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그 한 발 / 푸쉬킨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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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발 / 푸쉬킨 


우린 서로 쏘았다(*) -바라틴스키

[*에프게니 아브라모비치 바라틴스키, Yevgeny Abramovich Baratynskii, 1800-1844. 푸시킨과 같은 시대의 시인. 장시와 애가, 서사시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결투의 권리에 따라 그를 사살하겠다고 다짐했다. 내겐 그를 쏠 한 발이 아직 남아 있었다. - <숙영의 저녁>(**)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1825년 12월 14일에 반란을 일으켰다)의 반란에 가담한 유명한 작가인 A.A. 베스투제프(필명은 말린스키)의 중편소설. 그러나 이 소설에서 푸시킨이 여기 인용한 구절은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푸시킨의 창작이다.]


우리는 **라는 제법 번화한 촌락에 주둔하고 있었다. 보병 장교의 생활이란 뻔하다. 아침에는 훈련이나 승마 연습이 있고, 점심은 연대장 집이나 유대인의 식당에서 먹는다. 저녁에는 펀치를 마시며 카드 놀이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촌에는 무도회를 열 만한 집도 없고, 나이 든 처녀도 없었다. 그래서 장교들은 서로서로 숙소에 돌아가며 모이곤 했다. 당연히 거기에는 군복 외에 다른 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군인도 아닌데 우리 모임에 끼어있는 사내가 있었다. 나이는 35세 가량 됐을까, 우리는 그를 노인 취급했다. 그는 우리보다 세상 물정에 밝았으며 평소의 침울한 태도와 거친 성격, 신랄한 말투 등으로 젊은 청년 장교들의 마음에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뭔가 분명치는 않지만, 일종의 신비한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러시아인 같은데 이름은 외국식이었다.

전에 경기병 연대에 근무할 때는 제법 잘 나가는 군인이었다고 하는데, 왜 퇴역하여 이런 한적한 촌구석에 묻혀 사는지 아무도 까닭을 몰랐다. 그는 가난하면서도 돈 씀씀이가 헤펐다. 즉 항상 다 해진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걸어 다니는 주제에 우리 연대의 장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대접이라야 제대병이 만든 두세 가지 음식에 불과했지만 샴페인은 강물처럼 나왔다. 그의 재산이나 수입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또 감히 누구 하나 그에게 그 따위를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꽤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군사 서적과 소설 나부랑이였다. 그는 책을 남에게 빌려 주고 절대 돌려 달라고 독촉하지 않는 대신, 자기가 빌려온 책도 임자에게 돌려주는 법이 없었다.

그의 주요한 일과는 사격 연습이었다. 그의 방의 벽이란 벽은 마치 벌집처럼 총알 구멍 투성이였다. 여러 종류의 권총들을 수집해 걸어놓은 것이 그가 살고 있는 초라한 오두막의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그의 총 솜씨는 문자 그대로 귀신 같았다. 그가 모자 위에 놓인 배를 쏘아 떨어뜨리겠다고 말할 경우, 자기 머리를 내미는 걸 주저할 사람은 연대 내에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 장교들은 종종 결투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시리비오(그를 일단 이렇게 부르자)는 결코 그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결투해 본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저 퉁명스럽게 있다고 대답할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가 자기와 대결했던 어떤 불행한 희생자가 마음에 걸려 그러는가 보다고 우리는 짐작했다. 그의 뛰어난 솜씨로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겁쟁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겉모습만 보아도 그런 의심은 품기 어렵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겨 우리 모두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장교 열 명 가량이 시리비오네 집에서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진탕 술을 마셨고, 식사 후 우리는 주인에게 카드놀이 딜러가 되어 달라고 졸라댔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그 동안 카드 놀이에 잘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카드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금화를 50개쯤 테이블 위에 좍 뿌려놓고 자리에 앉아 카드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카드 놀이를 시작했다. 시리비오는 노름을 할 때, 완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옥신각신하거나 변명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다. 돈을 내는 사람이 계산을 잘못하면, 그는 즉시 부족액을 채워 지불하거나 남는 액수를 기록해 두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기 방식으로 계산하는 것을 버려 두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에는 부대로 갓 전속 온 장교가 한 사람 끼어 있었다.

그도 이 노름판에 함께했는데, 그만 실수로 카드의 귀를 지나치게 꺾어버렸다. 시리비오는 분필을 집어 계산을 전처럼 제대로 맞추어 놓았다. 그 장교는 이것을 보고 시리비오가 계산을 잘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리비오는 잠자코 카드 패를 계속 돌렸다. 장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우개를 집어 잘못 기록됐다고 생각한 부분을 지워버렸다. 시리비오는 분필을 집어 제대로 다시 적어 넣었다.

술과 노름에 취해 있었던데다 주위의 동료들이 웃는 소리에 발끈한 그 장교는, 자기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인 구리 촛대를 들어 시리비오에게 던졌다. 시리비오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살짝 피했다. 우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시리비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서더니 증오심으로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제발 여기서 나가 주시오. 그리고 이 일이 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우리는 이 새로 온 친구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장교는 시리비오의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라도 좋으니 이 모욕에 대하여 책임을 질 용의가 있다고 내뱉고는 휭하니 나가 버렸다. 우리는 노름은 몇 분 더 계속했지만, 주인이 노름을 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한 사람 두 사람 빠져 나와 각자 자기 숙소로 흩어져 돌아갔다.

이튿날, 마술 연습장에 나온 우리는 그 불쌍한 중위가 아직 살아 있는지 서로 물어보았다. 그 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바로 그 당사자가 불쑥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우리들은 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시리비오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를 꽤나 놀라게 했다. 우리는 시리비오에게 몰려갔다. 그는 뜰에 서서 대문에 붙여 둔 카드에 남은 한 발의 총알을 쏘려던 참이었다. 그는 어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사흘이 지난 뒤에도 그 중위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정말 시리비오는 결투를 안 할 생각인가? 우리는 의아해 하며 서로 수군댔다. 시리비오는 끝내 결투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중위의 무성의하고 짤막한 사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화해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부대의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가 떨어졌다. 이 청년들은 평소부터 용기를 인간 최고의 미덕으로 보고 어떠한 악덕도 그것만 있으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용기의 부족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최악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이 모든 사건도 잊혀졌다. 시리비오는 그리고 이 사건 이전의 명망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를 가까이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천성적으로 소설적 상상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사나이, 수수께끼 같은 생활 태도로 신비스러운 이야기의 주인공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 사나이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그 신랄한 말투도 드러내지 않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허심탄회하고 아주 기분 좋게 이야기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불행한 사건 이후,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더구나 그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그런 오점이 씻겨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생각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서 도저히 예전처럼 태연하게 그를 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눈치가 빠르고 세상 물정에 밝은 시리비오는 곧 나의 그런 태도를 눈치 챘다. 그 원인이 어떤 것인지도 금방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사실이 괴로운 것 같았다. 두어 번 정도 그가 나에게 거기 대해 해명하려는 눈치를 보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의식적으로 그런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시리비오도 그런 시도를 단념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와 시리비오는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나 만났을 뿐 전처럼 마음을 터놓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일은 없어졌다.

하루하루 시간이 잘 지나가는 대도시 사람들은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 지루하게 사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목이 빠지게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화요일과 금요일이면 우리 연대의 행정실은 장교들로 꽉 차곤 했다. 어떤 장교는 송금을, 어떤 장교는 편지를, 또 어떤 장교는 신문을 기다리고 있다. 편지 봉투는 대개 그 자리에서 뜯어지기 때문에 거기 담긴 뉴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행정실은 온통 북적거리게 된다. 시리비오 역시 우리 연대의 주소로 편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대개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초조하게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꺼내서 읽는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교들은 모두 자기 편지에만 정신을 빼앗겨 이런 모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분!"

시리비오가 큰 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저는 중요한 사정이 생겨서 곧 이곳을 떠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밤 떠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분들과 작별의 식사라도 같이하고 싶습니다. 다들 꼭 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도 기다리고 있겠소. 꼭 와 주시오."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행정실을 나가 버렸다. 우리들은 모두 시리비오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약속된 시간에 시리비오 집에 가 보니 연대의 거의 모든 장교들이 거기 와 있었다. 벌써 짐을 다 꾸려 놓아 실내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벽에 총알 자국만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우리들은 모두 식탁에 앉았다. 주인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즐거운 기분이 모두에게 전파되어 곧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계속해서 술병 마개가 펑펑 뽑히고 술잔에서는 부글부글 거품이 소용돌이쳤다. 우리는 진심으로 길 떠나는 사람의 장도에 행운과 안녕이 깃들이기를 기원했다.

밤이 깊어서야 다들 식탁에서 일어나 자리를 떴다. 나 역시 모자를 찾아 쓰고 막 나가려는 참이었다. 그 때 다른 장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던 시리비오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나를 만류하며 자리에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당신에게만 잠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았다.

손님들이 다 가고 두 사람만 남자, 우리는 마주앉아 묵묵히 파이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시리비오는 조금 전까지 마냥 즐거워하던 그 모습은 간 데가 없었다. 우울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지고 눈만 번쩍거리고 있었다. 입에서 담배 연기를 연달아 뿜어대는 모습이 마치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시리비오가 침묵을 깼다.

"우리는 아마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겁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작별하기 전에 당신에게 뭔가 변명을 하고 싶었소.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나는 남의 평판 따위에 신경을 쓰는 위인은 아니오. 하지만 당신을 좋아하고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에게만은 나쁜 인상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지. 그게 정말 괴로웠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 타버린 파이프에 다시 담배를 채웠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당신은 내가 그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 R***에게 결투를 신청하지 않은 게 무척이나 이상했겠지."

그는 말을 이었다.

"무기를 선택할 권리는 내게 있었고, 따라서 그 녀석의 목숨은 내 수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소. 결투를 하더라도 내 목숨이 위협 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 거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때 일을 크게 벌이지 않고, 그냥 그 작자를 놔둔 것은 오로지 내가 관대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해도 당신은 별로 반박할 수 없을 거요. 그러나 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소. 만일 내 생명이 위협 받지 않고 저 R***을 혼내 줄 수 있었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을 용서해 주지 않았을 거요."

나는 놀라서 시리비오를 바라보았다. 시리비오의 이런 고백은 정말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시리비오는 말을 계속했다.

"그렇소. 나는 내 생명을 위험에 내놓을 수 없었소. 그러니까 벌써 6년 전 일이군. 난 어떤 사람한테서 따귀를 얻어맞았고, 그 사람은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소."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신은 그 사람과 결투를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물었다.

"아마 어떤 사정이 생겨서 결투를 하지 못하고 헤어졌나 보군요?"

"난 그와 결투를 했소."

시리비오는 대답했다.

"보시오. 이게 바로 그 때 우리가 한 결투의 흔적이오."

시리비오는 일어서더니 짐 꾸러미에서 금술이 달린 빨간 모자(프랑스에서 경찰 모자라고 부르는)를 꺼내서 써보였다. 그 모자는 이마에서 5센티미터쯤 위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다.

시리비오는 말을 이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 기병연대에 근무하고 있었소. 짐작하겠지만, 나는 천성이 무엇에든지 으뜸이 되고싶었고, 남에게 지고 지낼 수가 없었소. 젊을 때부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내 정열이었소. 당시에는 난폭한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지. 그리고 난 우리 연대에서 난폭한 걸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군인이었소. 주량을 뽐내는 것도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을 거요."

"난 제니스 다비도프(*) 작품에도 나오는 그 쾌남아 부르초프(**)와 주량 대결을 벌여 이긴 적도 있었소. 우리 연대에서는 결투가 끊이질 않았고, 난 항상 그 많은 결투의 직접 당사자거나 입회인을 하곤 했지. 동료들은 나를 존경했지만 새로 부임해오는 연대장들에게는 내가 아주 귀찮은 골치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소."

*제니스 다비도프(1774-1830) : 푸시킨 시대의 이류 시인. 군대 생활을 노래하고 그 환락을 구가하는 작품을 썼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부르초프(?-1813) : 프러시아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서 다비도프의 동료였다.

"내가 여유만만하게(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명성을 즐기고 있는 판에 어느날 어떤 돈 많고 쟁쟁한 가문의 청년 장교(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소)가 우리 연대로 부임해 왔소. 나는 생전 그런 행운아를 본 적이 없었소. 생각해 보시오! 젊고, 똑똑한데다, 미남이고, 성격도 명랑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기를 가진 청년 장교 말이오. 가문이 쟁쟁한데다, 돈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 단 한 번도 돈에 궁해 본 적이 없단 말이오!"

"이 사내가 우리 부대에 어떤 바람을 불러왔을지 한 번 상상을 해 보시오. 그 때까지 내가 누리던 왕좌는 당장 흔들리기 시작했소. 그는 부대에 퍼져있던 내 명성을 듣고 나와 사귀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냉정하게 대했지. 그랬더니 그는 아무 미련도 없이 나를 무시해 버리더군. 나는 그 놈을 미워했소. 부대원이나 여자들 사이에서 그 녀석이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녀석과 싸울 시비거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됐소."

"내가 풍자시를 읊어 상대방을 조롱하면 녀석도 풍자시로 답을 하더군. 그런데 언제나 그의 풍자가 내 것보다 훨씬 기상천외하고 신랄했소. 그럼에도 그의 풍자는 비할 데 없이 명랑했단 말이오. 저쪽은 농담 삼아 했는데, 이쪽은 악의를 품고 약이 바짝 올라 있는 꼴이었소."

"드디어 어느 날 부근의 폴란드인 지주의 집에서 무도회에서 열렸소. 그가 거기 참석한 모든 귀부인들, 특히 내가 속으로 연모하고 있던 그 집 여주인의 주목을 받는 걸 보고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소. 나는 녀석의 귀에다 대고 야비한 농담을 퍼부었지. 그러자 녀석은 화를 버럭 내더니 내 뺨을 갈기더군. 우리는 동시에 샤벨을 움켜 쥐었고, 부인들이 기절하고, 온통 소동이 벌어졌어.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떼어놓았지만, 우린 당장 그날 밤 결투를 하러 나갔소."

"그때는 이미 새벽이 가까운 시간이었소. 나는 약속 장소에 세 사람의 입회인과 함께 나가서 그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한 심정이었소. 봄의 태양이 솟아올라 사방이 따뜻해졌소. 멀리 그 친구가 오는 모습이 보이더군. 그는 입회인 한 사람과 함께 군복 밑으로 샤벨을 질질 끌면서 터벅터벅 걸어오더군. 우리는 그 쪽으로 마주 걸어갔소. 그는 버찌가 잔뜩 든 군모를 손에 들고 있었어. 입회인들이 12걸음을 쟀지. 내가 먼저 쏠 차례였소. 그러나, 가슴에 증오심이 끓어오르고 손이 말을 안 들어 정확하게 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소."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얻기 위해 그 친구에게 먼저 쏘도록 양보했지만 듣지 않더군. 그래서 제비를 뽑기로 했지. 영원한 행운아인 그가 먼저 쏘게 되었소. 그는 겨냥을 하고 내 모자를 꿰뚫었어. 이제 내 차례가 되었지. 그의 목숨이 마침내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된 셈이오. 나는 마치 굶주린 것처럼, 녀석의 표정에서 불안의 그림자를 잡아보려고 노려보았소... 녀석은 내 총구 앞에서 서서 군모에서 익은 버찌를 꺼내 먹으면서 씨를 뱉더군. 그 씨가 내게까지 날아오는 거야."

"그의 태연함에 나는 미칠 듯 분노했소. 놈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내가 그것을 빼앗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때 문득 악마 같은 생각이 내 머리에 번쩍였소. 나는 권총을 내렸지. 그리고 '당신은 지금 죽음 따위엔 무관심한 모양이군'하고 그에게 말했어. '당신은 아침 식사를 드시는 모양인데, 방해하고 싶지 않소...' '아니, 당신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아요.' 놈은 대꾸했어. '사양하지 말고 쏘시오. 그런데 당신은 쏠 마음이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당신의 한 발은 아직 남아 있는 거요. 난 언제든지 명령을 받들 용의가 있어요.' 난 입회인더러 오늘은 쏠 생각이 없다고 밝혔소. 그것으로 그날 결투는 끝난 셈이지."

"난 곧바로 퇴역하자 이 시골 마을에 틀어박혔소. 그 후로 단 하루도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없었지. 그리고 오늘에야 비로소 그 날이 왔소..."

시리비오는 그날 아침 받은 편지를 호주머니에서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어떤 인물이 곧 아름다운 아가씨와 정식 결혼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아마 그의 부탁을 받은 대리인이 모스크바에서 그에게 써보낸 편지일 것이다.

"당신은 짐작이 갈 거요."

시리비오는 말했다.

"이 어떤 인물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난 지금 모스크바로 갈 거요. 결혼을 앞둔 그 자가 과연 전에 버찌를 먹으면서 태연하게 죽음을 마주봤던 것처럼, 결혼을 앞에 두고도 역시 마찬가지로 태연히 그것을 먹을지 어떨지를 분명히 보아야겠소!"

말을 마치고 시리비오는 벌떡 일어나서 군모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마치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않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상하고 모순투성이의 감정이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하인이 들어와 말이 준비 되었다고 알렸다. 시리비오는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우리는 서로 키스했다. 그는 트렁크 두 개를 실은 마차에 올라탔다. 그 하나에는 권총이, 다른 것에는 그의 가재 도구 따위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다. 말은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 해가 지났다. 나는 가정 형편으로 부득이 N**군의 어떤 가난한 농촌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사일을 돌보면서도 나는 과거의 소란하고 걱정 없던 생활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가을과 겨울의 기나긴 밤을 외롭게 혼자서 지내는 것이었다. 낮에는 관리인과 이야기를 하거나, 일 때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새 시설물을 두루 살피거나 하는 일도 이럭저럭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해가 저물기가 바쁘게 나는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장롱 밑이나 벽장 등에서 발견한 몇 권 안되는 책을 나는 깡그리 외울 정도였다. 가정부 끼릴로브나가 기억하는 옛날 이야기도 재촉해서 죄다 들었다. 시골 아낙네들이 부르는 노래는 나를 우울하게 만들 뿐이었다. 아직 다 익지 않은 과실주를 입에 대보았지만 머리만 아팠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홧김에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는 것이 아닌가 더 두려웠다. 그런 경우를 나는 주변 우리 군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았다. 내 주위에는 친한 이웃이라곤 전혀 없었다. 두서너 명 고주망태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란 대부분 딸꾹질 아니면 한숨 뿐이었다.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견디기 쉬웠다.

내 집에서 한 4베르스따 가량 떨어진 곳에 C*** 백작 부인의 기름진 영지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관리인만 살고 있을 뿐, 백작 부인은 결혼한 첫 해에 단 한번 자기의 영지에 왔을 뿐이었다. 그때도 기껏 한 달 정도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은둔 생활에 들어간 지 두 번 째 봄이 돌아왔을 때, 백작 부인이 남편과 함께 이 영지에서 여름을 보내려고 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과연 그들 부부는 6월 초에 영지에 왔다.

부유한 이웃이 왔다는 것은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뉴스거리다. 근방의 지주들과 하인들은 그들이 오기 두 달 전부터 그리고 왔다간 지 3년 후까지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젊고 아름다운 여자 이웃이 왔다는 소식에 마음은 강하게 끌렸다. 나는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도착한 후 첫째 주일에 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또 가장 충성스러운 시종의 자격으로 그들 백작 부부와 사귀기 위해 점심 식사 후에 *** 마을로 떠났다.

하인은 나를 백작의 서재로 안내하고, 내가 왔다는 것을 주인에게 알리러 갔다. 널따란 서재의 장식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방의 벽에 책장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청동 흉상들이 놓여 있었다. 대리석 벽난로 위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방바닥에는 녹색 나사를 깔았고, 그 위에 양탄자를 덮었다. 오랫동안 초라한 시골집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잊고, 다른 사람의 호사스러운 살림살이도 보지 못했던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마치 장관에게 뭔가 청원을 드리러 온 시골뜨기가 초조하게 면담 시간을 기다리듯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백작을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32세쯤 되어 보이는 이목이 수려한 사나이가 방에 들어왔다. 백작은 거리낌이 없는, 친근한 태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애써 용기를 내어 자신의 소개를 하려 했으나 백작이 한 발 먼저 선수를 쳤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소탈하고 다정한 말투에 곧 나는 서먹서먹하고 위축된 마음을 풀 수 있었다.

내가 차츰 평상시의 태도를 회복하는 순간 느닷없이 백작 부인이 들어왔다. 나는 전보다 더 당황했다. 그녀는 정말 미인이었다. 백작은 나를 소개했다. 나는 태도가 굳어지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러나 태연해지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거북스러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백작 부부는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교제에 익숙해질 여유를 주려고 했다. 내가 마치 오래된 친한 이웃인양 허물없이, 까다로운 격식을 따지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면서 책이나 그림을 구경했다. 나는 그림에 대해서 문외한이었지만 그 중 한 폭의 그림이 내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스위스의 어떤 풍경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 그림에는 하나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잇달아 쏜 두 발의 탄알이 하나의 구멍을 꿰뚫은 흔적이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사격 솜씨로군요."

나는 백작을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백작은 대답했다.

"정말 기막힌 솜씨입니다. 그런데 당신도 사격을 잘하십니까?" 백작은 나에게 물었다.

"제법 쏩니다." 나는 드디어 이야기가 내 신변의 화제로 이어진 것을 기뻐하면서 대답했다.

"30걸음 떨어진 거리라면, 카드를 못 맞추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이건 손에 익은 권총일 경우입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백작부인이 관심을 보이며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당신은 30걸음 떨어진 곳에서 카드를 맞힐 수 있어요?"

"언젠가 시간이 나면 이 분과 한 번 시합을 해봐야겠소. 옛날에는 그래도 꽤 쏘는 솜씨였는데, 벌써 4년씩이나 권총을 손에 잡아보지 못했으니까..." 백작은 대답했다.

"아하!"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시다면 내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백작께서는 20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카드를 맞히지 못하실 겁니다. 권총은 날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제 경험으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연대에서는 저도 내로라는 명사수였습니다만, 언젠가 권총을 수리하러 보내는 바람에 꼬박 한 달 동안 총을 손에 쥐어보지 못했습니다. 백작, 그래서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권총을 찾은 후 처음으로 쏘아 보았더니 25걸음 떨어진 곳에 술병을 놓고도 네 번이나 맞추지 못했습니다. 우리 연대에 입이 걸쭉한 대위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우연히 그 모습을 보더니 저에게 그러더군요. '여보게, 아마 자네 손이 술병을 만지고 싶지 않은가 보이'라고 말입니다. 백작, 권총은 연습을 소홀히 하면 당장 팔이 둔해지는 겁니다. 제가 아는 가장 뛰어난 사수 한 사람은 매일, 적어도 점심 식사 전에 세 발은 반드시 쏘았습니다. 마치 보드카를 매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이것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백작 부부는 내가 드디어 활발하게 대화에 참여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뛰어난 사수의 솜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백작은 나에게 물었다.

"이를테면... 백작, 벽에 파리가 한 마리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죠. 백작 부인, 당신은 웃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다만, 이건 절대 꾸민 얘기가 아닙니다. 파리를 보면, 그는 '꾸지카, 권총!'하고 소리칩니다. 꾸지카가 총알을 넣은 권총을 가지고 오지요. 그러면 꽝! 하고 한 발 쏘아서 파리를 벽 속에 처박아 버립니다!"

"그거 대단하군요!" 백작은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은 뭐라고 합니까?"

"시리비오라고 하였습니다, 백작."

"시리비오!" 백작은 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부르짖었다.

"당신은 시리비오를 아십니까?"

"아다 뿐입니까, 백작. 나는 그와 친구입니다. 우리 연대에서는 모두들 그를 동료처럼 대우했죠. 그러나 그의 소식을 못 들은 지도 벌써 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작께서도 그를 알고 계십니까?"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혹시 당신에게 이야기를...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혹시 그가 당신에게 어떤 매우 신기한 사건을 이야기해주지 않던가요?"

"무도회에서 그가 어떤 무례한 자에게 뺨을 맞은 것 말씀이십니까, 백작?"

"그런데 그 사람이 혹시 그 무례한 자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던가요?"

"아니오, 백작, 그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 그럼 백작 혹시..."

나는 사건의 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전혀 몰랐습니다... 혹시 백작께서 그 당사자 아니십니까?"

"그 사람이 바로 납니다." 백작은 몹시 심란한 듯 대답했다.

"그리고 총알 구멍이 뚫린 이 그림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기념인 셈입니다..."

"여보, 제발..." 백작 부인이 말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그 얘기는 하지 말아요. 듣기만 해도 무서워요."

"아니야." 백작은 말했다.

"난 남김없이 죄다 말해야 하오. 이분은 내가 이분의 친구를 모욕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소. 그러니 시리비오가 어떻게 내게 복수했는지도 이분에게 알려드려야 하오."

백작은 내게 안락의자를 권했다. 나는 무척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나는 5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결혼 첫 달, 밀월을 난 이 마을에서 지냈습니다. 이 집에서 난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과 또 가장 쓰라린 추억을 경험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 부부는 같이 말을 타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탄 말이 어찌된 셈인지 고집을 부리며 말을 안 들었습니다. 아내는 놀라서 내게 말고삐를 넘겨주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나는 말을 타고 한 걸음 앞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뜰에 들어서자 여행용 마차가 한 대 서 있더군요. 하인들의 말로는 내 서재에 한 사나이가 앉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덮어놓고 나에게 볼일이 있다고만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난 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먼지투성이의 사나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여기 이 벽난로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내의 얼굴을 기억에서 떠올리려고 하면서 난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날 알아보겠소, 백작?'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시리비오!' 나는 외쳤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나요.'하고 말하더군요. '나에게는 아직 한 발이 남아 있소. 난 그 한 발을 쏘기 위해서 여기 온 거요. 준비는 됐겠지?' 그의 권총이 옆구리 호주머니에서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난 열 두 걸음을 쟀습니다. 그리고 저쪽 구석에 가 서서,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쏘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얼른 쏘지 않고 시간을 끌더군요. 불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촛불을 가져왔어요. 난 문을 잠그고 나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일렀습니다. 그리고, 빨리 쏘라고 다시 부탁했습니다."

"그는 권총을 꺼내 겨냥을 했습니다... 난 일 초 일 초를 속으로 셌습니다... 속으로 아내를 생각했죠... 무서운 일 분이 지났습니다! 시리비오는 손을 내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안하지만, 이 권총에 장전된 것은 버찌 씨가 아니야... 총알은 무거운 거야. 난 지금 결투가 아니고 살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난 무기도 갖지 않은 자를 쏘는 것은 익숙치 않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누가 먼저 쏠 것인지 제비를 뽑읍시다.'"

"난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난 그때 싫다고 거절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다른 권총에 총알을 재고 제비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 내가 쏘아 뚫은 그 군모에 집어넣었습니다. 이번에도 또 내가 첫번을 뽑았습니다. '백작, 당신은 악마처럼 운이 좋군.' 그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하더군요. 나는 그의 그 미소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가 나에게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지 난 전혀 모르겠어요... 어쨌든 난 다시 쏘았습니다. 그리고, 저 그림을 맞추었던 겁니다."

백작은 총알이 뚫고 지나간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얼굴은 불처럼 타는 것 같았다. 백작 부인은 손수건을 비틀어 쥐고 있었다. 그 얼굴은 손수건보다 더 창백했다. 난 감탄의 외침을 참을 수 없었다.

"난 총을 쏘았습니다." 백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총알은 빗나갔습니다. 시리비오는... 그 순간 그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습니다. 시리비오는 나를 겨냥했습니다. 그때 별안간 문이 열리고 마샤가 뛰어들어와 비명을 지르며 내 목에 매달리는 거에요. 아내가 나타나는 바람에 나는 완전히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여보!'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장난을 치는 것일 뿐이오. 그렇게 놀라다니! 어서 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와요, 옛날 친구를 당신에게 소개할 테니.' "

"마샤는 그래도 반신반의하더군요. '남편의 얘기가 사실입니까?' 아내는 험악한 표정을 한 시리비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두 분이 장난을 치고 계신다는 게 사실이에요?' '바깥 양반은 늘 장난을 칩니다, 백작부인.' 시리비오는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한 번은 장난 삼아 내 따귀를 때리고, 또 장난 삼아 이 군모를 쏘아 맞추었고, 지금은 장난 삼아 날 빗맞췄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장난을 치고 싶군요...' 이렇게 말하고 그는 나를 겨냥했습니다... 아내 앞에서요! 마샤는 그의 발 밑에 몸을 던졌습니다. '일어나, 마샤, 부끄럽지도 않아?' 나는 자제심을 잃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 '그리고, 여보게, 가엾은 여자를 조롱하는 짓은 그만두지 못하겠나? 대관절 쏠 건가, 안 쏠 건가?' '아니, 안 쏘겠어' 시리비오는 대답했습니다. '난 만족했어. 난 당신의 당황한 모습, 겁을 집어먹은 것을 보았어. 난 당신에게 날 쏘게 했지. 난 만족해. 당신은 아마 평생 날 잊지 못할 거야. 난 당신을 당신의 양심에 맡기겠어' 그는 말을 남기고 나가려다 문득 문에서 걸음을 멈추고 내가 쏘아 뚫은 그림을 향해 거의 겨누지도 않고 한 방 쏘더군요. 그리고 나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하인들은 겁에 질려 감히 그를 가로막지 못하고 멍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는 현관을 나가자 마부를 불렀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떠난 다음이었습니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이리하여 나는 언젠가 나를 그렇게도 놀라게 만들었던 어떤 사건의 결말을 마저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그 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소문에 의하면 시리비오는 알렉산더 입실란티(*)의 반란 때 그리스의 한 부대를 지휘하다가 스크랴누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끝>



[*알렉산더 입실란티(Alexander Ypsilanti, 1792-1828) : 그리스의 독립운동 투사. 그리스인이면서 러시아의 육군 소장이기도 했다. 1820년 독립운동 결사(Hetaerea 그리스 신성대)의 수령으로 추대되어 이듬해 몰다비아에 침입, 터키군에게 패하여 오스트리아로 도망갔다가 비엔나에서 객사하였다.

**스크랴누이 : 베사라비아의 소도시로 루마니아의 국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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