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김유정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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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농민과 고향의 발견

 김영기

 

 

 

1

암흑기 식민지 조국에서 고독과 실의, 병고와 실연, 파산과 가난의 일생을 마쳤던 김유정은 그러나 농민과 고향의 발견이라는 한국 현대 문학사의 새 장을 열었다. 한국의 전통적 토착어의 해학과 뿌리 뽑힌 농민의 이야기, 그리고 고향 의식의 정서를 소설의 미학으로 삼았던 그는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성군 신동면 중리(실레)에서 2남 6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형과 누님들 사이에서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집안은 넉넉하여 수천 석을 운영하였으며 제동 공립 보통 학교에서 신학문에 처음 접하고, 휘문고보를 나왔으며, 연전을 중퇴했다. 맏형의 금광 실패와 방탕으로 집안이 기울고 그의 생활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고향에서 농촌 운동을 전개했으며 집안이 파산 지경에 이르러 서울의 누님 집에 의탁, 이때부터 창작활동이 시작된다. 병약과 실연, 파산과 가난 중에서도 그의 문학에의 정열은 샘솟는다. 1937년 3월 29일 서른 살의 젊은 죽음은 한 줌의 재로 한강에 뿌려졌다.

 

김유정의 창작 활동은 1935년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 문단에 데뷔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습작은 1933년 <소낙비>와 <산골 나그네>를 집필한 데서 비롯된다. 안회남과는 휘문고보 동창이었고, 박태원.이석훈.이상과는 어울리는 짝이었으며, 김문집으로부터는 찬양을 받았다. <봄 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아내> <산골 나그네> <가을> <두꺼비> 등을 계속해서 발표하면서 30년대 식민지 조국의 고향을 지키려 하였다. 춘천에 '김유정 문인비'가 춘성에 '김유정 기적비'가 세워진 것은 인간적.문학적 업적을 웅변적으로 표현해 준다.

 

 

2

김유정이 작품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30년대 중반기는 아직도 인습에 젖은 봉건주의적인 억압이 잔존해 있었으며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겹쳐서 서민의 대부분은 따라지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 두 가지의 상황은 농민을 소작인으로 몰락시켰다. 소작농은 전체 농민의 37.6%(1919년)에서 46.5%(1930년)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것이 식민지 한국의 참상을 말해 주는 것이었으며 한국 농촌의 황폐화는 곧 전면적인 민족적.사회적 위기 의식을 고조시켰다. 봉건.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전근대적인 역사 단계로부터 근대적인 단계로, 폐쇄적 고립 사회로부터 외래의 제국주의 식민 사회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민족 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일본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 수탈이 노골화하여 마침내 토지 조사 사업이 시작된다. 토지 소유자에게 일정 기간 내에 소정의 수속을 밟아서 각각 소유지를 신고케 하고 그 기간을 지키지 못한 농민들은 강제로 토지를 빼앗겼다. 부락 공유지는 조선 총독부 직할에 들어가고 일부는 일제의 착취 기관인 동양 척식 회사에, 다른 일부는 일본인 화사와 개인에게 염가로 불하되었다. 소수의 지주가 소유권을 획득했으나 대다수의 농민은 토지에서 유리, 영세 소작농으로 몰락했으며 경작권을 확보하지 못한 농민들은 만주.북간도 등지로 이주 유랑하든가 평안.함경.강원도의 산악 지방의 화전민이 되든가 도시의 토막민 노동자가 되었다. 토지의 보다 많은 부분이 일본인에 의하여 점거되었으며 당시의 지주들은 부재 지주로서 마름을 두어 지주를 대행하며, 소작인의 감독, 소작료의 징수 등에 종사케 했다. 소작료는 첫째 흉년이나 풍년에 관계없이 매년 일정한 소작료를 부과하는 방법으로서 정조법, 둘째 매년 소작료를 정하는 집조법, 셋째 전수확고를 무조건 양분하는 타조법이었는데, 대체로 소작료는 생산고의 2분의 1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33년의 화전민은 무려 1백 40만 명에 달했으며 심훈의 <상록수>가 발표되던 때의 총 인구 2천 1백만 중 농촌 인구는 92.2%였다는 것을 상기할 때 농촌 수탈이 어떠했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하여 농촌은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는 곳' 또는 '농민이 살고 있는 곳'과 같은 단순한 공간적 의미를 넘어서서 민족적 생존의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조국 회복이라는 명제와 근대화라는 과정에서 <흙>과 <상록수>는 치열한 이상주의와 계몽주의를 표방했으나 공허한 선언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유정의 등장은 바로 이같은 상황의 다음 단계에 놓여진다. 그리하여 그의 농민 의식과 농민 문학은 농민의 호흡과 생존의 언어로 표백된다. 그의 출세작인 <소낙비>부터 검토해 보자.

 

해동갑으로 해갈을 하고 나면 캐어 모은 도라지, 더덕은 얼려 사발 가웃, 혹은 두어 사발 남짓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동리로 내려와 주막거리에 가서 그걸 내주고 보리쌀과 사발 바꿈을 하였다. 그러나 요즘엔 그나마도 철이 겨워 소출이 없다. 그 대신 남의 보리방아를 온종일 찧어 주고 보리밥 그릇이나 얻어다가는 집으로 돌아와 농토를 못 얻어 뻔뻔히 노는 남편과 같이 나누는 것이 그날 하루하루의 생활이었다.   <소낙비>

 

농민이 농토를 빼앗기고 농토에 발을 붙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진 실상을 기술하고 있다. 유랑 농민이 당하는 궁핍에의 도전과 좌절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참상을 제시한 것이다. <소낙비>는 농토를 빼앗긴 유랑 농민 부부가 극한적인 경제적 궁핍을 탈피하기 위해 벌리는 매춘의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생존을 위해 아내의 몸을 지주에게 파는 남편의 행위는 극한적인 궁핍 앞에서 인간의 윤리적 사고의 도덕적 행위가 무의미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참상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 <소낙비>의 원명이 <따라지의 목숨>이었다는 것을 반추해 볼 때 유랑 농민의 삶이 곧 한국인의 비참한 삶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모두가 '빚장이들의 위협과 악다구니에 알몸으로 야간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유랑 농민으로서 뿌리마저 뽑혀 버린 것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즉, 생존의 비극을 통해 생존의 언어를 표백한 것이다.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엣, 엣 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은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기보다 끝없이 부끄러웠다. 같이 털어 주던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섰는데 빈 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건 진정 열적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참다참다 못해 응오는 눈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가뜩 한데 엎치고 덮치더라고 올해는 고나마 흉작이었다. 샛바람과 비에 벼는 깨깨 비틀렸다. 이놈을 가을하다간 먹을 게 남지 않음은 물론이요 빚도 다 못 가릴 모양. 에라, 빌어먹을 거 너들끼리 캐다 먹든 말든 맘대로 하여라, 하고 내던져 두지 않을 수 없다. 벼를 거뒀다고 말만 나면 빚쟁이들은 우우 몰려들 거니깐-- <만무방>

 

<만무방>에서는 농사를 아무리 잘 지어 보았자 소작료 등을 물고 나면 빚만 남는 소작인이 자기가 지은 논에서 벼를 밤에 몰래 훔치다가 형에게 들켜 봉변을 당하는 소작인의 생태를 생생하고 절실하게 그려 주고 있다. 농민은 아무리 궁해도 땅을 믿으며 땅에서 얻은 것을 결코 훔치지 않는 법이다. 이 같은 농민의 가치관이 파국에 이르는, 즉 자기가 농사지은 것을 자기가 훔친다는 것은 생존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소작인의 재산을 가로채어 가는 것은 지주와 마름이다. 각종 세금도 있었고 관리의 횡포도 있었다. 지주와 마름의 수탈은 <금 따는 콩밭> <동백꽃> <봄 봄> <총각과 맹꽁이> 등에서도 나타난다. <금 따는 콩밭>에서는 빚에 눌려 입에 풀칠하던 소작인이 친구의 권유에 가난을 면해 보겠다고 금을 캐다가 콩밭 하나를 망쳐 버린다. 지주는 대노해서 '내년부터는 농사질 생각을 말라고 발을 굴렀다'고 했다. <동백꽃>은 지주의 딸에게 소작인의 아들이 당하는 이야기이다. 소작인의 아들이 '이제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다가 울어 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봄 봄>은 딸이 자라면 성례를 시켜준다는 조건으로 데릴사위로 들어갔으나 딸을 미끼로 13명의 데릴 사위 머슴을 갈아치우면서 부려먹는 지주(마름)의 횡포를 그리고 있다. 머슴의 친구마저 '땅을 얻어 붙이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고 했다. 이 같은 소작농에의 수탈의 심화는 농민을 소외시키고 분해시키며 농촌을 피폐하게 만든다. <동백꽃>에서 애정을 타락시키고, <봄 봄>에서 희망을 꺾어 버리며, <만무방>에서 수탈의 종말을, <소낙비>에서 매춘의 비극을, <금 따는 콩밭>에서 좌절하여 뿌리 뽑힌 농민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인의 고향을 지키려 했다. 즉 소작농의 비극을 통해서 민족적인 비극에 접근한다.

유랑 농민과 화전민과 이어지는 자리에 도시의 토막민이 놓여진다. 김유정은 농민과 도시 토막민을 별개로 파악하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지> <봄과 따라지>의 세계도 유랑 농민과 화전민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쓸 방을 못 쓰고 사글세를 논 것은 돈이 아쉬웠던 까닭이었다. 두 영감 마누라가 산다고 호젓해서 동무로 모은 것도 아니다. 한데 팔자가 사나운지 모두 우거지상, 노랑퉁이, 말괄량이, 이런 몹쓸 것들뿐이다. 이 망할 것들이 방세를 내는 셈도 아니요, 그렇다고 아주 안 내는 것도 아니다. 한 달치를 비록 석 달에 별러 내는 한이 있더라도 역 내는 건 내는 거였다. 즈들끼리 짜기나 한 듯이 80전 70전 그저 1원, 요렇게 짤끔짤끔거리고 만다.   <따라지>

 

<따라지>에 등장한 사람들은 도시(서울)에 뿌리를 박지 못한, 집도 직업도 확실치 못한 유랑 토막민들이다. 농민에의 수탈이 도시 빈민촌 토막민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 밑바닥을 살아가는 토막민의 생활을 표백함으로써 식민지 서울이 가난에 찌든 현장으로 상징된다. 산업 시설이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암흑기에 서울의 토막민들은 곧 피압박 한국인의 생생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도시 유랑 토막민의 상습적 욕설이 '경성부 고스까이'라는 비유로 던져졌다는 사실은 실로 식민지 지배자들에 대한, 그 수탈과 횡포에 대한 저항의 소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식민지 서울의 궁핍상은 <봄과 따라지>에 더욱 여실히 묘사되고 있다.

 

큰길에는 동무 깍정이들이 가로 뛰며 세로 뛰며 낄낄거리고 한창 야단이다. 밥통들은 한 손에 든 채 달리는 전차 자동차를 이리저리 호아 가며 저희깐에 술래잡기 봄이라고 맘껏 즐긴다. 이걸 멀거니 바라보고 그는 저절로 어깨가 실룩실룩하기는 하나 근력이 없다. 따스한 햇볕에서 낮잠을 잔 것도 좋기는 하다마는 그보담 밥을 좀 얻어먹었다면 지금쯤은 같이 뛰고 하련만 큰길로 내려서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일 즈음 갑자기 따르르응 이 자식아, 이크 쟁교로구나, 등줄기가 선뜩해서 기급으로 물러서다가 얼결에 또 하나 잡았다.

 

<봄과 따라지>

거지가 득실거리는 봄의 서울 거리의 모습이다.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구걸하는 거지로 메운 식민지 서울의 모습은 당대의 어둡고 비참한 풍속도의 집약이다. 거지.바 걸.실직자.여공들이 바로 토막민이었으며 <따라지>는 비천한 따라지 인생들의 하루살이를 묘사했고 <봄과 따라지>는 밑바닥 인생의 구걸하는 비애를 그리고 있다.

 

 

3

김유정의 작품 세계는 토착적인 공간이다. 한자어가 스며들 수 없는 토착어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프로 문학의 도식주의와 이광수.심훈의 계몽주의.이상주의를 내포하지 않는 한국 농촌의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향을 상실한 식민지 조국의 하늘 아래에서 고향 회복을 갈구한 치열한 고향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살아 온 고향의 경험의 총체이며 고향의 역사 의식이다. 고향의 경험, 고향의 역사 의식은 결코 복고주의.지방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선험적 경험의 예언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언어다. 김유정의 고향 의식은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는 토착어의 세계이다. 그의 소설의 표제에서 볼 수 있듯이 <동백꽃> <봄 봄> <따라지> <산골> <산골 나그네> <노다지> <만무방> <아내> <두꺼비> <땡볕> 등등, 결코 한자어가 자리하지 못한다. 그의 문장.문법 또한 순수한 한국 농촌의 토착어의 세계이다. 둘째는 고향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무대는 태반이 <거문관이> <한들> <물골> <백석 고개> <옹고개> <덕만리> 등 그의 고향(실레)의 마을이며, <응칠> <덕만> <덕필> <점순> <석순> 등도 실레 마을의 실제 생존했던 인물들이다. 고향을 소설의 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고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토속적 해학의 세계이다. 고전 문학의 해학의 전통과 맥락이 닿으며 그의 해학이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정서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정조를 포착하여 고향의 발견으로 확대된다.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4년 동안에도 안 자랐다니 그 킨 은제 자리지유? 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세, 이자식아! 내가 크지 말라구 그랬니, 왜 날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났지유?"   <봄 봄>

 

아주머니 뺨을 쳐도 먹여 가며 치시니 감사한 말을 어찌 다 하오리까.

수고스럽지마는 이 뺨마저 쳐주시오. 밥 좀 많이 붙은 주걱으로. 그 밥 갖다가 아이들 구경이나 시키겠소.  <흥부전>

전자는 <봄 봄>에서의 데릴사위 머슴과 장인될 지주의 입씨름이다. 후자는 <흥부전>에서의 아주머니의 횡포에 대한 흥부의 반격이다. 둘 다 과장된 표현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해학 정신은 비애와 동반하는 희극성이다.

 

 

4

김유정의 문학론은 생명 우위, 인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가져오는 데 집중되고 있다.

좀더 심악한 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하고 함부로 내닫는 작가입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의 연애를 위한 연애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겝니다. 그들은 썩 호의로 보아 중학생의 일기문 같은 작문을 내어놓고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의 미명으로 그걸 알뜰히 미봉하려드는 여기에는 실로 웃지 못할 것이 있을 줄 압니다.  <병상의 생각>

 

심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 우위의 문학은 '많은 대중을 우의적으로 한끈에 꿸 수 있으면 있을수록 거기에 좀더 위대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에 비롯된다고 말한다. 즉 그는 '새롭다는 문자는 다만 시간과 공간의 전환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좀더 나아가 우리 인류 사회에 적극적으로 역할을 가져오는 데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얼른 말하면 조이스의 《율리시즈》보다는 저 봉건 시대의 《홍길동전》이 훨씬 뛰어나게 예술의 가치를 띠고 있는 것'이라는 논이다. 이상과 같은 그의 작가적 태도는 농촌과 고향의 삶을 통하여 한국적 삶을 파악하고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증언하는 민중애의 사랑이라는 문자 행위로 포괄한 것이다.

 

마치 우리 머리 위에 널려 있는 천체가 서로의 인력으로 제 자리를 차지하듯이 생명 우위의 기능을 유기적 관계로 설정한다(이것이 김유정이 갖는 인생파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의 농민 소설이 도시 서민에게로 이행되었을 때 이 관계는 유랑 농민과 유랑 토막민의 하나의 천체도와 같은 기능 또는 구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중과 아픔을 함께 한다. 고향을 지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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