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품팔이
by 송화은율매품팔이
안주의 한 백성이 볼기 맞는 매품을 팔아 살아갔다. 외군 아전이 병영에서 곤장 7대를 맞게 되매 돈 5궤미를 걸고 대신 매맞을 살마을 구하였더니 그 매품팔이가 선뜻 나섰다.
집장 사령은 그 자가 번번이 나타나는 것이 얄미워 곤장을 혹독하게 내리쳤다. 매품팔이는 곤장이 갑자기 사나워질 것을 생각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참아 보았으나, 두 번째 매가 떨어지매 도저히 견뎌 낼 재간이 없어서 얼른 다섯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5꿰미의 돈을 뒤로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집장 사령은 못 본 척하고 더욱 심하게 내리쳤다. 곤장 7대가 끝나기 전에 이러다가 자기가 죽게 될 것임을 깨달은 매품팔이는 재빨리 다섯 손가락을 다시 펴 보였다. 뒤로 먹이는 돈을 배로 올리겠다는 뜻인 줄 알 것이었다. 그 때부터 매는 아주 헐하게 떨어졌다. 매품팔이는 나와서 사람들을 보고 뽐내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에야 돈이 좋은 줄 알았네. 돈이 없었으면 오늘 나는 죽었을 사람이었지."
매품팔이는 돈 10궤미로 죽음을 면할 줄만 알고, 5궤미가 화를 불러온 것은 모르는구나. 어리석은 촌사람이로다. 이보다 더한 일이 있었다.
형조의 곤장 백 대는 속전이 7궤미였고, 대신 매를 맞아 주는 사람이 받는 돈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 매맞는 일로 살아가는 자가 있었는데, 어느 무더운 여름날 백 대 매품을 하루에 두 차례나 팔고 비틀비틀 자기 집을 찾아갔다. 그 여편네가 또 백 대 품을 선셈으로 받아놓고 있다가 남편을 보자 기쁜 듯이 말하였다. 사내는 상을 찌푸리고,
"내가 오늘 죽을 똥을 쌌어. 세 번은 못 하겠네."
여편네는 돈이 아까워서,
"여보 잠깐 고통을 참으면 여러 날 편히 배불리 수 있잖수, 그럼 얼마나 좋우. 돈이 천행으로 굴러온 걸 당신은 왜 굳이 마다 하우?"
하고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대접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취해서 자기 볼기를 쓰다듬으며 허허 웃고,
"좋아요."
하고 나갔다. 가서 다시 곤장을 맞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후 여편네는 이웃의 미움을 사서 구걸도 못 하고 길에 쓰러져 죽었다.
슬프다. 위의 두 이야기는 족히 세상에 경계가 되리라.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형식 : 고전 수필, 서사적 수필
성격 : 교훈적, 경세적
주제 : 인간의 헛된 욕심을 경계
내용 연구
매품팔이(代杖 : 대장) : 죄를 지은 사람이 맞을 곤장을 남이 대가를 받고 대신 맞아주는 일
외군 : 다른 군. 타 지역
곤장 : 죄를 다스릴 때 볼기를 치는 형구의 하나로 버드나무로 넓적하고 길게 만든 몽둥이
꿰미 : 노끈 같은 것으로 꿰어 놓은 정도의 분량
집장 : 매를 때리는 형을 집행함
사령 : 관아에 딸려서 심부름하는 사람
헐하게 : 엄하지 않게
형조 (刑曹) : 고려·조선시대 법률·사송(詞訟)·형옥(刑獄)·노예에 관한 일을 맡아본 중앙관청. 추관(秋官)이라고도 한다.
속전 : 죄를 면하고자 바치는 돈
선셈 : 물건을 받기 전이나 기한 전에 치르는 셈
천행 : 다행
내가 오늘에야 ~ 사람이었지 :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었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뜻을 말하고, 매품팔이의 변명
여보 ~ 그럼 얼마나 좋우 : 돈만 아는 아내의 지나친 욕심에서 남편의 희생을 생각하지도 않은 태도이다. 서민의 참담한 생활 속에 해학적 요소까지 지니고 있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은 매품팔이라는 두 편의 이야기가 연작 형태로 되어 있는 민간 설화이다. 전반부는 곤장 7대를 대신 맞고 돈 5궤미를 벌려다가 오히려 10궤미를 잃은 안주 매품팔이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돈만 아는 아내의 지나친 욕심으로 매품을 팔다가 즉사한 서울 매품팔이 이야기로, 매품을 팔아서 살아가는 비극적인 삶을 통해 당시의 궁핍한 사회상과 형정 관리의 타락상을 엿볼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매품이라도 팔아야 생계를 꾸려 갈 수 있는 서민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매품으로 재물까지 모으려 했던 인간의 헛된 과욕을 신랄히 꼬집는 풍자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를 통해 후세 사람에의 경계를 삼고자 했다.
심화 자료
청성잡기(靑城雜記)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잡록집(雜錄集). 필사본. 1책. 성대중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 순조롭게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통청운동으로 청직(淸職)에 임명되었으며, 박제가·박지원·유득공 등과 교유관계를 가졌다. 내용은 취언(言)·질언(質言)·성언(醒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취언이란 ‘헤아려 쓴 말’이라는 뜻으로 10편의 중국 고사를 쓴 뒤 ‘청장평왈(靑莊評曰)’로 시작되는 평론이 붙어 있다. 질언이란 ‘딱 잘라 한 말’이라는 뜻으로 댓구로 이루어진 120여 항의 격언을 모아놓은 것이다. 성언이란 ‘깨우치는 말’이라는 뜻으로 100여 편의 국내 야담을 모아놓았다. 원본은 이병도(李丙燾)가 소장하였으며, 1964년 김화진(金和鎭)의 소개로 《도서》 제6호에 전문이 활자화되어 소개되었다.
성대중(成大中/1732~18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사집(士執). 호 청성(靑城). 찰방(察訪) 성효기(成孝基)의 아들로, 김준(金焌)의 문인. 1735년(영조 2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5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64년 서장관(書狀官)으로서 통신사 조엄(趙d)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이후에 흥해군수 등을 지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규장각 검서관으로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관계를 가졌다. 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 때에는 노론계 북학자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조의 칭찬을 받고, 북청부사로 특채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패관문학을 천시하고 고문(古文)을 중시하였던 그의 문장론이나 《존주휘편(尊周彙編)》 편찬을 전후하여 제기했던 대명의리론은 아들 성해응(成海應)에게 계승되었다. 저서로는 《청성집》이 전한다.
형조 (刑曹) : 고려·조선시대 법률·사송(詞訟)·형옥(刑獄)·노예에 관한 일을 맡아본 중앙관청. 추관(秋官)이라고도 한다. 고려는 건국 당시에는 태봉(泰封)의 제도를 계승하여 의형대(義刑臺)라는 명칭으로 설치, 어사(御事)·시랑(侍郞)·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 등의 관원을 두었다가 곧 형관(刑官)으로 고쳤다. 995년(성종 14) 상서형부(尙書刑部)로 개칭하고, 문종 때 판사(判事:종1품)·상서(尙書:정3품)·지부사(知部事:종3품) 각 1명, 시랑(侍郞:정4품)·낭중(郞中:정5품)·원외랑(員外郞:정6품) 각 2명, 율학박사(律學博士:종8품) 1명, 율학조교(律學助敎:종9품) 2명 및 이속(吏屬)으로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4명, 계사(計史) 1명, 기관(記官) 6명, 산사(算士) 2명, 장수(杖首) 26명을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전법사(典法司)로 고쳤다가, 98년 형조라는 명칭으로 상서 l명, 시랑·낭중·원외랑 각 3명을 두었다. 1308년 언부(部)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곧 전법사로 다시 고치고, 56년에 형부, 62년에 전법사, 69년에 이부(理部), 72년에 다시 전법사로 고쳤다가 89년 형조로 복구하였고, 이것이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었다. 1404년(태종 4) 관제개편 때 정2품 아문(衙門)으로 승격하였다. 처음에는 전서(典書:정3품)·의랑(議郞:정4품)·정랑(正郞:정5품)·좌랑(佐郞:정6품)·주사(主事:정7품) 등의 관원을 두어 수재·화재·간음·도적·투살(鬪殺)·소송 등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따로 형조도관(刑曹都官)을 두어 노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1405년 이후에는 판서(判書)·참판(參判)·참의(參議) 각 1명, 정랑·좌랑 각 4명, 율학교수(律學敎授:종6품)·겸교수(兼敎授:종6품) 각 1명, 별제(別提:종6품)·심률(審律:종8품)·검률(檢律:종9품) 각 2명, 명률(明律:종7품)·율학훈도(律學訓導:정9품) 각 1명의 관원을 두었다. 또한, 형조의 업무를 분장하기 위해 그 예하에 상복(詳覆)·고율(考律)·장금(掌禁)·장례(掌隷)의 4사(司)와 전옥서(典獄署)·장례원(掌隷院) 등의 속아문(屬衙門)을 두었는데, 분장업무는, ① 상복사:중죄에 대한 복심(覆審) ② 고율사:법령의 조사와 형옥(刑獄)의 결정 ③ 장금사:문관(門關)·진량(津梁)·도로·금령(禁令) 관계의 일 ④ 장례사:노예에 관계되는 일 ⑤ 전옥서:죄수에 관계되는 일 ⑥ 장례원:노예의 장부와 소송에 관계되는 일 등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법무아문(法務衙門), 95년에 법부로 개칭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