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과욕은 금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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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욕은 금물

강 항 지음

김기빈 번역

제1화 너무 먹어도 탈

나는 농사를 짓고부터 한번도 소를 키운 적이 없다. 봄철에 동분서주하며 이웃들에게 소를 빌어 밭갈이 할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너무 심하다고 원망하였고, 나 자신도 먹고살기 위하여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지난 을묘년(1615)에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자 소작료로 받은 쌀을 가지고 암소 한 마리를 구입하였다. 그 이듬해 여름은 먹을 것이 좀 넉넉지 못한 게 흠이었지 심사(心事)는 맑고 편안하였다.

 

동짓달 초사흘에 잠포(岑浦)에 사는 소작인이 콩을 가지고 왔다. 한밤중이 되니 소가 코에 꿴 고삐를 물어 끊고서 섬돌에 올라가 콩을 훔쳐먹었는데,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사흘이 지나 배가 터져 죽었다.

나는 게으른 비복들이 여물을 제때 주지 못하여 소가 굶어죽지 않을까 염려한 적은 있지만, 배불러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소는 무지한 짐승이니 나무랄 것이 없지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 중에도 배불러 죽은 우환이 있다.

「시경」에는 '벼슬을 받아 사양할 줄 모르니 필경 몸을 망치리라.'라는 말이 보이고, 옛 글에도 '어린아이의 병은 너무 많이 먹는데서 생긴다.'라는 말이 보인다. 참으로 경계할 일이다.

제2화 혹 떼려다 혹 붙이기

여송(呂宋)은 동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지역이 치우쳐있는데다 물살 또한 빠르고 급한 관계로 백성 중에 혹이 난 사람이 많다.

어느 사람이 이마에 혹이 생겼다. 거의 항아리만한 크기의 혹이 머리를 눌러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처자는 부끄럽게 여겨 그를 쫓아내었다.

쫓겨나 산 속에서 지낸 지 며칠이 되었다. 한밤중이 되자 산도깨비들이 떼를 지어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려고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도깨비들이 그를 보고는 서로 혀를 내두르며 말하기를,

"이상하구나. 사람이 살지 않는 산 속에 이처럼 같이 놀만한 좋은 벗이 있다니."하고는 계속해서 북을 쳐대니 그도 따라서 계속 춤을 추었다. 먼동이 틀 무렵 도깨비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도깨비들은 사람과 달리 해가 뜨고 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내일 밤 꼭 다시 오려고 하는데 그대도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하니, 그도 그러마고 하였다. 도깨비들은 세 번씩이나 반복해 물었고, 그도 그때마다 승낙하였으나 도깨비들은 그래도 미심쩍은지,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믿기 어려우니, 그대의 혹을 떼어서 약속의 징표로 삼자."

하고, 즉시 혹을 떼어 가지고 갔다. 그는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겨 부리나케 달려서 집으로 돌아오니 본래의 모습으로 되어 있었다. 처자는 반갑게 맞이하였고 이 소문은 이웃마을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

그 마을사람 중에는 앞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혹이 나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산에서 혹을 떼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망설이다 찾아가 물었고, 사연을 모두 듣고나자 매우 기뻐하였다.

 

곧장 혹을 떼고 온 이가 묵었다는 산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밤중이 되자 도깨비들이 과연 북을 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다가왔다. 그는 미리 일어나서 들은 대로 정신 없이 춤을 추었다. 도깨비들이 매우 즐거워하며,

"신용이 있군."

하고 함께 실컷 놀다가 헤어졌다. 떠나면서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약속을 어길까해서 혹을 떼어가 징표를 삼았는데, 자네가 이미 왔으니 혹은 다시 돌려주겠네."

하고 즉시 앞서 가져갔던 혹을 그의 이마에 붙여놓고 가버렸다. 그 혹의 모양은 마치 두 채의 집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대성통곡하면서,

"한 개의 혹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둘이나 되다니!"

하고는 드디어 골짜기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상은 일본스님 순수좌(舜首座)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나는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살아 돌아왔기에 이런 태평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고, 나 스스로도 세상에 나갈 생각을 끊은 지가 오래되어 일찍이 벼슬했던 사실까지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가까운 이들이 더러,

"그대가 벼슬에 뜻을 끊은 것은 환관이 여자에 대한 마음을 끊은 것과 흡사하니, 차라리 장차 벼슬을 구하여 버림받은 치욕을 씻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권한다. 그때마다 나는 대답하기를,

"설사 구한다 하더라도 누가 곧바로 주겠는가. 전날의 치욕도 아직 씻지 못한 형편에서 도리어 다시 새로운 치욕을 더 얻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이것은 혹을 떼려다가 혹을 두 개를 붙인 그 사람의 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권하던 이가 크게 한 숨을 쉬고 가버렸다.

강 항 (1567∼1618)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본관은 진주. 우계(牛溪) 성 혼(成渾)의 문인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영광 논잠포에서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2년 8개월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동안의 기록이 바로 「간양록(看羊錄)」이다. 특히 일본에 있을 때 순수좌〔藤原惺窩〕에게 성리학을 전파하여 일본 성리학의 성립을 보게 하였다. 귀국 후에는 조정의 의논에 꺾여 벼슬을 못하고 영광에서 여생을 마쳤다. 여기에 실은 두 편의 글은 그의 문집인「수은집(睡隱集)」 권33에 실려있는데 전자의 원제는 <우계(牛戒)>, 후자의 원제는 <류계(瘤戒)>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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