교육은 스승이었던 프론토와 주고받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프론토가 당시 사회의 주요문인이었지만 수사(修辭)가 몸에 밴 음울한 현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프론토가 편지에 나타난 것만큼 생기없는 인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두 젊은이와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천재적인 감수성과 진솔한 교류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준하고 진지하며 지적인 마르쿠스는 스승의 한결같은 고급 그리스어와 라틴어 낭독방식에 점차 싫증을 느꼈으며, 대신 한때 노예였으나 스토아 학파의 주요 도덕철학자인 신앙심 깊은 에픽테토스의 〈담론 Diatribai〉을 탐독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주로 철학에서 지적 흥미와 정신의 영양분을 구했다.

 

한편 마르쿠스는 정력적인 황제 안토니누스 곁에서 통치술을 배웠으며 공직을 맡기도 했다. 마르쿠스는 140, 145, 161년에 콘술이 되었다. 145년 사촌이었던 황제의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했으며, 147년에는 공식상 황제직의 주요권력형태였던 '임페리움'(황제권)과 '트리부니카 포테스타스'(호민관의 권한)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르쿠스는 일종의 연하의 공동 황제가 되어 안토니누스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주요국정을 결정했다(그보다 10세 가량 어렸던 양동생도 적당한 시기에 주요공직을 맡았음). 161년 3월 7일 안토니누스가 사망하던 날 두 형제는 함께 콘술이 되었다.

 

로마 황제 시기

마르쿠스가 황제에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했다. 그는 이미 합법적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완전한 황제자리에 올랐다(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 양동생도 마르쿠스의 강한 요청으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이때부터 그는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받음). 루키우스 베루스가 많은 추종자를 거느렸다는 증거는 없다. 이렇게 하여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는 동등한 법률상 지위와 권력을 갖는 공동 황제가 탄생했다. 그러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업적은 뛰어난 황제 마르쿠스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대부분의 재위 기간 동안 변방지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큰 전염병, 도덕의 타락에 맞서 싸우는 등 중요한 국정은 철저히 마르쿠스가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는 국내정치에서 건설적으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고 독창적인 기풍을 세우느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그가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법률분야였던 듯하다 . 수많은 법령을 공포하고 사법판결을 확정했으며 민사법의 비정상적이고 가혹한 조항을 제거하고 노예·과부·소수민족같이 국가의 혜택을 적게 받는 계층의 비율을 줄였으며 상속 분야에서 혈연을 인정한 것 등을 업적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마르쿠스의 개인적 공헌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법령 개선의 유형은 혁신적이기보다는 전통에 따른 것이었고, 법령은 단지 사회와 법구조를 세련되게 만들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위대한 입법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 헌신적인 실천가였다. 더욱이 이러한 법률적 활동에는 특별히 스토아적인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어떤 점에서 보면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의 시대는 법과 사회의 관계가 이전보다 오히려 퇴보하기 시작한 때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통치기에는 형법에 따른 처벌에서 차별 적용을 받는 '호네스티오레'(honestiore:상류층)와 '휴밀리오레'(humiliore:하류층)라는 두 계급이 서로 구분되기 시작했거나 더욱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휴밀리오레는 형법에서도 언제나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정치가로서 마르쿠스의 자격을 문제 삼는 논란은 아주 다양하게 제기되어왔다. 그중 한 예가 그리스도교도 박해와 관련된 문제이다. 마르쿠스는 그리스도교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재위하는 동안 어떠한 조직적인 박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의 법률상 지위는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는 얼마든지 처벌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수배당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불안정한 그리스도교도의 지위는 제국의 안정기와 번성기에는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기 시에 지역 주민은 그리스도교도를 고발하고 행정관은 중앙권력의 명령에 따라 법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었다. 177년에 리옹에서 일어난 순교도 바로 이런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의 재위기간 동안 그전보다 많은 피를 뿌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결코 박해를 주도하지 않았다.

 

161년 동방의 중심세력 파르티아가 시리아 지역을 침략했다. 162~166년의 전쟁은 명목상으로는 베루스가 지휘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써 승리했지만 실은 황제 휘하의 유명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이 결정적인 공을 세운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대가 퍼뜨린 전염병은 수년 동안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으며, 게르만족의 침입과 함께 제국의 안정기에 익숙했던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약화시켰다.

 

167년 혹은 168년에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도나우 강을 건너 게르만족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의 등 뒤에서 게르만 유목민족이 엄청난 기세로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아드리아 해의 요충지였던 아퀼레이아를 점령했다. 위급한 사태에 직면하자 제국의 군사적 취약함과 재정구조의 경직성이 드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한 절망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제국의 재산이 경매되었다. 마르쿠스와 베루스는 게르만족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169년 베루스는 질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나우 강 국경선을 되찾기 위해 마르쿠스는 온 힘을 기울여 3년간 더 싸워야 했으며, 또다시 3년간 보헤미아 지방에서 싸운 끝에 잠시나마 도나우 강 건너 부족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명상록〉

마르쿠스가 골치 아픈 국정 수행기간 동안 추구한 사상과 비록 역사적으로 매우 값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일상 정치사상을 좀더 자세히 알려면 〈명상록〉을 읽으면 된다. 그가 이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로 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명상록〉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한 책으로, 논증적인 글과 경구가 번갈아 나타난다. 어떤 면에서 이 글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명상록〉은 로마인의 가장 내밀한 사상을 다 모아놓은 것이지만 놀랍게도 그리스어로 씌어졌는데, 이는 당시에 여러 문화들이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르쿠스의 사상을 찬탄해왔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까다로움과 히스테리가 뒤섞인 마르쿠스 사상의 병리학적 측면이 더 눈에 띈다. 마르쿠스는 항상 이룰 수 없는 행동목표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사색 속에서 그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과 물질 세계가 덧없고 야만스럽고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세상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떤 희망도, 심지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희망도 없이 의무와 직책에 얽매여 있었다. 평생 동안 병고에 시달렸으며 만성 위경련으로 고통받으면서 매일 많은 약을 복용했던 것 같다. 〈명상록〉의 책갈피 속에서 풍기는 종말론적 분위기는 약물중독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점은 마르쿠스의 불안이 다소 과장된 형태이긴 해도 그 시대의 풍조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철인왕(哲人王)의 사상이 담겨 있는 〈명상록〉은 오랜 세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 그 사상은 마르쿠스 자신의 것이긴 하지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스토아주의의 도덕철학이고,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지성이 지배하는 하나의 통일체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이 가진 지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혼돈과 변화의 한가운데 홀로 내던져진다 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확한 이해의 부족 탓이겠지만 마르쿠스 사상의 한두 측면은 스토아 철학을 벗어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웠다. 플라톤주의는 당시 에피쿠로스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단 철학을 다 끌어안아 신플라톤주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영혼불멸의 위안을 받아들일 정도로 스토아주의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마르쿠스가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국경지역을 평정하고 있는 바로 그때 이집트·스페인·영국 등은 반란과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베루스 아래에서 일했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175년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동방지역과 이집트까지 사실상 통치하게 되었다. 그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장군은 마르쿠스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우연히 듣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르쿠스는 북부 지역의 미정복 부족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비디우스의 반란군을 진압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반란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부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마르쿠스는 그 기회에 동방지역을 평정하고 시찰할 목적으로 로마를 떠났다. 그는 안티오크·알렉산드리아·아테네를 방문했으며, 아테네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엘레우시스 제전을 참관했다. 그러나 이 비의적(秘儀的) 제전은 그의 철학관점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은 것 같다. 도나우 강 지역 원정에도 동반했던 황비 파우스티나는 이 여행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도 전 로마 시민은 극진한 경의를 표했으며, 마르쿠스도 〈명상록〉에서 사랑과 존경의 글을 그녀에게 바치고 있다. 어떤 고대 사료는 그녀가 정직하지 못하고 충성심이 없었다(즉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고)고 쓰고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177년 마르쿠스는 16세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다. 그들은 협력하여 도나우 강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제국의 북쪽 국경선을 확장·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180년 마르쿠스가 아들 콤모두스를 국정의 최고 조언자로 임명하고 난 직후 군대 사령부에서 숨을 거두었을 무렵 거의 결실을 맺고 있었다.

 

평가

마르쿠스가 단 하나 살아남은 아들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비극적 역설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콤모두스는 뛰어나지 못한 황제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러나 다음의 2가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고대 사료를 보면 황제란 원로원의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에 따라 훌륭한 황제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황제가 되기도 한다. 둘째, 콤모두스가 북부지역의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한 것은 아버지처럼 고집스럽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팽창주의를 추구한 일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들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도록 결정한 점을 들어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개 마르쿠스가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능한 '철학자'의 길을 걸은 뒤 다시 노골적으로 세습왕조를 고수하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는 주장이다. 사실상 마르쿠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다면 이것은 그에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정치가였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도량이 아주 넓은 정치가는 결코 아니었으며 현자(賢者)도 물론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는 역사적으로 과대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몰락의 징조가 숱하게 드러난 제국의 금빛 휘장 아래서 혼란스런 방식으로 대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혹독한 평가일지라도 그의 고귀한 품성과 헌신성을 가리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꼼꼼하게 비용을 따지면서도 또한 서슴지 않고 그 비용을 치른 인물이었다.J. A. Crook 글 | 洪健寧 참조집필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마르코만니전쟁 (Marcomannic War)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66∼172년과 177∼180년의 2회에 걸쳐 마르코만니인(人)을 격파한 싸움으로 서(西)게르만의 한 부족인 마르코만니인들이 도나우강(江)을 건너 로마 제국령으로 침입하자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를 격퇴하여 그들의 원거주지에 정착하게 하고, 재침입에 대비해서 변경방비를 튼튼하게 하였다. 그러나 180년 빈드보나(지금의 빈)에서 병사하였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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