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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푸나 노픈 남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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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푸나 노픈 남게

 

높기도 높은 나무 위에 나를 (올라가라고) 권하여 올려 놓고

여보게 친구들아, 흔들지나 말아 주오.

(나무에서) 떨어져 죽는 것은 서럽지 않아도, 님을 만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다.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양원

연대 : 선조

갈래 : 평시조, 단시조

성격 : 풍자적, 비판적, 비유적

제재 : 당쟁, 나무, 벗

표현 : 비유적인 표현으로 세태를 풍자, 상징적 시어를 사용하여 우회적으로 주제를 제시함

주제 : 세태에 대한 풍자와 우국 충정, 당쟁(黨爭)을 일삼는 간신배들에 대한 풍자

출전 : 진본 청구영언

내용 연구

 

: 높으나 높은 나무로 여기서는 벼슬 자리를 의미

: 나무의 고어

: 돈호법으로 간신배들을 의미

흔들지나 마르되야 : 모함하지나 말아 주오

: 나무에서 떨어져 죽기는 서럽지 않아도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

님 못볼가 하노라 : 임금을 보좌하지 못할까 그것이 두렵노라. 임금과 국가에 대한 화자의 충의(忠義)를 드러낸 말이다.

이해와 감상

 

 

작자는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청렴 결백한 선비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선조 때, 당시 극심한 당쟁(黨爭)의 와중에서 작자는 중신들의 추천으로 영의정의 중책을 맡았으나 자신을 추천한 간신배들이 이를 보좌하기는커녕 모함을 일삼았다. 그런 답답한 세태에 대한 풍자와 군주에 대한 충직한 태도가 드러나는 시조로, 화자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음해하고 모략하는 세력들을 비판하면서,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하고 있다. 지은이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임금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풍문을 듣고 이를 통탄히 여겨 단식하여 숨졌다.

심화 자료

이양원(李陽元)

 

1526(중종 21)∼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정종의 아들인 선성군 무생(宣城君茂生)의 현손이며, 풍안수(豊安守) 옥석(玉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비홍령(飛鴻令) 난손(蘭孫)이고, 아버지는 이원부령(利原副令) 학정(鶴汀)이며, 어머니는 정양(鄭隧)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 (명종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해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객사한 정사(正使) 김주(金澍)를 대신해, 명나라의 ≪태조실록 太祖實錄≫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가 고려의 이인임(李仁任)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바로잡고 돌아와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평안도·충청도·경기도의 관찰사, 형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수도의 수비를 맡았으나 한강 방어의 실패로 양주(楊州)로 철수, 분군(分軍)의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과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사와 합세해 해유령(塵踰嶺)에 주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뒤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 : 딴 나라에 들어가 붙음)한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어릴 적에 이중호(李仲虎)에게 수학하였다. 성품이 충후하고 박학했으며, 흑백의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문에도 매우 능했다 한다. 시호는 문헌이다.≪참고문헌≫ 宣祖實錄, 宣祖修正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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