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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 플라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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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정치(哲人政治)'의 선언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내서 증명하기에 힘써야 할 것은, 오늘날의 나라들에서 도대체 무엇이 서투르게 이뤄지고 있길래, 앞서 말한 대로 국가가 조직되는 걸 막고 있는가? 그리고 또 가장 작은 변화를 통해 어떻게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국가조직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 그 변화(변혁)는 될 수 있는 한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 그것으로 족하지 못할 경우엔 두 번, 그래도 안 될 경우엔 가능한 한 적을수록 좋겠으며, 힘의 규모에서도 적었으면 좋겠군."

"그렇고말고요"하고 그는 말했네.

"그런데 내 생각엔 한 가지 변화로도 나라를 변혁시키리라는 것을 우리는 논증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건 작은 것도 아니고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일세"하고 내가 말했네.

"말씀하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네.

"만약 철학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왕이나 통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든가 해서, 즉 정치 권력과 철학적 정신이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또 현재로서는 숱한 사람들이 그들 중의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서 추구하는 것은 강제적으로라도 막지 않는다면… 여보게 글라우콘, 내가 생각하기엔 여러 국가들이나 인류에게도 재앙이 그치지 않을 걸세. 이러한 이치는 우리가 세운 국가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될 터이고, 따라서 방금 이야기한 그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한 이상국가의 형태로 실현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네. 오래 전부터 내가 말하기를 주저한 것이 바로 이것일세. 매우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말이야. 또 실제로 국가를 그렇게 만들지 않고서는 개인이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행복을 가져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는 일이기 때문일세"하고 나는 말했네.

그러자 그는 "소크라테스님, 이와 그런 말씀을 던지신 바에야 만만치 않은 떼거리가 이제 곧, 말하자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어서, 저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무기를 움켜잡고 엉뚱한 짓을 할 셈으로 선생님을 향해서 온갖 힘을 기울여 밀어닥치라고 각오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들을 말로 막아 내어서 물리치지 못하신다면, 정말로 웃음거리가 되시고 벌금을 물으셔야 할 겁니다"라고 말하더군.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다 자네 탓이 아닌가?"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죠. 그리고 제가 그렇게 한 것은 잘한 일이죠"하고 그는 말하더군. "그래도 저는 선생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제가 할 수 잇는 힘을 다해서 지켜드릴 것입니다. 저는 선의(善意)와 격려를 그렇게 할 수 있고, 아마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적절하게 대답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협조자가 있으니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도록 힘쓰셔야겠습니다."

"물론 힘써야겠지. 특히 자네는 그렇게 큰 동맹(同盟)을 제공해 주니 말일세.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네가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가자면 그들에 대해서 철학자들이 지배해야 한다는 감히 우리가 말할 때, 그 철학자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그것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인데, 그 까닭은 그런 일들이 분명하게 구별될 경우에, 어떤 사람은 철학에 종사하고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게 태어나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에 종사하지 않고 지도자에게 따르는 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서,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일세" 하고 내가 말했다.

"바로 정의(定議)를 내릴 때로군요"하고 그는 말하더군.

"자, 그렇다면 이렇게든 저렇게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리란 희망으로 뒤를 따라오게나."

"이끌어 주십시오"하고 그는 말했네.

( 플라톤에게 있어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참된 정치는 넓은 의미의 학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사랑한다고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 말이 옳게 쓰여지고 있다면 그가 그것의 한 부분은 사랑하지만 다른 뿐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네에게 상기시켜야 하겠는가, 아니면 자네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래도 상기시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혀 마음에 없었으니까요." 하고 그는 말했네.

"글라우콘, 다른 사람에게라면 자네가 말한 데로 말하는 것이 어울리겠지. 하지만 모든 청춘 남자들은 소년을 사랑하는 호색적인 사내를 어떻게 해서든 자극해서 반하도록 하고, 또 그들을 친절하게 해주고, 소중히 여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잊다니 그건 호색적인 사내에겐 어울리질 않는군. 자네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가? 어떤 소년은 들창코라서 매력적이라고 하여 자네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고, 또 어떤 소년의 매부리코는 제왕 같다고 말하고, 그 중간 코의 소년은 마침 맞다고 말하고, 살갗이 까만 사람은 보기에 사내답다고 말하고, 살갗이 흰 사람은 신의 아들처럼 수려하다고 말하네. 그리고 또, 꿀빛처럼이라는 묘사도, 비록 창백한 빛깔을 띤 청춘의 얼굴이 있다면,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어떤 애인의 그럴싸한 입에 말의 소산(所産)이 아니고 그 무엇이라고 자넨 생각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핑계로 둘러대고, 온갖 소릴 다 하면서 청춘의 꽃다운 때에 있는 사람들을 누구 하나도 거절하진 않겠다는 거겠지"하고 말했네.

(이 부분은 한비자의 설난(說難) 부분을 참고하면 좋을 것같다.)

"만약 호색적인 사람들에 관해서, 그들이 그렇게 한다는 덕을 저를 본보기로 말씀하고 싶으시다면, 저는 토론의 목적을 위해서 찬성하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네.

"그런데 어떤가?"하고 내가 말했네. "술을 즐기는 사람들도 그것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자넨 보지 않는가? 그들은 갖가지 핑계를 들어 온갖 술을 반가와하지?"

"정녕 그렇죠."

"그리고 또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진데, 내가 생각하기엔 그들은 장군이 될 수 없으면 대대장이라도 되려고 하며, 설사 거물급이나 고위층의 존경을 못 받는다하더라도 그들은 명예라면 모두 탐내기 때문에, 소인배나 하찮은 자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을 자넨 익히 라고 익히 알고 있을 걸세."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에 관하여 정말인지 아닌지 말해주게나. 즉,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탐내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는 그 무엇인가의 종류 전체를 탐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한 부분은 탐나지만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전체죠."하고 그는 말했네.

"그렇다면 또, 철학자들도 지혜를 욕구하고 다른 부분은 욕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모두를 욕구하는 사람이 아닐까?"

"옳습니다."

"그렇다면 공부에 관해서 싫증내는 사람, 특히 아직 어려서 어떤 공부가 이롭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 까닭도 모를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마치 음식에 싫증을 내서 까다롭게 말하는 사람을 굶주리고 있다든가, 음식을 탐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또 식도락가가 아니라 식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걸세."

"그렇죠.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을 순순히 맛보고 싶어하는 자, 또 기꺼이 공부를 하려고 하여 배움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등을 우리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할 걸세. 안 그런가?

그러자 글라우콘은 말하더군. "그렇다면 수많은 괴상한 무리를 철학자라고 선생님께선 부르시는 셈이군요. 왜냐하면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다, 제가 생각하기엔, 무엇인가를 즐겨 배우는 까닭에 그런 사람이겠소, 또 듣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포함시키기에는 매우 괴상한 자들이기 때문이죠. 그 까닭은, 철학적 토론이나 그런 따위의 소일거리에는 자진해서 나아가려고 하지 않지만, 그러나 마치 온갖 가무단을 듣기 위해서는 그들의 귀를 돈을 받고 빌려주기나 한 듯이,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디오니소스의 축제에 뛰어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라든가 그밖에 무엇인가 이런 따위를 배우는 사람들이라든가, 자질구레한 손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결코 그렇진 않지. 그러나 그들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과 비슷한 사람들이라고는 부르겠지"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다면 참다운 철학자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하고 그는 말했네.

"진리를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일세."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죠. 그건 옳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그건 다른 사람에게는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네"하고 내가 말했네. "그러나 자네라면 다음과 같은 것에서 나에게 찬성하리라고 생각하네."

"무엇인데요?"

"아름다움은 추함과 반대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둘이라는 것일세."

"그야 물론이죠."

"그리고 그것들이 둘이기 때문에 제각기 하나라는 것일세."

"그것도 그렇죠."

"그렇다면 또 정의나 부정, 선이나 악의 모든 형상에 관해서도 이것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네. 즉 제각기 그 자체로서는 하나이지만 행동이나 물체와 맺어지고 또 그것들끼리 서로 맺어져서, 어디서든지 나타나고, 그 각각이 많아 보인다네."

"옳은 말씀이십니다."라고 그는 말했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가르치겠네. 즉 한편으로, 방금 전에 자네가 말한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이나 꼴이나 그런 것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반기지만, 그들의 마음의 상태는 아름다움 자체의 본바탕을 보거나 반기지는 못하네"하고 내가 말했네.

"그렇죠. 과연 사실이 그렇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네.

"그렇다면 아름다움 자체로 다가가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겠지?"

"정녕 그렇죠."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들은 많은데도 아름다움 자체는 믿지도 않고, 또 누군가가 그것의 인식으로 이끌어 가려고 해도 따라가지도 못하는 사람은, 꿈을 꾸면서 살고 있다고 자넨 생각하는가, 아니면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디 생각해 보게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잠들어 있건 깨어 있건 바로 이 경우, 즉 어떤 것과 같은 것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닮고 있는 바로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겠지?"

"확실히 저는 그런 사람을 꿈꾸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네.

"자, 그런데 어떻겠나? 그 사람들과는 반대로 뭔가 아름다움 자체를 믿고, 그것도,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들도 분간할 수가 있어서,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을 자넨 눈을 뜨고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확실히 눈을 뜨고서 살고 있죠."

"그렇다면 그의 마음의 상태는,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식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편 사람은 억견(臆見)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로서, 억견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

"그렇고말고요."

"그렇다면 만약 믿기는 하지만 알지는 못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화를 내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정말이 아니라고 논박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리지 않고서 그를 어떻게든 달래고 조용히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그야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죠"하고 그는 말했네.

"자, 그렇다면 우리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나. 아니면 우리가 그에게 이렇게 묻고서,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시새우지는 않고, 오히려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보고 우린 매우 기뻐할 것이라고 말할 것인지 고려해 보게나. 어쨌든 나에게 이것을 말해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가? 자네가 그 사람 대신 대답해 주게."

"그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저는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네.

"그 무엇인가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이죠. 도대체 있지 않은 것이 어떻게 알려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완전하게 있는 것은 완전하게 알 수 있지만 결코 있지 않은 것은 아무리 해도 알 수 없다는 것에 관해선, 설사 제아무리 많은 지식으로 따져본다 해도 우린 자신이 있을까?"

"그야, 자신만만하죠."

"그건 그렇다 하세. 그러면, 만약 무엇인가가 있기도 하고 있지 않기도 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있는 것과 결코 있지 않은 것과의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사이에 놓여 있죠."

"그렇다면 있는 것에는 앎이 어울리고, 또 모름에는 불가불 있지 않은 것이 어울리는데, 이 사이에는 것을 위해서는 우린 무지와 지식과의 사이에 있는 무엇인가를, 만약 뭔가 그런 것이 있다면 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렇고말고요"

"그런데 우린 무엇이긴 하다고 말하는가?"

"그야 물론이죠."

"그건 지식과는 다른 능력인가, 또는 같은 능력인가?"

"다른 것이죠."

"그렇다면 믿음과 지식은 각각 제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것에 어울리겠지."

"그렇죠."

"그렇다면, 지식이란 원래 있는 것에 관계되는 것이라서 있는 것이 어떻게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군? 그보다도 오히려 우선 나는 이렇게 구별을 짓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네."

"어떻게요?"

(참다운 철학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로서 제시한 이데아론(論)이라는 플라톤의 근본사상이 여기에부터 처음으로 전개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이해와 감상

 

"국가"(Politeia)는 플라톤의 사상이 가장 원숙했던 중기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나라 체제" "나라의 구성" 또는 "정부형태"를 뜻하는 이 폴리테이아는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교육ㆍ경제ㆍ사회ㆍ예술ㆍ도덕ㆍ철학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론 등의 사상이 총망라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여기에 수록된 내용이 B.C. 4세기의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만큼 현대의 우리에게는 매우 소박하고 때로는 유치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이 그만큼 문제의 핵심을 제시해 주고 있어 음미할 만한 보람을 느끼게 한다. 플라톤의 사상은 옛날에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그러한 것이 아니다. 철학자 화이트 헤드에 의하면 "유럽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일련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한다. 이것은 곧 플라톤의 사상이 유럽 철학사의 주맥이 되어 각시대의 사상 속에 용해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서구의 사상을 알 수 없는 그러한 내용의 것이다. 따라서 "국가론"은 플라톤의 30여 대화편 가운데서 플라톤의 사상이 가장 잘 요약된 대표작으로서 교양인 필독의 서라 아니할 수 없다.

 

본 대화편은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권에서 정의(正義)의 정의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당시의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트라스마코스는 정의는 강자가 자기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의가 어떤 자에게는 의로운 것이고 좋은 것이지만, 다른 자에게는 불의요, 좋지 못한 것이 되는 그러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가 하는 것을 고찰하는 데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의롭고 좋은 것이 될 수 있는 정의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이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의보다 더 확대된 국가에 있어서의 정의를 밝혀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국가 문제로 대화를 옮겨간다.

국가의 기원에 대해 플라톤은 신화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발생론을 제기한다. 국가는 필요에 의해 생긴다고 하고 그 필요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분업과 전문화가 이루어지며 전문적인 분업에는 이에 적합한 인간이 종사하게 마련이다. 분업으로 생성된 제품의 교환을 위해 상업과 화폐가 필요하게 되며 전체 국민이 풍요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영토를 요구하게 된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게 된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전사가 필요하며 또한 국가를 인도할 지배자로서의 애지자(철학자)가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목표는 순수하고 명백하다. 이러한 목표에 대한 참된 인식과 목표 달성을 위한 지식은 생산자나 전사에게는 기대할 수 없고, 오직 철학자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철인정치의 이상을 내세운다.

인간이 소규모의 유기체인 것처럼 국가는 거대한 유기체이다. 인간에 있어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은 거대한 인간인 국가에서도 똑같이 이루어 진다. 인간에 있어서는 영혼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 세 가지의 인간형으로 분류되는데, 국가에도 이에 대응하는 세 계급이 생기며 이는 다음과 같다.

(1) 욕구에 따라 사는 자로 구성되는 것이 서민이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수요되는 여러 가지 체질에 대한 욕구로 이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농공상인 계급이다. 이들은 다른 두 계급에 속하는 자에게 "보수와 영양을 공급하는 자"로서, 국가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루지만 통치에는 전혀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보호자 계급의 보호와 지도를 받으며 우수한 자는 상위계급으로 오를 수 있다. 이들은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이므로 사유재산과 가족제도가 허용되며,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인정되고 보호자의 친구이며 형제로서의 대우를 받는다.

(2) 기개 있는 자에 상응하는 수호자 또는 보조자로서 용기와 명예를 높이 평가하는 계급이다. 이들은 밖으로 국가를 수호하고, 안으로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확보하는 임무를 갖는다. 이들은 부보다는 명예를 존중하기 때문에 일체의 사유재산이나 가족은 허용되지 않으며 부인과 자식까지도 공유해야 하는 완전한 공산사회를 형성한다. 개인적인 이해가 전체에 대한 그들의 봉사를 방해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여자는 천성에 있어 남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남자와 동일한 교육을 받으며, 동일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권주의자의 선구자는 플라톤이라 하겠다.)

(3)이성적인 것에 상응하는 최고의 계급, 즉 통치자 또는 철학자는 국민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현명한 자에 속하는 계급이다. 그들의 사명은 입법과 그 실시, 교육과 그 감독이다. 그들은 순서에 따라 최고의 관직에 취임하고, 나머지 시간은 철학적 탐구에 할애한다. 즉, 학문과 최고선의 이데아 탐구에 헌신하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최고 이념으로 이에서 모든 질서와 정의가 그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만약 철학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왕이 되든가 또는 우리가 오늘날 왕이나 통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든가 해서, 즉 정치 권력과 철학적 정신이 일체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 국가들이나 인류에게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철인정치"의 선언은, 아데이만토스와의 논의중에, 거의 강요되다시피 질문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아데이만토스를 피하고 글라우콘을 상대로 논의를 전개하여 가고 있다. 이것은 언뜻 보아 주제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나, 플라톤은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주제와 관련지으면서 전개하여 가고 있다. 즉, "정의"와 "선"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새삼스레 "철학"의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치"와 "철학"이 하나가 되지 아니하면, 인류의 불행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철학"은 불가결한 것이며, "선"의 내용이 되는 "행복"은 철학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한 국가의 통치자 혹은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정의"와 "선", "행복"과 "덕"의 기초가 되는 철학을 몸소 터득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선(善)의 이데아"― 소크라테스는 "치자(治者)"의 교육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맨먼저 "배워야 할 최대의 것"으로서, "선"을 들고, 이것을 대화편 전체의 주제로 삼고 있다.

 

"선의 이데아야말로 배워서 알아야 할 최대의 것이며, … 따라서 "올바른 것", "아름다운 것" 등이 어찌하여 "선"이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을 알고 있지 아니한 자를 수호자로 받들었다 하더라도 그다지 가치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내 생각으로는, 어떤 사람도 "선"을 모르고서는 "정의"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때 아데이만토스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소크라테스에게 질문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그 대답을 극력 피하고 주저하게 되자, 글라우콘까지 합세하여 그 대답을 유도하고자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하는 수 없이 직접적인 해설을 피하고,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간접적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다.

 

최초의 "태양"의 비유는 "배워야 할 최대의 것"인 "선"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의 "동굴"의 비유는 치자(治者)의 교육론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선분(線分)"의 비유는 철학이 추구하고 있는 "지(知)"와, 수학이나 그 밖의 "지식"과의 구별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서, 제7권의 "학문"론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 세 가지 비유에 있어서, "태양"의 비유는 "선"을 주로 한 것이고, 그 밖의 것은 종속적인 것이며, "선분"의 비유에 있어서는 가지계(可知界)가 주가 되며, 가시계(可視界)나, "선"은 부차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동굴"의 비유에 있어서는, 인간의 영혼의 해방으로서의 "교육"의 어려움을 그리고 있다.

한편 "태양", "선분", "동굴"의 순서는 곧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하강이지만, 우리들 인간의 순서로 생각하면, "동굴"의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와서, "선분(線分)"에 나타난 "간접지(間接知)"와 "문답법"을 거쳐서 그 정상에 이르는 것을 "태양"의 비유로 가르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육은 이상국가의 체제와 밀접히 연관이 된다. 선의 이데아 실현을 위한 적합한 체제가 이상국가라면 이에 따른 교육이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모든 유년기의 어린이에게 체육을 통해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 이루어지며, 마음에 음악교육을 통해 정서의 고상한 정신에 대한 채득과 조화를 도모한다.

이러한 목표를 위한 음악에는 그 교육 내용에 어울리는 것으로 엄선해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교육에서 장차 통치자가 될 자에 대한 유의가 있어야 하며,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자는 더욱 상위의 교육에로 진학이 허용된다. 음악 교육에는 문예에 관한 교육도 포함이 된다. 이것은 신화의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지만 호머나 해시오도시의 신화가운데 인간의 건전한 육성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제외되어야 하며, 재구성되어야 한다.

다음에는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에 시작과 문예, 음악을, 청넌기에 접어들면서 정신과 훈련과 양식이 되 수 있는 수학을 배우게 된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의 정문 현판에 "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고 써 붙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수학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을 위한 수학 교육이 아니라 정신의 훈련을 위한. 즉 추상적이며 이념적인 이데아의 인식을 위한 기초로서의 성격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교육 과정 속에서 방자하고 나약한 풍습은 배격되고, 다만 인간을 고귀하게 하고, 진리와 선과 미에로 인도하는 내용만이 허용된다. 이에 의해 참된 도덕국, 높고 순수한 신의 관념, 죽음과 무상이 따르는 현세적 복리에 대한 멸시감 들이 어린 영혼에게 싹트게 하려는 것이다.


참고 자료

 

플라톤(BC 429?-BC347) Platon ; Politeia

 

플라톤(B.C. 427~347)은 명문 집안의 3남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와 사별한 어머니의 재가로 의분동생 하나가 있다. 이들 형제는 대화편에 곧잘 상대로 나오지만, 자신에 대한 언급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짤막하게 두 번,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임종에 참석치 못한 자신의 이름을 한 번 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으로 간주되는 ‘제7서관’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404년과 401년에 각기 수립된 30인 과두 정치와 민주화 정치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게 된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처형에 충격을 받고 나서는 완전히 철학으로 전향해 버린다.

그는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남이탈리아와 첫 번째 시라쿠세 여행을 한다. 2,3년동안의 시라쿠세 체류에서 귀향한 그는 아테네 성 밖에 있는 영웅 ‘아카데모스’의 성역에 아카데미아라 불리는 학원을 세웠다.

이 두 번째 여행은 367년에 시라쿠세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사망으로 역시 새로운 참주가 된 ‘디오니시오스’ 2세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이 초빙은 새 참주의 숙질간이요, 플라톤 철학에 감화를 받은 리온의 권유에 의한 것이다.

60세의 ‘플라톤’이 이 초청에 응한 것은 그의 ‘철인왕(哲人王)’의 꿈을 이 참주에 기대해서였으나 이 참주와 ‘디온’의 관계가 악화되어 그 희망은 곧 무산되고 만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형이상학의 수립자로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동굴 ·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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