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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련 설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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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련 설화

 

명경대와 황천담

명경대는 석가봉과 시왕봉 사이의 황천담 이라고 하는 맑은 담() 앞에 있는 바위 절벽이다. 시왕(十王)은 저승에서 죽은 사람의 혼이 가야할 곳을 심판해 주는 열 명의 왕을 말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염라대왕은 열 명의 왕 중에서 다섯 번째 왕이다.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그가 살아있을 당시의 행적을 이야기하면 많은 혼들은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명경(明鏡) 앞에 그를 세운다. 그러면 그 거울에 그 사람의 살아 생전 행적이 남김없이 비추어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 명경대가 바로 금강산의 이곳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안개가 자욱히 낀 날이면 염라대왕이 죄인을 심판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명경대의 신비

금강산 주변 고을의 원으로 부임한 사또가 있었다. 평소에 금강산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는 고을 원으로 오자마자 즉시 행장을 차려 금강산 탐승을 떠났다. 산 아래 마을에서 하루 묵게 되었는데, 마침 주막에 빈 방이 하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유생과 승려가 묵고 있는 방에서 함께 유숙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원님은 자신의 행장에서 물건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나졸들을 풀어서 함께 잠을 잤던 유생과 승려를 잡아오도록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말할 뿐, 진범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원님은 이들을 데리고 금강산 명경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명경대 앞에 세우고 이들 중 범인을 잡아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유생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데 승려의 그림자는 비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원님은 승려를 범인으로 체포하여 모든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처럼 명경대 앞에 서면 죄를 지은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는 반면 죄가 없는 사람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의태자 관련 설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마음을 굳히자 태자는 아버지의 뜻을 바꾸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다. 그러나 부왕인 경순왕의 뜻이 확고함을 알고는 스스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오랜 시간을 걸려 금강산 장안사 계곡에 도착하자 장안사에 주석하고 있던 대륜법사가 이미 알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태자는 대륜 스님과 앞날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고려군에 대항하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은 출가하여 승려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네 주민들은 태자가 결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에 감복하여 명경대 입구와 영원동에 이르는 구간에 산성을 쌓았다.

 

어느 날 고려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고려의 군사와 싸울만한 인원이 없던 태자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시종하고 있던 사람들을 이끌고 망군대로 올라갔다. 망군대에 올라가 살펴보니 고려의 군사는 삼억동 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태자는 즉시 사람을 시켜 횟가루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명경대 앞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황천강 물줄기에 횟가루를 풀도록 시켰다. 한편 고려의 군사는 대열을 정비하여 공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강물에서 흰색 뜸물이 흘러오자 놀랐다. 그들은 횟가루를 쌀 씻는 뜸물로 생각하여, 산골짜기에 신라의 대군이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퇴각하였다.

 

이렇게 몇 년 세월이 흐르자 태자는 자신의 운명이 다하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 사이 태자는 화려한 복장을 벗어버리고 오직 베옷만을 입고 있었으므로 마의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의태자는 비로봉으로 올라가서 이제는 모든 것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계마석(繫馬石)에 묶어 두고 멀리 신라와 개경 쪽을 바라보았다. 마음 속으로 이별을 고하자 마의태자의 몸도 천천히 죽어 갔다.

 

태자가 죽자 그가 타던 용마 역시 죽어 바위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 비로봉 구역에 있는 마의태자릉은 그 때 태자를 묻은 곳이며, 옆에 있는 용마석은 그가 타던 말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한다.

 

비로봉의 금강초롱 전설

경기도 가평의 명지산 이북 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우리 나라 특유의 식물 중에 금강초롱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금강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기 때문에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꽃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 금강산 비로봉 아래에는 의좋게 살아가는 오누이가 있었다. 오빠는 이름난 석공이었으므로 항상 일을 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오빠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자신의 결심을 얘기했다. 그것은 금강산의 바위들을 잘 깎아 아름다운 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빠는 동생에게 3년을 기약하고 길을 떠났다.

 

자나깨나 오빠를 기다리던 동생은 3년이 지나도 오빠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오빠의 안부를 걱정하던 동생은 오빠를 찾아 금강산 골짜기를 헤매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만 날이 저물었다. 오빠를 찾느라 기진맥진한데다 길이 없는 산중에서 달빛 한 점 없는 밤이었으므로 동생은 도저히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동생은 초롱불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풀이 하나 자라더니 꽃이 피는 것이었다. 그 꽃은 마치 초롱 모양으로 자라 이상한 빛을 내는 것이었다. 동생은 그 초롱꽃의 불빛을 따라 밤길을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생의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오빠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빠는 금강산을 아름답게 장식을 한 후 너무 지쳐서 그만 산중에서 쓰러졌던 것이다. 동생은 얼른 가서 오빠를 살폈다. 그런데 전혀 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오빠는 초롱꽃의 향기를 맡더니 기적처럼 정신을 차리며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오누이는 금강산에서 길을 잃은 길손들의 불을 밝히라는 뜻에서 금강산 곳곳에 금강초롱을 심었다고 한다.

 

마하연에 간 세조대왕

조선시대 세조는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이후 많은 악몽과 병에 시달렸다. 자신의 업보라고 생각한 세조는 전국의 유명한 사찰과 산을 돌아다니면서 요양과 함께 불공을 드렸다.

 

세조가 한번은 금강산에 갔다. 장안사에서 유숙을 하고 난 후 마하연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청학동 아래 갈림길에 당도하였는데(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원통암, 왼쪽으로 가면 마하연으로 가게 된다) 갑자기 공중에서 웬 소리가 들렸다.

너는 소승(小乘) 나한(羅漢)의 후신인데, 어찌 감히 대승보살의 진신을 밟으려 하느냐?”

 

이 말을 들은 세조는 남들도 모두 다니는 길인데 왜 자신만 안 된다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그 길로 원통암의 나한도량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대승심(大乘心)을 발하여 정성을 다해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마하연으로 갔더니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은사다리 금사다리와 사랑바위

비로봉으로 가는 길에 은사다리 금사다리 못 미쳐 ‘20년 고개라는 등성이가 나타나는데 이 곳에는 어린애를 품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과 같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옛날 금강산에 살았던 금슬은 좋지만 자식이 없는 부부가 20년 동안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금강산 산신에게 득남 기도를 올려 자식을 얻었다는 전설이 깃든 사랑바위이다. 이 바위를 관음바위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후에 스님들이 불교 신앙을 포교하기 위해 전설에 나오는 산신을 관음보살로 바꾸고 바위 이름도 그와 결부시켜 다시 붙인 것이다.

 

http://my.dreamwiz.com/garamal/베이스.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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