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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선생께 답함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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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 선생께 답함

며칠 전에는 선생에게 더할 수 없는 후의를 입었습니다. 하찮은 저를 귀히 여겨 먼 길까지 전송해 주셨으니, 그 은혜와 영광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저같이 재주 없고 보잘것없는 몸으로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분발하지도 않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지혜가 없는데도, 몸을 닦고 실천해 나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옛 글에서 인용하시기를 틀림없을 때까지 반복해 주셨으니 이런 큰 복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머리가 부서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는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일찍이 들으니, 천 근이나 나가는 무거운 물건도 뱅분같은 장사가 들기는 쉽고, 매우 가벼운 깃털 하나도 초파리가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합니다. 그것은 힘에 강하고 약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실도 그와 같습니다. 특별히 애쓰지 않고도 도에 맞는 사람이 있고, 힘써 노력해야만 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 깊지 생각하지도 않고도 도를 터득하고 애쓰지 않고도 도에 맞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이 맑고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남보다 백 배나 공을 들여야 하고 스스로 쉼 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덕의 두텁고 엷음의 차이가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술의 미덕에 대해서는 오경(五經)과 제자(諸子) 및 사서(史書)에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술을 적당히 마시면 손님과 주인 사이에 좋은 분위기를 이룰 수 있고, 늙으신 어른들을 봉양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술을 돌리면 빛이 날 수도 있으니, 세상에 나아가도 거슬리지 않고, 수심에 잠겼다가도 술을 마심으로써 풀 수 있고, 답답한 가슴도 술로 편안하게 할 수 있으니, 술은 즐거이 천지와 더불어 평화로움을 함께하고, 만물과 더불어 그 조화를 통하고 옛 성현들과 함께 벗할 수 있고, 천백 년의 세월을 한가롭게 보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만약 술의 중용을 잃으면, 옥에 갇힌 사람처럼 산발하고, 끝없이 노래하고 어지러이 춤추며, 정중한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서로 사양해야 할 자리에서 엎어지고 넘어지고 합니다. 그래서 예를 망가뜨리고 의(義)를 없애서, 갑자기 광기가 발동해서 절도가 없어지고, 심하게 되면 까닭없이 제 마음대로 생각해서 성깔을 부리고 싸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는 작게는 몸을 망치고, 크게는 집안을 망치고, 더 크게는 나라를 망치는 사람들이 흔히 있습니다.

술이 끼치는 화가 이와 같은데도 주공과 공자는 술을 마셔도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았으며, 술의 덕이 이와 같은데도 진준과 주개는 술을 마시다가 몸을 망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술의 중용을 얻느냐 잃느냐 하는 차이는 머리카락 한 올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중간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을 굳게 다잡지 못하고 술을 마시는 일에 절제하지 못하면 그 유혹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겨져서 더욱 위태롭고 더욱 어지러워지다가 점점 술주정이 심해지고, 나중에는 자기가 술주정을 하는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있게 되니, 이치가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선비가 되려고 마음먹고도 뜻이 굳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못가짐을 단속하고 마음 속으로 잘잘못을 철저히 가려서, 어지러워지려는 뿌리를 막고 끊어내는 노력을 보통 사람보다 백 배나 더한 뒤에야 겨우 술의 화를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서'에는 계주지고(戒酒之誥)'가 있고 '시경'에는 빈연지편(賓筵之篇)'이 있고, 양자운은 술로써 잠(箴)을 지었고, 범노공은 술로써 시를 지었습니다. 저라고 해서 어찌 조용히 술잔을 들고 향음주례나 향사주례를 할때 제대로 예절을 지키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마음이 약하고 덕이 두텁지 못하여 술맛에 이끌려 절제하지 못하면, 마음은 흐트러지고 행동은 어지러워져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 초파리가 깃털 한 개도 짊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여 중년에 구설수에 오른 일이 적지 않았고, 버릇없는 주정뱅이가 되어 스스로 영영 버린 몸으로 치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몸과 마음이 모두 외부의 자극에 놀아나 정신은 지난날보다 소모되고, 행실은 날로 처음 먹었던 뜻을 저버리고, 모르는 사이에 부덕에 길들여져 집안에서까지 함부로 술주정을 부려 어머님께 큰 부끄러움을 드렸습니다. 맹자께서는 "바둑을 두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은 불효"라고 했는데, 하물며 술주정에 이르러서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깨어서 스스로 생각해 보면 불효의 죄는 삼천 가지의 죄 가운데 으뜸인데 무슨 마음으로 다시 술잔을 들 엄두를 내겠습니까? 이에 하늘과 땅에 다짐하고 육신(六神)에 참배한 뒤 내 마음에 맹세하고 어머님께 "지금부터 임금이나 아버님의 명이 아니면 감히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처럼 한 것은 술에 취하여 정신을 잃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그러니 신에게 제사 지내고 나서 마시는 음복이나, 헌수를 드리고 나서 돌리는 진하고 달콤한 좋은 술이 창자를 적셔도 정신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면, 제가 어찌 그것까지 사양하겠습니까?

저의 뜻이 대략 이와 같으니 선생께서 비록 술을 마시라고 하교를 하신다 해도, 맹세한 말을 저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맹세한 말을 저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속일 수야 있겠습니까? 설혹 제가 제 마음을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귀신을 업신여길 수야 있겠습니까? 또 귀신을 업신여길 수는 있다 하더라도 천지를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소홀히 한다면 몸둘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인자하신 어머님께서 자식을 기르면서 늘 "술을 조심하라"고 이르시다가 술을 끊겠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쁜 빛이 얼굴에 어렸으니, 술을 끊겠다는 저의 맹세를 어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아, 깨어 있는 굴원이나 술에 취해 지내던 유령이 본래 둘이 아니요, 청백함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백이나 화순함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유하혜가 마침내는 한 가지 도에 이르나니, 선생께서는 애써 술 못 마시는 목생을 잘못한다고 우기지 마시고, 일자(一字) 서신을 내려 가부를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월의 뜨거운 더위 속에 선생의 생활이 온갖 복으로 가득하시기를 빌며, 도가의 연단(煉丹) 만드는 데 쓰는 신묘한 복령 한 봉지를 올리오니, 제조하신 연단일랑 혼자 드시지 말고 저에게도 좀 나누어 주시어, 신선 도술로 이 뼈만 남은 앙상한 몸도 함께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남효온

원제 : 답동봉산인잠공서

갈래 : 수필

성격 : 우의적(友誼的), 서간적(書簡的),

주제 : 술을 사랑할 것을 권함. 권주(勸酒)

출전 :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심화 자료

남효온(南孝溫)

 

1454(단종 2)∼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四)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활동 상황〕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 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다.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문집 간행 경위〕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端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燃藜室記述, 償畢齋集, 虛庵遺集, 秋江集, 大東奇聞.(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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