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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밴 윙클 / 워싱턴 어빙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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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밴 윙클 / 워싱턴 어빙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캐츠킬 산맥을 잊지 못할 것이다. 북미주 동해안에 있는 대 아파라치아 산맥의 갈라지는 기점에서 산봉우리들이 강의 저 멀리 서쪽으로 솟아올라 마치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굽어보고 있는 듯 하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할 때마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때에 따라 이 산들의 꿈 같은 빛깔과 형태는 조금씩 바뀌곤 한다.

그래서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이 일대 여인들은 이 산을 일종의 기상 관측 표지처럼 여기고 있다. 맑게 개인 하늘이 저물어 오면 산은 보라빛을 띠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에 불쑥 윤곽을 드러낸다. 다른 곳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때에도 이 산들의 봉우리만은 잿빛 두건을 뒤집어 쓴 듯 안개가 자욱하여 저물어 가는 저녁 해의 마지막 빛을 반사하고 눈부신 왕관처럼 붉게 빛나곤 했다.

환상 같은 이 산의 기슭, 산의 푸른 빛이 좀더 가까워지면서 생생한 초록빛으로 옅어지는 근처에 아련하게 연기를 피워 올리는 마을이 있다. 그 판자 지붕이 수풀 속에 점점이 보이는 것을 혹시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봤던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역사가 퍽 오래된 작은 마을로 이 지방을 처음 개척할 무렵 홀랜드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다. 바로 피터 스타입샌트(바라건대 하늘나라에서 편히 잠드소서!)가 이 땅을 다스리던 초기의 일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곳에는 최초의 이주민들 집이 몇 채 남아있었다. 그 집들은 홀랜드에서 갖고 온 자그마한 노란 벽돌로 지어졌고, 네모진 창들이 달렸으며 집 정면엔 바람막이, 지붕에는 바람개비가 달려 있었다.

이 마을의 지금 말한 이러한 집에(실은 꽤 헐고 비바람에 부숴져 있었지만) 립 밴 윙클이라는 아주 정직하고 착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피터 스타입샌트 시절에 용감한 군인으로서 이름을 떨치고 크리스티나 요새 공격에도 참가한 밴 윙클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러나 립 밴 윙클 본인은 조상들의 군인다운 성질은 조금도 이어받지 않았다. 아주 정직하고 마음이 착했으며 이웃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마누라가 하라는대로 하면서도 언제나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순하고 얌전하니까 누구한테서나 호감을 샀지만 그것은 집안에서 엄처시하에 시달린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시끄러운 여편네에게 바가지를 긁히우는 사람일수록 집 밖에 나가서 사람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도록 굽신굽신하는 법이니까.

확실히 이런 남자들의 성품은 집안에서 마구 들볶인 결과로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간 쇠처럼 물렁물렁해지게 돼있다. 마누라의 잔소리는 꾹 참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어떤 설교보다 더 효과가 있다. 때문에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도 때로운 고마운 존재로,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립 밴 윙클도 상당히 운이 좋은 사나이였을지도 모른다.

또 그는 마을의 아낙네들 사이에선 퍽 인기가 좋았다. 여자란 모두 그런 것이지만 마을의 아낙네들은 이들의 부부 싸움이 벌어질 때는 언제나 립의 편이었다. 저녁 때 여자들이 모여 그 일을 놓고 지껄일 때면 으레 '밴 윙클의 마누라가 나쁘다'고 말했다. 마을의 아이들도 립이 나타나면 좋아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려 함께 놀아주고 장난감을 만들어 주며 연 띄우기나 구슬놀이를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유령 이야기, 마녀 이야기, 인디인 이야기처럼 긴 이야기도 곧잘 들려주곤 했다.

그가 마을을 거닐 때면 언제나 많은 조무래기들이 그의 둘레를 둘러싸고 옷소매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잔등에 기어오르거나 갖가지 장난을 하지만 무슨 짓을 당하든 그는 조금도 성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근방에서는 그에게 짖어대는 개는 한 마리도 없었다.

립의 한 가지 나쁜 점은 도대체 돈이 될만한 일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게으르다거나 참을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타타르 사람의 길고 무거운 창 같은 낛시대를 쥐고 축축한 바위 위에 앉아, 물고기 한 마리도 물어주지 않아도 군소리 한 마디 없이 하루종일 낛시질을 하는, 그리고 불과 몇 마리의 다람쥐나 들비둘기를 잡으려고 총을 메고 몇 시간이건 숲과 늪 사이를 돌아다니며 산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그런 사나이였으니까.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이웃 사람의 부탁이라면 거절하는 적이 없고, 옥수수 껍질 벗기기, 돌담 쌓기,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들일에는 발벗고 나서는 그였다. 또 마을의 아낙네들은 곧잘 그에게 심부름을 해달라고 했고, 자상하지 못한 남편들이 잘 해주지 않는 자자분한 일을 부탁하곤 했다. 말하자면 립은 자기 일 이외 남의 일이라면 즐겨 하는 것이지만 자기 가정이나 밭일이라면 왜 그런지 잘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자기 밭일은 쓸데없는 수고라고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이건 온 나라 안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밭, 거기서는 아무것도 잘 되지 않고 뭣을 하더라도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울타리는 언제나 무너져 소가 도망쳐 양배추 밭을 짓밟아 놓기 일쑤였다. 같은 잡초라도 딴 밭보다 일찍이 무성했다. 또 밭에서 무슨 일이라도 할라치면 꼭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려받은 토지는 그가 맡고부터 1에이커 또 1에이커 이런 식으로 야금야금 줄어들어 겨우 약간의 옥수수 밭과 감자 밭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밭은 그 근방에서 가장 가꾸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아이들도 마치 고아들처럼 누더기를 두르고 제멋대로 뛰어다녔다. 아들 립은 꼭 애비를 닮은 조무래기였지만 애비의 헌 옷뿐만 아니라 그 버릇까지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았다. 이 소년은 아버지가 입던 낡은 반바지를 걸치고 망아지처럼 언제나 어머니 꽁무니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마치 화려한 옷차림을 한 귀부인이 날씨가 좋지 않은 날 치마를 쳐들 듯 언제나 한 손으로 그 바지를 한사코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립 밴 윙클은 흔히 세상에서 보는, 행복하고 어수룩하고 늘어지기 짝이 없는 성질의 사람이었다. 세상을 진득하게 생각하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고 그저 손쉽게 손에 닿는 것이나 얻어먹는, 말하자면 천 냥을 위해 일하기보다 한 푼으로 굶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내버려 두면 아무 불평 없이 휘파람을 불면서 평생을 살았을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누라는 끊임없이 그의 귀에다 바짝 대고 그가 게으름뱅이요, 실속 없고 이러다가는 집안 망칠 사람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아침, 낮, 저녁 할 것 없이 마누라의 입은 쉬지 않고 남편이 뭐라고 한마디라도 하면 다짜고짜 아우성을 치기 마련이었다. 립으로서는 이런 잔소리에 응수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수없이 되풀이하는 바람에 아예 습관이 되어버린 그 방법,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눈을 치켜 뜰 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한 번 마누라의 일제 사격이 퍼부어진다. 할 수 없이 그는 퇴각하여 집을 뛰쳐 나간다. 마누라에게 꾸중만 듣고 있는 사나이로서는 사실 그밖에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집안에서 립의 편은 기르는 개 울프 정도였다. 그러나 울프 또한 그의 주인처럼 항상 야단만 맞았다. 까다로운 밴 윙클 가의 부인은 립과 개를 게으름뱅이 친구로 여기고 립이 건들건들 돌아다니는 것도 이 개의 탓이라는듯 사나운 눈초리로 울프를 노려보곤 했으니까.

사실 뭐로 보나 이 울프는 훌륭한 견공 정신의 소유자로서, 숲을 뛰어다니는 다른 어떤 사냥개에 지지 않을 정도로 용감했다. 그러나 정신없이 고함치는 사나운 여자 앞에서는 아무리 용감한 사냥개라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집안에 들어오면 이내 울프는 맥없이 꼬리를 땅에 늘어뜨리거나 뒷발 사이에 집어넣고 힐끗힐끗 밴 윙클 가의 부인을 곁눈질하면서 슬금슬금 기어다녔다. 그러다가 빗자루나 주걱이라도 번쩍 치켜드는 기미가 보이면 깨갱거리며 걸음아 날 살려라며 문께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립 밴 윙클과 살아가면서 마누라의 립에 대한 태도는 더욱 심해졌다. 무뚝뚝하고 화를 잘 내는 성질은 나이를 먹는다고 순해지고 잔잔해지는 것이 아니다. 꽥꽥 소리를 지르는 입을 자주 놀릴수록 그 입은 점점 더 잘 드는 칼날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집에서 쫓겨나온 립은 언제나 마을의 만물박사와 게으름뱅이들이 모여드는 데로 가서 마음을 위로하곤 했다.

조지3세 폐하(영국 국왕. 재위 1760-1820년. 이 왕의 재위 시절에 미국이 독립했다)의 붉은 얼굴 초상이 간판으로 걸려 있는 조그마한 여인숙 앞 벤치에 이들은 언제나 모여 앉아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마을의 소문, 졸리는 이야기를 끝없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기나긴 여름날을 보내는 것이다. 지나던 나그네가 묵은 신문 한 장이라도 주고 가는 날이면 그들 간에 꽤나 똑똑한 듯한 토론이 벌어진다. 그건 어느 정치가나 돈을 내고서라도 들어 둘만한 것이었으리라.

데릭 밴 브멜이라는 학교 선생이 신문 기사를 졸리운 목소리로 읽으면 모두들 장엄한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이 선생으로 말하면 학문이 있는, 까다롭고 키가 작은 사나이였고 사전 속의 어떤 어려운 낱말에 부딪혀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들은 몇 달 전에 일어난 세상의 사건들을 똑똑한 체하며 토론하는 것이었다.

토론의 결론은 마을의 어른이며 여인숙 주인인 니콜라스 베다의 생각에 따르기 마련이었다. 이 노인네는 아침부터 밤까지 여인숙 앞에 자리를 잡고는 몸을 움직인다는 게 다만 볕을 피해 커다란 나무 그늘을 좇아 위치를 바꾸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이 노인의 동작을 보면서 마치 해시계처럼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체 이 노인네는 여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줄곧 파이프를 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노인네의 졸개들(훌륭한 사람들에겐 누구에게나 졸개들이 있기 마련이지만)은 그의 마음을 알아 채고 그의 의견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읽은 것이나 이야기한 것이 마땅치 않을 때 노인은 연거푸 파이프를 피며 못 견디겠다는듯 뻐끔뻐끔 연기를 뿜어댔다. 반면 마음에 드는 일이면 파이프의 담배 연기를 느긋하게 빨아들였다간 조그만 구름처럼 불어낸다. 때로는 파이프를 입에서 빼고 향기로운 연기로 코 둘레를 가리고는 "암, 그렇구 말구"라는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립이 이들 속에 한 몫 끼어 이제 좀 쉬어야지 하고 있는 곳까지 수다스러운 마누라가 쫓아오곤 했다. 그렇게 되면 동료들은 그를 동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자리에서 쫓아내야 했다. 립의 마누라는 이 할 일 없는 모임에 돌연 뛰어들어 누구라 할 것 없이 마구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그 훌륭한 니콜라스 베다조차 이 사나운 여편네가 퍼붓는 험담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왜 우리집 주인을 꾀어 게으르게 하는 거예요?"라며 마누라는 무턱대고 닦아 세웠다.

불쌍한 립은 마침내 기운이 다 빠지고 말았다. 밭일이나 마누라의 호통을 피하기 위해 엽총을 들고 숲을 왔다갔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숲속에서 나무 등걸에 앉아 주머니에 들어있는 음식을 꺼내서는 강아지 울프와 함께 먹었다. 언제나 같이 마누라한테 구박을 받고 있는 이 울프가 불쌍해 견딜 수 없었다.

"불쌍한 울프, 너는 항상 우리 마누라한테 개 취급을 당하지. 그러나 걱정 말아. 내가 살아 있는 한 네 편을 드는 친구는 꼭 있을 테니 말이야."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러면 울프는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운 듯 주인의 얼굴을 쳐다본다. 비록 개일지라도 뭔가 생각이 있었다면 울프 역시 마음 속으로 주인을 가엽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느 맑은 가을 날, 여느 때처럼 긴 산책을 나간 립은 캐츠킬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제일 좋아하는 다람쥐 잡기를 하고 있었지만, 원체 사방이 조용했기 때문에 총 소리가 이 산에 메아리 쳐 울리고 다시 되돌아와 메아리 칠 정도였다. 그날 오후 늦게 그는 숨이 차고 아주 지쳐서 절벽 위에 푸른 풀로 덮인 언덕에 벌렁 누웠다.

나무 사이 사이로 몇 마일에 걸쳐 무성한 숲이 저만큼 아래로 보였다. 그 아래 멀리 넓은 허드슨 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게 보였다. 강은 자줏빛 구름을 비치고 거울과 같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배의 돛이 여기저기 보였지만 그것도 나중에는 푸른 산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또 한 쪽으로는 나무들이 뒤섞여 황량하고 무성한 깊은 골짜기가 내려다 보였다. 골짜기 한쪽은 비탈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 조각으로 메워져 있고 석양 빛도 거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잠시 립은 이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옆으로 누워 있었다. 점점 해가 저물어 산들이 길고 푸른 그늘을 골짜기에 던지기 시작했다. 마을에 닿기 전에 캄캄해질 것 같고 또 마누라한테 된 바람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립은 저절로 긴 한숨이 새나왔다.

그가 막 산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어딘가 멀리서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산 위를 한 바퀴 돌고 가는 까마귀 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고 다시 내려가려 하는데 역시 똑같이 부르는 소리가 조용한 저녁 공기를 울렸다. "립 밴 윙클! 립 밴 윙클!"

울프는 등을 세우고 낮게 짖으면서 바짝 그에게 붙어서 무서운 듯 아래 골짜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립도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뭔가 섬찟한 기분으로 골짜기 아래를 살펴 보려니까 이상한 사람 모습이 무거워 보이는 물건을 어깨에 짊어지고 천천히 바위를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쓸쓸하고 여간해서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는 곳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자 립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 이 근방 사람이 도움을 받고자 부르는가 싶어 그는 도와주리라 마음 먹고 급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 보니 생전 보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그는 다시 놀랐다. 그 사람은 키가 작고 단단한 몸집으로 머리털이 헝클어지고 흰 털이 섞인 턱수염을 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옛날 홀랜드 식으로 허리 둘레를 띠로 묶고 헝겊으로 된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오래 입어서 낡은 반바지의 겉은 품이 너무 넓고 그 양쪽에 장식 단추가 달려 있으며 무릎께는 나비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나이는 어깨에 단단해 보이는 작은 통을 메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술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립을 향해 가까이 와 짐을 좀 받아달라는 몸짓을 했다. 립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약간 겁도 났지만 여느 때처럼 선뜻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교대로 짐을 운반하면서 시냇물이 말라 버린 골짜기 바닥 좁은 계곡을 함께 기어 올라갔다.

함께 올라가면서 립은 멀리서 천둥 같은 소리가 길게 나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는 그들이 올라 가는 울퉁불퉁한 길의 앞쪽, 높은 바위 사이의 틈같이 생긴 깊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립은 잠깐 멈추었지만, 산 위에서 흔히 있는 천둥과 함께 오는 소낙비려니 생각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골짜기를 빠져나가자 땅이 푹 들어가 오목한 지대에 이르렀다. 그 곳은 칼로 벤 듯한 낭떠러지로 둘러싸이고 다시 빙 둘러 빽빽한 나무들이 가지를 뻗치고 있어서 푸른 하늘과 빛나는 저녁 구름이 약간 엿보일 뿐이었다. 그 때까지 립과 그 일행은 줄곧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다. 립으로서는 이렇게 험한 산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따위 술통을 메고 올라가는지 이상해 못 견딜 지경이었지만 처음 보는 이 사나이의 거동이 어쩐지 의아해 선뜻 말을 붙이기가 무서웠다.

그런데 그 둥근 오목 지대에 들어가 보니 이번에는 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광경이 나타났다. 한 복판 평평한 곳에 괴상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모여 나인핀즈(병 모양 기둥 아홉 개를 세우고 공을 던져 쓰러뜨리는, 볼링과 비슷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외국인처럼 기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브렛, 어떤 사람은 자킨 같은 옛날식의 몸에 착 달라붙는 저고리를 입고 허리 띠에 긴 칼을 달고 아주 큰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 생김도 묘했다. 어떤 사람은 수북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옆으로 퍼진 얼굴에 눈이 돼지처럼 가늘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얼굴에 코 뿐인 것 같고 조그맣고 빨간 수탉 꽁지를 꽂은 하얀 뾰족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들 턱수염 모양과 색깔이 제각각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건장한 노인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끈으로 묶은 다브렛을 입고, 폭이 넓은 띠를 둘렀으며 단검을 찼다. 또 깃을 단 산고 모자를 쓰고, 길고 빨간 양말에 꽃무늬가 달리고 뒤꿈치가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립은 마을의 목사 도미니크 반 샤이크 씨 댁 사랑방에 걸려 있는 플랑드르 풍 그림 속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그림은 이 지방이 처음 개척될 무렵 홀랜드에서 건너 온 것이었다.

립이 특히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이들이 모두 나인핀즈 놀이를 하면서도 아주 무뚝뚝한 얼굴로 시무룩하게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노는 사람들을 본 일이 없었다. 공이 뒹구는 소리 외에 이 자리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다만 공이 뒹굴 때 천둥이 쿠르릉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메아리 치는 것이었다.

립 일행이 가까이 가자 모두들 갑자기 놀이를 그만두고 마치 동상같이 언짢은 멍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립은 간이 콩알만 해져서 무릎이 떨렸다. 그의 길 동무는 통의 술을 커다란 병 속에 붓고 모두에게 술을 따르도록 립에게 눈짓했다. 립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시키는대로 했다. 그들은 잠자코 술을 들이키곤 다시 놀이를 시작했다.

립의 무섭고 불안한 기분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그는 술을 슬쩍 입에 대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맛이야말로 아주 희한하게 좋은 홀랜드 산 진(Gin) 그대로였다. 태어날 때부터 술을 좋아했던 립은 금방 다시 마시고 싶었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또 한 모금을 마시고 싶어 연신 몇 번이고 술병 곁에 가는 동안에 마침내 눈이 빙빙 돌고 취해 오자 머리가 수그려지면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눈을 뜨자 립은 처음 골짜기에서 노인을 발견한 그 푸른 언덕에 누워 있었다. 그는 눈을 비볐다. 어느새 눈부시게 해가 비치는 아침 아닌가. 작은 새가 숲 속을 쫑쫑 날면서 지저귀고 있었다. 매는 하늘 높이 맴돌며 산뜻한 산의 미풍을 안고 날아갔다. "설마, 밤새 여기서 잔 것은 아니겠지." 립은 생각했다. 그는 잠들기 전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술통을 진 낯선 노인네가 오고, 산 골짜기를 걸었다. 바위에 둘러 싸인 자연 깊숙한 곳, 나인핀즈 놀이를 하던 그 슬픈듯한 사람들, 그 술병...

"오, 그 술! 그 몹쓸 술병! 집의 마누라한테 뭐라고 말하면 좋담." 그는 자기 총이 어찌 됐나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번쩍번쩍 잘 기름칠이 된 자기 엽총 대신 낡은 화승총이 옆에 굴러다닐 뿐이었다. 총신은 녹슬고 개머리판이 풀어지고 나무에는 벌레가 좀을 먹었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 술꾼들이 장난을 하느라고 그를 취하게 만들어서 총을 훔친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 개 울프도 보이지 않았다. 다람쥐 아니면 산 메추라기라도 쫓아서 멀리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립은 휘파람을 불며 "울프! 울프!" 불러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메아리가 그의 휘파람과 외치는 소리를 산울림으로 돌려줄 뿐 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립은 엊저녁 사람들이 놀던 곳에 다시 한 번 가서 누구든 만나면 개와 총을 돌려 달라고 하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막상 걸으려고 일어서 보니까 어쩐지 몸의 마디마디가 뻑적지근하고 여느 때처럼 힘이 없었다. "산에서 자는 것은 아무래도 내 몸에 맞지 않는군. 이렇게 엉뚱한 짓을 하고 류마치스라도 걸려 들어 눕게 된다면 그 때야말로 마누라한테 단단히 혼날 거야." 립은 생각했다.

그는 간신히 골짜기에 내려가 전날 밤 길 동무와 함께 올라갔던 도랑을 찾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제 시냇물은 거품을 일으키며 흘러 바위에서 바위로 물을 튕기고 있었다. 촬촬대는 물소리가 골짜기 가득히 울렸다. 그러나 그는 떡갈나무, 시누대, 물싸리 등 갖가지 나무 수풀을 빠져나가고, 나무에서 나무로 그물처럼 얽혀있는 들포도 넝쿨에 발이 걸리기도 하면서 겨우 시냇물 끝까지 기어 올라갔다.

마침내 그는 골짜기가 낭떠러지 사이를 빠져서 둥근 오목지로 된 근처까지 찾아 갔다. 그러나 어제 그 곳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바위가 높은 벽처럼 솟아있고 그 절벽 사이로 물살이 폭포처럼 소리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는 넓고 깊은 연못으로, 주위를 둘러싼 무성한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어두침침했다.

오자 립은 할 수 없이 발을 멈추었다. 그는 또 휘파람을 불고 개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하는 것은 양지 바른 낭떠러지에 쌓인 마른 나무 위를 높이 나르는 까마귀의 까 까 까악 하는 소리 뿐이었다. 그 까마귀들은 이만큼 높으면 안심이라는 듯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불쌍한 립의 꼴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침 나절은 벌써 다 가 버렸다. 아침도 먹지 않아서 립은 배가 고팠다. 개와 총을 단념하기가 아까웠고 마누라를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나 이 산중에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녹슨 엽총을 어깨에 메고 쓸쓸히 집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 몇 사람을 만났지만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이 근방 사람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도 지금까지 립이 보던 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모두 다 약속이나 한 듯 놀란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본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턱을 만져보는 것이었다. 하도 모두 그러기에 립도 자기 턱을 만져보니 이것이 웬일일까. 그의 턱수염이 한자나 길게 자라 있지 않은가?

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떼를 지어 그의 뒤를 따라 오면서 떠들어대고 그의 희고 성성한 턱수염을 손가락질하였다.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개들이 짖어댔지만 어느 한 마리 전에 보던 개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도 그 모습이 아주 달라졌다. 그 전보다 커지고 사람들도 많아졌다. 여태껏 보지 못한 집들이 늘어서 있고 그 전에 자주 찾아 가던 집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문에 써 붙인 이름도 모두 모를 이름이며 창에서 내다 보는 사람의 얼굴도 모를 얼굴들 뿐이었다. 모두가 새로웠다. 립은 어쩐지 걱정이 되었다. 자기만이 아니라 주위의 세계까지 모두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는 분명히 어제 나간 고향 마을이다. 저기 캐츠킬 산맥이 솟아 있다. 앞에는 은빛 허드슨 강이 흐른다. 어느 산이건 어느 골짜기건 모두 옛날 그대로였다. 립은 어리둥절했다. '엊저녁 술이 내 머리를 흐트러 놓았다'고 립은 생각했다.

립은 간신히 자기 집을 찾아갔지만 마누라의 앙칼진 소리가 금세 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집은 부숴지고 지붕은 헐고 창도 부숴졌으며 대문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울프를 닮은, 굶어서 다 죽어가는 개 한 마리가 집 주위를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립이 "울프!"하고 불렀으나 강아지는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이건 너무한다... '강아지까지 나를 잊어버리다니!' 립은 중얼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누라는 언제나 집안 만큼은 알뜰하게 꾸며 놓았다. 그런데 지금 집은 텅텅 비어있고 어수선한 품이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았다. 너무 황량해서 립은 그만 마누라를 두려워하는 마음조차 잊고 큰 소리로 마누라와 아이들을 불러보았다. 쓸쓸한 방들로 일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곧 다시 조용해졌다.

립은 급히 밖으로 나와 전에 자주 다니던 마을의 여인숙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여인숙도 없었다. 그 대신 커다란 목조 건물이 서 있고 큰 창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몇 개는 부숴지기도 하고 헌 모자와 여자 속치마 같은 것이 누덕누덕 붙어 있었다. 대문에는 '조나단 둘리틀 경영, 유니온호텔'이라고 페인트로 써 있었다.

조용한 홀랜드 식 그 여인숙을 뒤덮고 있던 커다란 나무 대신 지금은 길고 밋밋한 장대가 서 있고, 그 꼭대기에는 뭔지 빨간 나이트캡 같은 것이 씌워져 거기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었다. 그 깃발에는 별과 줄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여하튼 모조리 변해서 전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인숙 간판에는 전처럼 조지 폐하의 붉은 얼굴이 보였다.

그 아래에서 그는 몇 번이나 한가로이 파이프를 빨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간판 그림조차 괴상하게 그 모습이 달라졌다. 빨간 웃옷은 노란 실로 누빈 푸른 웃옷으로 바뀌었고, 손에는 홀 대신 칼을 쥐고 있으며 머리엔 삼각모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글씨로 '워싱턴 장군'이라고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대문에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이 모여 있기는 했지만 립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성질까지 달라진 것 같았다. 언제나 멍하게 졸리는 듯한 그런 늘어진 데가 없고 초조하게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그 넓적한 얼굴에 이중턱을 하고 있던 만물박사 니콜라스 베다가 멋진 긴 파이프를 물고 쓸데없는 소리 대신 담배 연기라도 자욱하게 뿜어내지나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학교 선생인 밴 브멜이 묵은 신문 기사를 조금씩 읽어 들려주지나 않을까 하고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 대신 신경적으로 보이는 여윈 사나이가 주머니에 비라를 잔뜩 넣고 격한 어조로 시민의 권리, 선거, 국회의원, 자유, 뱅커스힐(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전쟁터), 1776년의 영웅 등 여러 가지 말들을 섞어 연설을 하고 있었지만 넋잃은 밴 윙클에게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희고 긴 턱수염을 기르고, 녹슨 엽총을 들고, 보지도 못하던 옷을 입었으며 그 뒤에 여자와 아이들이 줄지어 따라오는 립의 모습은 마침내 여인숙에 있던 이들 정치가들의 주의를 끌게 됐다. 그들은 립의 주위에 모여들어 이상한 듯 머리 끝에서부터 다리 끝까지 훑어보았다. 연설가는 립의 곁에 다가와 그를 조금 옆으로 끌어내고는 "당신은 어느 당에다 투표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립은 그저 멍청한 얼굴로 눈만 치켜뜰 뿐이었다.

그러자 또 하나 약삭빠른 작은 사나이가 그의 팔을 잡아 당기고 발돋음하면서 그의 귀에다 속삭였다. "당신은 연방당입니까, 아니면 민주공화당입니까?" 립은 이 질문에도 역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제 딴에 아는 체하는 얼굴을 하고 삼각모를 쓴 노인이 사람들을 좌우로 밀어 내고 한 팔은 허리에 또 한 팔은 지팡이에 올려놓고 그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초리와 뾰족한 모자로 마치 그의 마음 속을 꿰뚫기라도 하려는 듯 엄숙한 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당신은 총을 메고 여러 사람을 뒤에 이끌고 이런 선거장에 나왔소? 이 마을에서 무슨 소동이라도 일으킬 작정이오?" 립은 얼떨결에 외쳤다. "천만에요, 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무 죄 없는 사람,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민입니다. 오, 임금님 만세!"

그러자 옆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소리쳤다. "왕당파다, 왕당파! 스파이다! 감옥에서 도망쳐 온 놈이야! 때려라! 죽여라!"

이 야단을 진정시키기 위해 삼각모의 의젓하게 굴던 노인도 한참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먼저보다 더 의젓한 표정으로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는 이 죄인 립을 향해서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여기 왔소? 도대체 누구를 찾고 있는 거요?" 가련한 립은 자기는 아무 것도 나쁜 짓을 할 생각이 없고 다만 언제나 여인숙에 모이던 이웃 사람들을 찾으러 왔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건 누구를 말하는 거요? 이름을 대 보시오."

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어 보았다. "니콜라스 베다는 어디 있습니까?"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지만 곧 한 노인이 가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콜라스 베다라고? 그 사람은 벌써 죽은 지 십팔년이나 되지. 교회의 묘지에 나무 비석이 세워져 거기에 그 사람의 일이면 뭐든지 써 있었지만 그것도 벌써 썩어 없어졌어."

"그러면 브롬 다챠는 어디 있습니까?"

"아, 그 사람은 전쟁이 시작될 무렵 군사로 나갔지. 스토니 포인트의 공격 때 죽었다는 사람도 있고... 앤소니 노즈 고지 근처에서 폭풍을 만나 익사했다는 사람도 있소. 난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학교 선생인 밴 브멜씨는 어디 있지요?"

"그 사람도 전쟁에 나갔지만 독립군 장군이 됐고, 지금은 국회의원이야."

자기의 가정과 벗들이 이렇게 변해 버리고 이 세계에 자기 혼자 단 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을 안 립은 맥이 탁 풀렸다. 뭣을 물어봐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 전쟁과 국회와 스토니 포인트 같은 도무지 모를 말만 들려와 립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 이상 친구에 대해 물을 용기조차 잃고 속이 상한 김에 외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립 밴 윙클을 모릅니까?"

"립 밴 윙클!" 두세 사람이 소리쳤다. "알고 말고! 저기 저 나무에 기대어 있는 작자가 립 밴 윙클이야."

립 밴 윙클이 그 쪽으로 눈을 돌려 보니 꼭 산으로 올라갈 때의 자기 모습 그대로 한 사나이가 보였다. 보아하니 자기와 똑 같은 누더기 옷을 입고 자기와 똑같이 털털한 것 같았다. 가엾게도 립은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내가 내 자신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어안이 벙벙한데, 삼각모의 노인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며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립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딴 사람입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 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저 누군가가 내 몸을 대신했습니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나는 바로 나 자신이었는데 산에서 실컷 잠자는 동안 그들이 내 총을 바꿔치고 모두 온통 뒤바뀌어서 이 나까지도 바뀌었습니다. 내 이름을 뭐라고 하는지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듯 눈짓을 하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늙은 미치광이의 총을 빼앗아 위험한 짓을 못하게 하자고 소근댔다. 이 말을 듣자 삼각모의 의젓하게 굴던 노인은 살짝 뒤로 물러나 몸을 감추었다. 바로 그 때였다.

한 젊은 여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이 턱수염이 센 늙은이를 보려고 앞으로 나왔다. 이 여인은 통통하게 살찐 사내 아이를 팔에 안고 있었는데 아이는 이 늙은이의 모습에 놀라 앙하고 울어댔다. "립, 조용히 해. 바보처럼 우는 게 아니야. 저 할아버진 나쁜 짓은 않으니까"라고 여인은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 또 그 어머니의 거동, 그리고 또 그 말투, 그런 것들이 립에게 뭔가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부인, 당신의 이름이 뭐요?" 립은 물었다.

"주디스 가드너예요." "그럼 당신 아버님의 이름은?"

"불쌍한 제 아버지는 립 밴 윙클이라고 했는데, 총을 메고 나가서 벌써 20년 동안 어떻게 되셨는지 한 번도 소식이 없답니다. 개만이 돌아왔어요. 총으로 자살을 하셨는지 토인에게 잡혀가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나는 그 때 아직 어린아이였어요."

립은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는 약간 더듬으며 물었다. "그럼 당신 모친은 어디 계시오?"

"어머니는 요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뉴잉글랜드 행상에게 화를 내시면서 발끈하는 통에 혈관이 터지셨지요."

그 말을 듣고 립은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정직한 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딸과 아이를 두 팔에 안았다.

"내가 네 애비다." 그는 외쳤다. "예전에 젊은 립 밴 윙클이었지만 지금은 늙은 립 밴 윙클! 누구 혹시 이 립 밴 윙클을 아시는 분 없소?"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사람들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손을 이마에 대고 잠시 립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외쳤다. "어쩜 정말 립 밴 윙클이야. 정말 그렇군! 참 잘 돌아오셨소. 글쎄 20년 동안 어딜 갔었소?"

립의 얘기는 금세 끝났다. 20년이 그에게는 단지 하룻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중에는 서로 눈짓을 하며 그런 당치도 않은 일이 있으랴 하고 혀를 내미는 자도 있었다. 삼각모의 비싸게 굴던 노인은 놀라움이 가시자 다시 곁에 와서 입을 비틀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사람들도 따라서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천천히 이 쪽으로 다가온 피터 반다이크 노인이 자신의 의견을 말해서 자리를 가라앉혔다. 이 노인은 이 식민지에서 가장 오랜 옛날의 역사를 썼던, 그와 이름이 똑 같은 역사가의 후손이었다. 피터 노인은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으로서 일대의 희한한 사건과 전해오는 얘기를 모두 알고 있었다.

노인은 립의 일을 모두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이야기를 분명히 해주었다. 그는, 이것은 자기 선조 역사가로부터 전해온 것으로 틀림없이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캐츠킬 산맥에는 옛날부터 기묘한 자들이 나타난다. 허드슨 강과 이 지방을 처음 발견한 헨드릭 허드슨이 자신이 타고 왔던 반월호 선원들과 함께 20년마다 나타나서 산 속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망을 본다. 이처럼 그는 자기 모험의 자취를 다시 찾아와서 자기 이름이 붙은 허드슨 강과 허드슨 시를 지켜볼 수 있도록 신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노인의 아버지 역시 이들 허드슨 일행이 옛날 홀랜드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산의 오목한 곳에서 나인핀즈를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고 노인 자신도 어느 여름날 오후 마치 먼 데서 천둥치는 것 같이 그들이 공을 굴리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자 모였던 사람들은 다시 흩어져 더 중요한 선거 문제로 돌아갔다. 립의 딸은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가 함께 살게 되었다. 이 딸은 살림살이가 잘 정돈된 집에 살고 있었다. 그 남편은 튼튼하고 유쾌한 농사꾼이었다. 립은 이 사나이가 옛날 자기 등에 잘 기어오르던 꼬마 가운데 하나였던 것을 기억했다. 아까 나무에 기대어 있던, 립을 영락없이 닮은 아들은 품팔이 밭일을 하고 있었는데, 자기 일 말고 다른 사람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애비와 똑 같은 성질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립은 전처럼 산책을 하며 지내는 생활로 돌아갔다. 옛 또래들도 금방 몇몇 찾았지만 이제는 모두 늙어서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들 가운데서 벗을 사귀고자 하였다. 그리고 곧 인기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집에서 별로 할 일도 없고 더구나 아무리 놀고 먹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을 나이였기 때문에 다시 여인숙 대문 벤치에 앉아서 마을의 장로이자 '독립전쟁 전'의 산 역사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가 제법 세상 이야기에 한 몫 끼고, 잠자던 동안에 일어난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이해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왜 독립전쟁이 일어났는가? 또 왜 이 나라가 옛날부터 이어지던 영국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는가? 왜 조지3세 폐하의 신민이 아니고 지금은 그도 합중국의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는가 등등이었다.

사실 립은 본래 정치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립에게는 오랜 동안 그를 괴롭히던 압제가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 마누라의 등쌀이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그것 역시 끝이 났다. 그는 이제 마누라의 굴레에서 해방이 되었다. '밴 윙클 가 부인'의 횡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집을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마누라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언제나 목을 흔들고 어깨를 추켜올리며 눈을 위로 치켜뜨는 것이었다. 운명을 체념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한 숨 놓았다는 표시,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몸짓이었다.

립은 둘리틀씨의 여인숙에 새로운 손님이 오면 반드시 자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처음에는 말할 때마다 어딘지 조금씩 내용이 달랐다. 눈을 뜨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이야기는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 굳어져 버렸고 이 고장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 아이들까지도 그 이야기를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줄곧 립은 머리가 이상해졌다, 그래서 이 산의 이야기만은 역시 머리가 어떻게 된 때무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홀랜드 사람의 후예인 노인네들은 거의 모두 이 이야기를 진실로 생각했다. 지금도 여름 오후 캐츠킬 산맥 근방에서 천둥이 쿠릉쿠릉 멀리 들려오면 그들은 반드시 "저 봐, 헨드릭 허드슨과 그 부하들이 나인핀즈를 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일대에서 마누라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남편들이 살기 귀찮아지면 으레 립 밴 윙클처럼 괴로운 생각을 잊게 하는 술을 한 모금 마실 수 있었으면 하고 모두 마음 속으로 바라는 것이었다.



[참조]
작자인 워싱턴 어빙은 작품 서두에서, 이 이야기가 홀랜드 식민지 시대 지방사에 흥미를 갖고 있던 뉴욕 지방 디트리히 니커포커씨가 남긴 문서에서 발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또 후기까지 첨가하여 이 사실의 신빙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허구적인 이야기에 사실감을 부여하려는 당시의 문학적인 관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여기서는 그 서문과 후기를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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