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늙은 의원은 맹랑하게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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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의원은 맹랑하게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이호민 지음

정선용 번역

 

병이 났을 때 어떤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좋겠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단연코 늙은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다. 어째서인가?

어떤 의원이 있었는데, 그의 의술이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이는 많았다. 갑(甲)이란 이가 그에게 급히 달려와 물었다.

 

"우리 부모님의 병환이 이러 이러하고 처자식의 증세가 이러 이러한데,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의원은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덤덤하면서도 간단하게 말했다.

"이 약을 한번 써 보시오."

그 약을 보니 세속에서 흔히 쓰는, 다른 의원들의 처방과 다를 것이 없는 흔하디 흔한 처방이었다. 갑은 떨떠름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화를 내면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과 처자식의 증세가 위급해서 내가 급히 달려갔는데, 조금도 놀래거나 동요하는 기색없이 덤덤하게 이 약이나 한 번 써보라고 하더군."

그 약을 한첩 써 보았더니, 과연 차도가 없었다. 갑은 그 약을 모두 내다버리고서 다른 의원을 찾아나섰다.

시장에 가보니 마침 어떤 의원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얼굴 생김새는 반반하고 말은 청산유수였으며, 금궤와 옥함(玉函)에 든 의서(醫書)를 좌우로 벌여놓고 인삼이니 복령이니 지초니 백출이니 하는 약재를 앞에다가 죽 늘어놓고 있었다. 갑이 다가가서 치료 방법을 묻자, 그 의원은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마음을 써주는 듯 하더니, 진지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쓴 약은 엉터리 약이니 속히 약을 바꾸시오. 그렇지 않으면 3일도 못 넘길것이오."

그리고는 드디어 자신의 의술에 대해 떠벌리는데, 천지와 자연의 조화를 넘나들고 음양과 오행의 이치를 주워섬겼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물이 솟구치고 산이 내닫는 듯하여, 천하의 명의인 장중경(張中景) 이나 유원빈(劉元賓) 같은 이들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마음이 몹시 흡족해진 갑은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훌륭한 의원을 만났으니 병은 다 나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리고는 그 의원이 지어 준 약을 써 보았다. 그런데 그 약을 복용한 환자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두 세 차례 더 복용하자 증세는 더욱더 심해졌다. 갑은 나에게 글을 보내어 물었다.

 

 

"지난번에 늙은 의원이 지어준 약은 그래도 해는 없었습니다. 시장의 떠돌이 의원이 지어준 약은, 그의 말을 들어보면 퍽 그럴싸한데 복용하자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큰 지혜는 한 곳으로만 파고들지 않고 지극한 도는 평범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오로지 경험이 많은 늙은 의원이라야만 그 이치를 아는 법이네.

자네가 앞서 늙은 의원에게 부모님과 처자식의 증세를 말하였을 때, 그도 인간인데 어찌 애처로운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런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덤덤하게 말한 것은 이미 갖가지 병을 치료하면서 충분히 경험을 쌓았기 때문일세. 갖가지 병을 겪어봤기 때문에, 증상을 들으면 병의 근원이 무엇인지, 또 병이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알지. 따라서 처방을 내리고 약을 복용시킴에 있어서도, 미리 계획을 짜놓고 기사회생시킬 확실한 방도를 찾는단 말일세. 그러니 어떠한 고질병이라도 그의 의술을 어지럽힐 수 없는 거네. 더구나 환자의 보호자가 달려와서 증세를 말하는데 의원이 먼저 놀라는 기색을 보일 경우, 그 사람은 마음이 놀랍고 혼미해져 허둥댈 것은 뻔한 일. 환자의 마음이 먼저 동요되면, 그 해는 심각하지. 이 때문에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덤덤하게 말한 것일세.

또, 사람의 병이 어찌 신선들이나 먹는 진귀한 약을 먹어야만 낫겠는가. 늙은 의원의 약은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이치가 담긴 것으로, 한번 복용해서는 효험을 볼 수 없는 것이네.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두 번 세 번 복용시키지 않고 곧바로 약을 바꾸어버렸는가. 그의 약은 비록 효험을 보이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맹랑하게 죽이는 일은 결코 없을 걸세. 더구나 그 약은 반드시 효험이 있는 약인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시장의 떠돌이 의원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 그는 의서(醫書)는 보았으나 실습은 해보지 않아서 의술 따로 병 따로 논 다네. 환자의 증세를 들어도 어째서 병이 생겼고 어떻게 해야 치료되는지를 몰라 갈팡질팡, 두서를 못잡아. 그래서 자네의 말을 듣고는 놀라는 척하고 그럴 듯하게 떠벌리면서 아는 것을 죄다 동원하여 자신의 재능을 뽐낸 것이네. 그의 말이 청산유수면 그럴수록 의술은 더욱더 어긋나게 된지. 또 늙은 의원의 말이 먹혀들어 사람들이 혹 자신의 의술을 형편없다고 할까 두려워서, 3일도 못 넘길 것이라고 공갈을 쳤네. 이것은 어진이를 모함하고 자신의 실속만을 챙기려는 심보일세. 그런데도 자네는 떠돌이 의원의 말이 단호한 것만 보고는 '이 의원은 반드시 병을 고칠 것이다.' 여겼으니, 이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일세."

이호민(李好閔) : 1553(명종8)∼1634(인조12).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峰),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희(文僖). 158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史官)을 거쳐 대제학, 예조판서, 좌찬성에 이름. 문장에 뛰어나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함. 윗글은 월과(月課)로서, 원제(原題)는 <노의불맹낭살인론(老醫不孟浪殺人論)>임. 한국문집총간 제59집 『오봉집(五峰集)』권 7에 실려 있음.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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