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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手記)(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 릴케(R.M. Rilke)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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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手記)(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 릴케(R.M. Rilke)

작품의 아우트 라인

이 산문 작품(초판)은 65의 패러그래프(paragraph)로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나무토막을 이어 맞춰서 쌓아 올린 것 같은 구성에 의하여, 새로운 참신미(斬新味)를 자아내고 있다. 그 소재(素材)는 대별하여, 파리에 있어서의 주인공의 생활, 유년시절의 추억, 풍부한 독서(讀書)의 추억이라는 3부로 된다.

감수성이 강한 28살의 청년 말테는, 덴마크의 고향을 떠나 「살기 위하여」 파리로 온다. 지금은 부모도 없는 천애의 고아이다. 「나는 지금 외톨박이다. 아아, 비가 눈에 스며든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슬픈 인생의 이면과 패배된 모습 뿐이다. 앙상하게 드러나 있느 s부서진 집의 담벼락, 병원, 간이 숙박소, 눈먼 야채 장수, 여자 걸인, 신문팔이, 길거리에서 본 괴상한 몰골을 한 정신 병자, 밀크홀에서 만난 빈사(瀕死)의 사내, 말테의 아파트에 사는 신경 쇠약의 의학생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은, 결국은 그것들이 모두 그 자신의 마음의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었다. 그는 지금 「보는 것을 배우고 있다」. 「아무리 추악한 현실일지라도, 현실을 위하여서라면, 일체의 꿈을 기꺼이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준비가 없다면, 어떻게 그가 파리의 싸구려 하숙 생활을 이겨 낼 수 있겠는가.

원래 말테는, 덴마크의 유서있는 집안의 태생이다. 할아버지 크리스토프 디드레프 브리케는 우르스골 촌(村)에 광대한 영지를 가진 시종직(侍從職)이었고, 아버지는 주렵관(主獵官)이었다. 외가의 조부 불라에 백작(伯爵)의 영지 우르네크로스타에는 몇 마리의 사냥개가 있었는데, 소년 말테의 친구였다. 소년 말테는,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는 두터운 융단이 깔린 대저택 안에서 고이 키워졌다. 곧잘, 열병에 걸려 환각(幻覺)을 보는 선병질적인 어린애였다. 어느 겨울 날 해질 무렵, 마루에 떨어진 연필을 주울려고 책상 아래로 몸을 웅크린 말테에게, 별안간 맞은 편 벽에서 큰 여읜 손이 불쑥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소질은 성인이 된 말테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 의사로부터 전기 요법을 권유받을 만크, 파리의 말테는 여러 가지 불안과 환상 속에서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세느 강변을 거닐 때에는, 고서점(古書店)의 주인이 된 기분이 나고, 국립 도서관에서 프랑시스 쟝을 읽으면, 인적이 끊긴 곳에 별장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크류니 박물관에서 「여자와 일각수(一角數)」의 고브랑을 보면, 한때 연모 하였던 절은 숙모(叔母) 아페로니가 생각나기도 하였다.

말테는 특이한 연애관(戀愛觀)의 소유자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을 단념함으로써,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베니스에서 본 덴마크의 한 여자 가수에서 아페로니의 옛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 가수가 부른 노래 「한번도 그대를 붙들지 않았기에, 나는 더욱 굳게 그대를 끌어 안고 있지」는, 정녕 말테가 아페로니에 대하여 품고 있는 심정이었다.

『수기』의 마지막 패러그래프는 「방탕한 아들의 이야기」다. 말테에 의하면, 이것은 「사랑받는 것을 바라지 않은 사내의 이야기」, 세속적인 사랑을 끊고 오로지 신(神)의 사랑을 찾은 사내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무척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다만 일자(一者)만이 사랑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는 사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라는 일구(一句)로 이 수기는 끝나고 있다.

주인공 하이라이트

1927년, 잡지 N.R.F에 발표된 「어느 여자 친구」에게 보낸 프랑스어의 편지에서, 릴케는 이렇게 쓰고 있다---「이 책(『말테의 수기』)은 인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의 증명으로 RMx나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 반대고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비록 그 속에 씁슬한 비난의 화살이 있다 해도, 그것은 결코 인생에 향하여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들은 능력의 부족, 주의력의 산만으로 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이 세상의 숱한 재화를 거의 모두 잃어버린다는 것을, 이 소설은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작자의 생애

릴케(Rainer Maria Rilke)1875년, 체코(당시는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36년 스위스의 바르몬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루 죽은 20세기 독일의 대표적 서정 시인. 아버지는 장교로 있다가 철도 회사의 사원이 된 평범하고도 고지식한 사람이었으나, 어머니는 허영심이 강하고, 릴케에 앞서 태어나 요절한 딸 대신 루네(릴케의 야명)를 여장시키는 그런 별난 성격의 소유자였다. 11살 때에 아버지의 희망으로 장크트 볘르텐의 육군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것은 시인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에 못지 않는 공포의 경험이었다.

16살때에 메리슈 봐이스킬헨의 육군 사관 학교를 퇴학하고, 동년, 린쯔 상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퇴학하였다. 22살 때에는 뮨헨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무렵, 루앙드레이스 살로메를 알게 되었다. 살로메는 그녀의 『생애의 회고』에서, 「나는 릴케의 아내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2회에 걸쳐 러시아를 여행하고 톨스토이를 방문하였다. 26살 때에는 로댕 문하의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하고, 북부독일의 디트마루센의 평원에 있는 붸스타 붸데촌(村)에서 살았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이미 다음 해에는 가정 생활을 해산하고, 『로댕 론(論)』을 집필하기 위하여, 부부는 각각 파리로 나와 각자의 길을 걷고자 별거 생활을 하였다.

30∼31살 때에는 무던에 있는 로댕의 집에 일종의 비서로서 들어가 살았다. 34살 때, 후에 시인의 후원자가 된 닥시스 후작(侯爵) 부인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아들리아 해안의 두이노에 있는 그녀의 별장의 손님이 되어, 대표작 『두이노의 비가(悲歌)』의 인스피레이션을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시인도 병역(兵役)을 따르게 되었으나, 인제르 서점주(書店主) 키펜베르그 등 다수의 문화인의 운동이 주효하여, 소집 해제가 되었다.

45살 때에 처음으로 스위스의 봐레 지방을 찾고, 다으 해 뮈조트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영주하며, 10년의 세월을 두고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하였다. 만년에는 곧잘 병에 걸렸고, 발레리, 지드, 에드몽 쟈르, 샤르를 빌드락 등 많은 프랑스의 문인들과 교우하였다. 그의 묘는 뮈조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랭의 교회 묘지에 있다.

명문구 낙수

「젊어서 시를 쓸 것은 아니다. 사실은 더 기다려야 한다. 되도록 늙을 때까지 긴 일생의 의미(意味)와 꿀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 뒤에, 겨우 10행 정도의 좋은 시를 쓰게 될지 모른다. 시는 감정이 아니고…… 체험이기 때문이다. 」……「추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추억이 많을때에는, 그것을 잊을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그것이 되살아날 때까지 기다리는 큰 인내가 필요하다.」(『말테의 수기』에서).

심화 자료

백혈병으로 죽은 릴케의 묘비명(墓碑銘)은 자작의 시 「아아, 장미꽃, 순수한 모순의 꽃. 꽃잎과 꽃잎이 몇겹씩 겹쳐져서 눈꺼풀처럼. 누구의 꿈도 아닌 잠을 포근히 감싸 주고 있네.」가 새겨져 있다.

릴케의 어머니는 어린 그를 계집아이처럼 옷을 입혀 키웠는데, 부모가 이혼한 뒤에는 군인을 좋아하는 아버지 때문에 갑자기 육군 유년 학교를 거쳐 사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으나, 그는 중도 퇴학하였다.

 

세계문학의 명작과 주인공 총해설에서 - 소봉파편- (일신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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