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선전(金神仙傳)
by 송화은율김신선전(金神仙傳)
김신선의 이름은 홍기다. 나이 열 여섯 살 때에 장가들어서, 한 번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런 뒤에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곡식을 물리치고 벽만 바라보고 앉았더니, 두어 해 만에 몸이 별안간 가벼워졌다. 국내의 이름난 산들을 두루 찾아 노닐면서, 늘 한숨에 수백 리를 달리고는 해가 이르고 늦음을 따졌다. 다섯 해 만에 신을 한 번 바꿔 신었으며, 험한 곳을 만나면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옷을 걷고 물을 건너거나 달리는 배를 타면, 내 걸음이 오히려 늦어진다."
하였다. 그는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
내가 예전에 우울증이 있었다. 그때 마침 '김선생의 방기(方技)가 가끔 기이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만나고 싶어했다. 윤생과 신생을 시켜서 남들 몰래 서울 안에서 그를 찾았지만, 열흘이 지나도 찾지를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번에 '김홍기의 집이 서학동에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지금 가 보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촌 형제들 집에다 자기 처자식만 부쳐 두었더군요."
그래서 그의 아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우리 아버지는 한 해에 서너 번 다녀가시곤 하지요. 아버지 친구 한 분이 체부동에 사시는데, 그는 술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김봉사라고 한다오. 누각동에 사는 김 첨지는 바둑 두기를 좋아하고, 그 뒷집 이만호는 거문고 뜯기를 좋아하지요. 삼청동 이만호는 손님 치르기를 좋아하고, 미원도 서초관이나 모교 장첨사 그리고 사복천에 사는 병지승도 모두들 손님 치르기와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里門) 안 조봉사도 역시 아버지 친구라는데 그 집엔 이름난 꽃들을 많이 심었고, 계동 유판관댁에는 기이한 책들과 오랜 된 칼이 있었지요. 아버지가 늘 그 집들을 찾아다녔으니, 당신이 꼭 만나려거든 그 몇 집들을 찾아보시오.'
그래서 그 집들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어느 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저녁나절에 한 집에 들렸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뜯고 두 손님은 잠자코 앉아 있더군요. 흰머리에다 갓도 쓰지 않았습디다. 저 혼자서 '아마 이 가운데 김홍기가 있겠지.' 생각하고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길래 앞으로 나아가서,
'어느 어른이 김선생이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거문고를 놓고는
'이 자리에 김씨는 없는데 너는 누구를 찾느냐?'
하더군요.
'저는 몸을 깨끗이 하고 찾아 왔으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십시오.'
했더니 주인이 그제야 웃으면서
'너는 김홍기를 찾는구나. 아직 오지 않았어.'
하였습니다.
'그러면 언제 오나요?'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해 주더군요.
'그는 일정한 주인이 없이 머물고, 일정하게 놀러 다니는 법도 없지. 여기 올 때에도 미리 기일을 알리지 않고, 떠날 때에도 약속을 남기는 법이 없어. 하루에 두세 번씩 지나 갈 때도 있지만, 오지 않을 때에는 한 해가 그냥 지나가기도 하지. 그는 주로 창동(남창동, 북창동)이나 회현방(회현동)에 있고, 또 동관. 이현(梨峴), 동현(銅峴:구리개), 자수교, 사동, 장동, 대릉, 소릉 사이에도 가끔 찾아다니며 논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 주인들의 이름은 모두 알 수가 없어. 창동의 주인만은 내가 잘 아니, 거기로 가서 물어 보게나.'
곧 창동으로 가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거기서는 이렇게 대답합디다.
'그이가 오지 않은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소. 장창교에 살고 있는 임동지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김씨와 더불어 내기를 한다던데, 지금까지도 임동지의 집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래서 그 집까지 찾아갔더니, 임동지는 여든이 넘어서 귀가 몹시 어둡더군요.
그가 말하길.
'에이구, 어젯밤에 잔뜩 마시고 아침나절 취흥에 겨워 강릉으로 돌아갔다우.'
하길래 멍하니 한참 있다가
'김씨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지요. 임동지가
'한낱 보통 사람인데 유달리 밥을 먹지 않더군.'
하기에
'얼굴 모습은 어떤가요?'
물었지요.
'키는 일곱 자가 넘고, 여윈 얼굴에 수염이 난 데다, 눈동자는 푸르고, 귀는 길면서도 누렇더군.'
하기에,
'술은 얼마나 마시는가요?'
물었지요.
'그는 한잔만 마셔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아. 그가 언젠가 취한 채로 길바닥에 누웠었는데, 아전이 보고서 이레 동안 잡아 두었었지. 그래도 술이 깨지 않자, 결국 놓아주더군.'
하더군요.
'그의 말솜씨는 어떤가요?'
물었더니
'남들이 말할 때에는 문득 앉아서 졸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웃음을 그치지 않더군.'
합디다.
'몸가짐은 어떤가요?'
물었더니,
'참선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수절하는 과부처럼 조심하더군.'
하였습니다."
나는 일찍이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다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신생도 수십 집을 찾아보았는데, 모두 만나지 못하였다. 그의 말도 윤생과 같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홍기의 나이는 백 살이 넘었으며, 그와 함께 노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인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홍기는 나이 열 아홉에 장가들어서 곧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그 아이가 겨우 스물밖에 안 되었으니, 홍기의 나이는 아마 쉰 남짓일 거야."
하였다. 어떤 사람은
"김신선이 지리산에서 약을 캐다가 벼랑에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지 벌써 수십 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도 그 어둠침침한 바위틈에서 무엇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게 있다."
하였다. 그러자 또 어떤 사람이
"그건 그 늙은이의 눈빛이야. 그 산골짜기 속에선 이따금 길게 하품하는 소리도 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김홍기는 '오직 술이나 잘 마실 뿐이지, 무슨 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이름만을 빌려서 행할 따름이다.'는 소문만 들린다. 그래서 내가 또 동자(童子) 복을 시켜서 그를 찾아다니게 하였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 때가 계미년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내가 동쪽 바닷가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일만 이천'이라고 하는데, 그 산빛이 희었다. 산에 들어가니 단풍나무가 가장 많아서, 바야흐로 붉어가고 있었다. 사리, 느릅, 여자 따위가 모두 서리를 맞아 노랗게 되었고, 으루나무와 전나무는 더욱 푸르렀다. 그 밖에 사철나무가 많았는데, 산 속의 기이한 나뭇잎들이 모두 누렇고 붉었다. 둘러보면서 즐기다가 가마를 멘 스님에게 물었다.
"이 산속에 혹시 도술을 통달한 이상한 스님이 있는가요? 더불어 노닐고 싶소."
"그런 스님은 없고, '선암에 벽곡( 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남에서 온 선비라고 하는데, 알 수 없습니다. 선암에 이르는 길이 험해서, 그곳까지 가 본 사이 없답니다."
밤중에 장안사에 앉아서 여러 스님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같은 대답을 하였다. 또
"벽곡하는 사람이 백 일을 채우면 떠난다고 하는데, 이제 거의 구십 일은 되었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 이가 아마도 신선이겠지' 싶어서, 매우 기뻤다.
밤중에라도 곧 찾아가고 싶었다. 이튿날 아침 진주담 밑에 앉아서 같이 놀러 온 친구들을 기다렸다. 오랫동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았다. 마침 관찰사가 여러 고을을 순행하는 길에 금강산까지 들어와, 여러 절간에 묵으며 노닐고 있었다. 수령들이 모두 찾아와 음식을 장만하고, 나가 놀 때마다 따르는 스님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선암까지 이르는 길이 높고 험해서 나 혼자는 갈 수 없으므로, 늘 영원암 백탑 사이에만 오가며 마음이 서운했다. 마침 비가 오래도록 내리므로 산 속에서 엿새나 머물렀다. 그런 뒤에야 선암에 이르게 되었다.
선암은 수미봉 아래에 있었다. 내원통에서 이십 여리를 가면 천길이나 되는 커다란 바위가 깍은 듯이 서 있는데, 길이 끊어져서 쇠사슬을 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올라갔다. 그곳에 이르자 빈 뜨락에는 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탑(榻) 위에는 조그만 구리 부처가 있고, 다만 신 두 켤레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못내 섭섭해서 어정거리며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바위 벽에다 이름을 쓰고는 한숨을 내쉬면 떠났다. 그곳에는 언제나 구름 기운이 둘러 있었고, 바람조차 쓸쓸했다.
어떤 사람은
"선(仙)이란 산에 사는 사람이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게 바로 선(仙)이다."
하였다. 선(僊)이란 선선(僊僊)케 가벼이 공중으로 들려 오른다는 뜻이니만큼, 벽곡하는 자라도 반드시 신선은 아닐 것이다. 울울(鬱鬱)히 뜻을 얻지 못한 자가 바로 신선일 것이다.
요점 정리
작가 : 박지원
갈래 : 한문 단편소설
연대 : 1764년(영조 40) 이후
시점 : 일인칭관찰자시점
성격 : 풍자적
구성 :
발단 |
김홍기는 열 여섯에 장가들어 아들을 낳고는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점, 벽곡을 단행하고 수년 동안 면벽하여 신통한 능력이 생겼다는 이유로 신선으로 불리고 있다. |
전개 |
'나'는 우울증에 신선의 도술이 특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홍기를 만나고 싶어 윤씨와 신씨를 시켜 찾게 하였다. 윤씨와 신씨는 열흘 동안 온 서울을 뒤지나 그를 찾는데 실패하고 만다. 다만 김홍기라는 인물이 처자를 사촌 집에 두고는 도성 안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담론과 풍류를 즐기며 지낸다는 이야기와 김홍기에 관한 세상 사람들의 이런저런 풍문만 전개 듣게 되었을 뿐이다. |
절정 |
이듬해 가을 '나'는 동해를 유람하던 중 김홍기로 추정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나'는 며칠을 기다려 그 사람이 거처하고 있다는 암자로 찾아가니 그곳에는 신발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
결말 |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신선은 결국 뜻을 얻지 못해서 울적해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제재 : 김 신선의 행적
주제 : 김 신선의 행적 추적을 통한 신선의 실체 파악
특징 : 일인칭 서술자가 다른 인물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문답식으로 전개되어 있는데, 김 신선이 직접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신이한 모습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작품의 끝 부분에서는 작자나는 신선이란 벽곡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울히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며 신선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짧은 분량과 단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온 신선 사상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등장 인물 : 이 작품에 등장된 인물은 대체로 서민계층의 출신이며 다양한 유형이 나타난다.
김신선 : 이 작품의 주인공 김홍기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고는 아내에게 다시 접근하지 않고 수년 만에 신선과 같은 행동을 하여 김신선이란 별명을 얻는다. 생김새도 특이했고, 신선과 같은 행세를 한다.
기타 : 김신선의 아내, 김신선의 아들, 윤생, 신생, 김신선의 친구들과 동복자, 강원도 관찰사와 그를 따르는 수령들.
줄거리 :
김신선의 속명(俗名)은 홍기(弘基)로 16세에 장가 들어 단 한번 아내를 가까이해서 아들을 낳았다. 화식(火食)을 끊고 벽을 향해 정좌한 지 여러 해 만에 별안간 몸이 가벼워졌다. 그 뒤에 각지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하루에 수백 리를 걸었으나 5년 만에 한 번 신을 갈아 신었다. 험한 곳에 다다르면 더욱 걸음이 빨라졌다. 밥을 먹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김홍기의 키는 7척이 넘었다. 여윈 얼굴에 수염이 길었고 눈동자는 푸르며 귀는 길고 누른 빛이 났다. 술은 한 잔에도 취하지만 한 말을 마시고도 더 취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남이 이야기하면 앉아서 졸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빙긋이 웃었다. 조용하기는 참선하는 것 같고 졸(拙)하기는 수절과부와 같았다. 어떤 이는 김홍기의 나이가 백여 살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쉰 남짓 되었다고도 한다. 지리산에 약을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은 지가 수십 년이라고도 한다. 어두운 바위구멍 속에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 무렵에 박지원은 마침 마음에 우울병이 있었다. 김신선의 방기(方技 : 기이한 술수)가 기이한 효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 보려고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 몰래 탐문해보았다. 열흘이 지나도 찾지 못하였다.
윤생은 김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사촌 집에 처자를 남겨둔 채 떠나고 없었다. 그 아들에게서 홍기가 술 · 노래 · 바둑 · 거문고 · 꽃 · 책 · 고검(古劒) 따위를 좋아하는 사람들 집에서 놀고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 두루 찾았으나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창동을 거쳐 임동지(林同知)의 집에까지 찾아갔으나 아침에 강릉으로 떠나갔다는 말만 듣는다. 다시 복(福)을 시켜서 찾아보았다. 그러나 끝내는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에 박지원이 관동으로 유람가는 길에 단발령을 넘으면서 남여(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를 메고 가는 어떤 스님으로부터 “ 선암(船菴)에서 벽곡( 陽 穀 : 곡식은 안 먹고 솔잎, 대추, 밤 따위만 날로 조금씩 먹음)하는 사람이 있다. ” 는 소문을 들었다. 또한 그날 밤에 장안사의 승려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여러 날을 지체하여 선암에 올랐을 때에는 탑 위에 동불(銅佛)과 신발 두 짝이 있을 뿐이었다.
출전 : ≪ 연암별집 燕巖別集 ≫ 권8 방경각외전(放 揭 閣外傳)
내용 연구
김 신선(金神仙)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열여섯에 아내를 얻어 한 번 관계하여 자식을 얻은 후 다시는 아내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는 벽곡(벽穀 : 곡식은 안 먹고 솔잎·대추· 밤 등을 조금씩 먹고 삶.)을 하며 면벽좌선(面壁坐禪 : 벽을 향하고 좌선(坐禪)함. 또는 그런 일.)을 수년 간 하더니, 어느 날 몸이 홀연히 가벼워졌다. 이후 나라 안의 유명한 산들을 두루 다녔는데, 항상 수백 리를 간 후에야 아침인지 저녁인지를 살폈다. 오 년만에 한 번씩 신발을 갈아 신고 험한 길을 만나면 발걸음이 더욱 민첩해졌다[축지 : 도술로 지맥(地脈)을 축소하여 먼 거리를 가깝게 하는 일.].[김홍기의 신선적 면모]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옷을 걷고 물을 건너거나 조각배로 건너는 것은 다만 나의 갈 길을 더디게 만들 뿐이야.”
라고 했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세속 사람들과 다름] 사람들은 그를 신선이라 불렀다.
나는 일찍이 우울증[창작 배경을 고려하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데 대한 우울함을 의미]이 있었다. 듣자 하니 ‘신선의 방기(方技 : 술법, 방법과 기술)가 어쩌면 병세에 효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기에 더욱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생'은 '젊은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몰래 그를 찾았으나, 십여 일간 한양성을 뒤졌어도 그를 찾지 못했다. (중략) - 김홍기를 신선이라 부르게 된 유래와 그를 찾게 된 이유
나는 그 때 윤생(尹生)이 힘써 찾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였다. 그러나 신생(申生)도 수십 집을 방문했으나 그를 찾지 못하고 비슷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마도 홍기의 나이는 백여 세는 되었을 거야. 왜냐 하면 그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거든.”
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아. 홍기는 열아홉에 처를 얻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이제 겨우 약관(弱冠 : 남자 나이 20세의 일컬음)이잖나? 그러니 홍기의 나이는 아마 쉰 살 정도 되었을 거야.”
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 신선은 지리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것이 벌써 수십 년이나 되었네.”
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컴컴한 바위 구멍 속에 어떤 물건이 반짝반짝하더군.”
라고 하자, 다른 이가 대꾸하기를,
“그게 바로 그 노인의 눈빛이야. 그 산골짜기에서는 가끔 긴 하품 소리가 들리곤 하지.”
라고 했다.
실제로 김홍기라는 사람은 ‘다만 술 마시기를 좋아할 뿐, 술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할 뿐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童子) 복(福)이를 시켜 그를 찾으러 보냈다. 끝내 찾지 못했는데 그 해가 계미년(癸未年 : 1763년)이었다. (중략) - 윤씨와 신씨를 시켜 김 신선을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함
다음날 아침 진주담(眞珠潭 : 내금강의 연못) 아래에서 같이 놀기로 한 사람들을 찾아 오랫동안 살폈지만, 만나기로 한 시간 내에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가 여러 고을을 순행(巡行 : 여행이나 공부를 위해 여러 곳으로 돌아다님.)하다가 산에 들어와 여러 절간을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었다. 수령들 모두 모임에 참석해 장만한 요리를 전하니, 매번 나가 놀 때마다 따르는 스님 수가 백여 명은 되었다. 선암으로 가는 길은 너무 험준해서 나 혼자서는 갈 수 없었으니, 늘 영원(靈源 : 절 이름)과 백탑(白塔)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애를 태웠다.
때마침 비가 오랫동안 와서 산중에서 엿새를 머무니, 이에 선암에 갈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峰) 아래에 있는데, 내원통(內圓通 : 금강산의 골짜기)으로 가는 길을 이십여 리쯤 따라가니 나왔다. 천 길이나 되는 바위가 깎은 듯이 서 있고 길이 끊어져 쇠사슬을 잡고 공중에 매달려 올라가야만 했다. 그 곳에 이르니 빈 뜰에는 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긴 걸상 위에는 작은 구리 부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다만 신 두 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김 신선을 찾지 못한 데 대한 허탈감 / 노이무공 勞而無功 : 애쓴 보람이 없음]
나는 서운한 마음에 이리저리 다니다가 우두커니 서서 뜰에 놓인 신발을 바라보다가 암벽 아래 이름을 새기고 탄식하며 떠났다. 그 곳에는 늘 구름이 둘러 있고 바람이 소슬하게 불고 있었다.[신비스러운 분위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仙)이란 산에 사는 사람이야.”
라고도 하고,
“산에 들어가는 것이 곧 선(僊 : 신선이란 뜻)이야.”
라고도 한다. 또 선(僊)이란 선선(僊僊)히 가볍게 공중으로 치켜든다는 뜻이니, 벽곡하는 자가 반드시 신선은 아니다. 그[신선]는 단지 우울히 뜻을 얻지 못한 자일 뿐이다[신선에 대한 '나'의 평가이자 그 신선이 필자 자신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 김홍기에 대한 평가
이해와 감상
병에 시달려 김 신선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던 '나'가 김홍기라는 사람을 만나려 애쓰다 금강산에서 그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행적을 발견하고는 신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내용이다.
'김신선전' 은 박지원의 끈질긴 추적으로 소문에만 등장하던 신선을 그 신비로움에서 벗기는 것이다. 신선이란 허구를 타파하려는 작자의 실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 작자 스스로도 방경각외전 자서에서 “ 홍기는 대은(大隱 ;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숨어 사는 큰사람)이라 유희 속에 몸을 숨겼다. 맑거나 흐리거나 실수가 없고 탐내거나 구하는 아무것도 없었다. ” 라고 하여 그를 착한 은자로 이해한다.
이처럼 '김신선전' 을 통한 신선의 부정은 그의 현실적 · 실학적 정신의 기저가 된 것이라 하겠다. '김신선전' 은 서술이 매우 사실적(寫實的)이며, 문장이 기굴(奇 戈 ; 남다르고 큼)하다. 특히 문답식 전개가 찬란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선행작품으로, 허균 (許筠)의 '장산인전 張山人傳'이 있다.
심화 자료
'김신선전'의 창작 배경
연암이 '김 신선전'을 저술한 시기는 대략 30세 전후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연암은 이미 문장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연암의 현실에 대한 불만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연암은 현실을 초탈하고 산다는 신선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인물을 만나 현실에서 느끼는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창작 배경을 고려하면 작품의 서술자는 바로 연암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신선 사상
조선시대에는 지식인들이 도서(道書)를 애독하여 그 계통의 양생법과 의학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이런 계층과는 달리 몰락한 선비나 비천한 지식인들이 도술의 수련을 빙자하여 산수간을 오유하면서 시를 읊는 등 세속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선조 때의 낙방거사 조여적(趙汝籍)도 그런 부류의 하나인데, 그가 편술한 '청학집 靑鶴集'에는 위한조(魏漢祚)를 중심으로 10여 인이 모여 지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는 혼란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신선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당시 민중들은 물론 유학자들조차도 신선 사상에 심취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선적 삶의 추구의 이면에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런 작품으로 박지원의 '김 신선전'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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