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나도향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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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의 작품 세계 - 새롭게 평가되는 리얼리즘

윤병로

 

 

 

1

20년대의 천재 작가 나도향(羅稻香)의 문학사적 평가는 이미 보편화되고 확고한 성가를 구축했다 할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사실주의 문학으로 도약해서 비범한 문학적 역량을 과시했던 나도향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수작들을 남겼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제2차 유럽 한국학회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대학 교수 오카레크 최 여사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나도향의 작품이 북한에서 출판되어 뜻밖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나도향 소설의 언어에 관하여>에서 해명된 바로는, '나도향의 작품은 출판됐는데 그것은 모두 그의 제2시기에 해당하는 리얼리즘적 작품들로서 매우 큰 몇 권의 출판된 《현대 조선문학 전집》에 수록돼 있다. 그러나 낭만적인 초기 작품은 들어 있지 않아 20~30년대의 신문 잡지에서 찾아 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도향 문학을 한국 근대 문학 연구의 관건으로 해석하기까지 했다.

 

또한 오카레크 여사가 보여 준 김동인과 나도향의 다음과 같은 비교가 특기할 발언이라 생각된다.

즉 '전체적인 한국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김동인의 역할이 더욱 컸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 문학의 첫 시기에서 볼 때 나도향의 위치를 김동인보다 낮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도향의 문학적 위치를 무조건 격상시켜 아낌없는 찬사만을 나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의 문학의 우열을 정당히 평가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본다.

 

본명이 경손(慶孫)이요, 아호는 도향(稻香), 그리고 필명은 나빈(羅彬)으로 불리는 작가의 생애는 불과 25세로 끝을 맺는 기구한 편력이었다. 나주가 본적이고 서울이 태생인 도향의 가문은 대대로 의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는 한방의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그의 부친도 양의로 가업을 계승했으며 도향은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공옥 보통학교를 마치고 배재학당에 입학해서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애초에는 가업을 따라 경성의전에 진학했으나 문필에 뜻을 둔 도향은 끝내 중퇴하고야 말았다. 당시 무르익기 시작하던 일본 문단에 크게 자극되었고 더욱이 육당이나 춘원의 작가 활동이 부러워서 그의 뜻은 더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20세 미만의 젊은 시절부터 일종의 문학 중독에 걸렸던 도향은 학교 공부는 통 하지 않고 소설, 시집만을 밤새워 읽었다고 한다. 곧잘 신통치도 못한 습작들을 신문에 투고하기도 하고 《문우(文友)》란 잡지를 손수 만들어도 보았다.

 

문학 청년 도향은 의전을 중퇴하고 비장한 각오로 홀홀히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엄격한 그의 조부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로 좀처럼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상심의 귀국을 해야 했다.

 

이겻이 계기가 되어 도향은 방랑 생활을 남달리 즐겼다고 한다. 항상 그는, '방랑 생활이 좋아'하고 너털웃음을 껄껄 웃으며 백조사에서 몇 달씩 묵기도 하고 서울 있으면서도 여관 살림을 하기가 일쑤였다. 한때는 계명구락부에서 《계명》의 편집도 하고 안동으로 가서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도서에서도 일했고 빙허 현진건, 횡보 염상섭과 함께 기자 생활도 한 적이 있었다.

 

25세의 한창 젊은 나이로 요절한 도향에게는 한 두가지의 로맨스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쓴잔만을 마셨다고 한다. 첫 번은 한국에서 전형적 아가씨와, 다음은 일본에서 신식 멋쟁이 아가씨와의 로맨스였다. 일본에서 최모 양을 에워싸고 진모 씨와 라이벌이 되어 경쟁하다가 끝내는 돈의 위력으로 실연한 도향은 귀국해서 1년만에 폐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2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면서 한편 《개벽》《창조》《폐허》 등의 잡지가 쏟아질 때 순수 문예지로서 《백조》가 1922년에 창간되었다. 여기에 도향은 월탄, 빙허, 상화, 팔봉, 춘성, 석영, 운전 등과 함께 가장 나이 젊은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이 발표되었고 2호에는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이란 로맨틱한 처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젊은이의 시절>에서는 소년 철하의 누이인 음악가 경애가 가짜 예술가 영빈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배반당한다는 애기다.

 

여기서 얽혀지는 애정이란 추측컨대 소년 도향의 누님이 피아니스트로서 도향과 일종의 모의 연애 같은 것을 맺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노작 홍사용이 제목을 붙여 주었다는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이란 소설은 달콤한 매력 때문에 젊은 여성 독자들의 눈물을 한없이 쥐어짰다고 전해진다.

 

1922년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석영 안석주의 삽화와 함께 연재하여 대단한 인기를 거둔 때는 그의 나이 겨우 20세였다. 이 무렵 그는 천재 작가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하루에도 무려 3,40매의 원고지를 메웠다고 한다. 이러한 속필 때문에 다소 거친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도 수긍이 간다. 청춘 남녀의 애정 문제를 몹시 낭만적인 방향에서 다룬 <환희>는 작가가 좀더 객관적인 위치에서 그 주인공들의 장난을 한가닥 환희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죽어서 천당에 가기 위해 함께 살아온 애첩과 첩의 소생인 딸, 귀여워하던 혜숙을 따로 나가 살게 하는 이상국, 그의 외아들 영철은 아버지의 사상을 못 마땅히 여겨 누이동생과 동거하면서 그의 절친한 친구 선용을 혜숙에게 소개해 준다. 선용은 일본에서 고학하는 가난한 청년이지만 건실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의 혜숙은 돈 많고 잘생긴 백우영을 더 사귀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오빠를 절대적으로 믿는 혜숙은 선용을 따르기로 하고 영도사에서 사랑을 속삭이기까지 한다. 선용이 일본에 들어간 뒤에도 그들은 사랑의 편지를 교환한다.  그러나 어느 날 우영의 초대를 받은 혜숙은 처녀성을 잃고 우영의 아내가 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선용은 실의 차 자살까지 기도했다가 휴양차 귀국하게 된다. 그때 결혼에 실망한 나머지 심한 폐결핵을 앓고 있는 혜숙과 선용이 서로 상봉한다. 그러나 동경서 자기를 위해 염려해 주던 어떤 여학생의 환상을 그리면서 현실에 대한 감상과 비애를 맛본 선용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가 버린다.

 

정월로 이름을 바꾼 혜숙은 오빠와 함께 부여로 정양하러 갔다가 오빠의 애인 설화를 죽게 한 죄책감과 훗날 자기가 죽고 난 뒤 자기를 찾아 줄 인간들에 대한 낭만을 그리며 선용이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감한다.

 

정월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반짝반짝 춤추는 물결 속으로 죽은 스피리트가 가라앉는 것같이 정월의 몸은 백마강 물결 속에 들어가 버리었다. 야! 과연 죽어 간 정월이 설화의 원혼을 죽음으로 위로할 수가 있고, 이후에 선용이가 이 자리를 거칠 때에 정월의 죽어 간 자리를 찾아 낼 수 있겠는가? 이 모두 우리 인생이 한낱 환희인 까닭이로다.

 

소설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도향 자신도 하나의 요란한 반항아이기도 했다. 호적상에는 경손으로 불리었던 그는 자신의 이름에 항시 불만을 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맏손자를 보고 기쁨에 넘친 나머지 경사스런 손자란 뜻에서 경손이라고 불렀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아들이 장가를 가는 게 아니라 부모가 재롱을 보기 위하여 어린 며느리를 보는 것이요, 자기의 아들이 아들을 낳아 손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손자를 보았으니, '경손'이라는 사고 방식의 소유자가 바로 도향의 할아버지였다. 당시 춘원이 크게 외쳤던 자녀 중심론이 직접적인 계시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경손은 한사코 그 이름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작명을 해준 월탄의 해명을 들으면 <홍루몽> 속의 도향촌을 생각해서 "벼란 우리 인생에게 여간 유익한 게 아니라 더구나 아리따움을 시새는 백화난향보다 계절을 떠나 전원에 물결치는 도향화가 어떤가"하였더니 그는 파안일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네가 글을 잘하랴 뜻 두니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빈(彬)자를 쓰소"했다고 한다. 이래서 오늘까지 문단에서는 그를 도향 나 빈이라 애칭하고 있다.

 

 

3

도향의 짧은 생애가 남긴 작품 중에는 극히 미숙한 것도 많고 명작으로 지금까지 성가를 더해 가는 작품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남달리 천재적 작가였던 것은 그의 작품 활동을 한 6년 동안의 작품 세계에서 역력히 살펴볼 수 있다.

<환희>를 발표할 무렵에 발표된 <17원 50전>과 <은화 백동화> 같은 것은 그의 작품에 약간의 전환을 보여 준 느낌도 있으나 별로 신통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당시 그가 다작을 했다는 이유와 《백조》동인 중에서도 가장 연소한 탓으로 비교적 무난히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뒤를 이어 《백조》와 《개벽》에 발표된 <여 이발사> <행랑자식> <자기를 찾기 전> 등을 차례로 읽어 가면 비로소 도향이 문학 소년의 애상적인 공상을 깨끗이 청산하고 점차로 세련되고 정돈된 필치로 옮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자기를 찾기 전>에서는 주인공인 제분소의 여공 수님이가 순진한 소녀의 몸으로 사생아 모세를 낳자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하게 된 생활고에다가 모세는 장질부사로 병원에서 죽게 되니 이제까지 그렇게 굳게 믿었던 예수도 아랑곳없었고 드디어는 모세 아버지에게까지 배반당한다. 이때 수님이는 비로소 자신을 찾는 것이다.

 

주인공 수님이가 바로 도향이라고 믿을 수 있을 때 지금까지의 센티멘탈한 낭만 세계에서 벗어나 직접 현실과 대결하여 리얼하게 묘사하는 자기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여하튼 자기 세계를 분명히 찾아든 도향은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 <j의사의 고백><계집 하인> 등을 통해서 그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것은 <계집 하인> 등에 나오는 양철집이란 식모의 심리 묘사만 보더라도 충분히 수긍될 것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세련된 심리 추구는 플로베르나 모파상의 사실법에 별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어리석음의 생리가 가장 알맞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만을 갖고 도향 문학을 높이 평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어쨌든 도향이 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 수법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은 퍽 다행한 일이었다.

 

도향의 말기 작품에 속하는 <물레방아> <꿈> <뽕> <지형근> <화염에 싸인 원한> <벙어리 삼룡이> <그믐달> 등을 읽어 가면 여태껏 품었던 도향 문학에 대한 불만은 저절로 해소된다.

 

<뽕>에서는 주인공 안협집이란, 성적으로 몹시 음탕한 여성의 생활을 도향은 일체의 주관을 거세하고 놀랄 만큼 리얼하게 묘사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또한 <지형근>에서는 일제의 사회적 배경에서 파산 지주인 지형근이 이화를 주막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작자가 농촌 경제의 퇴폐에 인해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던 당시의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한 해답이었다.

 

 

4

이상의 작품들보다도 사실주의에까지 지향해서 도향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불레방아>와 <벙어리 삼룡이>라고 하는 것이 상식이다. 두 작품이 시대는 서로 다를지언정 모두 영화화까지 되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일제하에, <물레방아>는 60년대에 개봉되어 많은 인기를 독점했었던 것은 많은 독자의 기억에 생생할 것이다.

<물레방아>는 마을에서 가장 부자요, 세력이 있는 신치규 노인과 그 집에서 막실살이(머슴살이)를 하는 방원 내외 사이에 벌어지는 비극이다. 어떤 가을날 밤 달이 유난히 밝은 날 물레방앗간 옆에서 신치규는 계집이 탐이 나 방원을 내쫓고 살 흉계를 꾸민다.

 

방원 계집 역시 본래 정조 관념이 없었고 방원에게 오기 전에도 남편이 있었던 창부형의 여자였다. 아들만 낳아 주면 모든 재산이 네 것이 된다는 신치규의 꾀임에 빠진 계집은 방원을 배반하기에 이른다.

 

어떤 날 계집과 늙은이가 함께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방원은 분에 못 이겨 늙은이를 죽어라 패고 계집과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나 계집에게 끝내 거절당하고 오히려 상해죄로 석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옥살이를 끝낸 방원은 밤중에 계집과 늙은이가 사는 집으로 찾아간다. 그는 옛정을 생각해서 계집에게 도망갈 것을 간청해 보나 허사였다. 마침내 방원은 품고 갔던 칼로 계집을 죽여 버리고 자신도 자결한다는 내용이다.

 

한편 <벙어리 삼룡이>는 오생원 댁의 머슴 삼룡이라는 주인공의 얘기다. 삼룡이는 아주 못생긴 추남이며 땅딸보요, 옴두꺼비처럼 생겼으나 마음씨 곱고 진실하여 주인에게 충실하고 부지런했다. 평생 눈치로만 사는 벙어리지만 조심성 있어 실수한 적이 없는 삼룡이였다. 그 집의 외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굴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주인으로 섬기는 충성스런 머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집에 새 며느리가 들어오게 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집 딸이지만 무남독녀로 자란 아름다운 색시였다. 본래 개망나니 같은 남편에게 매일 몹쓸 구박과 매질을 당하는 것이 삼룡이로서는 너무도 애처롭고 가엾게 생각되었다. 그것이 그만 연정으로 발전되어 새아씨를 사모하다 주인 아들에게 매를 맞고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날밤 오생원 집에 불이 난다. 삼룡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집안으로 뛰어들어 주인을 업어다 놓고 다시 들어가 새아씨를 업고 지붕으로 올라간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

 

이 두 작품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애독될 수 있는 것은 그 작품이 <보봐리 부인>과 같이 객관적인 묘사에 시종하였다든가 그 내용이 <햄릿>처럼 비극적인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해명될 성질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령 <물레방아>의 주제가 우리의 지난 봉건 사회를 배경으로 한 애정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 모순의 일면을 도향의 모티브에 의해서 예리하게 형상화시킨 것이었다면 우리의 현실이 <물레방아>와 같은 시대에서 많이 앞선 것은 사실이지만 금력과 권세를 미끼로 유부녀를 마음껏 농락하는 신치규와 같은 치한이나, 물질적 허영에서 하루아침에 남편을 배반하고 색마의 품안으로 전락하는 방원의 아내나 생활력의 무능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 방원과 같은 불행한 인간이라든가, 이로 인하여 종당에는 살인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 사건을 오늘의 신 사회면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한 이 작품들은 우리에게 더욱 실감되게 받아들여진다 할 것이다.

 

 

5

  젊어서 죽은 도향은 가장 촉망되는 소설가였다. 그는 사상도 미완성품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열이 있었다. 예각적으로 파악된 인생이 지면 위에 약동하였다. 미숙한 기교 아래는 그대로 인생의 일면을 붙든 긍지가 있었다. 아직 소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도향이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다분히 센티멘털리즘을 발견하는 것은 아까운 가운데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 센티멘털리즘에 지배받지 않을 만한 침착도 그에게 있었다.(하략)

 

이상은 김동인의 <조선근대소설고>의 한 구절로 동인은 이 글에서 비교적 짧은 문장을 통해서나마 도향에 대한 적절한 인상평을 썼다고 본다.

 

20세의 소년 도향이 《백조》 동인으로서 단편<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을 발표하여 문명이 떨치게 되고 한편 장편<환희>를 갖고 당시 문단에 굴지의 맹장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었다.

 

그가 문단 생활이 시작된 날로부터 25세에 요절하기까지의 불과 6년 동안에 20여 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기록을 남긴 것이라 생각된다.

 

극히 짧은 생애가 남긴 작품일지라도 그의 작품은 초기의 작품이 완연히 낭만주의적 경향이고 그 후기가 자연주의 내지 사실주의 경향이었다는 종래의 그에 대한 평자들의 한결같은 말이 정평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월탄은 <대전후문예운동>에서 다음과 같이 실감있게 지적하고 있다.

 

도향 나빈의 작품이 초기에는 로맨틱한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비롯하여 장편 <환희>에까지 오도록 그 작품은 애상 영탄의 로맨틱한 덩어리였다. 그러나 작품은 편을 거듭하여 써 올수록 닦이고 닦여서 <여 이발사> 이후의 작품은 체호프를 연상케 하고 모파상의 편린을 어루만져 왔다. 그가 죽기 1,2년 앞두고 나온 작품 중에서 <뽕> <지형근> <물레방아> <벙어리 삼룡이> 등의 작품은 쌀쌀한 가을날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한다. 현존 작가들 쳐놓고 이 사람처럼 그 작품이 괄목하도록 변한 작가는 드물 것이다.

 

여하튼 도향이 초기에 낭만주의로 출발하다가 후기에는 사실주의로 극단에서 극단으로 비약한 데는 자신이 갖는 작가적 기질에서보다, 낭만주의가 소설 문학에는 부적당하다는 점에서와, 당시의 문학적 사조가 일변된 것에 순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향의 문학 세계를 결산하는 데 있어서 그 문학적 가치의 우열을 논하기보다도 그의 작가 수업을 통한 작풍의 비약을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문학은 앞으로 더욱 새로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점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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