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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소제부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 번역 : 이재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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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소제부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 번역 : 이재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적에 나는 아주 어렸었다.

아버지는 나를 팔아먹었다. 아직 내 혀가 `-ㄹ뚝 ! -ㄹ뚝 !

-ㄹ뚝 ! -ㄹ뚝 !'하고 겨우 외칠 수 있을 때,

그래서 굴뚝을 나는 소제하고 검댕 속에서 잔다.

 

꼬마 톰 데이커가 있었는데, 양(羊)의 등처럼 곱슬한

머리가 면도질 당했을 때 그는 울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조용히 해, 톰 ! 신경 쓰지 마, 네 머리가 대머리면 검댕이 흰 머리칼을

더럽힐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서 그는 잠잠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톰이 잠들어 있는데 그는 이런 광경을 보았다.

수천(數千)의 소제부들, 디크, 조우, 네드, 그리고 재크,

모두가 검은 관(棺)들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그런데 빛나는 열쇠를 가진 천사 하나가 곁으로 오더니,

관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그러자 푸르른 들판을 날뛰며, 웃으면서 그들은 달려가

강에서 몸을 씻고 햇빛을 받고 빛난다.

 

그리고는 발가벗은 흰 몸으로, 모든 가방들을 뒤에 둔 채

그들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 바람 속에서 장난치며 논다.

천사가 톰에게 말했다. 그가 착한 소년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고 언제나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그러다가 톰은 잠을 깼고, 우리도 어둠 속에 일어났다.

가방과 솔을 들고 일하러 나갔다.

비록 아침이 차가왔지만, 톰은 행복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 임무를 다한다면 해(害)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요점 정리

작자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 번역 : 이재호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환상적. 서사적. 상징적

어조 :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어조

심상 : 서술적·부정적 심상에서 환상적·긍정적 심상으로 표현

구성 :

1연 아주 어렸을 때 굴뚝 소제부가 됨

2연 톰을 위로하는 자조적(自嘲的) 대화

3연 검은 관 속에 든 소제부들을 봄

4연 천사로 인하여 해방된 이들의 기쁨

5연 꿈 속에서의 행복한 모습과 선(善)

6연 꿈으로 인하여 기쁘게 일을 시작함

제재 : 굴뚝 소제부

주제 : 현실 비판과 참된 행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 순수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

특징 : 1.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비판함 2. 낭만주의의 특성이 잘 나타남.

출전 : <장미와 나이팅게일>

내용 연구

소제(掃除) : 깨끗이 쓸고 닦아서 먼지 따위를 없게 함. '소제부'는 소제를 하는 사람

검댕 : 연기. 그을음 따위가 맺혀서 된 검은 부스러기

아버지는 나를 팔아 먹었다. : 돈을 벌기 위해 어린 자식을 노동판으로 내몬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비판이 보인다.

"조용히 해, 톰! 신경 쓰지 마, 네 머리가 - 너도 알잖아." : 톰의 머리카락이 희었다는 것과, 굴뚝 소제를 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전부 면도해 버린 톰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흰 머리칼에 검댕이가 묻지 않게 되었다고 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조적인 대화를 통해 비정(非情)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톰이 잠들어 있는데 그는 이런 광경을 보았다. : 꿈 속의 환상을 가리킴. 꿈 속에서 본 광경을 통해 현실의 가혹한 고통을 표현하였다.

검은 관(棺) : 노동에 혹사당하는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죽음으로 상징한 표현이다.

검은 관(棺)들 속에 갇혀 있는 것을. : 노동에 혹사당하는 현실이 죽음과 같은 것임을 표현한 시구이다. 검은 관은 노동에 혹사당하는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죽음으로 표현

그러자 푸르른 들판을 날뛰며, - 햇빛을 받고 빛난다. : 어둠과 대조되는 빛의 이미지를 통해 삶의 행복과 이상(理想)을 구현한 표현. 검은 관에 갇힌 양상과 대비되는 정황을 제시하여 해방되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검은색의 어두움과 햇빛의 밝음이 대조된다.

발가벗은 흰 몸 : 어린 아이들의 티없는 신체의 심상을 통해 순수한 인간성에의 동경을 표상함

천사가 톰에게 말했다. 그가 착한 소년이 - 언제나 기쁨이 넘칠 것이라고. : '천사'의 말을 통해 억압과 빈곤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시인의 이상을 예언적 목소리로 표출한 표현이다.

비록 아침이 차가웠지만, 톰은 행복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 냉엄한 외부적 현실과 미래의 꿈을 간직한 내면을 대비시킴으로써 현대의 억압 사회와 미래의 억압 사회를 보여 주고 있다. 외부 세계의 냉혹하고 비정함과 꿈을 지닌 내면 세계의 양상을 대비적으로 표현한 시구이다. 낭만적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주어진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낙관적인 인생관을 견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다른 작품 : 병든 장미

이해와 감상

산업 혁명이 진행되던 18세기의 영국에서는 아녀자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5,6세짜리 어린이들을 일하도록 하는 유아 노동까지 자행되었다. 생산경비를 줄이기 위해 성인 남자대신 주부나 미성년자를 쓰고, 어른이 충분한 생계비를 벌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노동판에 투입된 것이다.이 작품에서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고발하고 잇다.

1연에서 아이를 팔아 먹은 아버지는 현실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아이를 노동에 몰아넣은 억압적인 존재로서의 사회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굴뚝을 청소하고 외치고 다니는 아이가 이제 겨우 말을 배운 처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2연에서는 굴뚝 청소를 하는 아이들이 자신뿐 아니라 아이들 일반이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유아 노동이 개인적인 특수한 일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행은 일종의 아이러니로서 영국적인 유머 감각을 보여준다.

3연에서는 꿈 속에서 본 '검은 관'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통해 어린이들이 부딪치는 현실이 죽음의 현실임을 강조하고 있다.

4연은 마찬가지로 꿈 속의 일을 빙자하여 어린이들이 바라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을 현상화했다.

5연은 그러한 이상 세계를 가져올 구원의 손길을 강렬하게 염원하는 양상 드러낸다.

6연은 꿈에서 깨어난 현실을 제시하며 그 냉혹한 상황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어란아이의 내면 세계를 제시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하고 있다.

18세기의 영국에서는 5, 6세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을 억지로 부려서 굴뚝청소를 하게 했다. 체격이 작은 어린애들이라야 좁은 굴뚝을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굴뚝 소제부"는 이를 소재로 해서,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비판한 작품이다.

이 시대의 영국은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 발전의 톱니바퀴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어두운 면 또한 번창했다. 빈부 격차의 심화, 인간 가치의 상품화, 그리고 어린애들에 대한 노동혹사 같은 일이 그것이었다 블레이크는 이러한 불의와 도덕적 병폐를 비판하고 인간 회복을 꾀하고자 했다.

그는 천진 난만한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18세기 영국 사회, 특히 도시적 삶에 있어서의 냉혹한 어둠의 일면을 다루고 있다. 수천 명의 굴뚝 소제부 어린이들이 관 속에 갇혀 있는 모습은 당시의 영국 사회에 대한 그의 진단이며, 그들이 천사의 인도로 햇빛을 받으며 웃음 짓는 장면은 인간의 참된 행복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심화 자료

낭만주의 시의 특성

('질풍노도'의 분위기와 자기 표현적 성향)

시대 : 18세기 말~19세기 전반

특징 : 보편적, 이상적인 균형과 조화를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 고전주의에 대립되는 사조로, 이성보다는 감성, 형식보다는 내용, 보편성보다 특수성, 규범의 틀보다는 개성의 자유을 중시하고, 현실성보다는 상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아울러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전원적인 소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표출하였다.

작가 : W.워즈워스, S.T.콜리지,J.키트, G.G. 바이런 등, 한국에서는 주요한, 이상화, 홍사용, 나도향 등이 있고, 문제점은 낭만주의의 지나친 비현실성과 환상으로 인해 사실주의가 대두함.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문학

진정한 의미의 낭만주의가 싹트기 전인 18세기 중엽부터 몇 가지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전 낭만주의(Pre-Romanticism)라고 부른다.

영국 문학에서 낭만주의는 윌리엄 워즈워스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을 출판한 1790년대에 시작되었다. 워즈워스가 〈서정민요집〉 제2판(1800)에 붙인 서문에서 시를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충일"(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로 정의한 것이 영국 낭만주의 시운동의 선언이 되었다.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3번째로 중요한 시인은 윌리엄 블레이크이다. 한편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첫번째 단계는 내용과 문어체 모두에 걸쳐 일어난 혁신과 신비적인 것, 잠재의식,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탐닉이 그 특징이다.

1805년경부터 1830년대까지 지속된 낭만주의의 2번째 단계에는 고유의 민담, 민요풍의 발라드와 시, 민속춤과 음악, 심지어 그때까지 무시되어온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모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화적 민족주의가 되살아나고 민족의 기원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 특징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가 되살아나자 역사소설의 창시자인 월터 스콧 경은 이를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글로 옮겨, 역사소설을 개척했다. 이즈음에 영국의 낭만주의 시는 존 키츠와 바이런 경 및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1820년대에 이르자 낭만주의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문학에 널리 퍼졌다. 이 후기(2번째) 단계에서 낭만주의 운동의 접근방식은 보편성을 잃고, 나라마다 역사적 유물과 문화유산을 연구하거나 비범한 인물들의 정열과 투쟁을 조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이전에 활동한 대부분의 주요작가들을 들 수 있다.

한국문학에 있어서 낭만주의가 대두된 것은 1920년대초에 쓰여진 시에서이다. 개인의 자유와 창조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전통적 도덕과 인습에 거세게 반발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흔히 1920년대 낭만주의를 병적·감상적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홍사용·박종화·나도향·이상화 등이 이에 속했다. 박영희의 〈환영(幻影)의 황금탑〉(백조, 1922.1)·〈월광(月光)으로 짠 병실〉(백조, 1923.9), 박종화의 〈사(死)의 예찬〉(백조, 1923.9),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백조, 1923.9) 등은 현실의 모든 번민과 집착의 저편에 서서 죽음에의 초대를 노래했다.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백조, 1923.9)에서는 세상을 공포와 비애만이 가득찬 곳으로 보기도 했다. 따라서 1920년대 낭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행위는 낭만적 정열이라기보다는 낭만적 허무로 끝나며, 그것은 감상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고 일정한 감정의 절망적 몸짓을 관습화하는 이러한 감상의 바탕에는 건강한 도덕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은 김소월 등 몇몇을 외에는 그 가치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1920년대 초기에 감상 및 퇴폐적 성격을 띠었던 낭만주의 문학은 사실주의 또는 프로 문학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목적은 흔히 18세기의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다양하고 새로운 입장과 활동(자아에 대한 성찰, 자연에 대한 사랑, 중세의 재발견, 예술 숭배, 이국적 취향, 종교로의 회귀, 참신한 역사 의식, 무한한 것에 대한 갈망, 섬세한 감상주의, 감정에 대한 과대 평가, 자유주의적 정치관, 보수적 견해, 반동적 견해, 사회주의적 이상향 추구, 그밖의 몇몇 '독특한 특징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낭만주의와 같은 광범위한 문화혁명이 상충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면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종교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괴테와 베를리오즈는 범신론자였다. 바이런과 하이네는 무신론자였고, 빅토르 위고는 일종의 스베덴보리주의자였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특징 중 하나인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모든 비평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세계에 도전해 정복한 개인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러시아에서는 1820년에 결정적인 낭만주의 시대가 열렸다. 러시아에서는 푸슈킨의 풍부한 시가, 이탈리아에서는 작가 만초니와 레오파르디의 작품이, 프랑스에서는 라마르틴과 비니, 뮈세, 빅토르 위고 및 데보르드 발모르 부인의 시가 낭만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셰익스피어의 재발견 역시 낭만주의의 한 현상이었다. 예술가는 셰익스피어를 끌어냄으로써 형식을 내용에 알맞게 변형하거나 창조하고, 이미 시의 용어에서 배제된 낱말을 사용하며, 내적 감정의 유도에 따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가 모두 유동적인 시대에 살았고, 그중의 불확실성에서 창조적 추진력을 끌어냈다. 그림에는 새로운 '현실'이 등장했으며, 고야·컨스터블·터너·제리코·들라크루아 같은 낭만파 화가들은 참신한 세부를 기록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예술로 바꾸는 새로운 수단을 모색하는 데 헌신했다. 낭만주의는 또한 괴테가 베토벤과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자극을 주고, 독일의 민간설화가 베버와 슈만 및 슈베르트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었듯이, 음악과 문학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른바 사실주의 시대에는 예술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는 두려움과 욕망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했다. 〈어려운 시절 Hard Times〉 같은 소설에서 디킨스는 인생을 행복한 결말이 인위적으로 고안되는 황량한 지하 세계로 묘사하고 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은 권태와 통속적 비극을 냉혹하게 묘사하고 있다. 1850~90년에 활동한 그밖의 많은 작가들은 사실성을 추구했고, 평범한 삶의 세부를 사실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사실주의적'(realistic)이라는 단어를 우울하거나 지저분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소설'(novel)을 믿을 만한 역사적 자료로 간주하고 있다.

회화에서는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의 열정이 쿠르베와 마네의 사실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낭만주의가 사실주의로 바뀔 때 거쳐간 것은 바르비종의 '야외'(open-air) 화파였다. 바르비종 화파의 풍경화는 평범한 것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해보였다. 자신의 부모를 그린 마네의 초상화는 소박하고 단조로운 가난을 고통스럽게 묘사한 작품이지만 작품 자체는 아름답다. 이것이 사실주의의 목표이자 업적이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1757. 11. 28 런던~1827. 8. 12 런던. 영국의 시인·화가·판화가·신비주의자.

〈순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1789)·〈경험의 노래 Songs of Experience〉(1794)를 필두로 삽화를 그려넣은 일련의 서정시와 서사시는 서유럽 문화전통에서 매우 독창적·독자적인 작품들이다. 오늘날에는 최초이자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러나 당시 독자들에게는 무시당했으며, 외곬이고 비세속적이라는 이유로 미치광이라 불렸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가난하게 살다가 무관심 속에 죽었다.

교육과 초기작품

양말제조업자인 아버지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런던에서 자랐으며, 근처 교외의 페컴라이에서 나무에 있는 천사들을 보았고, 들판에서 선지자 에스겔을 보았다는 등 어렸을 때 체험한 환상을 훗날 시로 표현했다. 화가가 되고 싶어 10세 때인 1767년 스트랜드가에 있는 헨리 파스의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독서를 많이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그림을 판화에 새기면서 독학했다. 1772년 판화가 제임스 배사이어 밑에서 일하면서 판화의 기교를 철저히 배웠다. 배사이어는 그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보내 그곳의 조각을 그리게 함으로써 고딕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었다. 1779년 견습기간이 끝나자 판화부 학생으로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당시 교장이던 조슈아 레이놀즈 경을 몹시 싫어한 데다 자신의 재능을 허비하고 있다고 느낀 까닭에 그곳 생활은 순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립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출판되는 책에 판화로 삽화를 그려 생계비를 벌었고, 독자적인 수채화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무렵 조각가 존 플랙스먼과 화가 토머스 스토서드를 비롯해 뛰어난 젊은 예술가들을 사귀었으며 화가 헨리 퓌슬리와도 친분이 있었다. 1782년 8월 18일 가난하고 무식한 소녀 캐서린 보처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에게 완벽한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플랙스먼의 소개로 앤소니 S.매슈 목사부부를 알게 된 뒤로 한동안 이들이 여는 문학모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플랙스먼과 매슈는 블레이크의 시집 〈W. B.의 습작시집 Poetical Sketches. By W. B.〉(1783)의 인쇄비를 대주었다. 12~20세 때 쓴 시들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주목할 만한 첫 시집으로서, 그중 몇편은 17세기 이후 영국 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함, 때묻지 않은 상상력, 강렬한 서정성을 담고 있다.

블레이크는 매슈 부부의 집을 점점 찾지 않다가 마침내는 아예 발을 끊었다. 그뒤 그는 1780년대 급진적인 서적판매업자인 자신의 고용주 조지프 존슨의 집에서 모이던 진보적인 사상가들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1787년에 〈달에 있는 섬 An Island in the Moon〉이라는 환상적인 산문의 일부를 썼는데, 여기서 그 사상가들을 풍자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1784년 런던에 인쇄소를 차리고 남동생 로버트를 조수 겸 제자로 삼아 함께 살았다. 로버트는 1787년초 병이 나 2월에 죽었다. 동생을 극진하게 간호했던 블레이크는 로버트의 영혼이 기쁨에 차서 천장을 뚫고 날아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뒷날 말했다. 또 로버트의 혼이 자기 앞에 나타나서 인쇄업자에게 맡기지 않고도 책의 본문과 삽화를 새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도 말했다. 이 방법은 블레이크가 고안해낸 '채색 인쇄'로 양각 부식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여 본문과 그림 모두가 새겨진 활자판에서 책을 한 페이지씩 단색으로 찍어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그의 친구 조지 컴벌런드가 앞서 시도한 바 있었다. 그 다음에는 블레이크가 아내와 함께 각 페이지에 수채물감으로 채색을 하거나 물감을 섞어 인쇄를 하고, 종이표지를 씌워 제본한 뒤 2~3실링가량 받고 팔았다. 〈W.B.의 습작시집〉 뒤에 나온 대부분의 작품은 판화로 새겨 이런 식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에 독자 수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동적인 디자인과 불타는 듯한 색깔로 된 이 '삽화 시집'은 세계적으로 진귀한 예술품에 속한다.

블레이크가 독창적인 새 인쇄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책은 1788년경에 인쇄한 〈자연종교란 없다 There is No Natural Religion〉·〈모든 종교는 하나다 All Reli- gions are One〉라는 작은 책자이다. 이 2권 속에 그뒤에 펼쳐질 사상의 원형이 모두 들어 있다. 그는 당시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인간의 정신에 대한 로크의 이론과 널리 퍼져 있던 합리주의·물질주의 철학에 과감히 도전했고, '무한한 존재', 즉 신을 인식하는 수단인 상상력이 다른 '인지기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 소책자가 나온 바로 뒤에 창의력이 놀랄 만큼 발휘된 첫 걸작들을 발표했다. 〈순수의 노래〉(1789)·〈셀의 서 The Book of Thel〉(1789)·〈프랑스 혁명 The French Revolution〉(1791)·〈천국과 지옥의 결혼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1793)·〈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1793)·〈순수와 경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1794) 등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을 쓴 시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때와 우연히 일치했는데, 블레이크는 존슨의 가게에서 모이던 다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이신론·무신론·물질주의를 싫어했고, 교리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신앙심을 지닌 점에서 다른 영국 혁명주의자들과 상당히 달랐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

〈순수의 노래〉는 채색 인쇄로 된 첫 걸작이다. 이 시집은 연약하고 아름다운 서정시와 섬세하고 미묘한 장정이 조화를 이루어 목가시풍을 따온 〈W.B.의 습작시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수의 노래〉에서 블레이크는 대중적인 민요와 당시 불려지던 동요를 본보기로 그것을 영어로 된 가장 순수한 서정시로 바꿔놓았다.

1794년 〈순수의 노래〉에 〈경험의 노래〉를 덧붙여 약간 손질한 개정판을 완성했는데, 부제에 스스로 밝혔듯이 이 시집은 인간의 영혼이 지닌 두 상반된 상태를 보여준다. '두 상반된 상태'란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자기 성장을 완성시키는 기능만을 할 때의 순수와, 법·도덕·억압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의 경험을 가리킨다. 〈경험의 노래〉는 〈순수의 노래〉에 대해 일종의 반어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너그러운 신을 찬미한 〈순수의 노래〉와는 반대로 〈경험의 노래〉에서는 전제적·억압적인 신의 이미지가 나온다. 〈순수의 노래〉에서는 주된 상징이 양(羊)인 데 비해 〈경험의 노래〉에서는 호랑이이다. 호랑이는 블레이크의 서정시 가운데 최고 걸작인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의 주제이다.

"호랑아! 호랑아! 이글이글 불타는구나/ 캄캄한 밤 숲속에서/ 어떤 신의 손 혹은 눈이/ 네 무시무시한 형상을 빚어낼 수 있었는지?"

이 시 속의 호랑이는 힘·강인함·욕정·잔인함의 화신이며, "양을 만드신 그분이 너도 만들었느냐?"라는 마지막 질문 속에 인간의 비극적인 딜레마가 잘 함축되어 있다. 〈순수의 노래〉에서 도시를 행복한 시각으로 본 것과는 달리 〈경험의 노래〉에서는 당시의 런던 같은 대도시를 회의적으로 보았다. 〈경험의 노래〉에 실린 뛰어난 시 〈런던 London〉은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는 사회" 풍조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 시에서 사용된 매우 단순한 언어는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블레이크의 우려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초기 이야기체 시

블레이크는 서정시뿐만 아니라 이야기체 시도 실험했다. 첫 시도인 〈티리얼 Tiriel〉은 끝내 인쇄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매끈한 장정이 돋보이는 〈셀의 서〉는 꽃같이 섬세하고 투명한 점에서 〈순수의 노래〉와 닮은 목가시이다. 〈티리얼〉·〈셀의 서〉에서 14음절로 된 긴 무운(無韻) 시행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가 그뒤 이야기체 시에서 이것을 기본 운율로 썼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미완성의 시는 당대의 역사를 서사시로 써보겠다는 야심만만한 시도였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는 풍자·예언·해학·시·철학이 뒤섞여 있는데, 이에 필적할 만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로 간결하고 힘찬 산문으로 된 이 시는 제도화한 종교와 인습적인 도덕에 대해 풍자했다. 블레이크는 이 시에서 관능의 이상적인 사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지각(知覺)의 문간을 깨끗이 치우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즉 무한한 상태로 인간에게 나타날 것이다." 블레이크는 종래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뒤집어서, 선을 이성이나 억압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악을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았다. 이 책에는 유명한 밀턴 비평과, 영웅적인 힘에 대한 찬미와 창조적인 활력으로 유명한 70편의 간결한 아포리즘 〈지옥의 격언 Proverbs of Hell〉이 실려 있다.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혁명에 대한 믿음을 찬미한 〈자유의 노래 Song of Liberty〉로 절정에 달하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신성하다"는 긍정으로 끝을 맺는다. 〈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에서는 〈경험의 노래〉에 실린 시 몇 편에서 암시한 성의 자유라는 주제를 전개한다. 이 시의 주인공 우순은 성적인 희열과 재생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순결을 얻었음을 발견한다. 이 시에서 처음으로 추상적인 도덕을 대변하는 억압적인 신을 유리즌이라고 불렀다.

램버스

로버트가 죽은 직후 블레이크와 그의 아내는 런던의 소호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혁명기간에 나온 모든 작품이 씌어졌다. 1793년에 템스 강 남쪽 램버스로 이사해 그곳에서 7년을 살았는데, 이 시기는 블레이크가 세속적인 부를 가장 많이 누린 때이면서 정신적으로는 가장 불안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쓴 시들은 소위 '예언서'라고 하는데 〈아메리카:예언서 America, A Prophecy〉(1793)·〈유럽:예언서 Europe, A Prophecy〉(1794)·〈유리즌의 서 The Book of Urizen〉(1794)·〈아하니아의 서 The Book of Ahania〉(1795)·〈로스의 노래 The Song of Los〉(1795)·〈로스의 서 The Book of Los〉(1795) 등이 있다. 이들 시에서 블레이크는 일련의 우주적 신화와 서사시를 정교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의 틀을 설명했다. 이 작품들 속에서 중요한 상징적 존재는 유리즌이다. 블레이크가 보기에 유리즌은 버림받은 불멸의 존재로서, 인간의 영혼이 타고난 힘을 제약하고 억누르는 이성과 법의 세력, 그리고 여호와를 동시에 구현한다.

예언서는 이성(유리즌), 상상력(로스), 반항정신(오크)이라는 상반된 힘을 상징하는 개체들끼리 우주, 역사, 인간의 영혼 속에서 벌이는 일련의 장엄한 전쟁을 묘사했다. 화려한 채색 삽화가 그려진 〈아메리카:예언서〉는 짤막하지만 강한 인상을 주는 설화시로서, 미국 독립전쟁이 반항정신인 오크의 봉기라는 상상에 의한 해석을 내렸다. 〈유럽:예언서〉는 예수의 출현과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을 반항정신의 구현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보았다. 〈유리즌의 서〉는 성서 〈창세기〉의 블레이크판 또는 풍자적 모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창조주는 선하고 의로운 여호와가 아니라 태초의 통일성에 거역함으로써 물질세계에 갇히게 된 '어두운 힘'을 나타내는 유리즌이다. 3개의 강음이 있는 짧은 무운 시행으로 씌어진 〈유리즌의 서〉 속의 시는 음울한 힘을 지니긴 했지만 웅장한 삽화에 비해 약한 인상을 준다. 이 시의 삽화가 지닌 힘과 장중함은 가장 뛰어난 삽화시집으로 꼽히는 〈예루살렘 Jerusalem〉을 예고했다. 블레이크의 신화담은 〈창세기〉에 해당되는 〈유리즌의 서〉에 이어 일종의 〈출애굽기〉인 〈아하니아의 서〉로 이어지며, 〈로스의 서〉에서도 계속된다. 〈로스의 노래〉에서는 우주적인 주제로 다시 돌아가 인류의 이야기를 자신의 시대로 끌어내린다. 이 무렵 블레이크는 정신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진 듯하며 그의 시도 마지막 예언서에 이르러서는 힘을 잃었다. 묵시록과 인류를 갱생하는 힘이라고 믿었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신뢰는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고, '대립상태'에 근거하여 통합을 이끌어내려는 자신의 시도가 복잡한 인간 실존에 대한 해답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주요서사시

〈로스의 노래〉를 마지막으로 시의 실험 기간은 끝났다. 그뒤로 거의 10년 동안 시집을 전혀 인쇄하지 않았다. 1795년 한 서적상으로부터 에드워드 영의 〈밤의 사색 Night Thoughts〉에 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1797년까지 이 작업을 계속해 537편의 수채화를 그렸다. 본격적인 서사시를 써야겠다는 새로운 창조적 충동을 느낀 때는 바로 이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95년 〈발라 Vala〉라는 서사시의 초안을 잡고 〈4개의 조아 The Four Zoas〉로 제목을 바꾸어 9년여에 걸쳐 고쳐 썼는데 판각은 하지 않았다. 이 시는 웅장한 토르소로 남아 있지만, 시의 특성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은 지나치게 복잡한 신화체계에 가려 빛을 잃었다. 개개의 시구와 주요개념은 장엄한데도 전체적으로는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그뒤에 나온 서사시 〈밀턴 Milton〉· 〈예루살렘〉 등은 이 작품에서 소재를 얻었다.

1800년 블레이크 부부는 서식스의 대지주 윌리엄 헤일리의 초대를 받아, 그가 마련해준 서식스 해안의 펠팜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가서 살았다. 헤일리는 마음씨는 좋지만 예술감각이 없는 예술애호가로서 블레이크를 고용하여 판각을 시켰다. 그러나 헤일리는 상상력이 풍부한 그의 작품들을 업신여겨 그를 자신의 소유에 속한 세밀화가나 길들여진 시인으로 바꾸어놓으려 했다. 처음에 블레이크는 서식스 생활에 만족했으나 곧 후원자인 헤일리의 처사를 참아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오두막이 너무 습해서 아내의 건강이 나빠지자 1803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펠팜을 떠나기 얼마 전에 블레이크는 스코필드라는 군인을 자기 집 정원에서 내쫓으면서 매우 모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그 군인에게 고소당했다. 블레이크는 치체스터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무죄판결을 받았다. 헤일리는 블레이크의 보석금을 내고 변호인도 고용했다. 이 일은 〈예루살렘〉·〈밀턴〉의 밑바닥에 깔린 신화의 일부를 이루었다. 블레이크가 〈순수의 예언 Auguries of Innocence〉을 비롯한 가장 뛰어난 후기 서정시를 쓴 것도 펠팜에 있을 때였다. 〈순수의 예언〉은 다음 첫 연이 인상적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면,/ 네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쓴 것도 펠팜에 있을 때인데, 그 대부분은 토머스 버츠에게 보낸 것이다. 공무원인 버츠는 여러 해 동안 한결같이 아낌 없는 도움을 베푸는 후원자였고, 블레이크는 이무렵에 그린 거의 모든 그림을 그에게 위탁했다.

1804~08년 블레이크는 〈밀턴〉을 인쇄했다. 이 시는 비교적 짧은 서사시로 주인공(밀턴)과 사탄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적인 위엄과 블레이크가 만들어낸 신화의 모호함이 나타난다. 시 속에서 밀턴이 악과 투쟁하는 것은 블레이크 자신이 후원자 윌리엄 헤일리의 오만함과 싸우는 것을 반영한다.

〈예루살렘〉은 대표적인 서사시 가운데 3번째 작품이며 가장 긴 시이다. 1804년에 시작해 〈밀턴〉을 완성한 직후 써서 인쇄했는데, 채색한 책 가운데 가장 장식이 화려해 100페이지 중 3~4페이지에만 삽화가 없다. 세부내용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시의 기본 틀은 간단하다. 시의 도입부는 영국과 인류를 상징하는 거인 앨비언이 '울로의 잠', 즉 추상적인 물질주의라는 지옥에 내동댕이쳐진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핵심부는 장인(匠人) 또는 창조적 인간의 원형인 로스에 의해 앨비언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살아남을 그리고 있다. 앨비언이 모든 사람은 한 형제라는 예수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예루살렘(그가 잃어버렸던 영혼) 및 신과 재결합하면서 시는 절정에 이른다.

말년

1803~20년경은 블레이크가 세상살이에 실패한 시기이다. 일거리를 얻기가 힘들었고, 이무렵부터는 만들어낸 판화도 창의성이 없는 것이 많았다. 1809년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려는 마지막 시도로 16점의 유화와 수채화를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위해 〈Descriptive Catalogue〉를 정성들여 썼으나 참석한 사람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같은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1819년 화가 존 리넬이라는 관대한 새 후원자를 만나 새뮤얼 파머를 비롯한 젊은 화가들을 소개받았다. 말년에 블레이크는 이 화가들의 핵심인물이 되어 그와 같이 종교적 진지함을 공유한 회원들에게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예루살렘〉 뒤에 쓴 가장 주목할 만한 시는 〈영원한 복음 The Everlasting Gospel〉(1818?) 속에 들어 있다. 이 시집은 예수의 인물됨과 가르침을 과감하게 재해석한 미완성작이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말년에 주로 미술작업에 몰두했다. 1821년 린넬의 위탁을 받고 〈욥기〉에서 영감을 얻어 22점의 수채화 연작을 그렸다. 이 가운데 몇 점은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축에 든다. 린넬은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 삽화도 그려달라고 했는데, 이 작업은 1825년에 시작했으나 결국 끝내지 못했다. 이 책의 삽화로 그린 102점의 수채화는 화려한 색깔이 특징이다. 블레이크는 60대에 와서야 비로소 평생 원했던,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업에 대한 추종자와 조력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결과 말년에 기교가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삽화들을 그릴 수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침대에 누워 자신의 책들에 색칠을 했으며, 스트랜드가에 있는 방 안에서 70세로 숨을 거두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이크는 묘비도 없이 버닐필즈의 한 묘소에 묻혔다.

회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당대의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조형회화라는 버젓한 예술전통에 속한다. 블레이크는 처음에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조각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뒤에는 제임스 배리, 존 모티머, 헨리 퓌슬리 같은 당대 조형화가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미술가들은 블레이크처럼 극적인 자세를 한 누드상을 매우 율동적인 직선으로 윤곽만 나타냈다. 특히 퓌슬리의 지극히 환상적인 화법은 블레이크가 시각적인 상상력을 해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내면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로이 인물상을 변형할 수도 있게 되었다.

평생 동안 블레이크는 색보다 선을 강조해서 '딱딱한 느낌의 곧은 선'을 즐겨 썼다. 솔을 사용하거나 음영을 넣는 등 그림의 윤곽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싫어했다. 궁극적으로는 상상하여 창조한 미술작품이 자연을 관찰하여 얻은 것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점은 블레이크가 기억이나 상상 속의 이미지를 놀랍도록 정확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희귀한 재능, 즉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직관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된다. 블레이크가 환상적인 광경을 말할 때 그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실제로 그가 본 것 같았다. 블레이크가 그림이 지닌 환상과 변형의 능력을 믿은 것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가 자연의 겉모습만을 천하게 모방함으로써 영국의 물질주의적 지배자들에게 봉사한다고 여겨 그들을 싫어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블레이크의 판화·수채화·템페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결 모양의 윤곽에서 느껴지는 율동적인 생동감, 위풍당당한 단순함을 지닌 특이한 형상, 극적인 효과와 독창성을 지닌 몸짓으로 유명하다. 블레이크가 즐겨 쓴 주제는 밀턴이나 단테의 작품 및 성서에 나오는 일화였다. 또한 많은 그림에서 과감하면서도 남달리 섬세한 채색화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장 훌륭한 연작화는 1790~95년에 그린 12점의 대형 채색판화, 1799~1805년에 그린 성서의 삽화와, 죽기 직전에 그린 〈욥기〉의 삽화인데 그중에서도 〈욥기〉 삽화가 그가 이룬 시각예술의 업적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평가

블레이크는 오랫동안 동료 미술가나 시인들에게만 인정을 받았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블레이크가 밑그림을 그린 시집을 1847년 대영 박물관에서 10실링에 샀다. 로제티가 이 책을 1861년 알렉산더 길크라이스트에게 빌려주어 블레이크의 첫번째 전기가 나왔으며, 1868년에는 앨저넌 찰즈 스윈번에게 빌려주어 장문의 블레이크 평론인 〈평론선 Critical Essays〉이 나왔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1893년 블레이크 대표선집을 준비하고 주석 다는 일을 도왔다. 1920년 T.S.엘리엇이 〈신성한 숲 The Sacred Wood〉에 블레이크 평론을 실으면서 그의 이름은 새로운 독자층에게 친숙해졌다. 그가 죽은 지 100주년이 되는 1927년 많은 기념논문과 책이 발간됨으로써 현대에 와서 명성을 굳혔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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