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맹자 /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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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정우봉-고려대 국문과 교수>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양계초는 일찍이 논어 맹자를 읽는 방법을 비교 설명하는 자리에서 `논어'는 이를테면 주식인 밥이요 자양에 가장 좋고,`맹자'는 약과 같으니 질병 제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맹자 독법의 몇가지 측면을 언급하였는데 기상이 웅대하여 거침이 없고 광명정대하여 감추어진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하며,그 의지가 올곧아 꺾이지 않음을 볼 것이니 그 말을 좇는다면 어떤 환경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스스로를 낮추거나 아첨하는 일 없이 당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제후와 대등한 입장에 서서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주장을 과감하게,때로는 완곡하면서도 예리하게 설파하는 맹자의 능수능란한 논변과 웅대한 기상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한 제후와의 대화에서 오십보 백보의 고사를 적절히 원용해 상대방의 허점을 공격함으로써 상대방을 자기도 모르게 설득당하게 하는 뛰어난 변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맹자는 변론과 비유가 뛰어나며,그 문장이 유창하고 예리하고 또한 박력과 활기에 넘친다이러한 점에서 맹자는 전국시대의 대표적 사상서로서 뿐만 아니라,사마천 한유 등의 문장에 큰 영향을 미친 선진(先秦) 시대의 대표적 산문 저작이기도 하다

 

맹자 및 맹자는 여러모로 공자 및 논어와 병칭된다맹자는 공자에 버금가는 사상가로서 공맹(孔孟)으로 일컬어지며 그의 사상을 담고 있는 맹자 논어등과 함께 유가의 기본 경전으로 존승되었다

 

그러나 맹자가 살었던 당대에 그의 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유학의 한 지류에 불과했으며,그 지위 또한 결코 높지 않았다당나라 때 한유에 의해 재평가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그 지위는 낮았다이후 송나라에 들어와 성리학이 자리잡으면서 비로소 맹자는 사서(四書)의 하나로 편입되면서 유가의 기본 경전으로 격상되기에 이르렀다

 

맹자의 이름은 가()이며,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가까운 추읍에서 태어났다대체로 기원전 4세기 무렵에 활동한 그는 부유하다고 할 수 없는 사() 계층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하였다특히 그의 성장 과정과 관련하여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세번 집을 옮겼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베틀을 잘라 아들을 가르쳤다고 하는 단기지교(斷機之敎)의 고사는 유명하게 전해온다

 

유학에 뜻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평생 사명으로 삼았던 맹자는 여러 제후 국가를 편력하면서 자신의 일관된 학설과 정치적 입장을 설파하였다제후와의 대화에서 강론한 왕도정치론 맹자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한다

 

 

맹자에서는 () ()의 분변에 기초하여 사리사욕이 아닌 공명정대한 마음과 도덕심의 발양을 통해 어진 정치를 폄으로써 당시의 혼란된 상황을 막을 수 있으며 천하를 화평하게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이러한 주장은 전국시대 절대권력자인 제후들의 가혹한 수탈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현실적 처지를 바로잡고자 한 것이었으며,공자의 () 사상을 현실정치에 적용한 것이었다.「인간의 마음은 본래부터 선하다고 하는 성선설은 이러한 왕도정치론의 철학적 논거로 제창된 것이었다

 

맹자는 제후들에게 어진 정치를 행하기 위한 어진 마음의 소유를 역설하는 한편,백성들의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부의 토대 위에서 교육을 통한 사회 교화를 주장하였다이것이 이른바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다백성들에게 생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일정한 재산(생업)을 마련해 주어야 그들이 항시 변함없는 착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치의 주체를 백성이 아닌 제후에게 둔 것이었지만,끊임없는 전란과 노역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를 안정시키는 것을 현실정치의 우선순위로 두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맹자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제후들이 인의를 중시하는 왕도정치를 행하지 않고 학정만을 일삼을 때,백성의 지지를 얻으면 군주지만 백성의 원망을 얻으면 한 지아비며,인의를 해치는 적으로 살해되거나 추방될 수도 있다고 하여 혁명,무력에 의한 정권교체의 정당성을 거론하였다혁명은 곧 천명을 바꾼다는 것을 뜻하는데,이때 백성의 향배는 군주의 덕에 달려 있으며 백성이 지지하지 않으면 덕을 갖춘 다른 군주에게 천명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전국 말기의 사상가인 순자 또한 임금은 배와 같고,백성은 물과 같다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 엎기도 한다고 하여 맹자의 이같은 혁명설을 계승한 흔적을 보인다

 

맹자의 다른 곳에서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하였는 바,이같은 주장과 위의 맹자의 발언은 봉건시대의 절대권력자인 군주들에게 좋은 충고가 될 수도 있었지만,반대로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거스르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실제로 명나라 태조는 등극한 후 백성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 맹자의 그 구절을 문제삼아 이를 삭제하도록 명하였고,맹자의 위패를 공자 사당에서 축출하기도 하였다

 

맹자에 나타나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 가운데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이른바 민본주의 정신,백성의 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위정자의 자세,경제적 안정의 토대 위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현실정치의 방법 등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변함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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