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신 - 난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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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에 얽힌 恨의 美學 - 「난장판」을 중심으로-
조동민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작가 김 홍신은 밝은 녹색의 정원보다는 곰팡내 나는 쓰레기장을 즐겨 찾는 작가라 한다. 그는 왜 그러한 곳을 즐겨 찾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부터 먼저 던져 두고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이 물음은 그의 문학은 어떤 특성을 가졌는가라는 물음과 같은 발문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선천적으로 뜨거운 심장과 강한 윤리 의식을 지닌 작가의 한 사람이란 데에 그 해답이 구해질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삶의 진실을 그 어두운 곳을 헤집어 찾고, 그 어둠을 걷어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작가다. 이것이 바로 쓰레기장을 즐겨 찾는 이유가 될 것이다. 김 홍신 문학의 가장 큰 특성의 하나는 깨끗한 양심 실천에 있다. 이것은 청교도적 결백증으로 볼 수도 있으며, 자기 양심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순결한 작가 의식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인간시장(人間市場)」이나「무죄증명(無罪證明)」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난장판」도 결코 이러 이러한 세계와 궤를 달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순수한 선의지가 충만해 있고 강한 윤리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대개 그의 작품에서 보여 주는 주인공들의 초인적인 의지, 그것은 폐쇄된 세계나 무기력한 세계의 인간들에게 상황 탈출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하나의 통풍 작용을 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념적 구호와는 달리 누구나가 자기 무력증에 빠져 있으며, 사회 정의와 양심 부재라는 무거운 병적 징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집단 의지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활성화된 개인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민주적 사회구조 속에서 참된 개인의 부재야말로 가장 위태로운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에 대한 자각 촉구, 곧 무기력증에 대한 각성제가 되는 것이 김홍신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고인 물이 오래면 썩게 마련이고 오래도록 통풍이 없으면 질식하게 마련이다. 이 통수와 통풍의 구실로써 많은 독자의 공감을 사고 있는 것이 그의 문학이다. 「난장판」도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현재 가장 많은 독서 인구를 동원하고 있는 작가 김홍신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소설들이다. 소설을 재미있게 엮는 기술은 그의 타고난 재주인 것 같다. 어느 작품이고 그의 작품은 지루하다든지 따분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재미있고 감동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재미의 한계를 넘어서 진지하고 엄숙하며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 줄거리를 살펴보면, 사건의 발단은 논산읍의 한 변두리 〈쌈짓골〉에서 시작된다. 이 곳엔 인생의 바닥을 살아가고 있는 세 집단이 움막을 치고 살게 된다. 곧 털보, 점백이 그리고 곡마단원의 셋이다. 털보네 패거리는 동냥아치들이고 점백이 패거리는 소매치기들이다. 곡마단원이란 자기들 장비를 압류당해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부류다. 이들 세 집단은 서로 상종이 없었으나 점백이 소속 성자가 죽음으로 인해 서로의 처지를 이해 동정하게 되고 모두가 읍내 황장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공동 운명체임을 알게 되며, 다같이 황장사에 대한 풀리지 않은 응어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털보네의 부두목격인 허풍선이는 가장 큰 원한을 품고 있으나, 밖으로 알려지긴 실성한 사람으로만 알려진 채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때때로 허풍선이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며 무언가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란 것이 드러나는 암시적 수법을 쓰고 있다.
백중이 다가오자 읍내에서는 난장이 선다는 말이 나돌게 되고, 털보의 읍내 출입이 잦게 되며, 애들에 대한 감시도 한층 누그러진다. 드디어 허풍선이는 그 동안 닦은 기량과 체구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고, 어머니와 순냄이한테 장사 씨름 대회에 출전할 것을 알리기도 한다. 한편 번개가 훔쳐온 권총으로 황장사를 해치우려는 것을 타일러 말리고 자신감에 넘치는 의사를 밝히며 협조를 구한다. 그런데, 황소가 걸린 천하 장사 씨름 대회는 황장사 이외에는 우승을 못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잇다. 그것은 황장사가 비록 중늙은이라곤 하지만 논산이 생긴 이래 죽은 김문재를 빼놓고는 그 사람을 힘으로 당할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어라차차 !〉 한마디면 단숨에 쇠뿔도 뽑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상적인 존재로 되어 있다. 때문에 누구든 그와 씨름 붙었다가 잘못하며 목숨도 못 건진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만약 힘으로 제압한다 할지라도 그 패거리들의 칼날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을 건 모험에 허풍선이가 뛰어들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죽기를 맹세코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기어이 그 곳에 뛰어들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유가 밝혀짐으로써 사건의 긴장은 고조되어 간다. 허풍선이가 그처럼 위험스런 모험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그 곳이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한이 맺혀 있기 때문이다.
「난장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뼈에 사무치도록 맺힌 한(恨)을 푸는 이야기다. 악(惡)의 대명사요, 괴력의 사내 황장사에게 목숨을 걸고 도전하게 된 허풍선이는, 황장사에게 오직 그의 씨름의 맞잡이란 이유 때문에 살해당한 김문재의 아들이며, 미모인 그의 어머니까지 농락당하고 있는 한 맺힌 사내이다. 지금까지 그의 어머니는 그자의 손에서 벗어나질 못하며, 허풍선이 자신은 김대문이란 이름까지 호적에서 파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호적상으론 인공 난리 때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름도 없이 살아오게 된 것은 모두가 외삼촌 털보의 눈물겨운 뒷바라지의 덕이었다. 그런 덕으로 혈안이 되어 찾아다닌 황자사의 눈을 교묘히 속여 넘길 수가 있었던 것이고, 그가 끝까지 베일 속에 숨어산 것도 황장사의 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고, 남 몰래 밤으로만 몸을 단련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한시도 아버지의 비참한 최후와 능욕당하던 어머니의 부끄러운 장면을 잊지 못했다. 이렇게 자신을 감추고 살아오는 동안 황장사 패거리의 비인간적 잔인성은 그들의 동료에게 쉴 새 없이 가해지고 있었다. 쪼깐이, 성자, 째보 등의 처참한 죽음이 이어질 때마다 그는 더욱 맹렬한 분노의 불꽃을 피어올리고 있었다. 귀엽고 앳된 쪼깐이는 그들에게 몸을 바치고 끝내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시체를 매장하러 와서까지 갖은 모독을 다 저질렀다. 곧 쪼깐이의 치마를 들추고 아랫도리를 쑤셔대는가 하면, 구덩이에 밀어 넣고 오줌을 갈기기도 했다. 보다 못한 그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으나. 몽둥이와 자전거 체인의 세례를 맞고 그만 눕고 말았다. 달포만에 간신히 생명을 건져 일어난 그는, 성자가 죽었을 때나 째보가 죽었을 때에도 누구보다 섧게 울었다. 이 모두가 그에게는 풀지 못한 한으로 가슴에 응어리져 갔던 것이다. 비단 이런 한은 허풍선이에 한한 것만은 아니다. 쌈짓골 사람 모두가 이러한 한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성자가 죽었을 때, 그들이 풀지 못한 한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애인 (성자)을 잃은 번개, 섬섬이를 잃고 보복하러 갔다 개죽음을 당한 째보, 섬섬이를 못 잊는 빠꿈이 들이 모두 한 맺힌 사람들이요, 황장사의 농간에 걸려 벌이도 못 한 채 묶여 사는 곡마단 패거리, 그 중에서도 백중날 장비를 실어 내려다 붙들려 병신이 된 난장이 박서방, 그리고 인질로 잡혀진 채 몸을 바치고 있는 통 굴리는 여자, 남편 죽은 지 삼칠일도 지나기 전에 능욕당한 심가의 아내, 이 모두가 한이 맺히고 응어리진 사람들이다. 심지어 천천수도 백정놈으로 괄시당한 한을 못 풀어 황장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도 한을 지닌 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어떻든 이 작품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한을 지닌 사람들의 삶을 그린 이야기며, 허풍선이는 가장 큰 응어리를 지닌 사람으로 이러한 한을 풀기 위해 목숨을 건 결전장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숙명적 사내였다. 정말 그것은 숙명적 대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 대결은 더할 나위 없이 엄숙한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 작품의 감동적이 미학은 바로 여기에 자리잡고 있다. 진정 그는 선과 악의 대결장에 선의지의 상징적 존재로 나서게 된 것이다. 뿌리 깊은 악에 대해서 당당히 맞서는 선의지, 여기서 허풍선이의 존재는 우리의 공명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과는 허풍선이의 승리로 끝나는데 다음은 그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황장사가 번쩍 들렸다.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고 가슴께까지 들어올렸다. 무서운 힘이었다.
어디가 허물어지는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처절한, 포효하는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외마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리를 꺾어 무릎 위에 얹고 절구질을 했다.
모래 바닥이 팽기며 황장사는 개구리처럼 뻗어 경련을 했다. 허리가 작신 부러졌다. 처참한 장면이었다.
결승에서 한 판 져 준 후 완전히 탈진한 황장사를 메어꽂는 장면이다. 이 감동적이 파국은 가장 시원한 장면이다. 그것은 단순히 허풍선이 한 사람만의 승리가 아니라. 소중하게 커 온 선의지의 승리이며, 응어리진 한을 푸는 해한제였다. 이 한판의 승부가 단순히 한 사람만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협력에 의한 것이란 점도 또 하나의 의의를 지니게 된다.
마지막 대단원은 댓골 습격에 대한 읍민의 봉기로 이루어지는데, 그 최후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손에 낫이나 몽둥이 그리고 쇠스랑과 도끼를 들고 읍내로 몰려하는 군중, 〈황가눔 잡아라 !〉〈천가눔 잡아라 !〉하는 함성, 그것은 우람한 코러스요 선의지의 대합창이다. 그것은 크고 확실한 감동을 동반한 합창이다.
이것이 「난장판」의 대략적인 줄거리거니와, 이 작품은 단적으로 말해서 난장에 얽힌 한(恨)을 감동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냥질과 소매치기와 폭력과 사기로 뭉쳐진 비교양의 집단. 본능적 원색 감정만으로 살아가는 이들 삶의 이색 지대를 통해서 이 작가는 새삼 삶의 조건이 무엇이여, 최후까지 살아 남는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곧 김문재, 쪼깐이, 성자, 쨰보 등의 죽음을 통해서 삶의 기본 조건이 어떻게 짓밟히고 있으며, 그들의 한이 얼마나 크고 풀기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한의 미학(美學)을 통해서 우리는 김홍신의 독특한 상징을 읽을 수 있다. 선악의 갈등 대립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주제지만. 악의 상징적 존재인 황장사와 선의지의 상징적 존재인 허풍선이의 대립은 독특한 시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곧, 악의 세력이 팽배한 상황 속에서 악의 칼날을 피해 어렵게 성장해 가는 선의지는 언뜻 청마(靑馬)의 시귀를 연상케 한다.
선은 약하고 악은 강하며 성(盛)하다. 여기 신의 포상(褒賞)을 믿지 아니하는 사나이가 넉넉히 악을 증오하고 선에 가담하여 마침내 즐거이 사망할 수 있음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이렇게 인간의 성적에 있는 향선성(向善性)의 이유는 다만 선이 약하고 슬픈 때문이리라.
실로 선(善)은 악(惡) 앞에 약하고 슬픈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악에 비해 선의 실권이 그만큼 어려움을 뜻한다. 선과 악은 분명히 조화될 수 없는 상극적 대립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악을 경계하고 악은 반대로 선을 경계한다. 여기서 악이 팽배했을 때 선이 자랄 수 없는 이유가 성립한다. 이 작품은 이러한 선악의 대립 갈등상을 그려 내고 있다. 허풍선이가 씨름판이 끝날 때까지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선이란 그만큼 성장키 어려운 존재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말하자면 한없이 약하고 슬픈 존재인 특성을 상징해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 속에 숨어서 자랄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은닉 속의 성장이 퍽 시적 인상을 주고 있다. 말하자면 어둠 속에서 자란 존재이기 때문에 허풍선이의 존재가 귀중하듯이 끊임없는 악의 박해를 피해자라는 선이기 때문에 선은 아무리 작더라도 소중한 논리 바로 그것이다.
허풍선이를 표상으로 하는 선의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강자인 악과의 힘의 불균형은 우리를 초조한 긴장 속에 싸이게 한다. 악의 실체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 보면 황장사는 철저한 기회주의자다. 거대한 체구와 엄청난 힘에 비해서 하는 짓은 한없이 비열하고 저속하다. 예를 들면, 적 치하에 선 붉은 완장을 둘렀다가. 국군의 수복 후에는 치안 대장으로 둔갑하여 남의 재산과 생명을 마음대로 유린한다. 뿐만 아니라. 무서운 힘과 커진 재력을 이용하여 사조직을 강화하고 읍내를 마치 사설 왕국처럼 나들어 그 위에 군림한다. 그는 또 닥치는 대로 여자를 농락하여 야수적 성욕을 만끽한다. 실로 안하무인격이다. 이것이 악의 실체다. 그야말로 그는 힘의 우상이다.
반대로 허풍선이는 분명히 윤리적 인간이었다. 인정과 사랑을 지닌 윤리적 인간이었다. 그는 그의 부하들을 폭력으로 다스리지 않는다. 그리고 확고한 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차츰 무서운 힘의 소유자로 성장해 갔지만 결코 그 힘을 악용하거나 남용하지 않았으며, 그 잘 하는 노래 솜씨도 때와 장소를 가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한을 푸는 일에도 결코 비겁하거나 비합리적인 수단을 강구하지 않았다. 오직 합법적인 방법으로 대결하기 위해서 힘만을 기르기에 전념했고, 번개가 황장사를 치기 위해 훔친 권총까지를 뺏어 버린다.
여기서 작가는 힘에는 힘으로라는 정공법을 쓰면서 당당한 윤리적 인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직한 직선의 미학을 보게된다 허풍선이는 그 성격 자체가 윤리적이다. 이 윤리적 인생관은 털보네 움막의 생활 신조였다. 다음과 같은 훈시는 철저하게 이 윤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허풍선이 성님한테 얘길 들었을 것이다. 느이들은 동냥아치가 아니라 자활대의 용사이다. 지금은 빌어먹지만 이 담엔 결코 빌어먹어선 안 되겠기에 여기 모인 것이다."
"동냥질이 아니라 놀이채를 받는 거다. 결단코 빌어먹거나 떼를 써선 안 된다. 타령을 해서 놀이채를 주면 받고 주지 않으면 그냥 오는 거다."
이처럼 그들은 성실하고 당당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잉여 인간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려는 자세 그것이 허풍선이의 인간이다. 이것은 허풍선이의 성격 중 가장 매력 있는 부분이거니와 이 거인다운 면모로써 작가는 선의지의 고귀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같은 체구와 힘을 가졌으면서도 비열하고 야비하며 사악한 쪽으로 기운 황장사와 곧고 바르며 당당한 윤리성을 지닌 허풍선이를 통한 상징 체계는 영웅적 서사시 같은 시정을 느끼게 해주며 비극적 긴장감을 안겨 준다. 이것은 그이 작품이 확고한 윤리 의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와 성격을 통해 볼 때, 그 인물들이 전근대적 형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전근대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은 힘의 대결을 다름 아닌 씨름으로 치른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코 현대적 방식이 아니다. 특히 암흑가라는 데 그렇다. 거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리와 비합법만이 난무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장사는 그 힘의 공인을 씨름장에서 받게 되고 허풍선이는 굳이 이 씨름이라는 전근대적 방식을 통해서 황장사를 침몰시키려고 계획한 점이다.
기실 옛날의 씨름꾼은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유도를 도(道)라고 하지만 씨름이야말로 가장 신사다운 것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씨름의 우승자는 남자로서 영예롭기도 하였거니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황장사는 이러한 절대성을 빌어 악용하였던 것이고, 허풍선이는 본래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선용한 것이다.
또 하나 전근대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주는 것은 그들의 최대의 무기가 전통적 살생 무기가 아닌 농기구였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들은 최고의 무기로써 낫이나 식칼을 들고 나섰다. 황 장사의 씨를 밴 어머니가 핏덩이를 쏟고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을 때나. 번개가 가진 권총을 빼앗을 때에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한 자루의 낫이었다. 또 심가의 아내가 남편이 죽은 지 삼칠일도 안 된 몸으로 황장사의 능욕을 당할 때, 여관 밖에서 지키고 있던 똘마니 손에 들려 있던 것도 한 자루의 낫이었다. 그리고 번개가 황장사에 대한 한을 풀고자 성자의 무덤을 찾았을 떼에도 그의 손에는 부엌칼이 들려 있었다. 이 떼의 낫과 부엌칼은 최대의 살의를 암시하는 흉기로 변해 있는 것이다. 마지막 대단원을 맺는 장면에서 황가를 무찌르기 위해 달려간 군중의 손에 쥐어진 것도 몽둥이나 농기구였다. 이러한 것은 우리민족이 살인 무기를 쓸 줄 모르는 전통적 순박성을 그대로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근대적 흔적은 황장사의 여성 관계에서도 약간은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능욕하고 다닌 쪼깐이, 성자, 섬섬이, 심가의 처, 통 굴리는 여자 등이 모두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배우자 없는 홀몸의 여자들이란 점이요, 허풍선이의 어머니의 경우는 그의 남편을 살해해서라도 홀몸이 된 후에 농락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악마의 핏속에도 우리의 전통적 윤리관이 실낱같게나마 남아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특히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고전적인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전근대적 인간형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전근대적 인간형이 작품의 성패와는 무관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히려 이런 전근대적 성격은 우리의 전통적 윤리관이 밑받침이 된 것으로서 사건의 해결을 순수하고 인상깊게 해주고 있다.
끝으로 이러한 사건을 담고 있는 문체를 일별함으로써 김홍신 문학에 대한 좀더 밀도 있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의 문체는 결코 유려한 문체라고 할 수는 없다. 매끄럽고 치밀하다기보다는 더러는 성글고 거친편이다. 가끔 생경한 표현은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즉 힘있는 문체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소재가 그러한 만큼 생생한 사투리와 비어와 은어와 속어가 한데 뒤섞여 그의 문체는 넘치는 박진감을 주고 있다.
즉 이러한 문체는 교양과 문화를 외면한 이들 세계의 적나라한 원색 감정을 묘사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특히, 충청도 사투리는 구수하면서도 여유와 인정미를 느끼게 하는 뉘앙스를 발휘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지문보다는 대화에 월등한 재능을 보여 주고 있다. 참으로 그의 대화체는 매력적이다. 때때로 그의 대화 속에서는 희곡의 한 대문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그의 대화는 적절하고 박진감이 있다. 작가가 대화를 잘 쓴다는 것은 등장 인물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작가가 등장 인물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 대화는 빗나가고 따라서 대화는 사건과 상황에 조화되지 못하고 허공에 뜨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대화는 성격과 상황에 완전히 조화를 이룬 가운데 여유 있게 사건을 유도해 나간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이눔이, 뒈지고 싶냐?"
황장사가 꿈쩍도 않는 허풍선이에게 한 말이었다.
"넴게유."
"아줌니, 뭔 일유?"
강서방이 머쓱해 있는 서천댁에게 물었다. 서천댁이 입을 달싹거렸다.
"맹근이 아부지, 내 돈 내놔유."
전혀 엉뚱한 소리였다.
은 마지막 결전장에 나가서 한 판 붙는 장면의 대화이다. 이때 허풍선이의 심정은 형언할 수 없이 복잡했을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또, 황장사의 심기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다. 어쩔 수 없이 당황해진 황자사의 입에서 튀어 나올 수 있는 말은 '뒈지고 싶냐?' 이 말 한 마디밖에 딴 말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풍선이가 이 상황에서 뭐라 대답할 것인가. '넴게유.' 이 한마디는 가장 적절하면서도 말하지 못한 수천 마디의 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곧 암시와 여유의 표면적 순종의 다양한 의미가 그 속엔 숨어 있는 것이고, 이 대화는 난리에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서천댁이 남정이 그리워 야바위꾼 강서방(홀아비)에게, 접근하는 첫 대화다. 밤길에 뒤쫓아간 여인이 숨었다 불쑥 나온 사내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고 지금 그 장면이 얼마나 어색하고 서먹서먹한가. 여기서 가장 적절한 한 마디는 역시 딴전 부리기밖에 없을 것이다. 야바위에게 돈도 많이 잃어 주었으니까.
우리는 대화란 것이 일반적 서술이나 묘사보다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다. 한 마디의 능숙한 대화는 어색한 분위기를 번쩍 살아나게 해주며 풀기 어려운 실마리를 가장 쉽게 풀어진다. 서천댁의 이한 마디의 대화는 강서방과의 사이에 팽배하게 긴장되어 있는 어색한 분위기를 가장 쉽게 그리고 편안히 건너뛸 수 있게 해준다. 이 작가는 성격과 분위기에 가장 적절한, 그리고 유일한 대화를 찾는 데 누구보다 세심한 작가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민속의 하나였던 난장은 참으로 흥겨운 잔치였고, 과거 우리 조상들의 최대 스트레스 해소 장소였다. 그것은 연일 흥겨운 오락과 술과 도박이 계속되고 씨름과 그네, 곡마단, 남사당패 등으로 혼을 쑥 뽑아 놓을 만큼 문자 그대로 난장(亂場)을 이루었던 것이다. 얌전한 처녀 총각이 느닷없는 바람이 나는 것도 이 난장의 영향이었고, 수절 청상이 몰래 봇짐을 싼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난장은 흥겹고 화려하고 들뜨고 가슴 부푼 행사였다. 그러나 작가 김 홍신은 이런 난장을 통해서 그 표면에 겉도는 삶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앙금처럼 서려 있는 그늘진 삶의 애환을 그려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색다른 점의 하나는 사실의 표층이 아니라 심층부를 조명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심층에 서려 있는 한(恨)을 양각시켜 냄으로써 숨은 감동을 불러 내고 있다. 성과면에서도 이 작품은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도 진지하고 문학적 향기가 높은 작품으로 보인다.
곧, 선의지의 표상인 허풍선이를 성장시켜 뿌리 깊은 악의 표상인 황장사를 떳떳하게 침몰시킴으로써, 막힌 밀실에 통풍 작용을 해줌과 함께 시정 어린 영웅주의적 당당한 방법으로 감동적인 파국을 형성함으로써, 감동전달이라는 문학 본연의 사명에도 충실하고 있다. 자료 수집과 구성에도 성실성을 보여 준 작품이다. 역작이다.
앞으로 작은 거인의 작가 김홍신에게 할 일이 남았다면 허풍선이를 더욱 성장시켜 현실 쪽으로 끌어들이면서, 보다 철저히 작가 자신이 작품 뒤로 숨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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