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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해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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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해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시습

갈래 : 단편 소설. 명혼(冥婚) 소설, 시애 소설, 염정 소설, 전기소설, 번안 소설

연대 : 세조 때.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구성 : 4단 구성 혹은 5단 구성(전체로는 발단에 속함)

기 :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 놀이를 함

승 : 양생과 여인의 만남과 이별

전 : 양생과 여인의 재회와 이별

결 : 양생이 여인의 명복을 빌고 속세를 떠남

발단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생은 조실부모하고 나이가 차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만복사에는 매년 삼월 이십사일 청춘 남녀들이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는데, 양생도 저포를 가지고 가서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과 내기를 하여 만약 자신이 이긴다면 좋은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했는데 양생이 이긴다.

전개

불좌 뒤에 숨어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들어와 불전에 축원문을 올린다. 양생은 자신과 같이 여인도 배필을 원하고 있음을 알고,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여인은 양생을 자신의 개령동 집으로 데리고 간다.

위기

양생은 그녀와 즐거운 마음으로 지냈는데, 삼 일째 되는 날 여인은 양생에게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헤어질 때 그녀는 은잔을 주며 내일 보련사에서 자신의 부모를 만나라고 말한다.

절정

다음날 양생은 보련사 가는 길에서 여인의 부모와 만나게 된다. 은잔을 얻게 된 경위를 말한 양생은 그녀가 왜구의 난 때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는다. 보련사에 도착한 양생은 음식을 먹는 혼백의 수저 소리로써 여인의 존재를 그녀의 부모에게 확인시켜 준다. 부모는 양생을 사위로 인정해 주고 동침해 줄 것을 요청한다.

결말

여인과 헤어진 양생은 그녀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돈으로 개령동에 가서 여인의 무덤에서 정식 장례를 올리고 자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

성격 : 낭만적, 전기적, 종교적(불교적, 도교적)

제재 : 남녀간의 사랑.

주제 : 죽은 여인과 시공(時空)을 초월한 사랑, 죽음을 초월한 사랑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로, 한문으로 표기됨.(이 작품은 '양계와 음계의 인물의 만남- 이별 - 양계의 인물이 속세를 버림'이라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주인공 양생은 비록 현실이 아닌 음계의 인물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한다. 음계의 여인이 사흘 동안의 재가 끝난 후 공중에 나타나 양생에게 정업을 닦아 속세의 누를 벗어날 것을 부탁하지만, 양생이 장가도 들지 않고 속세를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작품은 설화적 소재에 자신의 창의성을 덧붙여 상당 수준의 소설적 형식을 갖춤으로써 소설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기타 : 중국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고, 재자가인형 주인공이 등장하며, 인귀 결합 모티브를 사용했으며, 몽유록 형태로 현실계와 비현실계의 교차 구성을 보여줌.

줄거리 : 죽은 여자와의 사랑을 그린 명혼소설(冥婚小說)이다. 전라도 남원에 양생(梁生)이라는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라는 절에서 방 1칸을 얻어 외롭게 살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절에 와서 소원을 비는 날 그는 모두가 돌아간 뒤 법당에 들어갔다. 저포를 던져 자신이 지면 부처님을 위해 법연(法筵)을 열고, 부처님이 지면 자신에게 좋은 배필을 달라고 소원을 빈 다음 공정하게 저포놀이를 했는데 양생이 이기게 되었다. 양생이 탁자 밑에 숨어 기다리고 있자 15, 16세 정도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배필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축원문을 읽은 다음 울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양생은 탁자 밑에서 나가 처녀와 가연을 맺은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얼마 뒤 양생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나 자신이 3년 전에 죽은 그집 딸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게 되었다. 양생은 처녀의 부모가 차려놓은 음식을 혼령과 함께 먹고난 뒤 홀로 돌아왔다. 어느 날 밤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 자신은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양생도 불도를 닦아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처녀를 그리워하며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혼자 살았다고 한다.

출전 : 금오신화

내용 연구

만복사 저포기 : '만복사'라는 절은 양생과 여인이 결연을 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고, '저포'라는 놀이는 양생이 여인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전라도 남원(南原)에 양생(梁生)이란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아직 장가를 들지 못하고 홀로 만복사(萬福寺)[남원 기린산에 있었던 절] 동편 방 한 칸에서 외로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절간 방 앞에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때마침 봄을 맞아 꽃이 활짝 피어, 온 뜰 안이 찬란하여 은세계를 이루었다. 그는 달밤이면 배나무 밑을 거닐면서 시를 읊조렸다.[금오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는 대체적으로 주인공의 비판적 현실에 대비되는 낙관적 서정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등장 인물의 심리를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역할을 한다. 원망이나 한탄을 시로 표현하여, 정서를 극대화하고 있다]

한 그루 배꽃나무 적적함을 짝하니

시름도 많아라, 달 밝은 이 밤이여.

사나이 홀로 누운 외로운 창가에

어디서 들려오나, 고운 임 퉁소 소리

외로운 비취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 맑은 물에 노니는데,

뉘 집 인연 그리며 바둑을 두는가.

가물가물한 등불은 이 내 신세 점치는 듯.[홀로 사는 주인공의 심리가 담겨 있고, 주인공이 현재 보고 있는 풍경이 작품에 담겨 있으며,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처지에 동화될 수 있도록 유도하며, 사건의 흐름을 잠시 중지시켜서 흐름이 단조롭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음. 전전반측]

 

양생이 시를 읊고 나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되,[비현실적인 내용으로서, 전기적 요소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후의 내용이 비현실적, 낭만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대가 참말로 고운 배필을 만나고자 할진댄 그 무엇 근심할 것 있으랴.” - 양생이 배필 없음을 한탄함

이 소리를 듣고 양생은 크게 기뻐해 마지아니하였다. 그 이튿날은 곧 삼월 스무나흘이었다. 그 고을에서는 해마다 이 날을 맞게 되면 많은 젊은 남녀들이 반드시 만복사를 찾아 등불을 켜고 저마다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었다.[등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풍습은 일종의 의례이다. 이는 시공간을 바꾸기 위한 장치이다. 이 때부터 소설 속의 공간은 초월적 시공간으로 바뀐다. 따라서, 이 부분은 전기 소설의 우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장치로서 간주할 수 있으며, 그 필연성은 연등 행사, 즉 불력에서 비롯된다.]

 

이 날 양생은 저녁 예불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법당[불상을 안치하고 도를 설법하는 절의 정당]으로 들어가 자기 소매 속에 깊숙이 간직해 갔던 저포(樗蒲)[호인들이 점칠 때 쓰던 윷과 같은 기구]를 내어, 부처님 앞에 던지기에 앞서 스스로 바라는 바를 사뢰었다.

 

“오늘 제가 부처님을 모시옵고 저포놀이를 해 볼까 합니다. 만약 소생[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 여기서는 '양생'을 가리킴]이 지오면 법연(法筵)[불도를 설법하는 자리, 불전에 절하는 자리]을 베풀어 부처님께 보답해야 할 것이오며,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부처님께서 지신다면 반드시 아름다운 여인을 소생의 배필로 점지[신불이 자식을 낳게 해주는 일. 여기서는 아내를 내려 주는 일을 뜻함]하여 주시옵기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렇게 축원을 한 다음 문득 저포를 던지었더니 과연 양생이 승리하였으므로, 곧 그는 부처님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되,

“인연은 이미 정하여졌사오니, 소생[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1인칭 대명사]을 속이지 마시기 바라옵니다.”

 

하고, 양생[초월적인 힘에 기대어 소망을 성취시키고자 하는 인물]은 불탁(佛卓)[불상을 모셔 둔 탁자] 밑에 숨어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왔다[양샹의 발원의 결과]. 그녀는 열대여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깨끗이 단장하고 태도가 아름다운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니, 그 아름답고 고운 모습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화용월태(花容月態) :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원뜻은 꽃같은 얼굴과 달 같은 태도.]. 흰 손으로 등잔에 기름을 따라서 등불을 켜고, 향로에 향을 피운 뒤에 세 번 절하고 꿇어 엎드려 슬피 탄식하여 말하되,

“인생이 박명[기구한 운명. 필자가 사나움]하기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사오리까?”[처녀의 운명이 기구함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소설에서 처녀는 왜구의 난리 때 죽은 처녀의 영혼이다]

 

하고, 품 속에 간직하였던 축원문[잘 되게 하여 달라고 바라며 비는 글 / 자신의 배필을 얻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글]을 꺼내어 부처님 탁자 위에 드리니, 그 글에 하였으되,

 

“아무 고을 아무 동리에 사옵는 소녀는 외람됨[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치다. 분에 넘치다]을 무릅쓰고 부처님 앞에 사뢰옵니다[말씀드리었다]. 이즈음 변방[나라의 변두리가 되는 지방]이 허물어져 왜도적들이 쳐들어와 싸움이 쉴 날 없사와 봉홧불[적이 쳐들어 옴을 알리기 위하여 산꼭대기에서 피워 올리는 불(연기)]이 해마다 그칠 날이 없사옵니다. (중략) 흐르는 흰구름과 쉬임 없는 물결 소리 들으며 무료한 세월을 보내옵나니, 그윽이 깊은 골짜기에서 평생의 박명 박행(薄明薄倖)[운명이 기구하고 불행함. 목숨이 짧고 불행함]함을 탄식하오며, 홀로 공규(空閨)[남편 없이 여자 혼자 사는 방]를 지키어 기막힌 밤을 보내오니, 임 그리운 이내 정이 채란(彩鸞)[아름다운 빛깔의 난새의 일종]의 외로운 춤을 홀로 슬퍼하였삽더니,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서러운 혼백은 맘둘 곳 없사옵고,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 밤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마저 끊어질 듯하옵니다. 어지신 부처님이시여, 자비와 연민함을 베푸시옵소서. 인간의 한평생이 이미 정해져 있사옵고 선악(善惡)의 업보(業報)[전세(前世)의 악업(惡業)으로 인한 과보. 업과(業果).] 또한 피할 길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하루바삐 꽃다운 인연을 맺도록 배필(配匹)[부부의 짝]을 정하여 주시옵소서.” - 아름다운 여인의 축원

여인은 축원문을 마치고 난 후에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 슬픈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에, 불좌[부처를 모신 자리] 밑에 숨어서 이를 엿보던 양생은 그 아름다움에 정을 가누기가 어려워, 문득 뛰어 나와 말하되,

“아가씨, 지금 읽은 글은 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하고, 이윽히 여인의 글발을 한번 훑어보고 만면(滿面)[얼굴 가득]에 기쁜 빛을 감출 수 없어[자신과 같은 소망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여인에게 일러 말하되,

 

“그대는 누구시기에 이 곳에 홀로 와 있습니까?”

그러자 여인은 아무런 놀라움도 없이 답하여 말하기를,

 

“저도 사람입니다. 무슨 의심나는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당신은 다만 아름다운 배필을 구하시면 그뿐[양생의 소망], 굳이 성명을 알아 무엇하시겠습니까?”

 

이 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절 한모퉁이에 옮겨 살고 있었기 때문에, 법당 앞에는 다만 쓸쓸한 행랑채 끝에 매우 비좁은 판자방이 한 칸 있었다. 양생은 여인에게 눈짓하여 옆에 끼고 안으로 들어가니, 여인도 이를 거절치 않고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에 두 사람은 운우(雲雨)의 즐거움[운우지락 : 남녀가 육체적으로 어울리는 즐거움]을 누리었다.(하략) - 양생과 여인이 인연을 맺음

(중략)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함께 개령동(開寧洞)으로 향하였다[만복사 한쪽에서 운우지정을 나눈 두 사람이 새로운 장소인 개령동으로 옮겨 가 함께 지냄]. 어느 한 곳에 이르니 다북쑥이 들을 덮고 참천(參天 :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으로 높이 솟음)한 고목 속에 정쇄(精灑 : 매우 맑고 깨끗하다)한 수 간(間) 초당이 나타났다. 양생은 아가씨가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는 침구와 휘장이 잘 정리되어 있고, 밥상을 올리는데 모든 음식이 어젯밤 만복사의 차림과 차이가 없었다. 양생은 퍽이나 기쁜 마음으로 이틀 동안을 유유히 보냈다. 시녀(侍女)는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조금도 교활한 면이 없었다. 좌우에 진열되어 있는 그릇들은 깨끗하고 품위가 있어 그는 간혹 의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인간 세계가 아님을 암시하는 도구들]. 그러나 그녀의 은근한 정에 마음이 끌려 다시금 그런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양생에게 말했다.

“당신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곳의 사흘은 인간의 3년과 같습니다[왜구가 창궐할 때 정절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처녀의 환신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남]. 가연을 맺은 지가 잠깐인 듯하오나 오래 되었사오니, 서운하지만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셔서 옛날의 살림을 돌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중략>

술을 다하여 헤어지게 되자 그녀는 은잔[양생이 비현실계의 인물을 만났다는 것을 현실계의 인물에게 알리는 매개물로서 가능함] 하나를 꺼내어 양생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일 제 부모님께서 저를 위하여 보련사(寶蓮寺)에서 음식을 베푸실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진정으로 버리지 않으신다면 도중에 기다렸다가 함께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생은 대답했다.

“예, 그렇게 하겠소.”

하고는 양생은 이튿날 그녀의 말대로 은잔을 가지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렸다. 과연 어떤 귀족 양반 한 분이 딸의 대상(大祥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을 치르려고 수레와 말이 길에 잇달리게 보련사를 향하여 가는 것이었다. <중략>

 

양반은 타고 가던 말을 즉시 멈추고 양생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은잔을 갖게 된 경위를 물었다. 양생은 그 전날 여인과 약속한 일을 빠짐없이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그 양반은 놀랍고 의아하여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 팔자가 불행하여 슬하에 오직 여식 하나밖에 없었는데, 왜구의 난에 그마저 빼앗기고는[여인이 죽게 된 원인이 밝혀짐] 미처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개령사(開寧寺) 곁에 묻어두고는 머뭇거리다가 지금에까지 이르렀네. 그러다 보니 오늘이 벌써 대상인지라 부모된 도리로 보련사에서 재나 베풀어 볼까 해서 가는 길이네[인물의 말을 통해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이 모두 밝혀진다.]. 자네가 정말 그 약속대로 하려면 조금도 의아하게 생각지 말고 여식을 기다려서 함께 오게.”

 

말을 마치고 양반은 먼저 보련사로 향하였다. 양생은 혼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과연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그녀는 시녀를 데리고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 절로 향하였다.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먼저 부처에게 예를 드리고 곧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친척과 절의 스님들은 모두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오직 양생만이 혼자서 보았다. 그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함께 저녁이나 드시지요.”

 

양생이 그 말을 여인의 부모에게 알리자, 여인의 부모가 시험해 보려고 같이 밥을 먹게 하였다. 그랬더니 오직 수저 놀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인간이 식사하는 것과 한가지였다. 그제야 여인의 부모가 놀라 탄식하면서, 양생에게 권하여 휘장 옆에서 같이 잠자게 하였다.[양생은 은잔을 매개로 하여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하고 이어서 여인의 숟가락 소리로 여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난 뒤 그녀의 부모로부터 인정받는다. 동시에 여인의 존재도 확인된다.]

무시고 : 수시로

비취 : 물총새

뉘 집 : 누구의 집

배필 : 부부의 짝

할진댄 : 할 것이면, 할 것 같으면

법당 : 불상을 안치하고 도를 설법하는 절의 정당

사뢰었다 : 말씀드리었다.

소생 :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1인칭 대명사

법연 : 불도를 설법하는 자리

점지 : 신불이 사람에게 자식을 낳게 하여 주는 일. 여기서는 배필을 내려 주는 일이란 뜻.

화용월태(花容月態) :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원뜻은 꽃같은 얼굴과 달 같은 태도.

채운 : 여러 가지 빛깔로 아롱진 고운 구름

월궁 : 달 속에 있다고 하는 궁전, 선녀 항아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음

변방 : 나라의 변두리가 되는 지방.

봉홧불 : 적이 쳐들어 옴을 알리기 위하여 산꼭대기에서 피워 올리는 불(연기)

유리 걸식 : 이리저리 흩어져서 빌어 먹으러 돌아다님

궁벽한 : 매우 후미지어 으슥한

사옴 : 살아 옴. 사는 것

박명 박행 : 운명이 기구하고 불행함. 목숨이 짧고 불행함

공규 : 남편 없이 여자 혼자 사는 방.

채란 : 아름다운 빛깔의 난새.

그러구러 : 우연히 그렇게 되어

구곡간장 : 깊은 마음 속

연민함 : 불쌍하고 가련함

백년가약 :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한 평생을 아름답게 지내자는 언약

불좌 : 부처를 모신 자리

황홀난측 : 황홀하여 분별하기 어려움

사경 : 새벽 두 시 전후.

건즐(을) 받들다 ; 여자가 아내나 첩이 됨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건즐 : 수건과 빗

비익조 : 새이름

칠등 : 무덤 속에 켜는 등불

남교 : 선인 배항이 운교 부인을 만나던 곳

월로 : 중매를 하는 선인

양홍 : 전한 때 사람

맹광 : 양홍의 아내

초협 : 중국의 지명

소상강 : 순임금의 두 아내 아황과 여영이 놀던 곳

동심쌍관 : 부부가 변하지 않기를 맹세하기 위해 맺은 실

부단 부채 : 사랑을 잃은 여자를 비유

봉래섬 : 신선이 사는 곳

문소 : 인선

장석 : 인선

수레와 말이 길에 잇달리게 : 긴 행렬을 이루어

왜구의 난에 그마저 빼앗기고는 : 왜인의 난리로 딸을 빼앗기고, 이 작품은 15세기에 지어진 것이므로 임진왜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대상 : 사람이 죽은 지 두 돌만에 지내는 제사.

서생 : 유학을 닦던 사람.

광중 : 무덤 속

여식 : 딸자식

재 : 명복을 빌기 위하여 드리는 불공

보련사 : 남원의 보련산에 있음

개녕사 : 남원의 대수산에 있음

건상과 상서 : '시경'에 나오는 말로, '건상'은 청춘남녀의 음탕함을 '상서'는 사람의 무례함을 풍자한 내용이다.\

 

양대의 운우 : 중국 초나라 때 송옥이 지은 '고당부'에 나오는 이야기에. 무산 선녀가 임금을 사모하여 아침에는 구름으로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에 머물렀다는 데서 온 말.

들판 다북쑥 속에 묻혀 있어서 : 들판의 땅 속에 묻혀 있어서, 무덤 위에 쑥이 잘 자라므로 '다북쑥'은 무덤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인다.

오작은 은하에 흩어지매 : 견우와 직녀를 만나도록 은하수에 오작교를 놓아주던 까막까치들이 다 흩어져 갔으니, 고사와 전설을 인용하여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나타낸 말이다.

삼세 : 불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함

시식 : 음식을 보시함

양계 : 사람이 사는 이 세상. 반대는 음계

난조와 무산 : '난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황과 비슷하다는 상상의 새. '무산'은 중국의 사천성의 명산

제전 : 의식을 갖춘 제사와 갖추지 않은 제사를 통틀어 이르는 말.

서시와 숙진 : '서시'는 월의 미녀로 월왕 구천이 패한 뒤 오왕 부차에게 미인계로 보낸 인물. '숙진'은 중국 송나라의 여류시인이었다.

가을철 비단 부채 무정도 하였소 : 죽어 땅속에 있으니 가을 부채처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명을 달리했을지라도 실상 운우의 즐거움을 같이하였소 : '유명'을 달리한다는 것은 밝고 어둠을 달리했다는 말로, 밝은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갈리었다는 말은 죽음을 뜻한다. '운우의 즐거움'이란 남녀간의 사랑의 즐거움을 뜻한다.

달나라에서 난조를 타고 무산의 비가 되오리다 : 달나라에 가서 봉황보다 더 상서롭다는 난새를 타고 무산의 비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려 전하는 다섯 편 중의 하나로 일종의 전기소설(傳奇小說)로, 전래하는 인귀교환설화(人鬼交驩說話), 시애설화(屍愛說話), 명혼설화(冥婚說話)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이승의 사람과 저승의 영혼의 결합이라는 전기성(傳奇性)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전래 설화, 패관 문학, 가전(假傳) 등의 내적 요인에다 중국 진당(晋唐) 전기체(傳奇體) 소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직접적으로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의의를 지닌다.

이 글의 소설적 특징은 <금오신화>에 실려 있었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재자가인(才子佳人)이고 한문 문어체로서 사물을 극히 미화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안에 보이는 운문은 상황에 따른 정감을 집약시켜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는 구실을 하고 있지만, 당대의 여건으로 본다면 모든 문장이 운문에서 완전히 탈피하기 어려웠다. 불교의 연(緣) 사상이 바탕이 된다.

이 작품은 '양계(陽界)와 음계(陰界)의 인물의 만남, 이별, 양계의 인물이 속세를 버림'이라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주인공 양생은 비록 현실이 아닌 음계의 인물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것을 한갓 장난이나 일시적인 것으로 알지 않고 진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음계의 여인이 사흘 동안의 재가 끝난 후 공중에 나타나, 자신이 양생의 은덕으로 타국의 남자로 태어났음을 말하고, 양생에게 정업을 닦아 속세의 누를 벗어날 것을 부탁하지만, 양생이 장가도 들지 않고 속세를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작품은 설화적 소재에 자신의 창의성을 가하고 상당 수준의 소설적 형식을 갖춤으로써 소설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 ( 東京 )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 金鰲新話≫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 ( 金集 )이 편찬한 한문소설집에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과 더불어 필사된 것이 있다.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그린 애정소설이며, 구조 유형상 명혼소설(冥婚小說) 또는 시애소설(屍愛小說)이라고도 한다.

〈만복사저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총각 양생(梁生)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의 구석방에서 외로이 지냈다. 배필 없음을 슬퍼하던 중에 부처와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아름다운 처녀를 얻었다.

그 처녀는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이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3년간 궁벽한 곳에 묻혀서 있다가 배필을 구하던 터였다. 둘은 부부관계를 맺고 며칠간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양생은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났다. 여기서 양생은 자기와 사랑을 나눈 여자가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의 혼령임을 알았다. 여자는 양생과 더불어 부모가 베푼 음식을 먹고 나서 저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생은 홀로 귀가했다.

어느날 밤에 여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은 타국에 가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당신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여자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지냈다.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었다.

〈만복사저포기〉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주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통해 강렬한 삶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죽은 여자는 민간 속신에 나타나는 문자 그대로의 귀신이 아니다. 그것은 역설적인 구조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작자의 논설에 나타난 사상과 일치한다.

〈만복사저포기〉의 생인(生人)과 사자(死者)의 사랑은 살아 있는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욱 강렬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 의지를 좌절시키려 드는 세계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더욱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작품의 결말은 비극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도교적인 초월로 보기도 한다. 현실적·일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현실을 깊이 있게 주시하면서 현실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주의적·사실주의적 경향을 띤다.

〈만복사저포기〉는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적 가치와 소설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金鰲新話(李家源譯註, 通文館, 1925),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現實主義的 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大學校, 1971), 金鰲新話考察(金一烈, 朝鮮前期의 言語와 文學, 韓國語文學會, 1976), 金鰲新話의 悲劇性에 對한 超越의 問題(崔三龍, 語文論集 22, 高麗大學校國語國文學科, 1981).

심화 자료

금오신화(金鰲新話)

금오신화에 실린 작품

금오신화는 전래되던 설화 문학을 계승하여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을 확립했다는 사실에 의의가 크다. 금오신화의 특징은 주인공이 재자가인(才子佳人)들이고, 현실과 초월 세계가 펼쳐지면서, 평범한 남자 주인공과 귀족이었던 여자 혼령과의 만남을 통해 비현실적, 낭만적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점이다. 금오신화에 실린 다섯 편에 대한 작품에서 네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주제 :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선 간절한 소망과 사랑. 죽음을 초월한 남녀간의 사랑으로 조선 초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소설집 ≪금오신화 金鰲新話≫에 실려 있다., 국내의 것으로는 김집 ( 金集 )의 수택본 한문소설집에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와 더불어 필사된 것이 있다.

〈이생규장전〉은 전반부에서는 살아 있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다룬 애정소설이다. 특히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을 주목해 명혼소설(冥婚小說)이라 부르기도 한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도에 사는 이생(李生)이라는 총각이 학당에 다니다가 노변에 있는 양반집의 딸인 최씨녀를 알게 되어 밤마다 그 집 담을 넘어 다니며 밀연을 계속하였다.

아들의 행실을 눈치챈 이생의 부모가 이생을 울주(울산)의 농장으로 보냈다. 둘은 서로 만나지 못해 애태우다가 최씨녀의 굳은 의지와 노력으로 양가부모의 허락 아래 혼인을 하였다.

이생이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행복이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홍건적의 난으로 양가 가족이 모두 죽고 이생만 살아남아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최씨녀가 나타났다.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여자인 줄 알면서도 열렬히 사랑하는 나머지 반갑게 맞아 수 년간을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날 최씨녀는 이승의 인연이 끝났다며 사라졌다. 이생은 최씨녀의 뼈를 찾아 묻어준 뒤에 하루같이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이생규장전〉은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 인물로 하였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성격을 지닌 작품이다. 전반부는 주인공이 효라는 도덕규범을 파괴해가면서까지 힘겹게 사랑을 성취해가는 과정이다. 후반부는 강렬한 사랑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좌절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생규장전〉에는 죽은 여자가 산 사람처럼 나타나 활동하기도 한다. 이때의 죽은 여자는 전설에서처럼 문자 그대로의 죽은 여자가 아니라 열렬한 사랑의 의지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가 대결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역설(逆說)이다.

〈이생규장전〉에서 남녀 주인공의 혼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심각한 장애에 부딪히는 것은 두 가문의 신분 차이 또는 문벌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15세기 후반의 신흥사류의 일원이었던 김시습의 처지 및 현실적 갈등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결말의 비극성과 더불어 작품의 비극적 성격도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이생규장전〉은 우리 소설사를 선도한 소설유형인 전기소설(傳奇小說) 작품이명, 정교한 구성과 강렬한 작가의식이 문학적 가치를 높여준다.

≪참고문헌≫ 金鰲新話(李家源譯註, 通文館, 1959),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조선시대의 애정소설(박일용, 집문당, 1993), 韓國傳奇小說의 美學(박희병, 돌베개, 1997), 現實主義的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大學校, 1971), 金鰲新話考察(金一烈, 朝鮮前期의 言語와 文學, 螢雪出版社, 1976).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조선 초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단편소설집 ≪ 금오신화 金鰲新話 ≫ 에 실려 있다.

〈 취유부벽정기 〉 는 기자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하여 한 남자 상인과 죽어서 선녀가 된 기자(箕子)의 딸 사이에 이루어진 정신적인 사랑과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일종의 애정소설이다. 구조유형상 ‘ 명혼소설(冥婚小說) ’ 또는 ‘ 시애소설(屍愛小說) ’ 이라고도 부른다.

〈 취유부벽정기 〉 는 개성의 상인 홍생(洪生)이 달밤에 술에 취하여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가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홍생의 글재주를 칭찬하면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홍생이 처녀와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다가 신분을 물었다. 처녀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로서 천상계에 올라가 선녀가 되었다. 그런데 달이 밝자 고국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기씨녀는 홍생의 청을 받고 긴 시 한수를 더 읊었다. 그 내용은 자기들의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었다. 그 뒤에 기씨녀는 천명을 어길 수 없다며 사라지고 홍생은 귀가하여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병이 들었다. 어느날 홍생은 기씨녀의 주선으로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는 내용의 꿈을 꾸고 세상을 떠났다.

〈 취유부벽정기 〉 는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토속적인 성격 및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자의 작품인 〈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 및 〈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 과 동일하다.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구별된다.

〈 취유부벽정기 〉 는 불의와 폭력에 의하여 정당한 삶과 역사가 좌절되는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어서 짙은 우수가 서려 있다. 귀가한 주인공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작품이 비극적 성격을 지니나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성격이 다소는 약화되어 있다.

 

〈 취유부벽정기 〉 의 해석과 평가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려 있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의 우의(寓意)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선녀와의 연애 및 선계로의 승화를 현실도피로 보고 그것은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기에 작품은 결국 작자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모순에 찬 세계를 개조해서 세계와 화합하려는 자아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대결을 통하여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 취유부벽정기 〉 를 도가적(道家的) 문화의식의 투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을 동이족(東夷族)의 문화적 우월감과 함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극렬한 반존화적(反尊華的) 민족저항의 분한(憤恨)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 참고문헌 ≫ 金鰲新話, 梅月堂金時習硏究(鄭 泄 東, 新雅社, 1965),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韓國古典小說의 探究(李相澤, 中央出版社, 1981), 現實主義的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大學校, 1971), 金鰲新話의 悲劇性에 對한 超越의 問題(崔三龍, 語文論集 22, 高麗大學校, 1981).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조선 전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목판본. 작자의 단편소설집 ≪ 금오신화 金鰲新話 ≫ 에 실려 있다. 주인공이 꿈속에서 겪은 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몽유구조의 소설로서, 작자의 철학사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은 유학 ( 儒學 )으로 대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뜻이 높고 강직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그는 귀신 · 무당 · 불교 등의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고 유교경전을 읽고, 세상의 이치는 하나뿐이라는 내용의 철학논문인 〈 일리론 一理論 〉 을 쓰면서 자신의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어느날 꿈에 박생은 저승사자에게 인도되어 염부주(炎浮洲)라는 별세계에 이르러 염왕(閻王)과 사상적인 담론을 벌였다. 유교 · 불교 · 미신 · 우주 · 정치 등 다방면에 걸친 문답을 통하여 염왕과 의견일치에 이름으로써, 자신의 지식이 타당한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염왕은 박생의 참된 지식을 칭찬하고 그 능력을 인정하여 왕위를 물려주겠다며 선위문(禪位文)을 내려주고는 세상에 잠시 다녀오라고 하였다. 꿈을 깬 박생은 가사를 정리하고 지내다가 얼마 뒤 병이 들었다. 그는 의원과 무당을 불러 병을 고치지 않고 조용히 죽었다.

작품에 나타난 염부주와 염왕은 작자가 자신의 사상이 타당한 것임을 입증해보이기 위하여 설정한 가상적인 존재이다. 이것을 매개로 하여 그 타당성이 입증된 사상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이다.

 

첫째는 유교가 불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유교사상은 주인공의 기본사상이자 작자의 기본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불교의 미신적 타락상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둘째는 세계에는 현실세계만 존재할 뿐 천당 · 지옥 · 저승 같은 별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세상의 이치도 하나일 뿐이라는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다. 즉, 미신적 · 신비주의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현실적 ·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폭력과 억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하여, 백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경고하는 정치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 남염부주지 〉 는 이같은 사상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사상에 투철한 유능한 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릇된 세상을 은연중 비판하고 있다. 작자의 깊은 사상을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사상을 밀도짙게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 참고문헌 ≫ 金鰲新話(金時習 著, 李家源 譯註, 通文館, 1959), 梅月堂金時習硏究(鄭 泄 東, 新雅社, 1965),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金鰲新話硏究(薛重煥,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3), 現實主義的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대학교, 1971).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조선 전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단편소설집 ≪ 금오신화 ≫ 에 실려 있다. 주인공이 꿈속에 용궁으로 초대되어 가서 겪은 일을 주된 내용으로 한 작품으로서 구조유형상 몽유소설(夢遊小說)이라 부른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글에 능하여 그 재주가 조정에까지 알려진 한생(韓生)이 어느날 꿈속에서 용궁으로 초대되어 갔다. 용왕의 청을 받고, 새로 지은 누각의 상량문을 지어주었더니, 용왕은 그 재주를 크게 칭찬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였다. 잔치가 끝난 뒤 용왕의 호의로 한생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골고루 구경하였다.

하직할 때 용왕은 구슬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 꿈에서 깬 한생은 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명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 용국부연록 〉 의 중심내용은 주인공이 꿈을 통하여 자신이 지닌 지적인 능력을 발휘해 보이고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깬 뒤에는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작품은 비극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하나의 문제로 제기한다. 자신은 지적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자 하나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는 데에서 오는 작자의 불만을 나타낸 작품이다. 김시습은 어릴 때에 탁월한 글재주를 인정받아 조정에 초대되어 가서 세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작자의 전기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으로 흔히 해석되고 있다. 작품의 기본적인 성격은 ≪ 금오신화 ≫ 에 실린 다른 작품들의 경우와 유사하나 문제의식은 비교적 깊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참고문헌 ≫ 金鰲新話(李家源 譯註, 通文館, 1959), 梅月堂金時習硏究(鄭 泄 東, 新雅社, 1965), 韓國小說硏究(李在秀, 宣明文化社, 1969),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金鰲新話硏究(薛重煥,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3).

 

금오신화(金鰲神話)의 특징 및 의의

(1)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뛰어난 재능과 감성을 가진 재가가인(才子佳人)적인 전기적 인물이나 현실 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2) 문장 표현이 한문 문어체로서 사물을 극히 미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3) 일상의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한 내용을 그렸다.

(4) 전기적 특성을 보이면서도, 인간성을 긍정하고 현실 속에서 제도, 인습, 전쟁, 운명 등과 강력하게 대

결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한 점에서 현실주의적 지향이 엿보이는 소설로서 평가받고 있다.

(5) 구우의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결코 모방은 아니며, 우리 설화 문학의 전통 속에서

탄생된 독창적 소설이다.

(6) <금오신화>의 출현으로 소설 문학이 대두하는 동기가 되어 소설 문학 발흥의 획기적 계기가 되었다.

(7) 설화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발전 단계를 알게 하여 주는 자료가 된다.

 

김시습(金時習)

1435(세종 17) ∼ 1493(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 · 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峰)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생 애〕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 매월당집 ≫ 에 전하는 〈 상류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 〉 , 윤춘년(尹春年)의 전기 ( 傳記 ), 이이의 전기, 이자(李 秕 )의 서문(序文), ≪ 장릉지 莊陵誌 ≫ · ≪ 해동명신록 ≫ · ≪ 연려실기술 ≫ 등이 있다.

그의 선대는 원성왕의 아우 김주원(周元)이다. 그의 비조(鼻祖)는 고려시대 시중을 지낸 연(淵) · 태현(台鉉)로 전하고 있으나 ≪ 매월당집 ≫ 의 세계도에 의하면 인존(仁存)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증조부 윤주(允柱)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할아버지 겸간(謙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 아버지 일성(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 ( 忠順衛 )를 지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울진 선사장씨(仙 笑 張氏)이다.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외조부로부터 글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한시를 지을 줄 아는 천재였다.

≪ 정속(正俗) ≫ , ≪ 유학자설(幼學字說) ≫ , ≪ 소학 ( 小學 ) ≫ 을 배운 후 5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그가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고 하여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5세 때에 이웃집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 ( 修撰 ) 이계전 ( 李季甸 )으로부터 ≪ 중용 ≫ 과 ≪ 대학 ≫ 을 배웠고, 이후 13세까지 이웃집의 성균관 대사성 김반 ( 金泮 )에게서 ≪ 맹자 ≫ · ≪ 시경 ≫ · ≪ 서경 ≫ 을 배웠고, 겸사성 윤상 ( 尹祥 )에게서 ≪ 주역 ≫ · ≪ 예기 ≫ 를 배웠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서 공부했다.

15세에 어머니 장씨를 여의자 외가의 농장 곁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그러나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던 외숙모가 죽고 아버지는 계모를 맞아들였으나 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그는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가정이 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인간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었고. 18세에 송광사에서 선정에 드는 불교입문을 하였다. 그 후 삼각산 ( 三角山 ) 중흥사 ( 重興寺 )로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 ( 首陽大君 )의 ‘ 왕위찬탈 ’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온 장안 사람들이 세조의 전제에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진 사육신의 시신을 바랑에 주섬주섬 담아다가 노량진 가에 임시 매장한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역사의 고적을 찾고 산천을 보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이는 ≪ 매월당집 ≫ 에 ≪ 탕유관서록 宕遊關西錄 ≫ 으로 남아 있다.

그가 쓴 발문에서 방랑을 시작한 동기를, “ 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질탕(跌宕)하여 명리(名利)를 즐겨하지 않고 생업을 돌보지 아니하여, 다만 청빈하게 뜻을 지키는 것이 포부였다. 본디 산수를 찾아 방랑하고자 하여, 좋은 경치를 만나면 이를 시로 읊조리며 즐기기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곤 하였지만,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하루는 홀연히 감개한 일(세조의 왕위찬탈)을 당하여 남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도(道)를 행할 수 있는데도 출사하지 않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도를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 고 적었다.

26세(1460) 때에는 관동지방을 유람하여 지은 시를 모아 ≪ 탕유관동록 宕遊關東錄 ≫ 을 엮었고, 29세(1463) 때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 탕유호남록 宕遊湖南錄 ≫ 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 ( 孝寧大君 )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내불당에서 교정(校正)일에 참여하라고 권유하여 열흘간 내불당에 거쳐한 일이 있었다. 1465년 원각사 낙성식에 불려졌으나 짐짓 뒷간에 빠져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에 경멸하던 정창손 ( 鄭昌孫 )이 영의정이고, 김수온 ( 金守溫 )이 공조판서로 봉직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 ( 金鰲山 )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31세 때부터 37세까지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 금오신화 ≫ 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 ≪ 유금오록 遊金鰲錄 ≫ 에 남겼다.

그동안 세조와 예종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성종 2) 37세에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등지에서 10여 년을 생활하였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481년 47세에 돌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아들여 환속하는 듯하였으나, 이듬해 ‘ 폐비윤씨사건(廢妃尹氏事件) ’ 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의 길에 나섰다. 당시 양양부사(襄陽府使)였던 유자한 ( 柳自漢 )과 교분이 깊어 서신왕래가 많았으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강릉 · 양양 · 설악 등지를 두루 여행하였다.

이 때 그는 육경자사(六經子史)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 관동일록 關東日錄 ≫ 에 있는 100여 편의 시들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 ( 鴻山 ) 무량사 ( 無量寺 )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圖)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 · 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 매월당집 ≫ (신활자본)에 〈 동봉자화진상 東峯自 怜 眞像 〉 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숙종 33년(1707)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동 8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많은 시가 유실되었으나 그의 문집은 중종 때에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그의 시가 좋다고 하여 편찬이 논의되었고, 이자(李 秕 )에 의하여 10여 년 동안 수집하여 겨우 3권으로 모아졌으며, 윤춘년 · 박상이 문집 자료를 모아 1583년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이가 전을 지어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이 간행되었다. 일본 봉좌문고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사상과 문학〕

김시습은 지금까지 ≪ 금오신화 ≫ 의 작자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자못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 · 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뿐 아니라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들도 그의 전반적인 사유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몫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 같은 면은 그가 이른바 ‘ 심유천불(心儒踐佛) ’ 이니 ‘ 불적이유행(佛跡而儒行) ’ 이라 타인에게 인식되었듯이 그의 사상은 유불적인 요소가 혼효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근본사상은 유교에 두고 아울러 불교적 사색을 병행하였으니, 한편으로 선가(禪家)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대에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 ( 李滉 )으로부터 ‘ 색은행괴(索隱行怪) ’ 하는 하나의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때에는 불교 자체를 엄격히 이단시하였으므로, 김시습과 같은 자유분방한 학문추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의 사상에 대한 정밀한 검토와 분석이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만족할 만큼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 점은 그의 생애가 여러 차례의 변전을 보여 주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 또한 상황성을 띠고 있기에 일관한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 신귀설 神鬼說 〉 · 〈 태극설 太極說 〉 · 〈 천형 天形 〉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의 신비론(神秘論)을 부정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펴고 있다.

이는 유교의 속성인 현실을 중심으로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면과 맥이 닿고 있다. 잡저 ( 雜著 )의 대부분은 불교에 관계된 논문들인데, 그는 부처의 자비정신을 바로 한 나라의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패려(悖戾 : 도리에 어그러짐) · 시역(弑逆 : 부모나 임금을 죽이는 대역행위)의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하도록 하는 데 적용하였다.

이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은 그의 〈 애민의 愛民議 〉 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혹자들은 그의 성리사상이 유기론(唯氣論)에 가까운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불교의 천태종에 대해 선적(禪的)인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 귀신론 〉 은 귀신을 초자연적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 만수지일본(萬殊之一本) ’ · ‘ 일본지만수(一本之萬殊) ’ 라 하여 기(氣)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그의 문학세계를 알게 해주는 현존 자료로는 그의 시문집인 ≪ 매월당집 ≫ 과 전기집(傳奇集) ≪ 금오신화 ≫ 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전기집인 ≪ 금오신화 ≫ 에 집중되어왔으며, 그의 시문에 대한 연구는 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시문집인 ≪ 매월당집 ≫ 은 원집(原集) 23권 중에 15권이 시로써 채워져 있으며, 그가 재능을 발휘한 것도 시이다.

그는 문(文)에서도 각 체 문장을 시범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이 그의 사상편(思想篇)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김시습의 시는 현재까지 그의 시문집에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2,200여수나 되지만 실제로 그가 지은 시편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스스로 술회한 그대로 그는 어릴 때부터 질탕하여 세상의 명리나 생업과 같은 것을 돌보지 아니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산수를 방랑하면서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나 읊으면서 살았다. 원래 시란 자기실현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역대의 시인 가운데서 김시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로써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기에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시적 충격과,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적 동기도 모두 시로써 읊었다.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그는 시를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했기에 시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에게서 유출되는 모든 정서가 시로써 표현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도 고려하지 않았다. 실천적인 유교이념을 가진 그의 지적 소양에서 보면, 그는 모름지기 경술(經術)로써 명군(明君)을 보좌해야만 하였고, 문장으로 경국(經國)의 대업에 이바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이요 선문(禪門)이었으며, 그가 익힌 문장은 시를 일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문은 이단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한 선문에 몸을 던진 것이나 시를 지음에 침잠한 것도 이미 사회의 상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의 행적이 괴기하다든가 그의 시작이 희화적(戱畵的)이라는 평가는 당연하였다. 우리 나라 한시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김시습의 시에서도 가장 흔하게 보이는 주제적 소재는 ‘ 자연 ’ 과 ‘ 한(閑) ’ 이다. 몸을 산수에 내맡기고 일생을 그 속에서 노닐다가 간 그에게 자연은 그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 ’ 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도 그 일부가 되곤 하였다. 평소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한 그는 특히 자연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현실에 대한 실의가 크면 클수록 상대적으로 자연의 불변하는 영속성 때문에 특별한 심각성을 부여하고 비극적인 감정이 깃들이게 하였다.

일생을 두고 별일 없이 살아간 그에게는, 어쩌면 ‘ 한 ’ 그것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적인 관심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고 자신과 자연이 함께 평화스러운 상태에 놓이기가 어려웠다. 한의(閑意)가 일어났다가도 세상일이나 다른 사물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흔들어 놓곤 하였다.

때문에 〈 한의 〉 · 〈 한극 閑極 〉 · 〈 한적 閑適 〉 · 〈 우성 偶成 〉 · 〈 만성 漫成 〉 · 〈 만성 亶 成 〉 등 그의 시에서 보여준 그 많은 ‘ 한 ’ 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의 시에 대한 뒷사람들의 비평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집약된다.

첫째는 힘들이지 않고서도 천성(天成)으로 시를 지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생각이 높고 깊으며 뛰어나 오묘한 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이 모두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인 자신이 “ 단지 시의 묘한 곳을 볼 뿐이지 성련(聲聯)은 문제삼지 않는다. ” 라고 하였듯이 그의 시에서 체재나 성률은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듯하다.

그의 시 가운데서 역대 시선집에 뽑히고 있는 것은 20여 수에 이른다. 그의 뛰어난 대표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산행즉사 山行卽事 〉 (7절) · 〈 위천어조도 渭川漁釣圖 〉 (7절) · 〈 도중 途中)(5율) · 〈 등루 登樓 〉 (5율) · 〈 소양정 昭陽亭 〉 (5율) · 〈 하처추심호 何處秋深好 〉 (5율) · 〈 고목 古木 〉 (7율) · 〈 사청사우 乍晴乍雨 〉 (7율) · 〈 독목교 獨木橋 〉 (7율) · 〈 무제 無題 〉 (7율) · 〈 유객 有客 〉 (5율)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 도중 〉 · 〈 등루 〉 · 〈 독목교 〉 · 〈 유객 〉 등은 모두 ≪ 관동일록 ≫ 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관동지방으로 떠났을 때의 작품이며, 대체로 만년의 작품 가운데에서 수작(秀作)이 많다.

≪ 금오신화 ≫ 는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 등 5편이 전부이며, 이것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호재(好材)로 제공되어 왔다. 그러나 〈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 를 제외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怪奇譚)이다.

이 전기의 틀을 빌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결핍되어 있던 사랑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나라 역대 시인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艶情詩)를 남긴 시인이 되었다. 그의 역사사상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소재로 인식하였으며,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역사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 고금제왕국가흥망론 古今帝王興亡論 〉 이란 논문에서 역사적 위기도 인간의 노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파악하고, 항상 인간의 마음씀을 중시하였다. 그가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한 점은 단순히 성리학적 견해만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이론이기도 하다.

또한 〈 위치필법삼대론 爲治必法三代論 〉 에서는 삼대의 군주들이 백성들의 생활에 공헌을 하였기 때문으로 해석하였으며 인간의 고대문화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그는 우리 나라의 역사도 단군조선으로부터 당대인 세종대까지의 역사를 문화사, 사상적으로 파악하여 발전적 역사관을 보였으며, 금오신화 중의 〈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 는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梅月堂集, 梅月堂集解題(崔珍源,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3), 韓國儒學史略(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6), 金時習硏究(鄭炳昱,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篇, 1958), 金時習의 佛敎觀(鄭 泄 東, 慶北大學校論文集 6, 1962), 金時習의 鬼神觀과 道敎觀(鄭   東, 趙潤濟博士回甲紀念論文集, 新雅社, 1964), 金時習의 文集과 著述(鄭   東, 慶北大學校語文論集 2, 1964), 金時習攷(林憲道, 人物韓國史, 博友社, 1965), 金時習(鄭炳昱,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金時習論(閔丙秀, 韓國文學作家論, 螢雪出版社, 1977), 梅月堂의 詩世界(閔丙秀, 서울大學校人文論叢 3, 1978), 金時習의 政治思想의 形成過程(金鎔坤, 韓國學報 18, 一志社, 1980), 금오신화의 사상적 성격 (박혜숙, 한국문학사의 쟁점, 1986), 15세기 후반 이학적 우주론의 대두-매월당 김시습의 천관을 중심으로-(구만옥, 朝鮮時代史學報}7. 1998), 김시습의 역사철학(정구복, 한국사학사학보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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