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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이호우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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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이호우


요점 정리

 지은이 : 이호우

 갈래 : 현대시조. 연시조

 성격 : 역동적(力動的), 관념적(觀念的), 의지적(意志的), 상징적(象徵的)

 표현 : 직설법, 과장법

 구성 :

  제1연 : 힘을 가진 너(깃발)의 승리에 대한 믿음

  제2연 : 눈부시고 뜨거운 절대의 표백(表白) - 온 몸에 ~ : 깃발의 절대적 모습 (시각적 심상을 청각적 심상으로 전이(轉移)시킨 공감각적 표현)

  제3연 : 다함이 없는 젊음의 표상

 제재 : 깃발

 주제 : 힘과 의지와 젊음의 표상인 깃발에 대한 예찬, 절대적 허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힘과 의지의 표상인 깃발의 예찬

 특징 : 전통적인 시조의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현대적인 감각을 잘 살리고 있으며 삶에 대한 굳센 의지와 승리에의 신념을 생동감 있게 표현(表現)하고 3장이라는 기본적 틀을 제외하고는 시조의 기본 형식을 파괴했음.

 출전 : 이호우시조집 (문장)

 이해와 감상

  이 시의 극한 상황은 6·25로 전쟁으로 인한 암흑 속에서 깃발을 통해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시인의 의지를 드러난 작품으로 삶에 대한 굳센 의지와 승리에의 절대적 신념을 깃발로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깃발은 '힘'의 상징으로, 2연에서는 '절대의 표백'으로, 3연에서는 '젊음'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들 세 이미지 사이에 어떤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는지는 쉽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이 삶에 대한 굳센 의지와 승리에의 절대적 신념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음은 잘 알 수 있다.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시조시인. 본관은 경주(慶州).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 아버지는 종수(鐘洙), 어머니는 구봉래(具鳳來)이며, 누이동생 영도(永道)도 시조시인이다.

 

향리의 의명학당(義明學堂)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8년 신경쇠약증세로 낙향하였다.

 

1929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하였으나 신경쇠약증세 재발과 위장병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다음해 귀국하였다. 1934년에는 김해(金海) 김씨 순남(順南)과 혼인하였다.

 

광복 후 ≪대구일보≫ 편집과 경영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52년 대구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1956년에는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한편으로는 시작 활동을 하여 지방문화 창달에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작 활동은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 落葉〉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40년 ≪문장 文章≫ 6·7호 합병호에 시조 〈달밤〉이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작품집으로는 첫 시조집 ≪이호우시조집 爾豪愚時調集≫이 1955년 영웅출판사(英雄出版社)에서 간행되었다. 이어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낸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 休火山≫(1968)을 발간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호우시조집≫ 이후의 작품들을 모아 엮은 시조집이다.

 

그의 시조관은 ≪이호우시조집≫ 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한 민족, 한 국가에는 반드시 그 민족의 호흡인 국민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국민시는 간결한 형(型)과 서민적이고 주변적이며 평명(平明)한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추천 작품 〈달밤〉에는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아무 억지도, 꾸밈도, 구김도 없다.”는 선자(選者)의 말과도 같이 범상적인 제재를 선택하여 평이하게 쓴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범상적 제재와 평이성이 초기 시조의 세계라면, 후기 시조 ≪휴화산≫의 시편들은 인간 욕정의 승화와 안주하는 경지를 보인 점이 특색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고전적 시조를 현대 감각이나 생활 정서로 전환시켜 독특한 시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시조 시단에 남긴 공적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대구 남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1955년 첫 작품집인 ≪이호우시조집≫으로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저로 ≪고금시조정해 古今時調精解≫가 있다.

 

≪참고문헌≫ 이호우論(金濟鉉, 現代文學, 1970.3.), 李鎬雨論(金允植, 現代詩學, 1970.8.), 爾豪愚論(韓春燮, 時調文學, 1976.12.), 定型에의 鄕愁와 逸脫(金昌完, 韓國現代詩文學大系 22, 知識産業社, 198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깃발

  유치환(柳致環)이 지은 시. 9행의 자유시이다. 1936년 1월 ≪조선문단≫ 종간호에 발표되었다가 그의 첫 시집 ≪청마시초 靑馬詩抄≫(1939)에 수록되었다.

 

이 작품이 전재되는 과정에서 몇 군데 첨삭이 가해지고 있음은 다른 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전체가 9행으로, 연이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내용면에서 세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 단락(1∼3행)은 도입부로 깃발의 상징적 이미지를 영원한 세계로 향하는 향수의 몸부림으로 보았고, 두 번째 단락(4∼6행)에서는 깃발을 통하여 영원히 이룩할 수 없는 꿈과 끊임없는 흐느낌과 향수와 좌절로 보았다. 세 번째 단락(7∼9행)에서는 이러한 좌절의 근본적인 요인을 묻고 있다.

 

작자는 여기서 깃발의 본래의 형태를 자신의 독특한 주관으로 해석하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의 실현을 갈구하는 마음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은 “깃발의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 계속 일으키는 파동감, 즉 상징성이 형성하는 자장(磁場) 같은 것”이라고 한 어느 논자의 말과 같이, 그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역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깃발’은 소리 없는 아우성도 되고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도 된다. 이때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순정이 “이념(理念)의 표(標)ㅅ대 끝에”서 백로처럼 날개를 펴는 애수로 화할 때, 깃발은 이상향에 집착하는 의지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 의지로 발전하다가 결국 좌절의 비애로 귀결된다.

 

시인이 지니고 사는 높은 이념이 외롭고 애달픈 것임을 현실과 이상, 좌절과 염원을 대응시킴으로써 더욱 확연해진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의지가 비애와 좌절로 귀결되면서도 생명에 대한 연민과 강한 애착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靑馬 柳致環論(文德守, 現代文學, 1957.11·12.), 絶對的 心象(李商燮, 心象, 1973.3·12.), 허무와 非意志的 자아(金埈五, 韓國代表詩評說, 文學世界社, 198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旗)의 상징성

   기라고 하는 것은 헝겊·종이 등에 글자·그림·부호 등을 잘 보이도록 그리거나 써서 특정한 표상으로 쓰는 물건이다.

 

(1) 일반적 상징성 기는 ‘어떤’ 뜻을 나타낸다. 이것이 기의 주요 기능 가운데의 하나인 상징성이다. 의견이 분분할 때 자기 편의 태도를 확실히 밝히면 ‘기치가 선명하다. ’고 한다.

 

이와 같이 기는 드러내 보일 때와 뉘어서 숨길 때와는 그 상징하는 뜻이 달라진다. 군대가 진격해서 고지를 점령하면 맨 먼저 자기편의 기를 꽂는다. 그러면 한쪽은 사기가 충천하고 한쪽은 풀이 죽는다.

 

6·25전쟁 때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이 맨 먼저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는 광경을 보고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의 나제전(羅濟戰)에도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 너머에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백제 왕자 태(泰)는 매우 급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군기(軍旗)가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보여준다.

 

또, 기는 정복을 상징한다. 탐험가나 등산가들이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면 거기에 자기 나라 국기를 꽂아 정복을 표시한다.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의 우주인들이 성조기를 꽂고 돌아온 것도 같은 보기이다.

 

기는 신호로 쓰이기도 한다. 전쟁에서의 백기는 평화 또는 항복을 뜻하고, 철도에서 푸른 기를 흔들면 기차가 진행하고 붉은 기를 흔들면 정지한다. 적십자기는 의료기관을 상징하므로 전쟁에서도 그 표지가 있는 곳은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 전쟁에서 적을 협공할 때 맞은편의 아군과 기로써 신호를 하였다. 이때 쌍방이 미리 정한 방법에 따라 여러 개의 기를 차례로 사용하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도 서로 전달할 수 있었다. 또, 옛날 지휘관은 자신의 지위와 책무를 쓴 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도 수기를 들어 위의를 표시하며, 이것을 휘둘러 군대를 지휘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손에 든 학털 부채는 군사(軍師)를 상징하는 수기의 구실을 하였고, 우리 농악대가 전립(戰笠) 끝에서 돌리는 상모도 지휘용 수기와 같은 구실을 하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위용은 방위에 따라 오색기를 휘날리며 여러 개의 북을 둥둥 울리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병서(兵書)에도 “정정한 기는 맞서 싸우지 말며, 당당한 기는 치지 말라.”고 하였다. 군대의 진용과 사기는 깃발로써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라는 시조에서도 장백산에서 휘날리는 깃발로 김종서(金宗瑞)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성을 수비하며 조련할 때의 예를 보면, 낮전투에서 정문을 닫고 쉬게 할 때는 숙정패(肅靜牌)를 내걸고 표미기(豹尾旗)를 세운 뒤 휴식호령을 내리게 되어 있고, 밤조련에서는 방위에 따라 고초기(高招旗)의 색깔을 달리하여 세우면 그 색깔에 해당되는 대열이 출동하게 되어 있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 정유(丁酉) 9월 16일조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장수 하나가 물러나 저만큼 간 것을 보고, 곧장 회선하여 그부터 목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나의 배가 돌아서면 여러 배가 동요될 듯하여 중군에게 휘(麾:군령을 내리는 기)와 초요기(招搖旗:장수를 부르며 지휘 호령하는 기)를 세우게 하니 그들의 배가 돌쳐서 왔다.”는 대목이 있어 해전에서 군기의 쓰임새가 실감 있게 표현되고 있다.

 

어선에서는 풍어가 되면 오색천을 길게 달아 나부끼게 함으로써 용왕에게 감사하고 기쁨을 나타낸다. 무당이 굿할 때에는 색깔을 갖춘 여러 개의 기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게 하여 그 기의 빛깔로 사람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는데, 붉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왕성하고 노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시든다는 등으로 해석을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만국기를 다는 것은 축제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기의 상징성은 우리 생활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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