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전문 / 엄흥섭
by 송화은율길 / 엄흥섭
1
"왜 또 너는 잠을 못 자고 깨니…… 또 뱃속이 거북해 오니?"
"아녜요, 어머니는 언제 깨셨에요?"
"나는 두시에 깼다. 비두 주리틀게 퍼붓는구나! 게다가 웬 바람까지 부니."
"거기 차잖어요? 아랫목으로 오셔서 편히 좀 주무셔요. 아직도 날이 샐려면 멀었는데."
"싫다! 잠이 오니. 어서 네나 더 자려무나."
"……"
"꿈두 참…… 이상하기두 허다. 네가 아들을 낳으려나…… 선연 네 남편이 얼굴이 샛노래 가지고 어디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웃으며 들어오더니 대문간에다 인줄을 매드구나! 죽은 혼두 못 잊어 그러니…… 온…… 아마 네가 쉬 해산하려나 보다……."
정애는 아무 말 없이 그 어머니의 말을 듣고만 있다.
그는 어느 틈에 두 눈이 화끈해지며 눈물이 빙그르르 돌아 귀밑으로 떨어져 베개를 적신다.
"공연히 꿈이야기를 했구나! 그까짓 꿈이야기에 서러워 울 게 뭐냐! 인젠 그만 툭툭 털어 버리구 죽은 사람 생각 말래두 그래!"
"누가 죽은 사람 생각을 해서 그래요! 내 앞길을 생각고 그러죠……."
정애는 머리맡에서 손수건을 집어 눈물을 씻는다.
정애의 눈앞엔 죽은 남편의 환영이 선뜻 지나친다.
소같이 억세던 남편이 오 년 만에 세상에 나올 때는 샛노란 얼굴과 뼈만 남은 그 허수아비와 같은 몸집을 가진 병신이 되어 가지고 뒷간 출입도 지팡이를 짚고서야 겨우 해 내려오던 일이 새삼스럽게 정애의 기억을 흔든다.
"별수없느니라 어린애 낳거든 내게 맡겨라! 너두 네 일 네 알아 일찍 조처해야지, 언제나 젊어 있는 줄 아니…… 까딱하면 너마저 내 신세짝 되고 만다."
정애는 그 어머니의 이 말이 자기에게 무슨 뜻을 알리기 위함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정애는 그 말을 더 깊이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스르르 아랫목 벽 쪽으로 돌리며 이불 위로 한 손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는다.
초저녁에 읽다가 잠이 들어 떨어뜨렸는지 베벨의 {부인론}이 퍽 하고 한 손에 걸리었다.
겉표지가 저절로 넘겨지자 남편의 사인이 선뜻 눈에 띈다.
"얘, 그런 책은 또 왜 보니…… 느 남편 읽던 책 아니야?"
"아녜요, 어머니는 아시지두 못하구……."
"그럼 느 오빠 거로구나!"
"어머니두 망령나셨수? 오빠 책은 어머니가 다 불살러 버리구 뭘 또 있는 줄 아세요?"
"모르겠다. 그놈의 책들 때문에 난리두 하두 겪어서…… 인젠 천자책만 봐두 지긋지긋허다……."
정애는 아무 말 없이 몸 전신을 옆으로 돌리며 보다 접어 둔 책장을 넘긴다.
이 순간 정애는 갑자기 책을 집어던지고,
"아이구, 배야" 소리를 치며 엎어진다.
"옳지 인제 아이가 도나 부다! 가만히 몸을 가지고 아랫배에 힘을 살살 줘봐라."
어머니는 부스스 일어나 속옷 끈을 졸라매고 치마를 입는다.
"아이구, 배야!"
"살살 아랫배에 힘을 줘라……."
"어머니…… 얼른 좀 준비하세요!"
"오냐! 겁만 집어먹지 마라!"
어머니는 밖으로 뛰어나온다.
빗줄기는 여전히 바람결과 함께 좍좍 여름날 장마처럼 퍼붓는다. 늦은 가을 첫새벽에 때아닌 번개까지 이따금 번쩍인다.
부엌으로 뛰어들어온 어머니는 아궁이에 먼저 불을 살라 넣는다.
해산 구완을 해본 일이 별로 없는 어머니건만 달구치면 맞는 겪으로 어쩔 수 없이 산파역이 되고 말았다.
장작에 간신히 불을 댕겨 놓고 만일을 몰라 어젯밤 빨아 놓았던 미역을 솥에 털어넣는다.
그리고 준비해 두었던 짚단 뭉치를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온다.
정애는 어머니의 서두는 꼴에 더욱 긴장되어 뱃속이 각각으로 더 아파 온다.
그는 "아이구, 배야" 소리를 치며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세워 가지고 방바닥을 고양이처럼 좍좍 쥐어긁기 시작한다.
"얘, 꿈이 맞으려나 부다. 이를 악물고 아랫두리에 살살 힘을 더 줘봐라."
"어머니…… 산파 좀 불러오세요. 산파 좀……."
정애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또 한번 이를 악다문다.
"……산파 오문 뭐 허니 돈만 달아나지…… 아랫배에 힘을 줘라 힘을 줘……."
"아이구, 어머니…… 나 죽겠네!"
정애의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진다.
"산파 생각 말구 네 힘으로 나야 한다. 첫애는 다 그러니라!"
정애는 이 순간 고통으로 잊었던 설움이 복받친다.
"첫애는 다 그러니라!"
소리가 정애의 귀엔 슬프게도 울린 때문이다.
"어머니두 첫애는 다 이렇다구요? 남편 잡어먹은 년이 첫애니 둘째 애니가 다 무에요!"
정애의 소리는 방바닥을 박박 긁는 손가락과 함께 빠르르 떨린다.
"종알대지 말구 아랫배에 힘이나 주어!"
어머니는 돌아서며 옷고름으로 눈을 씻는다.
2
날은 아직도 밝아 오지 않는다.
빗줄기는 힘차게 퍼부어 댄다.
이따금 천둥도 없는 번개가 번쩍번쩍 방 안을 비춘다.
미역국이 끓고 밥솥이 피―피― 넘건만 정애는 여전히 배를 붙이고 뒹굴며 고양이처럼 앙앙거리면서 방바닥을 긁고만 있다.
정애의 몸이 워낙 튼튼치 못한데다가 아이 밴 지 석 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속을 썩여 그런지 암만해도 난산을 할 것 같다.
정애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속옷 끈이 저절로 끌러지고 저고리 끈마저 풀어졌다.
이마를 몇 번이나 손등에 비벼 대고 고개를 몇 번이나 흔들었던지 흰 댕기 드려 쪽찐 머리가 마냥 풀려 어깨로 흘러내렸다.
정애는 인제 더 기운을 쓸 수 없다는 듯이 한 팔을 뻗은 채 정신을 잃고 눈을 감고 까무러져 버린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방으로 혼자서 부리나케 왔다갔다하더니만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진 정애 곁에 와서 귀에다 입을 대고 고함을 지른다.
"얘야 얘야! 정신차려라 정신! 다, 아이 날 땐 이렇다. 그렇기에 제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 공을 아느니라……."
"아이구, 어머니…… 나 죽겠네…… 산파 좀 불러요…… 얼른……."
정애는 최후로 악을 쓰고 뻐드러져 버린다.
어머니는 만일 난산이 되면 어쩌나 겁이 나서 몸이 떨리면서도 자기가 정애 남매를 낳을 때의 경험에 비추어보아 얼마쯤 마음이 눅지기도 한다.
"정애야!"
"……"
"얘, 얘, 정신차려, 이를 앙다물어라. 산파 오면 별수 있니. 내가 너를 날 때는 지금 너보다 더 까무러졌었다…… 세상에 여편네로 태어나는 죄가 제일 큰 죄란다……."
어머니는 위로 겸 한탄을 늘어놓는다.
정애는 이 순간 어머니의 말에 약간의 위로가 생겼던지 힘을 최후로 긁어모아 보았다. 그러나 그 힘은 조금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난 뒤 정애는 아랫배가 갑자기 불근해지더니 날카로운 칼로 간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온 전신을 치밀면서 마른 땀이 조르르 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뻗쳐 흐른다.
어머니는 정애의 아랫도리를 들여다보다가 큰 소리를 지른다.
"옳지 옳지…… 나온다! 힘을 더 줘라……."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끙끙 하고 정애보다 더 크게 힘을 들인다.
"어서 더…… 어서 더……."
애기문이 조금 열려진다. 아이는 까만 머리통이 어린애 베개 마구리만큼 보인다.
"어서 더…… 어서 더……."
어머니는 애가 타서 긴장된 목소리로 또 한번 힘을 재촉한다.
이 순간 어린아이 머리는 닷 푼쯤 밀려나온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나올 생각은커녕 정애는 아주 풀이 죽어 까무러져 버리고 만다.
어머니는 겁이 치밀었다.
'설마 어떨라구' 하고 순산을 믿던 마음이 이렇게까지 난산이 될 줄이야 몰랐다.
이러다가 만일 정애가 아이도 못 낳고 그대로 죽어 버린다면? 하고 어머니는 무서운 생각이 번개처럼 들다가도,
'설마 내 딸이 무슨 죄가 있기에…….'
하고 눙쳐 생각하고는 까무러진 정애의 뺨을 철썩 올려붙여 본다.
"얘야! 정신차려라 정신…… 조금만 더 써라 더…… 머리가 나왔다. 정신을 놓으면 못쓴다…… 어서 좀 힘을 모아라……."
정애는 어머니의 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는지 정기가 홰홰 풀린 눈을 스르르 뜨며 어머니의 얼굴을 흘긴다.
어머니의 얼굴은 뱅뱅뱅 온 방 안을 휘돌아다니고 윗목의 농짝과 경대가 기우뚱기우뚱 움직인다.
정애는 눈을 스르르 감으면서 이를 악물어 본다.
그러나 아이는 그 이상 더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어머니는 허둥지둥 방문을 열고 뛰어나와 지우산을 찾는다.
빗줄기는 지우산 위를 요란스럽게 내리때린다.
골목으로 나섰을 때는 바람은 더 세차게 불어때려 지우산을 뒤집어 버린다.
어머니는 줄비를 그대로 온 전신에 맞아 가며 천방지축 힘을 모아 산파집 대문 앞까지 뛰어갔다.
대문을 몇 번이나 흔들었지만 안에선 아무 소리가 없다.
빗발에 젖은 위아래 옷은 철썩 몸 전신에 들러붙었다.
천근이나 될 것처럼 무겁고 살은 마치 얼음장 속에 처박힌 것 같다. 찬 기운이 스며들건마는 어머니는 그 생각보다도 정애의 애타는 양이 더 또렷이 걱정된다.
진작 정애의 말대로 산파에게 부탁이나 해둘걸! 하는 후회와 아울러 지금쯤은 정애가 영영 까무러져 정신을 아주 잃어버렸으면 어쩌나? 겁이 돌자 두 무릎이 마치 꿈속에서처럼 찌르르 울리며 오금쟁이가 팍팍 아파 올라오기만 한다.
어머니는 또 한번 이를 앙다물고 대문짝이 떨어져라 하고 왈칵왈칵 흔들어 본다.
길거리는 희미해 오건마는 사람 하나 그림자도 없다.
빗줄기는 더한층 대문짝을 가로세로 내리때린다.
3
어머니가 산파를 인력거에 태워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정애는 정신을 잃을 대로 잃고 까무러져 버렸다.
어머니는 허둥지둥 정애의 배 아래를 들여다본다.
아이는 이마가 뾰조롬히 내다보인 채 나오질 않고 쉰다.
산파는 먼저 강심제를 꺼내어 두 대를 거듭 주사한다.
그러나 정애는 정신이 아주 풀려 산파가 온 것조차 잊어버리었다.
"아이구, 진즉 좀 서두실걸, 이게 무슨 위험한 짓입니까!"
산파는 또 한 대의 주사약을 톱으로 끊기 시작한다.
주사 기운에 정애는 약간 정신이 돌았는지 몸뚱이를 스르르 움직이며 힘을 모으려 하는 듯하다.
"얘, 정애야! 산파 오셨다. 정신차려라!"
"아이유, 선생님 살려 주세요!"
정애의 말소리는 바르르 떨린다.
"가만히 진정해야죠, 겁 집어먹지 말구 조금 더 힘을 주어 봐요……."
산파는 아무런 겁도 없다는 듯이 둥글넓적한 얼굴에 두셋 주름살을 지은 대로 태연스런 표정을 지으며 거의 직업적으로 정애의 배 아래를 가만히 만지기 시작한다.
정애의 배 아래를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몸뚱이는 벌벌벌 자꾸만 떨린다.
정애는 죽을힘을 모아 아랫배로 보내 본다.
아이 이마가 슬며시 밀려나온다.
"옳다! 얘야, 인제 다 나오겠다 힘써라 힘써!"
어머니는 기쁜 듯이 소리를 벌떡 지른다.
정애는 이 순간 자기 이상의 비상한 힘이 샘솟음을 깨달았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하던 생리적 큰 힘을 정애는 선뜻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고개까지 쑥 나온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나오지 않고 또 다시 쉰다.
이제는 더 큰일난 것처럼 어머니는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어머니는 만일 이러다가는 두 생명을 한꺼번에 죽여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번개처럼 머리를 지나친다.
산파도 약간 허둥대기 시작한다.
"워낙 산모가 원기가 없어서……."
산파는 어머니의 표정을 훑으면서,
"또 주사를 놔야겠습니다."
하곤 또 한 개의 주사약을 꺼내었다.
오 분쯤 지난 뒤에야 아이는 다 나왔다. 거의 빼낸 셈이다.
"옳다, 얘야, 나왔다, 다 나왔다, 고치자지를 달구 나오느라구 에미를 그리 애태웠지…… 가만히 누웠거라, 후산을 해야지!"
어머니는 연방 기쁨과 깜찍함이 뒤섞여 넘친다.
그러나 아이는 웬일로 조금도 울지를 않는다. 살빛조차 새파랗게 보인다.
산파는 어린아이를 받아 가지고 장난감 주무르듯 두 다리와 머리통을 잡고서 폈다 오그렸다 체조를 시킨다.
어머니는 어린아이가 죽지나 않았나 겁이 났다.
한참 만에 어린아이는 컥컥 느끼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그제야 떨리는 가슴이 조금 가라앉는다.
정애는 아이를 낳아 놓고 그대로 쓰러져 아주 정신이 까무러져 버렸다.
산파의 눈과 손은 산모에게보다도 어린아이에게만 쏠린다. 그의 손은 마치 기계와 같이 어린아이를 다룬다. 눈코만 없으면 한 점의 고깃덩이 같은 피 묻은 어린애를 물에 씻고 옷 입히고 베개에 베기까지의 광경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산파란 꼭 불러야 할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큰일날 뻔했습니다. 아이 모가지가 아이문에 걸려서 오래 쉬면 아이뿐만 아니라 산모도 살기 어려워요."
어머니는 산파의 말에 이제야 두 생명이 살았구나 느껴진다.
"얘야, 정신차려라 정신차려!"
어머니는 이맛살을 찡그리며 정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가만두세요, 산모가 워낙 약해빠져서."
산파는 또 한 대의 강심제를 놓는다.
"얘야, 정신 좀 차려! 응?"
어머니는 속이 달아 또 한번 정애를 흔든다.
정애는 꿈속에서 깨나는 사람처럼 눈을 스르르 뜬다.
"아들 하나 낳기 힘두 든다."
어머니는 정애를 위로하려는 듯이 빙그레 웃음을 띠며 말소리를 부드럽게 던진다.
정애는 아들을 낳았다는 말에 선뜻 새 정신을 느끼었다.
그러나 아랫도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가만히…… 정신만 놓지 말구 계세요. 큰 욕 봤습니다만…… 후산을 또 해야 할 테니……."
산파는 물끄러미 정애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정애는 이제야 조금씩 새 정신이 샘솟는다.
"어째 어린애가 울지두 않나요!"
정애는 이 순간 자기가 난산이었던 것을 깨닫자 선뜻 어린아이가 혹 질식이나 하지 않았었나 겁이 난다.
정애는 그것이 자기가 이미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 만 이 순간의 처음 느껴지는 한 가닥 본능적 모성애가 가진 공포라고 깨달았다.
"지금 잡니다. 워낙 어머니 뱃문이 좁았던지 혼이 단단히 나서 울지두 않구……."
산파의 말에 일변 안심은 되나 그러나 혹 질식해 죽은 것만 같다.
정애는 고개를 들어 어린애가 혹시 죽은 남편을 닮았는지 어린애 쪽을 보려 했다. 그러나 고개는 생각대로 돌려지지 않는다.
"어머니, 어린애가 죽지 않었어요?"
정애는 불쑥 말소리를 떨었다.
암만해도 이미 시체가 되어 뻐드러졌건만 자기의 마음을 상치 않기 위하여 일부러 속이는 것만 같다.
"에이, 방정맞은 것 같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온! 눈을 뜨고 벌써부터 주먹을 빨려고 휘휘 내두르는걸!"
어머니는 시침을 떼고 어린아이 얼굴로 시선을 옮긴다.
아까 산파가 목욕 감길 때 흑흑 두어 번 기침 같은 소리를 하고 나서 아직도 울지 않던 어린아이는 살빛이 아직도 붉어 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 순간 겁이 났다.
어머니는 정애의 눈을 스르르 피하면서 어린아이 코밑에 자기의 귀를 가만히 기울인다.
색―색―색―색― 가는 숨소리가 들릴 둥 말 둥 흘러나온다.
"내버려두세요. 저도 좀 쉬고 정신을 차려야지."
산파는 그렇게 쉽게 사람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어머니의 얼굴을 힐끗 흘겨보고 주사기를 주섬주섬 집어넣는다.
4
정애는 무서운 꿈을 꾸는 것 같은 긴장 속에서 후산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새 정신이 샘솟았다.
정신이 맑아짐을 따라 정애는 까닭 없이 슬펐다.
그것은 첫째,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살았던들 오늘의 자기의 고통은 오직 순간적 생리적 고통에 그쳤을 것이건만…… 오늘의 고통을 위로할 자 누구며 이제 앞일을 맡길 자 누구인가? 생각되매 아득한 적막과 슬픔이 가슴을 쪼갤 것처럼 치밀어 올라온다.
그러나 정애는 이 적막과 슬픔을 억지로 참으려 했다.
이젠 다만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자기의 온몸을 희생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의 천직이려니 생각하려 했다.
정애는 어머니가 가져다 주는 첫국밥을 먹었다.
"많이 좀 먹어라, 먹어야 산다!"
어머니는 치맛고름으로 눈물을 연방 씻는다.
어머니의 눈물방울은 죽은 아이 애비를 생각하는 정이거니 느껴지자 정애는 미역국에 목이 메이기 시작한다.
이제 스물다섯의 청춘 시절을 과부가 되고 또다시 유복자를 키운다는 것은 그렇게 명랑한 사실이 아님을 정애는 모르지 않는다.
자기의 중학 동창생으로 모 은행원과 결혼하여 행복스런 문화주택에 단꿈을 누리는 갑순이! 백만장자의 아들 김모의 셋째 첩으로 삼층 양옥에 버티고 사는 경주! 유복자를 안고 과부 된 지 두 달 만에 장사꾼 남편을 맞아 간 경희! 그런 동무들의 얼굴이 선뜻 눈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정애는 애써 머리를 흔들어 버린다.
자기의 행복은 갑순이나 경주나 경희가 사는 그런 집에서, 그런 곳에서 찾아낼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애는 꼭 같은 한 세상, 한 시대, 한 땅에 살면서 갑순과 경주와 경희와 자기와의 세상은 거리가 멀고 사이가 막혔음을 깨달았다.
갑순이의 길이나 경주의 길이나 경희의 길은 도저히 자기의 가는 길과는 딴 가닥 길이거니 생각된다.
자기의 행복은 오직 가버린 남편의 어린아이의 어머니로서 앞길을 걸어나아가는 데에 빛나리라 생각되었다.
정애는 옆에서 잠든 어린아이의 얼굴을 스르르 내리훑는다.
"어서 커서 네 애비의 못 이룬 뜻을 이어야지……."
정애는 어느 틈에 두 눈이 따끈해 온다.
명대로 다 못 살고 청춘에 꺾이고 만 남편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눈앞을 어른거리기 때문이었다.
정애는 이를 악물었다.
"……남편을 죽인 것은……."
정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깨물어 본다.
작년 봄 오 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세상에 나올 때의 파랗게 병들어 비틀걸음을 걷던 남편의 얼굴이 스르르 정애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정애는 어느 틈에 두 눈이 흐릿해 온다.
날은 훤하게 밝았건만 아직도 빗줄기는 여전히 퍼붓는다.
정애는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또 한번 어린아이의 잠든 얼굴을 옆으로 흘겨본다.
"어머니로서 일생을……."
정애의 가슴엔 또다시 이러한 생각이 용솟음친다.
이런 감정이 북받치자 정애는 까닭 없이 서럽고 슬펐다.
자기의 일생은 끝까지 빛 없는 암흑 속에서 허덕이다 말 것인가 생각되매 세상이 허무하고 자기 한몸이 버러지처럼 내리켜 보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정애는 오늘 자기와 같이 빛 없는 세상에서 허덕이는 여자가 오직 자기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선뜻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박차고 당신의 청춘까지 희생하고라도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충실하려 한다구?
남편의 병이 위경에 이르렀을 때 임신중의 자기에게 최후의 반문을 던지던 남편의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정애의 귀를 울려 온다.
정애는 이 순간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나는 벌써……."
정애는 어느 틈에 한가닥의 절망이 떠올라왔다. 그러나 그는 곧 머리를 흔들며, 내겐 벌써 청춘도 없다. 내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중얼거렸다.
'오직 한 개의 모성으로서 세상과 싸워 나가는 것이 나의 가장 가까운 길이다.'
그는 또한 새로운 진리나 깨달은 듯이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었다. 밖에선 여전히 빗줄기가 내리쏟아진다.
출전:여성10(1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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