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김주영 - 칼과 뿌리, 익는 산머루,외촌장 기행, 바보 연구 등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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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아들의 겨울

 

 

김주영의 풍자적 단편들

金思寅

 

 

 

    김주영은 조해일·황석영 등과 비슷한 시기(70년대초)에 출발하여 이미 두세 권의 창작집을 통해 중견 작가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다. 더욱이 대다수 70년대 작가들이 등단 당시의 화려한 각광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근래로 오면서 상업주의와 매스컴에 편승, 나쁜 의미의 대중 작가로 전락해 가는 중상을 보여 온 데 반해 김주영은 최근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의 「객주(客主)」를 연재, 그의 작가적 면모를 새롭게 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만으로도 그는 80년대의 초입에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로 부각되는 것이다.

 

  김주영의 작품 중 많은 작품의 작중 화자(作中話者)가 아이들로 설정되어 있음을 보게 되며, 그러한 설정이 특유의 풍자적인 기법과 함께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보다 선명하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어린 화자(話者)를 축으로 전개되는 작중의 현실 인식이 현실 세계의 복잡성과 중압에 맞설 만큼 견고한 것이기 어려우리라는 점과, 따라서 작품의 전개가 문제의 참다운 해결 과정과 일치하기 어렵다는 부담이 있는 반면, 주로 어른들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현실 세계에서 아이들은 국외자적 입장에 서 있고 어른들의 타락한 세계가 그들에 대해 오히려 무방비 상태로 열려 있다는 점은, 경우에 따라 어린 화자의 설정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김주영은 이러한 점을 잘 이용하고 있는 작가다.

 

 이러한 점과 함께 그의 작품에서는 남녀 관계나 성희(性戱)의 장면들이 과감하게 드러나는데, 아직도 성의 문제를 문학――창작이든 비평이든 ――의 전면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 본 적이 별로 없는 우리에게 있어 김주영의 작품들은 이 점에서도 무시 못할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두어 가지 점에 유의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작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소설을 대하면 우선 읽는 사람은 작가의 진하고 끈끈한 입담과 거침없이 구사되는 비어(卑語)·속어(俗語)에 말려들게 된다.

 

  그 돼먹잖은 의붓아버지란 작자는, 초저녁부터 어머니와 흘레붙기를 잘하였습니다. 양잿물로 절인 김치를 준대도, 먹고 삭일 수 있을 만큼 먹새가 좋은 나는, 초저녁 잠이라면 도둑놈이 와서 뱃구레를 밟는대도 모를 지경입니다. (「도둑 견습」)

 

  고물 장수이지만 생계의 큰 몫은 도둑질에 의존하는 의붓아버지와 <이원수>란 이름의 <싸가지 없는> 의붓아들의 희한한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밑바닥 삶의 애환과 생명력을 풍자적인 수법으로 그리고 있는「도둑견습」의 부분이다. 이처럼 종횡무진으로 쏟아지는 작가의 입담은 단지 짜여진 줄거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형식상의 방편이라는 선을 넘어서서 그것 자체가 작품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김주영의 이러한 부류의 작품에서 입담이 차지하는 몫을 걸러내고 나면 이렇다 하게 남는 골격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들이 한 편의 풍자 소설로서 별 저항감 없이 단숨에 읽힌다는 사실은 김주영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가 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보육원 출신의 <늑대 같은> <곤조통>인 <내>가 <계집애 같은> 아이들의 성격 교정을 위한 도구로 부잣집에 입양되어 잘 먹고 지내다가 아이들이 좀 사내다워진다 싶자 가차없이 보육원으로 다시 <끌려가는>희화적 줄거리의 「모범사육」, 도시 빈민들의 도착에 가까운 <내 집>에의 애착을 통절하게 보여 주는「즐거운 우리집」들도 「도둑 견습」과 같은 유의 작품으로서, 정공법에 의거한 소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통쾌한 세태의 풍자를 담고 있다.

 

  이 부류의 작품들은 지적되어야 할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위의 세 작품은 모두 성인이 아닌 아이들을 화자로 등장시키고 있다. 그러한 설정은 현실의 비리와 타락상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반면, 아이들의 시점이라는 제약으로 인하여 작품 속의 현상에 대한 인식이나 인물의 파악이 전체성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도 같으며, 주변 현실에 대해 화자가 성숙한 행동상의 반응을 보일 수 없는 제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에서는 성인들이 관계하는 장면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그런 장면에 비해 그 인물들의 사회적인 행동들(그들의 공적 생활)이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화자가 아이들이라는 사실에 관계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도둑 견습」유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풍자적인 수법의 역할이 지적될 수 있다. <그 돼먹잖은 의붓아버지란 작자는, 초저녁부터 어머니와 흘레붙기를 잘 하였습니다. 양잿물로 절인 김치를 준대도, 먹고 삭일 수 있을 만큼 먹새가 좋은 나는....> 투에서도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그의 단편들을 비교적 성공적인 풍자 소설로 살아 있게 하는 데에는 그의 진한 입담과 함께 희화화·과장·대비들의 수법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작가가 표방하는 가치 체계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을 때 풍자는 부정적인 현실을 공격하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풍자의 본질은 <웃음이 가지는 공격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물 성정과 사건 전개 과정에서 구체성·사실성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하게 하는데, 이러한 결함이 풍자적 수법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작가의 도덕적 철저성 또는 현실을 대하는 입장의 확고함에 의해 메꾸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탄탄한 작가의식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풍자는 구성상의 견고함과 공격성을 함께 잃게됨으로써 죽도 밥도 아닌 지경에 떨어질 위험을 가지는 것이다. 김주영의 단편들에도 이러한 <웃음이 가지는 공격성>은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크게 본다면「아들의 겨울」을 제외하고(이 작품에서는 풍자적인 요소가 부분적인 수법 이상의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도둑 견습」「모범사육」등을 풍자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만,「모범사육」이 그러한 면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도둑 견습」의 마지막 부분에서 집으로 삼고 살던 고물 마이크로버스가 주물 공장으로 들어가게 된 뒤의,

  이제 한쪽 바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고 차체가 삐거덕 소리를 내며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썅, 우리는 시방부터 살 집도 없어졌고, 너 엄니와 흘레도 못 붙게 되얐어, 이젠, 이것아."

  아버지는 역시 쓸쓸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케이 에쓰 넷데루 딱 붙은 이 왕자표 좆도 이젠 써먹을 장소가 없어졌다구 이놈아 흐흐."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와 같은 부분이나「아들의 겨울」몇 곳에서 보이는 지나치다 싶을 작자의 전지적(全知的)개입과 웃음 위주의 입담은 작품의 짜임새를 손상시키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어떻든 종횡무진 거칠 것 없이 구사되는 쌍소리와 비어 등을 포함하여, 그의 입담은 그를 우리 시대의 손꼽을 만한 이야기꾼으로서 모자람이 없게 하며,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단기적 효과를 겨냥하는 풍자 단편으로서는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게 해준다, 그러나 단편의 경우 매우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는 그러한 입담이 현실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본격 장편에서는 오히려 어떤 역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세 번째로는 그의 작품 어디에서고 쉽게 찾아지며, 의도적이다 싶을 정도로 전면에 드러내 놓은 성희(性戱)의 장면들이다. 물론 김주영은 외국의《남회귀선》또는《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작가와 같은 성의 문제를 그 자체로서 문제삼고 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만큼 분방하게 남녀 관계의 장면을 드러내면서 작품을 <신문소설>적 차원으로 떨어뜨리지 않는 예는 우리 주변에서 결코 흔치 않다. 어떻게 보면 남녀 관계 묘사의 장면은 김주영 소설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관건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통적인 관념에 비추어 볼 때 남녀 관계란 은밀하고 가장 사적인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에 대한 언급은 어느 곳에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의 문제가 우리들의 삶에서 가장 보편적인 한 부분에 해당하며,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작가의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라면, 성의 문제는 공동체의 도덕적인 기초가 가장 섬세하게 드러나는 부분인 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테마임이 분명하다. 김주영은 성적인 묘사를 과감하게 전면에 내놓으며 외설과 숨김 사이에서 거의 구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아들의 겨울」에서 외설스러울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어머니나 채순미 선생의 성희 장면은 전후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작품의 내적 요구와는 떨어져 역겨움을 주고 있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채순미가 왜 그렇게 느닷없이 흥분해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내가 그녀의 앞가슴 속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채순미의 태도가 돌변해 버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난 그녀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회자에게서처럼 젖을 보여 달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사팔뜨기 계집애에게서처럼 치마를 벗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었다. 나는 다만 보이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보이는 것을 본 아이에게 그처럼 화를 내는 것이 정상이라면 애당초 이 세상은 왜 이처럼 보여지는 것이 많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참으로 어른들이란 알 수 없는 동물이었다. (「아들의 겨울」)

 

  이상하게도 나는 비봉산에서 울어쌓는 뻐꾸기 소리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개똥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들의 겨울」)

같은 부분이 어른들 세계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아이의 경험으로서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비교적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는 정도가 아닌가 보인다.

 

  김주영 소설에서 이루어지는 남녀 관계의 표현이나 묘사가 진정한 성의 해방을 통한 참다운 인간 해방에 기여하고 있는가는 그의 작품 전체를 모아놓고 주의 깊게 검토해 볼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대략 두 가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하나가「도둑 견습」「즐거운 우리집」과 같이 풍자성을 갖는 작품의 경우로, 인물을 희화화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되어 풍자적 효과를 강화시키고 있다. 또한 이 경우에는 작자의 풍자적 시선에 의해 성적인 암시를 갖는 진한 표현들과 더불어 밑바닥 삶들(「도둑 견습」의 가족은 고물 장수,「즐거운 우리집」의 가족은 넝마 하치장에서 일한다)의 거침없고 생명력이 넘치는 싱싱한 생활에 대한 작가의 애정에 힘입어 외설로부터 구제되고 있다. <그 여자의 복숭아 속살처럼 새하얀 가슴팍에 매달린 백금 목걸이가 하늘하늘 가늘게 떨고 있었습니다>(「모범사육」) 외설스러움에 비해, 흙·먼지와 때에 전 고물 마이크로 버스 집안의 성교는 싱싱한 삶의 일부분으로 보이지 결코 외설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비교적 정공법에 따라 씌어진 작품에서 보여지는 성행위 장면들을 들 수 있다. 작품 전체의 구성은 논외로 하더라도「겨울새」의 다음과 같은 부분은 김주영의 역량을 십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 최주사하고 한번 살아 봤으면 좋겠소이"

  "무슨 농담을 침도 안 바르고 쏟아 놓는 게지?"

  "최주사 진정이요. 내 최주사 색시보다는 열 살이나 위지만 안죽 그렇게 늙어빠지지는 않았소. 누구한테나 의지해야 내가 살아갈 것 같소. 의지한다면 지금이사 최주사밖에 누가 있겄소? 날 늙었다 생각 말고 좀 받아 주소. 최주사도 좋지 않겠소? 딸이 다섯이나 되는데 시집 보낼 때 내 땅의 곡식 갖다 쓰시고, 1주일에 한두 번 그저 알게 모르게 들러 주시면 좋겠소. 늙었지만 몸땡이가 그리 못쓰진 않소. 내 목간 자주 하께요."

  "누군 목간 자주 하겠소. 나도 한 여름에 거랑물 맛 보고는 겨울은 그냥 지냅니다."

  "그래도 아새끼를 낳아 본 일이 없어서 내 몸뚱이야 안죽도 40이요."(.......)

 

  위에 올라 있는 그녀를 방바닥 쪽으로 바로 뉘이고 그녀 위에 올라간 최석도가 이렇게 씨부렸을 때 그녀는 참으로 행복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땀을 흘리며 그리고 발버둥을 치며 혹시나 자기 여편네보다 재미가 덜하다고 투덜거릴까봐 젖먹은 힘까지 뽑아서 용을 써 준 탓인지 사내는 제법 끼욱거리며 즐거워하였다. 즐거워하는 최석도를 어둠 속에서 황망히 눈뜨고 바라보면서 그녀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차마 묻기 어렵고 부끄러웠지만 그녀는 물어보았다.

 

"워떻소 어이?"

  "뭣이 워떻다는 거여?"

  "내 몸땡이가 그리 못쓸 것 같지는 않지요?"

  "에끼, 못할 소리 없구만. 몸땡이보다는 마음 먹기지."

  "그라요. 마음인들 못 주겄소."

 

  이튿날 그녀는 새벽이 아직 눈을 덜 뜬 시각에 일어나서 한 마리 남은 씨암탉을 마저 잡았다. (「겨울새」)

  「겨울새」는 무당의 딸로서 소장수 첫남편으로부터 3년 만에 보따리를 싸고 돌아와 20여 년을 붙박힌 남자 없이 동네에서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나이 50 가까운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장면은 50 가까운 여자와 처자식이 있는 사내간의 <치정>임이 분명함에도, 더욱이 무슨 지순한 연애감정은커녕 돈의 문제까지 개입되어 있음에도, 결코 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파란 많은 젊은 시절을 지나 50이 가까워 오는 여인네의 <외로움>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인지. 이것은 동물적인 육욕도 아니고 철없는 장난도 아니다. 앞의 풍자적인 작품들이 그 풍자적 수법에 의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사건 전개나 인물의 행동 거조에 지나친 작위성이 개입되었으며 따라서 세상을 애써 살아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성실한 자세를 놓치고 있었다면, 「겨울새」의 이 부분은 그러한 결함을 선뜻 넘어서서 김주영의 원숙한 시야를 과시하는 대목이다. 남녀의 잠자리 장면이 이처럼 천연스럽게 그려졌던 예를 최근의 우리 소설들에서 본 일이 없다. 물론 최석도의 거짓이 후에 다시 드러나고 말게 되지만, 이 장면에서 보여진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들의 겨울」에서는 작가 자신이 비교적 이러한 요소들의 폐단을 넘어서, 문제의 핵심에 정면으로 부딪치고자 애쓴 흔적이 역연하다. 주인공이자 화자(話者)인 <박무도>의 회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중편 소설은 독특한 문체를 통해 작품 전체를 강한 서정성으로 휘감고 있다. 다분히 자전적 요소가 강해 보이는 이 작품은 일반 성장 소설로 분류될 수 있겠다.

 

  주인공이 과부인 어머니와 외간 남자의 <자는> 광경, 학교 담임 채순미 교사의 비밀스러운 밀회, 살인 현장, 동생의 죽음 따위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어린이의 세계를 잃어 가는, 그러면서 타락하고 황폐한 현실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그 주요 골격으로 하고 있다. 가장 크게 주인공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어른들 세계의 은밀한 성 관계이며, 이러한 과정은 <나에게 부끄러운 것을 가르친 것은 어머니였다>로 시작하는 회상형 시제와 침착하고 섬세한 심리 묘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의존하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6·25나 4·19, 또는 가족사를 밝혀 보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시작을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 비한다면, 김주영의「아들의 겨울」은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과의 관련이 없이 세계에 눈떠 가는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전형성을 가질 수 있을 것도 같다. 특별하달 것도 없는 시골 면 소재지 정도의 동네를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외부적인 사건과의 관련보다는 아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섬세한 변화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주인공이 어머니의 통정(通情) 현장을 지켜보고 나서의 대목,

  그때, 어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우물가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뜰을 가로질러 걸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랐다.

 

  "무도냐?"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비봉산에서 울어쌓는 뻐꾸기 소리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개똥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이나 어두운 뜰 한가운데 서서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와락 내게로 달려와선 내 몸 전부를 안았다.

  "내가 죽일 년이다."

  어머니는 울었다. 굉장히 많이 울어서 어머니는 딸꾹질을 했다.

이나, 그 대상인 양조장 집의 무서운 사내에 대해 주인공이 갖는 이율배반적 감정과 행동 방식, 그리고 주인공의 기대가 단숨에 박살나는 과정의 묘사,

 

  그때 나는 벌써 일이 틀려 버렸다는 걸 눈치챘다. 사내는 분명히 내 얼굴을 보았을 터이고 그리고 내가 누구의 자식이란 것도 동시에 확인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자식. 너 거기서 뭘해'라는 식의 돼먹잖은 쌍소리는 사내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우러나옴직한 자각의 연상 작용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금방 포기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한편으로는 그 사내가 미처 내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무작정 내뱉은 위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도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서 숨어섰던 담벼락 밖으로 한 발을 불쑥 내밀었다.

 

  나를 노출시킴으로써 <내가 나>라는 것을 확연하게 인식시켜 볼 심산이었다. 내가 획책하는 바가 곧바로 전달되어서 사내가 스스로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묵인에의 기대는 금방 쌍소리로 뒤바뀌어 들려 왔다.

등은 매우 섬세하고 탁월하다.

 

  그러나, 한 어린이의 정신적인 성장 과정에 중점을 둔 나머지 동생의 살인을 비롯해서 성장의 계기가 되어 주는 사건 성정에 충분한 필연성이 부여되지 못하여 작품 전체의 사실성을 반감시키고 있다는 점, 성적인 문제들이 과다하게 개입되어 인물들의 현실감이 오히려 감해졌다는 점 등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모범사육」「도둑 견습」이 아이들의 관점과 풍자적인 기술 방식의 결합을 통해 일정한 공격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는 반면, 현실에 온 몸으로 부딪쳐 가는 둔중하고 견고한 산문 정신의 아쉬움을 준다는 사실을 위에서 지적했다. 이에 비해「외촌장 기행」과 「겨울새」「천궁(天宮)의칼」은 화자를 성인으로 설정하고 있어 비교적 다른 작품들에 비해 주제에 대한 사실적인 접근의 여지가 마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의 경우에 비해 탄탄한 소설적 구조를 가졌다고는 하나, 거기엔 앞의 작품들의 신랄한 풍자에 비해 너무 <점잖아졌다>는 실망도 함께 따른다.

 

  「외촌장 기행」의 <그녀>의 인물 제시, 「천궁의 칼」에서의 <어머니>의 설정이 마치 작중 화자와는 별종의 사람처럼 제시되어 읽는 우리와는 상호 거래가 안 될, 오직 기이한 관찰의 대상으로 닫혀진 느낌이다. 인물 묘사가 매우 추상적인 것도 이러한 사실을 돕고 있다.

 

  더욱이 그의 소설이 구체적·현실적 사건의 전개가 별로 없고 작중 화자의 기억이나 설명을 통해 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결함으로 보인다.「겨울새」와「천궁의 칼」의 끝부분이 혈연의 숙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비교적 화해로운 결말에 머물고 마는 것도 아쉬운 점으로 들어야 할 것인데, 이 두 작품뿐 아니라 이 소설집 속의 대부분의 인물들을 고아·넝마주이·창부·고물장수·백정 등 이 시대의 소외 집단들로 설정하면서도 그러한 성정에 응당 뒤따라야 할 적극적인 인물, 행동하는 인물들을 그가 그려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한 인물 설정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인간상을 보여 주려는 노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궁벽진 것, 신기한 것만이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믿던 수준의 안이한 소재주의, 복고주의에서 질적으로 크게 구별되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새 차원으로의 비약은 김주영 혼자의 과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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