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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 루쉰(魯迅)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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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 루쉰(魯迅)

 

나는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이천여 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떠나온 지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 때도 어느새 엄동이 되었다. 고향에 가까이 올수록 날씨는 점점 음산하고 우중충하며, 찬바람이 쌩쌩 몰아쳐 선실(船室) 안까지 스며들었다. 선창(船窓)으로 밖을 내다보니 희끄무레한 하늘 밑에 초라한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전혀 활기가 없어 보였다. 나의 마음 속에서는 슬픔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 이것이 내가 20년 동안 그처럼 그리던 고향이란 말인가?

<중략>

"어머나, 이렇게 변했구려. 수염도 많이 자라고……."

갑자기 날카롭고 괴팍한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광대뼈가 불쑥 나오고 입술이 얄팍한 50 전후의 여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치마도 입지 않은 채,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제도 기구(製圖器具)인 다리가 가는 콤파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몰라 보겠수? 내가 전엔 안아 주었었는데……."

나는 더욱 놀랐다. 마침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설명을 하셨다.

"그 애가 오랫동안 객지로 돌아다녀서 모두 잊은 모양이오. 아마 너도 생각이 날텐데……."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이 분은 길 건너 양얼샤오(楊二嫂) 아주머니란다. 그 두부집을 하던……."

나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길 건너 두부집에는 진종일 앉아 있던 양얼샤오라는 여인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두부서시(豆腐西施)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분을 뽀얗게 바르고 광대뼈도 불쑥 나오지 않았으며 입술도 이렇게 얇지 않았다. 종일 앉아만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서 있는 자세는 보지 못하였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그녀의 덕분에 두부집은 장사가 잘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나이 탓이었는지 나는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인은 몹시 못마땅한 듯이 경멸하는 표정으로, 프랑스 사람이 나폴레옹을 모르고, 미국 사람이 워싱턴을 모르는 것을 비웃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본래 귀인은 눈이 높은 법이라……."

"그럴 리가 있어요? 실은……."

나는 황망하게 일어서며 말하였다.

"그럼, 내가 이야기를 좀 하겠소. 씬(迅) 도련님, 당신은 훌륭하게 되었다면서, 운반하기도 불편할 텐데, 이런 낡아빠진 나무 그릇을 무엇에 쓰시려우? 나나 주구려.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쓸 수 있으니……."

"저는 조금도 훌륭하지 못해요. 저는 이런 것을 팔아야만 앞으로……."

"아이고, 맙소사! 당신은 도대(道臺=道長官)님이 되셨다면서요? 당신은 지금도 첩을 셋이나 거느리고, 나라에 드나들 때면 팔인교(八人轎)를 타고 다니시면서도 출세를 하지 않았다니? 흥! 어떤 말로도 나를 속이지 못하오!"

나는 더 할 말도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부자가 되면 될수록 돈에 벌벌 떤다더니, 한 푼도 낭비를 않으니 부자가 될 수밖 에……. "

그 여인은 성이 나서 마구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어머니의 장갑을 아랫바지춤에 찌르고 나가 버렸다.

그 후에도 근처의 일가 친척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들을 접대하면서 틈틈이 짐을 쌌다.

이렇게 삼사 일을 보내게 되었다.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 날 오후, 내가 점심을 먹고 나서 차를 마시며 앉아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때, 나도 모르게 몹시 놀라 황망히 일어나 그를 맞으러 나갔다.

그가 바로 룬투였다. 나는 첫눈에 룬투인 것을 알았지만, 내가 상상하고 있던 룬투는 아니었다. 그는 키가 무척 자랐으며 붉고 둥글던 얼굴은 이미 누렇게 변하였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주름살이 부쩍 늘었다. 눈은 그의 아버지와 비슷하였지만 눈두덩이 부어서 불그레하였다. 바닷가에서 농사를 짓노라면 종일 바닷바람을 쏘여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머리에 낡은 털모자를 쓰고 몸에는 아주 얇은 솜옷을 한 벌만 걸쳤을 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꾸러미와 긴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 손도 전에 내가 기억하고 있던 붉고 통통한 손은 아니었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루쉰(魯迅)

갈래 : 단편 소설

성격 : 감상적, 체험적

제재 : 20여 년 만에 돌아간 고향에서의 일

주제 : 발전 없이 변화만 보이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지은이가 고향에 돌아가서 보고 느낀 점을 쓴 것으로 문명의 발달을 따르지 못하고 가난 속에 머물러 있는 고향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줄거리 : 나는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이천여 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20여 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다. 고향에 오니 그 곳은 나의 어렸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살아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발전된 것도 없이 모두 변화되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제 고향을 영영 이별하기 위하여 왔는데, 어머니는 떠나는 것이 몹시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웃과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나는 어렸을 적 같이 놀던 룬투가 보고 싶었다. 룬투도 내 얘기를 자주 했다고 했다. 룬투는 우리 집의 농사일을 도와주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마침내 룬투가 왔지만, 그는 몹시 변해 있었다. 옛날처럼 정겨운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가난 속에서 아주 현실적이 되어 있었으며, 내게도 존대말을 사용하였다. 그 곳 사람들은 모두 나를 옛날 사람이 아닌, 출세해서 달라진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얻어가기를 바랐다. 그런 모습은 내게는 몹시 역겨웠다. 나는 고향을 떠나는 배 안에서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생가하며 구슬픔에 잠겼다.

내용 연구

선실(船室) : 배에서 사람이 타고 가는 방

선창(船窓) : 선실에서 밖을 내다보도록 만든 창

제도 기구(製圖器具) : 기계나 건축물 등의 도면을 만들 때에 쓰는 도구

황망(惶忙)하게 : 어리둥절하여 매우 급하게

도대(道臺) : 청나라 때 행정 구역의 하나인 '도(道)'의 장관(長官)을 일컫는 존칭어

팔인교 : 여덟 사람이 메는 큰 가마

이해와 감상

소설집 <방황>에 수록된 작품으로 1919년 그가 북경에서 고향에 돌아와 가사를 정리할 때에 얻은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비하여 감상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에 볼 수 있는 가치관의 혼란 상태를 잘 그려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고향을 찾는 처음 부분과 고향에서 있었던 일의 중간 부분을 옮겼다. (출처 : 김용직 박문수 저 대일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노신(魯迅)

(병)Lu Xun (웨)Lu Hsun.

1881. 9. 25 중국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紹興]~1936. 10. 19 상하이.

20세기 중국문학의 거장으로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예재(豫才).

초기생애

루쉰의 어린시절 이름은 장서우[樟壽]였고 수런이라는 이름은 1898년 난징[南京]의 학교에 입학할 때 가지게 되었다. 광서(光緖) 11년에 동생 저우쭤런[周作人:1885~1966]이 태어났다.

루쉰은 어렸을 때 서당 선생에게서 역사서나 유교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책을 보거나 베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중국 고대의 목판화집 〈북평전보 北平箋譜〉·〈십죽재전보 十竹齋箋譜〉를 정전둬[鄭振鐸:1897~1958]와 공동으로 다시 새겨 출판하는가 하면 독일 메에펠트의 소설 〈시멘트〉의 그림, 소련의 판화집 〈인옥집 引玉集〉, 독일 콜비츠의 판화집 등 외국의 새로운 판화를 복사하여 출판함으로써 중국에서 새로운 판화를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같은 그의 회화 지향은 이미 소년시대부터 싹튼 것이었다.

그가 13세 때 가정의 중심이자 경제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체포·투옥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친지가 관리시험을 치를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시험관에게 뇌물을 건네주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현지사(縣知事)와 중앙정부 관리까지 지냈던 할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의 일가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생활은 갑자기 곤궁해졌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병약하여 당시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어머니의 장신구 등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약을 사왔지만 아버지는 결국 그가 16세 때 사망했다.

그의 첫번째 소설집 〈눌함 喊〉의 자서(自序)에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씌어 있다. "누구라도 평온한 가정으로부터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상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은 2년 후 18세가 된 그는 8원의 학비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난징으로 갔다.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닦기 위해서였다.

학업과 성장기

그는 원래 학비를 면제받는 해군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육군학교 부설 노광학당(路鑛學堂)으로 전입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어를 공부했고 물리·지질·광물·지리·역사·그림·체조 등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서양식 과목에 접하게 되었다.

루쉰이 난징에 있는 동안 읽은 책 중 후일 특히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그즈음 출판되어 평판이 좋았던 옌푸[嚴復:1853~1921]의 〈천연론 天演論〉(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발췌·번역하여 군데군데 역자 자신의 의견을 삽입한 것)으로서 여기에 담긴 진화론학설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의 법칙성이 국제사회 속의 중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민족적·국가적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화론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중국을 혁명하여 '신생'(新生)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전진의 염원이 청년 루쉰을 다그쳤다. 바로 이 때문에 루쉰은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중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봉건적·전근대적 의식구조를 집요하게 파헤쳐 비판하고 공격했다.

1902년 22세 때 노광학당을 졸업하자 일본에 유학하여 8년에 걸쳐 도쿄[東京]와 센다이[仙台]에 체류했다. 그는 처음 2년간 중국유학생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도쿄의 홍문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와 교양과정을 배웠고 24세 때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째 되던 해 그만두고 도쿄에 돌아와 문학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의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정에 관해서도 〈눌함〉의 자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세균학강의에 영화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남을 때에는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것도 보여주었다. 마침 러일전쟁 때였기 때문에 시사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때로는 그와 같은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포들과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를 위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수당하는 동포와 그것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많은 동포들이었다. 모두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체로 무지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훌륭하고 건장해도 바보같은 구경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데에는 문예가 가장 적당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의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갔다."

루쉰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웠는데 도쿄로 돌아와서도 '독일협회학교'에 다니면서 독일어 공부를 계속했고 레크럼 문고의 세계문학을 읽었다. 특히 유럽이나 동유럽의 문학, 그 중에서도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 등 당시의 약소·피정복 민족의 문학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조국인 중국과 마찬가지로 약소하고 압박받는 민족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즉 다른 약소민족의 문학을 통하여 중국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공감의 계시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귀국과 공무원 생활

선통(宣統) 1년(1909) 그는 8년 간의 일본유학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항저우[杭州] 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쳤으나 다음해에는 사오싱 중학교의 교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1911년 가을 후베이 성[湖北省]의 우창[武昌]에서 혁명이 일어나 곧바로 전국에 파급되어 각지의 청조(淸朝) 지배기구는 속속 무너졌다. 사오싱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도독(都督:지방군권 장악자)에 의해서 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도독을 비판하는 신문을 냈기 때문에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신문에 루쉰은 하이네의 시를 번역하여 실었다. 또 이즈음 그의 첫 소설인 문어체의 단편 〈회구 懷舊〉(1913년 3월 〈소설월보 小說月報〉에 게재)를 저술했다.

1911년 혁명으로 청조가 쓰러지고 다음해인 1912년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는데, 그는 고향 선배이자 새 정부의 교육부를 관장하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의 초청으로 교육부 관리로 임용되었다. 이해 5월 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그도 베이징으로 이사하여 그후 15년 간 교육부관리로 사회교육국에 근무했다. 1918년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의 베이징 생활 역시 '적막감'의 연속이었다.

베이징 시절 초기 그는 공적으로는 교육부 일을 보면서 틈이 나면 개인적으로 오래된 탁본을 모아 그것을 베껴쓰거나 오래된 소설집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이 '적막감'에 사로잡힌 영혼의 고통을 마취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즉 혁명 후의 정치불안과 공포분위기를 잊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외형적으로야 어떻든 실질적으로는 중국이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불안만 가중된 현실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 것이다. 혁명 후 실권자가 된 것은 청조를 배반한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고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제정(帝政)을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려 했고 심복을 부려 제정 부활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자의 입을 막기 위해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정부 관리가 잡담중에 반대의견을 흘리기라도 하면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 그때 루쉰이 탁본을 모으고 그것을 베껴쓰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암살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동생인 저우쭤런은 쓰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때때로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시 그가 받았던 마음의 충격이 마치 후유증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로 계속된 그의 문필활동을 볼 때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인간적인 민족애를 한층 확고히 해주고 나아가 다음 단계의 싸움을 자극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자선집 自選集〉(1932)의 서문에서 "절망이 허망하기는 희망과 마찬가지이다"라는 헝가리 시인 베트피산더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문인으로서의 출발

1918년 친구 첸셴퉁[錢玄同]이 루쉰을 방문하여 잡지 〈신청년 新靑年〉에 기고할 것을 권했는데 이 잡지의 5월호에 루쉰은 단편소설 〈광인일기 狂人日記〉를 실었다. 이것이 루쉰이 작가로서 출발한 첫번째 작품이다.

〈신청년〉은 본래 〈청년잡지 靑年雜誌〉라는 이름으로 1915년 9월에 창간되었다가 1916년부터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어 베이징대학의 문과학장 천두슈[陳獨秀:1879~1942]가 주재하고 베이징대학 교수 몇 명이 동인으로 편집에 참여했던 종합적 계몽잡지로서 '문학혁명'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정식 문장에는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정통 문학용어 또한 문어였다. 그러나 문어는 고어(古語)로서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1917년 1월 미국 유학중에 있던 후스[胡適]는 〈신청년〉에 기고한 〈문학개량추의 文學改良芻議〉라는 글에서 구어(口語)가 아니면 오늘날의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다음해 같은 잡지에 천두슈는 후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용어는 물론 내용의 측면에서도 옛 문학의 무사상성(無思想性)을 통렬하게 공격하고 앞으로의 문학은 평이한 표현을 사용하여 사회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문학혁명론 文學革命論〉을 발표했다. 그후로 〈신청년〉은 '문학혁명'의 본산이 되어 다른 동인들도 구어문학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이 잡지에 속속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신청년〉의 주요주제는 봉건적 국민의식의 변혁을 지향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막 성립된 민주공화제를 다시 군주제로 되돌리자는 낙오된 의식의 비근대성을 비판·시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두슈는 문학혁명을 이끄는 것은 '민주'와 '과학'의 양대 지주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같은 목표와 관련하여 중국 봉건사회를 2,000년 이상이나 윤리·사상적으로 구속해오던 '유교'의 권위는 새로운 민주 중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청년〉은 국민의식 속에서 민주와 과학을 추진하기 위해 유교주의를 격렬하게 비판·공격했다. 예로부터 확고부동한 권위를 누리고 있던 문어를 부정하고 구어문학을 정통으로 하는 '문학혁명론' 역시 봉건사회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신청년〉은 후스의 구어문학 주장을 곧바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그것을 '문학혁명'이라는 한층 정치적인 표어로 바꾸어 제기한 것이었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후스와 천두슈의 구어문학이나 '문학혁명' 주장을 최초로 실천한 작품이다. 구어적 표현을 채택한 이 작품은 유교의 억압적인 도덕이 '사람이 사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이것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대담하게 말한 내용으로, 결말은 "어린이를 구하라"는 말로 맺고 있다. 중국의 장래를 위해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은 유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루쉰은 〈광인일기〉에 이어 〈공을기 孔乙己〉·〈약 藥〉·〈풍파 風波〉·〈고향 故鄕〉 등의 단편소설을 〈신청년〉에 계속 발표하여 '문학혁명'이 제창하는 작품의 가능성을 실천했다. 특히 1921년 베이징의 신문 〈천바오 晨報〉 부록판에 연재된 〈아Q정전 阿Q正傳〉은 신문학의 승리를 확인하고 또한 작가 루쉰의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설은 '아Q'라는 날품팔이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봉건적인 중국사회가 만들어낸 민족적 비극을 풍자하여 전형화(典型化)한 것인데, 독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아Q 기질에 충격을 받았고 이 작품은 곧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루쉰은 수필 〈나는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 속에서 "나는 병든 사회의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로부터 소재를 찾았다. 그 의도는 질병과 고통을 거론하여 치료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데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루쉰 소설의 일반적 특징을 스스로 서술한 것이라 하겠다.

루쉰은 소설과 병행하여 평론성을 지닌 짧은 수필을 계속 집필했다. 그중에는 날카로운 풍자와 격렬한 공격을 통해 전근대적인 병든 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을 파헤친 것이 많았다. "지상에는 본래 길이 없고 그곳을 걷는 사람이 많으면 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 현실의 보수적 습속을 통렬하게 비판·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평론성을 띤 수필을 그는 '비수' 혹은 '투창'에 비유하고 있다.

1926년 3월 18일 외교문제에 관해 정부에 청원하려는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있었는데 호위병이 이 행렬에 발포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루쉰은 그 날을 '민국 이래의 가장 어두운 날'이라 하여 사망자에 대한 애도와 학살자에 대한 분노를 글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군벌정부는 사상탄압을 강화하고 많은 진보적 예술인을 체포하려고 했다. 루쉰은 베이징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신하여 샤먼대학[廈門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곳에 4개월 간 머물다가 다음해 1월에는 광저우[廣州]의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겼다. 중산대학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국민당과 합작하고 있던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그 동조자에 탄압을 가했는데 그가 가르치던 학생도 다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진보파라고 간주되던 그 자신도 감시를 받아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그해 10월 비밀리에 상하이로 탈출하여 그곳에 죽 머물면서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했던 자신의 수필집을 교정·편집하기도 하고 신문과 잡지에 익명으로 반정부적인 단평(短評)을 써나갔다.

루쉰이 상하이에 막 도착했을 때 문학계에서는 '혁명문학'이 널리 제기되는 중이었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주장으로 발전하여, 일부 청년문학가들은 소련의 좌익문학론을 받아들여 활발한 논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한 국민당 정부의 파쇼정치 강화와 함께 문학계는 대부분 좌익화의 경향으로 치달아 1930년에 ' 중국좌익작가연맹'[左聯]이 출범했는데 루쉰은 그 발기인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 1월에 좌련에 속한 청년작가 6명이 체포되어 비밀리에 살해되었고 루쉰 또한 그들과 교류했다 하여 위험에 처하자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아파트에 일시적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1932년말 국민당 정치의 민중탄압 격화에 항의하여 '민권보장동맹'(民權保障同盟)이 성립하자 루쉰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1933년 6월 동맹의 간사장(幹事長)이 대낮에 저격당하여 죽고 루쉰도 또한 암살명단에 올라 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그는 아파트 방에 틀어박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집필활동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폐병에 걸렸다. 그는 1936년 10월 19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이때 학생과 시민 조문객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그의 관을 덮은 것은 '민족혼'이라는 검정 글씨가 쓰여진 흰 천으로서 상하이 시민대표가 증정한 것이었다. 그는 '만국공묘'(萬國公墓)의 한 구석에 안치되었다.

작품

루쉰은 본래 단편작가로서 그의 단편은 제1소설집 〈눌함〉(15편, 1923 초판)과 제2소설집 〈방황 彷徨〉(11편, 1926)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소설활동을 개시함과 동시에 평론적인 수필을 썼으며 소설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 단평·수필을 계속 집필했다. 그러므로 양적으로는 소설보다 수필이 훨씬 많다. 수필집으로는 〈열풍 熱風〉(1925)·〈화개집 華蓋集〉(1926)·〈화개집 속편〉(1927)·〈이이집 而已集〉(1928)·〈삼한집 三閒集〉(1932)·〈이심집 二心集〉(1932)·〈남강북조집 南腔北調集〉(1934)·〈위자유서 僞自由書〉(일명 〈불삼불사집 不三不四集〉, 1933)·〈준풍월담 准風月談〉(1934)·〈화변문학 花邊文學〉(1936)·〈차개정잡문 且介停雜文〉(1937)·〈차개정잡문 2집〉(1937)·〈차개정잡문말편(末編)〉(1937) 등이 있다. 뒤에 열거된 3권은 사후에 출판된 것으로 부인 쉬광핑[許廣平]이 편집한 것이다.

이외에 초기 일본 유학중에 쓴 것을 포함하면 논문집 〈분 憤〉(1927), 산문시집 〈야초 野草〉(1927), 회고문집 〈조화석습 朝花夕拾〉(1928), 역사소설집 〈고사신편 故事新編〉(1936)이 있고 베이징대학에서의 강의를 정리한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처음에는 상·하권으로 나누어 출판되었음. 1925 합정조판, 1930 개정판)과 소설사 관계자료집 〈소설구문초 小說舊聞〉(1926) 등이 있다.

또 이상에 열거한 수필집에서 빠진 단문과 시(구체시와 신체시)를 묶은 〈집외집 集外集〉(1935)과 역서의 서문이나 부기(附記), 서간 등을 모은 〈집외집습유 集外集拾遺〉(죽은 후 1938년 〈루쉰전집 魯迅全集〉에 수록)가 있다. 루쉰의 서간집으로는 부인 쉬광핑과 결혼 전에 주고받은 서간집 〈양지서 兩地書〉(1933)가 있고 루쉰 자신이 친지에게 보낸 것은 쉬광핑 편 〈루쉰 서간 魯迅書簡〉(1946)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루쉰은 1912년 5월 5일 최초로 베이징에 온 날부터 죽기 전 날인 1936년 10월 18일까지 25년에 걸쳐서 메모 형식의 일기를 썼는데, 자신이 직접 쓴 원고의 사진판(1951)과 그것에 의거한 활자본(1958)이 있다. 단 1922년분이 분실되어 완전하지는 않다.

루쉰에게는 외국문학의 번역서도 많다. 일본 유학중에 일본어와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이 두 외국어 역서는 〈루쉰역문집 魯迅譯文集〉(10권, 1958)에 수록되어 있다. BIE| 增田涉 글 | 廉丁三 참조집필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노신의 생애와 작품 세계

시대의 어둠을 사르던 불꽃

동양권에서 세계문단의 명성을 얻고 명작의 대열에 낀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겐 《아Q정전(阿Q正傳)》으로 유명한 중국의 노신은 그 많지 않은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뛰어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 교육자로서도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노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고뇌의 중국인 지성을 대표한다.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인 과도기에 그는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시대의 선각자였다.

노신(魯迅)은 1881년 9월 25일(음력 8월 3일), 절강(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성내(城內)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 자(字)는 예재(豫才)로,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했던 필명이다.

노신 집안의 조상들은 원래 호남성(湖南省) 도주인(道州人)인데 노신의 14대조 때에 농민으로 소흥에 이주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점차로 부를 축적했으나 노신이 태어난 당시에는 약간의 논밭과 점포를 소유하고, 조부가 한림편수(翰林編修)로서 북경(北京)에 나아가 관리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봉건 소지주의 가정이었다.

노신은 6세 때부터 가숙(家塾)에 들어가 초보적인 독서를 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1세 때는 삼매서옥(三昧書屋)에서 수경오(壽鏡吾)라는 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집에서는 증조부에게서 글을 배웠다. 유년시절의 노신의 성품은 근면한 편에 속했으며, 가숙이나 서당에서의 규정된 공부 외에도 중국의 고서와 야사 등을 즐겨 읽었고, 어린시절부터 조부나 유모를 통해 듣던 민간전설과 설화 등은 노신의 관심을 끌었다. 이외에도 소년 노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안고촌(安稿村) 외가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사희(社 )>(1922)에는 그 무렵 생활의 일단이 회고되어 있다. 여름철에 외가에 놀러 갔다가 마을 소년들과 천진난만하게 놀던 일이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노신은 "그곳은 내게 있어서는 천국이었다. 모두들 오냐, 오냐 해 주었고 질질사간(秩秩斯干), 유유남산(幽幽南山)(《시경》의 한 구절)을 외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술회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노신은 마을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문댁 도련님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복한 생활은 노신이 12세 되던 해에 조부가 투옥되고, 그로 인해 아버지 백의(伯宜)가 중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뒤바뀌고 만다. 주씨 집안은 이 투옥 사건을 계기로하여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고, 노신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거의 매일을 전당포와 약방을 출입하게 된다. 전당포는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 물건을 저당잡히기 위해서였고, 약국은 의원이 처방해 주는 약을 사기 위해서였다. 훗날(일본 유학에서 현대의학을 배운 이후) 노신은 그 고생이 속임수 같은 한의 때문이라고 술회하는데, 그 회고담은 그의 첫 작품집인 《납함( 喊)》(1923)의 자서(自序)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창작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명천(明天)>(1920)은 바로 그 기억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3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장남인 노신은 새로운 삶의 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의 타격, 특히 처음부터 곤궁했던 것이 아니고 갑작스레 그리 된 것이기 때문에 노신에겐 낙원의 상실이 굴욕감과 더불어 보다 강하게 의식되었고, 그것이 다시 응어리가 되어서 뒷날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노신의 작품 세계에서 보이는 깊숙한 비애와 어둠은 주로 그의 불행한 소년기에 키워진 비관적인 정서와 의심적인 기질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개인적 환경은 당시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노신을 입신양명을 꿈꾸던 명문댁 도련님에서 열렬한 문학혁명의 전사(戰士)로 변모시키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근 백년 간의 중국의 역사는 영국을 선두로 하는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떨어지는 역사인 동시에 중국민족이 그러한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해방사이고, 열강을 따라 잡으려는 근대사의 역사였다. 특히 노신의 전 생애와 맞물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사회는 암흑의 구름으로 뒤덮인, 절망으로 충만된 시대였다. 아편전쟁 이후 계속 심화되어 온 정치, 사회적 혼돈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중국 사회와 중국 민족은 단말마(斷末魔)의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유교적인 폐습이었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 내의 폐단으로 인한 국민성의 후진성이야말로 근대화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인들을 더 깊은 나락의 절망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국민정신을 계몽하고,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1919년 5·4운동이라는 문화혁명(신문화운동)으로 심화,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노신은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문학'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자기 민족의 낡은 사상과 의식을 불태우고, 시대의 어둠과 절망을 넘어서려고 애쓰던 '정신계의 전사'로서 일생을 일관하게 된다.

문학의 길을 향하여

근대 중국 사회가 서구 문명과의 접촉으로 근대화에 눈을 뜰 무렵, 집안의 몰락으로 정통적인 입신의 길이 막혀 버린 노신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위해 무술변법(戊戌變法)이 나던 해인 1898년 그의 나이 17세 때 남경(南京)으로 가 강남육사학당(江南陸師學堂) 부설의 광로학당( 路學堂)으로 전학을 해 거기서 4년간 노신은 물리, 수학 등 근대 과학의 기초를 배우며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학교에서의 정규교육 외에 당시 중국의 식자들간에 널리 읽히고 있던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진화와 논리》 번역)을 통해 진화론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진화론에의 개안(開眼)은 노신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의 구습에 얽매여 있는 중국 민족의 낙후된 정신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노신은 이 시기에 유신파(維新派)에 의해 간행되던 「시무보(時務報)」와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것을 널리 소개했던 「역서강편(譯書江編)」 등을 통해 서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접하게 된다. 이 잡지는 189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신잡지로, 주로 서구의 서적을 번역하여 실었다. 노신은 이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뒤마의 《춘희》 등이었다고 한다.

 

노신은 1901년 말에 광로학당을 졸업하고 바로 다음 해인 21세 때,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동경의 홍문(弘文)학원 속성과에 입학한다. 그곳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노신은 일본어를 배우며 철학과 문학에 관한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며, 혁명집단인 '광복회(光復會)'에도 출입하게 된다. 이 때에 그는 '국민성'에 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일본의 유신(維新)이 서양의 의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고 1904년 가을 동경을 떠나 센다이[仙臺]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노신은 의학에 관한 전문적 지식의 습득 외에도 정치 모임에 자주 참가하면서 더한층 정치적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며, 서서히 문학의 길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유명한 '환등(幻燈)사건'으로 인해 노신은 의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환등사건에 관한 일화와 그 충격으로 인한 문학에의 결심은 노신의 첫 작품집인 《(납함)의 자서(自序))에서 그 일면을 잘 엿볼 수 있다. 노신은 환등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같은 낙후된 국민에게는 건강한 체격보다 강한 국민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통감한다. 그래서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데 문예를 통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문예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작업으로 노신은 동인 잡지 발간을 계획한다. 1907년 노신은 동경에 있던 몇 명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신생(新生)」이라는 문예잡지의 출판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 20대의 젊은 중국 유학생들의 의욕과 패기는 인력과 재력의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노신은 이 문학활동의 실패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만 곧 극복하고 <마라시역설(摩羅詩力說)>,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등의 논문과 몇 편의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여 자신의 문학생활의 첫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8년 노신은 혁명적 논객인 장병린(章炳麟)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강의를 듣게 된다. 손문, 황흥과 함께 신해혁명의 삼종(三宗)이라 일컬어지는 장병린은 국학자로서의 성망도 있고 해서 당시 혁명 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지식인과 학생들 간에 손문 이상으로 컸다. 노신은 동생인 주작인(周作人), 허수상(許壽裳), 전현동(錢玄同)과 함께 학자로서의 장병린에게 접촉한 셈인데 '전투적인 문자이야말로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구적인 업적'이라고 <태염선생(太炎先生-장병린)에 대해서>에서 말할 정도로 그 감화는 지대했다. 노신은 장병린과 사귀면서 그들 조직인 '광복회'에도 자주 출입하게 되는데 그 가입 여부는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8년여에 걸친 유학시절은 노신의 최초의 문학활동 시기였으며, 초기 사상의 중요한 형성시기였다.

중국 신(新)문학의 선구

1909년 노신은 귀국해서 항주(杭州)의 양급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인 1910년 여름에 고향인 소흥으로 돌아와서 소흥 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1911년 이른바 신해혁명이 폭발하고 노신은 소흥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다음해인 1912년 남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육총장이 된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에 따라 교육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노신은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원세개(遠世凱)의 제정부활운동, 장훈(張勳)의 복벽(複壁)사건 등을 통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흐르자 크게 실망한다. 1912년에서 <광인일기>를 발표하게 되는 1918년까지는 노신의 생애를 통해 사상적으로 가장 고난에 빠진 시기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사고와 심사의 시기였다. 그는 중국사회와 사상에 관해 깊이 관찰하고, 중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서적에 관한 고증과 수집, 금석비첩(金石碑帖)과 불경의 연구 등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신해혁명의 붕괴로 심한 혼란에 빠진 노신은 새로운 중국 혁명상의 재건을 고대하며 절망과 침묵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노신에게 있어 청년기의 반항없는 문학활동의 실패와 그 뒤를 이은 어두운 조국의 현실은 심한 정신적 방황과 고뇌를 가져 왔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아가 다시금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윤리적, 의지적인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정신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황과 고뇌를 뚫고 나온 작품이 바로 노신의 처녀작이자, 백화체(白話體-구어체) 문장으로 씌어진 중국 최초의 신소설인 <광인일기>였던 것이다.

중국문학이 비록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줄곧 경시되어 왔다. 명청시대(明淸時代)에 백화소설(구어체로 된 소설)이 많기는 하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창조정신이 결여되었고 새로운 사상도 없이 묘사하는 신변잡기식 이야기였다. 따라서 진정한 신소설은 신문학운동 이후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깊은 자극을 준 것은 번역을 통한 서양사상과 문학의 영향이었다. 청일전쟁 후 변법운동(變法運動)이 대두했던 때에 한편으로는 유럽의 사상과 문학이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양서적의 변역은 그 전부터도 있었지만 종래의 그것은 양무(洋務)운동이나 기독교의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었는데, 이 무렵에 와서는 사상과 문학의 분야까지 넓혀졌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엄기도(嚴幾道-嚴復), 임서(林緖),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주작인 등은 문학, 사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이들의 문학혁명과 문체개혁, 서구문학의 번역소개는 새 세대들에게 문학에 흥미를 갖게 했으며, 중국 신문학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양문학의 특성을 새삼 인식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지식인들 머릿속에 수입된 합리주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유교사상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개혁에 관한 의기당당한 거센 물결은 곧 5·4운동의 고조를 맞이하면서 전국을 석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을 통한 현대문학의 기원이 된 것은 노신의 소설들이었고 특히, 백화로 씌어진 소설로 1918년 「신청년」지에 발표되었던 <광인일기>였다.

노신은 이 백화체의 문장으로 씌어진 새로운 구성의 소설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어온'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 '너희들, 지금 곧 개심하라. 진심으로 개심하라 알겠는가.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된단 말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뒤에 전국적으로 백화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 출현하였으며, 이에 중국의 오래 전통문학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현대문학이 그 넓은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광인일기>와 문학혁명

노신의 <광인일기>는 당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진영으로부터의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노신의 작품 중 가장 현실에 대한 고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내용과 형식의 과감한 파격성으로 인해 중국의 젊은 지식인 세대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작품은 13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기체 형식이다. 흘인(吃人-먹는 사람). 피흘인(먹히는 사람), 박해자, 피박해자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피해망상자의 형상을 통해서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내의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단과 피해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다.

<광인일기>는 어느 날 밤 달을 보고 '이제까지 30년 이상이나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인의 이상심리-광인은 각성하였으나 유교이념의 강력한 조직에 묶여 있는 정상인들과는 괴리감을 느낌-를 통하여 암흑 속에 있는 중국사회 전체를 고발한 작품이다. 광인의 눈에 비친 사회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남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잡아먹히지 않으려 하므로 서로 의심을 품고 흘끗흘끗 상대방을 감시하고 있는' 세계이다. 광인은 4천년에 걸친 중국 봉건사회의 역사책 속에서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해 내고, '인간을 잡아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구하라'고 호소한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비유이지만, 노신이 광인의 눈을 통하여 본 중국사회는 그처럼 헤어날 길 없는 구조적 병폐에 갇혀진 암흑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회의 일원임을 실감한 나머지 '아이들을 구해라……'하고 부르짖기에 이르는 광인의 정신적 변화는 바로 작가인 노신 자신의 정신적 체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일본 유학시절 진화론과 니체, 바이런 등을 통해서 접한 서구 근대정신사조의 영향으로 홀로 각성하여(이 때 중국의 현상에 대하여 '잡아먹힌다'는 공포를 자각한다) 개혁의 의지를 품고 스스로가 '팔을 힘차게 흔들며 한 번 외쳐서 이에 응답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게 할 수 있는' 정신계의 전사라는 임무를 떠맡아 문예활동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헛되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더욱이 자신이 무한한 열의를 가지고 지지하였던 신해혁명조차도 무력하게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탁본(拓本)의 수집, 연구 등에 파묻혀 스스로를 마비시켜 오던 작가 자신이, 광인이 '나도 누이동생의 고기를 먹었다'고 하는 죄의 자각에 도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의 체험을 통하여 '잡아먹힌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속해 있는 중국사회의 도피할 길 없는 암흑의 구조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문학자로서의 자각을 얻어 '아이들을 구해라……'고 하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상적, 관념적인 반항과 행동의 정신계의 전사는 그처럼 자신을 시대의 저변에 편입시키는 근원적인 선택에 의해 다시금 실재하는 중국민족과 밀착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문학자로 탄생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노신의 창작행위는 중국사회의 엄연히 가로놓여 있는 절망의 소재에 대한 현장 검증에 바쳐지게 된다.

중국의 현상에 뿌리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노신은 '문학혁명' 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붓을 들게 되고,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인생을 위한',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작품을 발표한다. 노신은 1918년 <광인일기>로부터 1925년의 <이혼>에 이르는 8년여 동안 많은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일련의 작품들은, 비평적 선도에 의해 열려진 문학 혁명 이념을 작품상에 나타낸 최초의 작품군이었다. 이 작품들은 시기별로 각각 창작집인 《납함( 喊)》(1923)과 《방황(彷徨)》(1926)에 수록되는데 특히, 첫 창작 소설집인 《납함》(싸움터에서 양쪽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 함성)에 실린 작품들은 문학전사로서의 노신의 투철한 비판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구지식인의 몰락과 나태한 근성을 지적하여 경향심을 불러일으켰던 <공을기(孔乙己)>(1919), 미신과 무지로 인한 중국인의 병폐를 일깨워 준 <약>(1919)과 <명천>, 농촌생활의 암담함과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고향>(1921) 등의 시대 고발적인 일련의 작품들은 문학혁명가로서의 노신의 열정을 대중에게 알리며, 문학인으로서의 노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신의 이름을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Q정전(阿Q正傳)>일 것이다.

<아Q정전>과 정신승리법

<아Q정전>은1921년 12월에서 다음해 2월에 걸쳐 주간 「신보부간(晨報副刊)」에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노신의 이름을 불후한 것으로 만든 대표작이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 시기의 농촌생활을 제재로 하여 이 시기의 중국 농촌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쳐 아Q라는 품팔이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중국민족의 나쁜 근성을 지적하여 국민성을 각성시키려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노신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견하고, 희망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몰려 소외되고 탈락되고 짓눌린 자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낸 것이다.

아Q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더구나 신해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타성의 사회에서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으면서 부질없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디어는 무기력하고 비겁한 노예근성으로 돌아가 그 최후를 공허하게 끝마치는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아Q의 성격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다혈질이다. 그는 자손심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우매무지하다. 그러나 아Q의 성격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관념의 흐름은 '정신승리법'이다. 노신이 아Q를 통하여 예술상의 '정신승리법'을 끌어 낸 것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깊은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공허한 영웅주의와 무력한 패배주의에 침식되어 자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고, 타개치 못하는 민족적 위기에 살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물질생활의 군데군데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정신적인 만족에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청나라 정부와 한(漢)민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청나라 정부는 그들의 실패를 변명하고 감추면서 조정의 위엄을 계속 유지, 봉건 통치를 완고히 함으로써 허영과 거만한 욕구를 채운다. 이러한 상류사회의 기풍이 반봉건성, 반식민지의 중국사회에 만연되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즉, 실제는 모든 것에 패하였으면서도 정신적인 승리에 만족하는 기풍이 하나의 국민성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국민성에 대한 것을 노신은 철저하게 증오하게 된 나머지 아Q라는 인물을 내세워 심히 채찍질을 한 것이다.

아Q는 비겁하다. 상대를 비교해 보아 더듬거리는 놈에게는 욕을 하고 기운이 약한 놈은 때린다. 그러나 혼나는 때가 더 많다. 왕털보한테 혼이 나고 저항력이 없는 젊은 여승에게 취하는 행동, 힘이 없는 소D에게 우쭐되며 깔보는 것은 그의 비겁한 행동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노신은 중국 민족성의 병폐요, 비겁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아Q는 정신승리법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매를 맞아도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놀림을 받고 있는지도 생각지 않고 도리어 마음속으로는 우월감에 차 있다. 아Q는 자존심이 강하다. 그가 비록 품팔이 일꾼에 지나지 않으나 미장(未莊)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조대감을 비롯한 지주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존경의 빛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아Q식의 정신승리법을 노신은 일찍 깨닫고 문예를 무기로 삼아 깨닫지 못한 대중을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Q주의'는 피압박 사회에서 하나의 교활한 대응 방법이다. 민족의 치욕을 건망하고 병을 앓으면서도 의사를 기피하고, 남의 뒤를 따라 공연히 뇌동하고 약자에겐 잔인, 강자에겐 아첨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지난 날의 영광을 과장해 환상에 젖어 있는 자기 민족에 대한 맹혹한 질책인 것이다. 특히, 마지막 아Q의 처형 장면은 노신의 자기 민족에 대한 노여움, 분노, 쓸쓸한 동정 등의 우울한 물결의 파장을 전해준다. 이 〈아Q정전〉은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는 국민의 나쁜 면만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급진적인 세력으로부터는 적극적인 생산 농민을 묘사하지 않고, 룸펜 농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데서 각각 비난과 질시를 받았다. 하지만 〈아Q정전〉은 이러한 국수주의와 이데올로기의 논란을 넘어서 문학적 영역으로 승화된, 중국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걸작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암흑 속에서 광명의 미래를

노신은 1926년 두 번째 소설집인 《방황》을 출판한 이루로는 소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는 수단으로 문예활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잡문(雜文)을 주로 발표한다. 그리고 1927년 상해(上海)에 와서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상해에서의 10년 동안, 노신은 두 번 북경을 다녀온 외에는 줄곧 상해에서 보낸다. 상해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노신은 9권의 잡문집과 역사소설인 《고사신편(新古事編)》을 출간했고, 문예이론, 장편, 단편소설, 동화 등을 번역했으며, 소련과 독일의 신흥목각(新興木刻)을 소개했고, 신문학운동을 제창했으며 세계 언어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행동적인 면에서는 '중국 자유운동 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노신의 문학세계는 이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대로 분수령을 이룬다. 노신의 전기시대가 단편시대라면 후기는 잡감문(雜感文)의 시대이고, 전기가 계몽적이고 사실적인 인생문학이라면, 후기는 사회비판과 문학비평을 전제로한 정치문학이다. 전기작품에는 전통적인 애수와 낭만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지만 후기작품은 맵고 신 정공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노신은 후기에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인간혁명, 제도혁명에 전념하게 되고, 비판문학의 영역으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만년의 노신은 중국의 고리키라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지병으로 병상에 드러누우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던 노신은 1936년 10월, 55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항일 통일전선 조직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단을 통일하기도 했다.

노신의 작품들은 대개 짤막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사상성과 예술성으로 인해 그 생명력은 어느 작품보다도 길다. 노신의 문학은 혁명을 위한 문학이지만,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향기롭고 위대한 문학이다. 노신이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말뿐인 지식인 작가의 허위가 아닌,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뜨거운 정열,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노신의 문학세계는 어둡다. 그것은 노신을 둘러싼 현실이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절망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신은 그 절망 속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자기확인을 통해 발전적인 의지로 승화시킨다. 노신의 작품 중 하나인 <고향>의 마지막 장면에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이 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에게 있어 희망은 이처럼 묵묵히 다져진 좌절감 위에 비로소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아Q정전>에서도 노신은 아Q의 혁명을 비참하게 좌절시킴으로써 아Q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얻도록 했던 것이다. 중국이 희생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의 길은 바로 아Q의 절망서부터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신이 암흑속에서 광명의 미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열렬한 애정에서 기인한다. 노신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이글거리던 민족애야말로 그의 문학세계에 희망을 잉태시킬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가장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 격동기를 살며 열렬한 민족애로 일관했던 노신. 그는 민족의 병근(病根)을 노출시킴으로써 과거의 어두운 체험으로부터 계몽하는 일을 피부로 느끼고, 앞날의 행복을 드러내 놓기보다는 과거의 고통을 쫓아 현재를 움직이며 미래를 예언하던 시대의 선각자요, 민족혼이었다.(출처 : 삼성출판사 세계 문학대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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