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김승옥 - 서울 1964년 겨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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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존재(存在)로서의 고독

千二斗

 

 

 

60년대 문학의 기수

우리가 한국의 60년대 문학을 말하는 경우 첫째로 거론해야 할 작가가 김승옥(金承鈺)이며, 또 그의 문학을 말할 때 첫째로 거론해야 할 작품이 그의 「서울 1964년 겨울」이다. 한국 현대 소설사상 그의 위치는 그만큼 획기적인 것이었고 또 그러한 획기적 성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작품이 바로 「서울 1964년 겨울」이다. 그는 이른바 전쟁(혹은 전후) 문학으로서의 50년대 문학이 거의 시효 만료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문학의 지평이 채 뚜렷하게 예견되지 않는 시점에서,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았고 또 성공의 보증도 없는 미지의 영역 속으로 헤쳐 들어간 당돌한 모험가였다. 뿐만 아니라 이 모험가는 결국 진실로 새롭고 발랄한 문학의 영토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60년대 문학은 실로 작가 김승옥을 스타트로 해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를 일러 60년대 문학의 기수라 하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과히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50년대 문학은 전쟁(6.25)과 직결된 문학이었다. 1950년대의 벽두에 일어난 6.25는 그 뒤의 한 디케이드의 문학을 성격짓는 결정적 요인으로 되고 있다. 50년대 문학은 넓은 의미에서 전쟁(혹은 전후) 문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학적 감성을 길러야 했던 일련의 50년대 작가들에 있어서 그렇다. 그들의 문학은 전쟁이라는 유일 절대의 사태와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형성된 50년대 문학은 단적으로 말해서 경화된 엄숙주의의 문학이었고, 강력한 교훈주의의 문학이었다. 전쟁이라는 절박사 사태 앞에서 누구나 팽팽하게 긴장된 자세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고, 또 전쟁이라는 사태 앞에서는 에피큐리언적인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50년대 문학이 그 문장의 톤에 있어서 고도로 긴장된 것이 아닐 수 없었고, 또 예외없이 어떤 뚜렷한 이슈를 전제로 하는 문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의 심연 속에 가라앉게 한다. 6.25의 아픈 기억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생생한 현장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은 이제 시효 만료에 부딪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새로운 문학의 지평을 열어 보이면서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가 김승옥이다. 그의 「서울 1964년 겨울」은 그의 이 새로움을 잘 반영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김승옥의 문학이 반영하는 획기적인 점은 첫째 50년대 문학이 예외 없이 간직하고 있던 바 강력한 이슈에의 집착 내지 교훈주의에의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김승옥의 문학에 짙은 에피큐리언적인 점이 반영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문학은 거의 대부분의 50년대 문학에서 볼 수 있는 바 경화된 엄숙주의에서 연유되는 고도로 긴장된 문장의 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김승옥에게서는 오히려 재기 활발한 감수성과 아울러 싱싱한 위트가 넘친다. 그만큼 그에게서는 어떤 여유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의 문학이 넓은 의미에 있어서 유희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도 그런 점과 관련이 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숙명적 조건으로서의 고독을, 추상적 서술이나 직선적 호소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생생한 모습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소외 의식 및 숙명적 조건으로서의 고독을 추상적인 서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현장의 재현을 통해서 제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바 호소로서의 고독이 이제 비로소 존재로서의 고독으로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그의 대표작 「서울 1964년 겨울」을 음미해 가면서 그의 문학적 특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複數的 에고의 존재 양식

이 작품에는 서울 길거리의 포장집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사나이가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고,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어울려 다니고, 하룻밤을 같은 여관에서 보내게 되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 세 사나이란 내레이터인 <나>와 대학원 학생인 <안>, 그리고 서적 판매원을 하는 30대 사나이이다. 작품의 전반부는 우선 <나>와 <안>이 포장집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게 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와 <안>은 동갑인 25세, 그러나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대조적인 면을 반영한다. 나는 <스물 다섯 살짜리 시골 출신, 고등학교는 나오고, 육군 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군대에 갔다가 임질에 한 번 걸려 본 적이 있고, 지금은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반하여, 안은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있는 데다가 <대학 구경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전공을 가진 대학원생>이며 부잣집 장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프로필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점에서 대조적이다. 나의 입장이 대체로 직감적, 조건 반사적이며 소박한 편이라면 안의 그것은 훨씬 더 의식적이고 어떤 점에서 현학 취미조차도 느끼게 한다. 그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런 면은 부각된다. 나와 안이 주고받는 대화가 중심이 되어 있는 전반부는 문장의 톤부터가 지극히 경쾌하고, 재기 활발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두 사람의 대화는 얼핏 보기에 무의미한 입씨름 같기도 하다. 그들의 대화는 우선 <파리>에 관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아니오, 아직까진……." 그가 말했다.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예"라고 나는 대답했다.

"날 수 있으니까요. 아닙니다. 날을 수 있는 것으로서 동시에 내 손에 붙잡힐 수 있는 것이니까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 안에 잡아 본 것이 있으세요?"

"가만 계셔 보세요." 그는 안경 속에서 나를 멀거니 바라보며 잠시 동안 표정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없어요, 나도 파리밖에는……."

 

이러한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일상적 효용성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 자기 내면에 설움을 지닌 삼십대 사나이가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끼어드는 작품의 중반부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대화는 한결같이 이러한 무의미한 입씨름 같은 대화로 이어지고 있다.

 

하기야 우리들의 일상의 대화 자체가 반드시 효용성만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그저 말하기 위해서 하는 말, 뜻없이 하는 말 등등, 이른바 무상(無償)의 언어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기에 《시의 이해》의 저자들 (브르크스와 워렌)도 우리들의 일상의 대화 중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쓰인 언어는 과연 전체의 몇 퍼센티지나 되겠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실용성에서 벗어난 용법인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대개 일상적, 실용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일상적, 실용적인 차원을 빙자하여 그 무상성을 누리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언어의 유희성을 추구하는 경우조차도 그 언어의 실용적 측면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인용된 대화는 그야말로 일종의 작위적 언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야말로 완전한 거짓말, 또는 극화된 언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임에 있어 작가 김승옥은 언어의 실용성에 빙자하는 법 없이 당초부터 거기서 일탈함으로써 언어의 무상성을 농도 짙게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심각한 얘기를 좋아하는 이 친구를 골려 주기 위하여,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기의 음성을 자기가 들을 수 있는 술 취한 사람의 특권을 맛보고 싶어서> 얘기를 시작했다고 <나>는 말하고 있거니와 말하는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말하는 행위, 그것은 일종의 에피큐리언의 그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언어는 절박한 상황 현실과 밀착된 50년대 문학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50년대 문학의 언어는 상황 현실과 밀착된 언어이며. 절실한 어떤 이슈를 뒷받침해 주는 언어였다. 말하자면 그것은 언어의 실용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언어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50년대 문학의 언어적 특질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작가 김승옥에서 볼 수 있는 바 언어의 고위적 조작에 의한 그 유희성의 추구는 그 자체가 50년대 문학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요, 반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러한 언어의 유희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 김승옥의 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개인, 개인성, 개인적 감수성이 유달리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나와 안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음미하는 것은 중요한 뜻이 있다.

 

"을지로 3가에 있는 간판 없는 한 술집에는 미자라는 이름을 가진 색시가 다섯 명 있는데 그 집에 들어온 순서대로 큰미자. 둘째 미자, 셋째 미자, 넷째 미자, 막내 미자라고들 합니다."

 

"그렇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겠군요, 그 술집에 들어가 본 사람은 꼭 김형 하나뿐이 아닐 테니까요."

"아 참, 그렇군요, 난 미처 그걸 생각지 못했는데, 난 그 중에서 큰미자와 하룻저녁 같이 잤는데 그 여자는 다음날 아침 일수(日收)로 물건을 파는 여자가 왔을 때 내게 팬티 하나를 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저금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 되들이 빈 술병에는 돈이 110원 들어 있었습니다."

"그건 얘기가 됩니다. 그 사실은 완전히 김형 소유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있는,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 그 사실이 아무리 하찮고 무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자기 개인의 완전한 소유로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의 것에 대한 확인이요, 사물의 자기화에의 노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50년대 문학이 개인의 문제를 전쟁이라는 전체의 문제 속에 전가시킴으로써 개인의 문제를 대개의 경우 집단의 문제로 귀속시켰던 사실과 비교해 볼 때, 김승옥의 작중 인물에서 볼 수 있는 바 앞서 말한 몸짓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전환의 계기를 찾게 된다. 즉, 전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적인 문제로부터 파리니 유리창의 등불이니 빌딩의 창유리니 하는 지극히 쇄말적인 대상에로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쇄말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의하여 확인된 것만이 자기 소유일 수 있다는, 가치 의식의 전환을 거기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집단적, 보편적인 이슈에 우선을 두었던 50년대 문학의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개별적, 개체적인 것에 강조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문학의 전과정을 통해서 볼 때 이처럼 언어의 유희성을 의식한 작가로 우리는 이상(李箱)을 들 수 있다.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는> 것으로 놀이를 벌였던 1930년대의 작가 이상에게서 우리는 언어의 유희성의 한 추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김승옥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 언어의 유희 속에 젖으려 하였던 「날개」의 이상은 외로운 나르시스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김승옥에 있어서의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어서의 그것이다. 이상의 언어는 단적으로 말해서 나르시스적 독백으로서의 언어였다. 이점에서 「날개」나 「지주회시」가 일인칭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평면적 독백으로 일관됨으로써 직접화법적인 대화를 통해서 빚어지는 인간의 지평적 관계 양식을 박탈해 버리고 수직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은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에 반하여 김승옥의 언어의 유희성은 인간 관계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그것이다. 즉 대화를 통해서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와 안 사이의 대화, 그것이야말로 언어의 실용성을 완전히 탈각한, 완전한 작위적 유희성만으로 이루어진 대화의 생생한 실례라 하겠다.

 

나와 안 사이의 이러한 대화의 전개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독한 현대인의 복수적(複數的)인 인간 관계의 모습이다. 물론 현대 문학에 있어서 고독이라는 용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까이는 손창섭이나 장용학에게서, 그보다 이전에는 이상이나 최명익 같은 작가들에서 우리는 이 용어와 긴밀히 관련된 여러 국면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령 이상에서 손창섭에 이르는 고독은 대개의 경우 외로운 독백으로서의 고독, 어느 외로운 에고가 타자(독자)에게 직선적으로 호소하는 것으로서의 고독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내레이터가 자기의 고독을 그 청자(靑瓷)에게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그러한 고독이었다. 이리하여 종래의 우리 문학에 있어서의 고독은 어느 특정한 에고의 일방 통행으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이르러 고독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 있어서 상대적 고독, 즉 인간의 숙명적 존재 양식으로서의 고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나와 안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주목할 만하다.

 

"오르내린다는 건……호흡 때문에 그러는 것이겠죠?"

"물론입니다. 시체의 아랫배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까요. 나는 그 아침의 만원 버스 속에서 보느 젊은 여자의 아랫배의 조용한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움직임을 지독히 사랑합니다."

"퍽 음탕한 얘기군요."라고 안은 미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화가 났다. 그 얘기는, 내가 만일에 라디오의 박사 게임 같은 데에 나가게 돼서 '세상에서 가장 신선한 것은?'이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 남들은 상치니 오월의 새벽이니 천사의 이마니 하고 대답하겠지만, 나는 그 움직임을 가장 신선한 것이라고 대답하려고 하니 일부러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아니 음탕한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그 얘기는 정말입니다."

"음탕하지 않다는 것과 정말이라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죠?"

"모르겠습니다. 관계 같은 것은 난 모릅니다. 요컨대……."

"그렇지만 그 동작은 <오르내린다>는 것이지 꿈틀거린다는 것은 아니군요. 김형은 아직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시구먼."

 

우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떨어져서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개새끼, 그게 꿈틀거리는 게 아니라고 해도 괜찮다,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장면의 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의 복수적인 관계 양식 속에 있어서의 인간의 양면성을 효과적으로 목격할 수 있게 된다. 나와 안과의 이 대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의 의도와 밖으로 나타나는 타자와의 관계 양식(언어)이 부단한 차질을 빚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의 생각은 나의 주체의식 <안>에서는 절대적이다. 얼마든지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도 주장할 수도 고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 일단 말로 되어 <밖>으로 나왔을 때, 그리하여 지평적인 관계에서 다른 <나>의 말과 부딪치게 될 때, 그것은 나의 내부에서 누리던 모든 특권을 순식간에 박탈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양면성으로서의 에고의 존재 양식은 가령 「날개」나 「유실몽(流失夢)」(손창섭)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있는 것은 내레이터 자신의 일방적인 독백, 즉 에고의, 일방통행만 있었을 뿐, 에고와 에고 사이의 지평적인 관계에서 연유되는 주체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절대적 우월감과 관계 상황 속에 있어서의 상대적 좌절감과 양면성이 생생하게 부각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의  작중 상황은 나의 주관적 진술에 의하여 펼쳐진다. 따라서 독자는 이 점에서는 <나>의 고독한 절대 군주의 우월감에 부딪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나의 에고와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그리고 나와 꼭 마찬가지고 주체적인 의미에 있어서 절대 군주로서의 우월감을 간직하고 있는 다른 에고(안의)와의 지평적인 관계 위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나의 내부에서는 확신과 자부가 용솟음친다. 상대방을 개새끼라고 경멸할 수도 있는 우월주의가 넘친다. 그러나 다른 나(안의)와의 대화에 부딪치자마자 나와 우월주의는 산산이 부서진다. 나의 주장이 대화 속에 던져지자마자 나는 내가 간직하고 있는 만큼의,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근거와 발상에서 연유되는 상대방의 에고의 우월주의에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에고에서 비롯되는 확신이나 주장이 다른 에고들을 일방적으로 유린하고 설복시키면서 탄력있게 확산되어 나가는 게 아니라, 그것은 대등한 지평적인 관계 위에 놓여 있는 타자에 의하여 끊임없이 오해당하고 반격 내지 묵살당하면서 작기 외톨박이로서의 자기 에고 속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의 대화가 가는 곳마다에서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침묵 속으로 떨어져서>, <그때 우리의 대화는 또 끊어졌다> 등등의 진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중단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와 안 사이의 의사 소통은 이처럼 수시로 두절된다. 그들은 각기 외로운 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의 언어들은, 결국 고독한 자기 내면으로 되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고독한 현대인들이다.

 

이와 같은 의사 소통이 단절된 자리에서 가능한 두 가지 행위를 우리는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으로 떨어지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새뮤얼 베케트의 등장 인물들(「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각기 자기의 언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경우이다. 이때 모든 대화들은 앞뒤의 필연성이나 인과율을 상실한 채 무한한 평행선을 그으면서 진열되어 나가는 것이다. <나>와 <안>의 대화는 후자의 방식에 해당한다. 그들은 이제 타자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갈 것을 포기한 채, 자기 혼자의 소유임만을 확인하는 언어를 전개하는 데 시종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고독의 메아리인 것이다.

 

이상이나 손창섭의 내레이터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는 타자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려는 그들의 끊임없는 시도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는 호소로서의 언어, 에고의 일방 통행으로서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시도는 아예 도외시되고, 각자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외로운 섬임을 확인하는 언어로서의 평행선을 긋는 것이다.

 

자기 소유임을 확인하는 언어의 끊임없는 퍼레이드는 이렇게 해서 비롯된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퍼레이드, 일종의 이동 진열장과 같은 것이다. 이제까지 수시로 끊겨야 했던 그들의 대화는 그들의 언어가 각기 고독한 메아리임을 확인한 바로 그 순간, 일종의 탄력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투는 점점 서로를 존중해 가고 있었고> <동시에 말을 시작했을 때는 번갈아 서로 양보하는> 아량을 보임으로써 대화의 에티켓을 준수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령 소박한 휴머니스트가 생각하고 있던 바와 같은, 인간의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 그러한 대화의 에티켓이 아니라 언어의 무상성(無償性) 내지 대화의 무의미성을 전제로 하는 자들끼리의 고의적인 조작에 의한 대화의 에티켓인 것이다.

그들의 대화가 얼핏 보기에는 경쾌하고 활기에 넘쳐 있는 듯하면서도, 실상은 각기 외로운 섬으로서의 자신들의 고독한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50년대의 문학에서 그처럼 흔히 접할 수 있었던 고독이니 불안이니 소외 의식이니 하는 문제에 관하여 단 한 마디의 언질도 얻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 자체에서 우리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직선적 호소로서의 고독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고독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50년대의 문학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획기적이다.

 

이에 반하여 나와 안의 이러한 대화의 중간에 뛰어든, 서적 판매원인 30대 사내는 그 두 젊은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반영한다. 첫째 이 사내는 우선 나이가 그들보다 10여 세 손위이다. 게다가 그는 짙은 생활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다분히 환상적 공간의 주민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나나 안과는 달리 이 30대 사내는 다분히 세속적 분위기를 발산한다. 짙은 <가난>의 냄새를 풍기는 점부터가 그렇다.

 

게다가 그는 타자에게 호소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기 내면의 절실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것을 호소하고자 이 두 젊은이들에게 매달린다. 이러한 그의 몸짓은 외로운 섬으로서의 자기 소유만을 확인하던 그 두 젊은이들과는 다룬 면이라 할 것이다. 자기만이 절실한 설움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누구에게라도 그것을 감염시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사내의 시도는, 인간끼리의 대화는 애당초 단절의 그것일 뿐이며, 따라서 결정적 침묵을 고수하거나 아니면 고의적 조작에 의해서만 겨우 그 대화를 엮어 갈 수 있을 뿐임을 알고 있는 젊은이(특히 <안>)들에 비하면 확실히 전세대적인 위인이라 할 것이다.

 

그는 지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이다. 게다가 장례비를 마련할 수 없어 결국 그 아내를 해부용 시체로 팔아 버린 것이다. 이런 기막힌 사연을 누구한테라도 털어놓은 다음 그 돈을 오늘밤 안으로 다 써 버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젊은이에게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은 그들을 자기 하소연의 대상자로 생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역이요, 무의미한 노고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말마따나 <그 양반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사내를 자꾸 피하려 했던 것이다. 자기들에게 그의 설움을 감염시킴으로써 자기 에고의 일방 통행을 꾀하려던 그 사내가 그들(20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짐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나 안이 30대 사내와 어울리게 된 것은 결국 자기 에고를 감염시키려는 30대 사내의 시도에 말려들어간 것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나 안은 자꾸 그 사내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30대 사내의 시도는 더욱 집요하다. 결국 그 30대 사내의 요청대로 밤거리를 서성거리고, 점포에 들러 물건을 사고, 질주하는 소방차를 뒤쫓아가서 불구경을 하고, 그리고 그 사내의 서러운 넋두리를 들어 줘야 하고, 결국 그 사내와 함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젊은이의 관점에서 볼 때, 특히 보다 더 비판적이고 의식적이라 할 수 있는 안의 입장에서 볼 때, 이 30대 사내가 자기 설움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이리하여 안은 셋이서 한 방에서 자자는 사내의 제의를 물리치고 각기 딴 방에서 잘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 사내로 하여금 혼자 있게 함으로써 자기 고독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케 하려는 방법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엔 무책임한 방식 같지만 <안> 나름의 계산에서 연유된 소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도 결국 실패로 끝난다. 사내는 결국 자살했기 때문이다. 안이 염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결국 적중해 버린 것이다. 다음날 아침 사내는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해야 할 고독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사내의, 그 호소의 길이 막힌 데서 오는 좌절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20대의 젊은이, 특히 이런 최악의 사태를 미리 염려한 안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사내는 자기 외로움을 소화하는 데 실패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작품은 50년대 문학이 간직하는 근본적인 취약성의 일면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제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이 작품이 보여 주는 중요한 다른 일면을 간과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그 사내의 죽음이 이 작품의 한 종말을 의미하고 있으면서도 두 20대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점으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30대 사내의 죽음은 이 두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해결이라 할 수 있지마는 동시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 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해결(사내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깨달음과 아울러 새로운 의문에 떨어지는 그 두 젊은이(특히 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안의 입장으로 볼 때 지난 하루 저녁 동안의 체험은 지극히 농도 짙은 것이었고, 자기 생애에 있어서 어떤 큰 깨달음을 가져다준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하룻밤의 사이에 <너무 늙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도 그만큼 지난 하룻밤의 체험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운 것이다. 그리하여 한 단계 높은 성숙의 계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 하룻밤의 체험, 그것은 그 20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탐험의 과정이었고 모색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모색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늙어 버릴> 정도로 성숙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숙은 새로운 의문을 가져온다. 그의 죽음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너무 늙어 버린 것을 의식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사내의 죽음은 그들 앞에 숱하게 펼쳐질 앞날의 생애에 대한 더 큰 의문을 제시해 주고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일종의 교양소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교양소설적 요소는 「생명연습(生命演習)」이래의 김승옥 문학에 일관하는 하나의 뚜렷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발랄하고 싱싱한 20대의 감성에서 중후하고 칙칙한 중년에 접어드는 작가 김승옥의 문학이 이 작품에서 보여 주고 있는 바와 같은 자기 탐험적인 면을, 중후하고 칙칙한 중년적 문학 현실 속에 효과적으로 수렴하기 위해서는 그의 20대의 꿈이 회피하여 돌보지 않았던 일상의 범용성 내지 실용성이 다시금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부각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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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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