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늙은 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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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말

홍우원 지음

신용남 번역

 

숭정 9년(1636년, 공 32세 시) 4월 어느날 주인이 종놈인 운(雲)을 시켜 나뭇간 아래에서 늙은 말을 끌어내게 하여 말에게 고하기를,

"아, 갈기말아! 이제 네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근력도 이제는 쇠할 때로 쇠하였다. 장차 너를 데리고 치달리게 하고 쏜살같이 몰아 보려한들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며, 너에게 도약을 시키고 뛰어넘게 하려해도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내가 안다. 내가 너를 수레에 메워서 태행산(太行山)의 험한 길을 넘으려 한다면 너는 넘어지고 자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너에게 무거운 짐을 실어서 망창(莽蒼)의 아득히 먼 길을 건너고자 한다면 너는 고꾸라져 짐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갈기말아, 너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푸줏간 백정에게 넘겨주어 너의 고기와 뼈를 가르게 하자니 내가 차마 너에게 그렇게는 못하겠고, 장차 시장에 내어다가 팔려 해도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너를 사겠는가.

아, 갈기말아. 내가 이제 너에게 물린 재갈을 벗겨주고 너를 얽어맨 굴레를 풀어서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둘 테니 너는 가고픈 대로 가겠느냐? 그래, 떠나도록 해라.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취하여 쓸 것이 없다."

하였다. 이때에 말은 마치 무슨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귀를 늘이고, 마치 무슨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듯이 머리를 쳐들고는 한참을 주저주저 몸을 펴지 못하더니, 입으로는 말을 하지 못하는지라 가슴 속에 쌓여있는 심정을 억대(臆對)하여 이르기를,

"아, 진실로 주인의 말이 맞소이다. 그러나 주인께서도 역시 어질지 못한 분이십니다 그려. 예전에 내 나이가 한창 젊었던 시절에는 하루에 백여리는 치달렸으니 나의 걸음걸이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한번 짊어지면 곡식 몇섬은 실을 수 있었으니 나의 힘이 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소.

 

주인께서 가난했던 형편에 대해서는 오직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온 집안은 쑥대가 무성하여 처량하기 그지없고 텅 빈 살림살이는 쓸쓸하기까지 하였소. 쌀단지는 바닥이 나서 됫박쌀의 저축도 없고 고리짝에는 한자짜리 비단조각 조차 없질 않았소. 파리하게 수척한 마누라는 굶주림에 허덕이다 바가지나 긁고, 딸린 여러 자식들은 너나 없이 밥달라 징징거리며, 아침 저녁에도 죽으로 요기나 때우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냥쌀 빌어다가 끼니를 잇지 않았소.

그 당시에 내가 실로 있는 힘을 다해 동분 서주하기를 오직 주인의 명령대로 하였고, 남으로 가라면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자면 북으로 가기를 오직 주인께서 시키는 대로 하였소. 멀리는 기천 리 가깝게는 수십, 백 리를 지고 나르며 달리고 치닫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니 나의 노고가 실로 컸다고 할 것이오. 주인집의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해 온 것은 모두 나의 덕이며, 길가에 쓰러져 굶어죽거나 곤궁하게 떠돌다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처박혀 죽지 않은 것도 모두 나의 덕이 아니겠소.

옛날 한나라의 고조(高祖)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하는데, 지금 주인께서야말로 말을 가지고 집안을 꾸려오셨으니 나의 공이 가히 높다고 해야 할 것이오. 대개 나라의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노고가 많은 자에게 반드시 많은 녹봉을 주는 법이니,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장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스스로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까닭인 것이오.

그러나 지금 주인께서는 그렇지 않소. 나의 노고가 이와 같이 큰데도 나에게 먹여주는 것은 전혀 변변치 못하였고 나의 공이 이와 같이 높은데도 나를 길러주는 것은 푸대접뿐이었오. 짚 썰은 한 방구리의 여물과 한 사발의 물로 나의 배를 채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잖소. 게다가 재갈과 굴레를 씌워서 속박하고 채찍으로 치고 때리는가 하면, 굶주리고 기갈들게 하고 치달리고 달음박질시키느라 나를 쉬지 못하게 한 것이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소. 비록 내가 나이가 들지 않고 아직 어리다고 한들 나의 기력이 어찌하여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으며, 나의 힘이 어떻게 쇠하지 않을 수 있겠소.

대저 기기(騏驥)나 화류와 같은 천리마들은 좋은 말이 많은 기주 북방에서 알아주는 양마이며, 천하에서도 으뜸가는 준마라 할 것이오. 그러나 그들도 올바르지 않은 도리로써 채찍질해대고 그 재량을 다 할 수 있도록 먹여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보통의 말만도 못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전혀 기기나 화류에 미치지 못하는 나와 같이 노둔한 재주를 가진 말이야 말해 무엇하겠소. 그러므로 나의 기력이 지치고 나의 힘이 쇠하여 쓸모가 없게 된 것이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대저 젊었을 때 그의 기력을 다 부려먹고 나서 늙었다고 하여 내버리는 짓은 실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라면 하지 않는 법인데, 주인께서는 차마 그렇게 하시려드니, 아, 역시 너무도 어질지 못하십니다.

아, 내 아무리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식성은 왕성하며, 주인께서 특별히 성의를 가지고 나를 기르고 마음을 써서 길러준다면 옥산(玉山)의 좋은 풀은 고사하고 동쪽 뜰에 풍성한 풀이면 족히 나의 허기를 면할 수 있고, 예천(醴泉)의 좋은 물은 말할 것도 없고 남쪽 계곡의 맑은 냇물로도 족히 나의 갈증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쌓인 피로를 쉬게 하여 지쳐 느른한 기력을 회복하고 쇠하여 비척대는 몸을 쉬게 하여 고달픈 힘을 소생시켜서, 힘을 헤아려 짐을 싣고 재주를 헤아려 부려준다면. 비록 늙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어젖힐 수 있으니, 주인을 위하여 채찍질로 부림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이로써 남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면 이것은 나의 커다란 바램이오.

그러나 끝내 버려지고 말 팔자라고 하더라도, 아직 나의 발굽은 족히 서리와 눈보라를 헤쳐 나갈 수 있고 갈기 털은 추운 바람도 막아 줄만 하니, 풀 뜯고 물 마시며 애오라지 스스로 자신을 기르고 다스리면서, 나에게 주어진 천성을 온전히 하고 나의 본래의 성질로 되돌아 갈 것이니 나를 풀어준다 해도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감히 아뢰오."

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이때에 멍하니 맥을 놓고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다. 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게 되었을 때 관자(管子)라는 이가 늙은 말을 풀어 놓아 그 말을 따라 가도록 청하였다. 오직 관자야말로 늙은 말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쓸 줄 아는 이였기에, 이로 해서 능히 그의 임금을 보필하여 천하에서 패왕노릇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 본다면 어찌 늙은 말이라고 하여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이에 운에게 단속하여 하는 말이.

"말을 잘 먹여주도록 하라. 그리고 네놈의 손에서 말이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홍우원(洪宇遠) : 〔1605년(선조38)∼1687년(숙종13)〕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징(君徵), 호는 남파(南坡)이다. 홍가신(洪可臣)의 손자로서, 학문이 고명(高明)하고 품성이 직절(直節)하였다는 평이 있다. 1654년 소현세자빈 옥사때에 직언으로 장살된 김홍욱(金弘郁)의 신원과 1663년 조대비 복상문제로 유배된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등 직언으로 인해 수차 파직되었고, 말년에는 허적(許積)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문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글은 저자의 유집인 남파집(南坡集 - 한국문집총간 제106집) 권10에 실려 있으며 원제는 '노마설(老馬說)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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