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답주인가
by 송화은율고공답주인가
아아! 저 양반아! 돌아앉아 내 말 듣소.
어떠한 젊은 손이 셈없이 다니는가?
주인님 말씀을 아니 들어 보았는가?
나는 이럴망정 외방의 늙은 종이
공 바치고 돌아갈 때 하는 일 다 보았네.
우리 댁 세간이야 예부터 이렇던가?
전민이 많단 말이 일국에 소리 나데.
먹고 입는 드는 종이 백여구 남았으니,
무슨 일 하느라 터밭을 묵였는가?
농장이 없다던가? 호미 연장 못 가졌나?
날마다 무엇하려 밥 먹고 다니면서
열나무 정자 아래 낮잠만 자는가?
아이들 탓이던가? 우리 댁 종의 버릇 보노라면 이상하데.
소 먹이는 아이들이 상마름을 능욕하고,
진지하는 어린 손들 한 계대를 기롱한다.
삐뚤린 제급 뫃고, 딴길로 제 일하니,
한 집의 많은 일을 누가 힘써 할까?
곡식창고 비었거든 고직인들 어이 하며,
세간이 흩어지니, 옹기인들 어이 할까?
내 왼 줄 내 몰라도 남 왼 줄 모를런가?
풀치거니 맺히거니, 헐뜯거니 돕거니.
하루 열 두 때 어수선 핀 것인가?
밖별감 많이 있어야 외방마름 도달화도
제 소임 다 버리고, 몸 꺼릴 뿐이로다.
비 새어 썩은 집을 누가 고쳐 이으며,
옷 벗어 무너진 담 누가 고쳐 쌓을까?
불한당 구멍 도적 아니 멀리 다니거든
화살 찬 수하상직 누가 힘써 할까?
크나큰 기운 집에 상전님 혼자 앉아
명령을 뉘 들으며 논의를 뉘와 할까?
낮시름 밤근심 혼자 맡아 계시거니,
옥 같은 얼굴이 편하실 적 몇 날이리?
이 집 이리 되기 뉘 탓이라 할 것인가?
셈없는 종의 일은 묻도 아니하려니와
도리어 생각하니, 상전의 탓이로다.
내 생전 외다 하기 종의 죄 많컨마는
그렇다 세상 보며 민망하여 여쭙니다.
삭꼬기 말으시고, 내 말씀 드르소서.
집일을 고치거든 종들을 휘어잡고,
종들을 휘오거든 상벌을 밝히시고,
상벌을 밝히거든 어른 종을 믿으소서.
진실로 이리 하시면, 가도 절로 일겁니다.
요점 정리
작자 : 이원익(李元翼)
연대 : 조선 선조 때
성격 : 풍유적, 교훈적, 계도적, 경세적
구성 :
기 - 상전(임금)의 말을 듣지 않는 종과 머슴들(신하)을 꾸짖음
승 - 어른 종(영의정)의 말을 듣지 않는 상전에게 충고함
전 - 집안(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의 중요성
결 - 종들을 휘어잡는 방법
주제 : 고공가(雇工歌)의 답가로 임진왜란 직후 나태하고 파당적 행위를 하는 이기적인 관리들의 정치적 행태를 비판 / 기울어진 집안 살림을 일으키는 방도
표현 : 집안일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비유의 기법이 사용됨.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농사짓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빗댐, 3·4조, 4음보의 율격으로 이루어짐, 허전의 '고공가'에 답하는 형식이지만, 나라의 형편이 기울게 된 원인을 신하의 이기적인 행태에만 초점을 맞춘 '고공가'보다 사태에 대한 분석력이 더 뛰어남.
내용 연구
아아! 저 양반아! 돌아앉아 내 말 듣소.
어떠한 젊은 손이 셈없이 다니는가?
주인님 말씀을 아니 들어 보았는가?
나는 이럴망정 외방의 늙은 종이
공 바치고 돌아갈 때 하는 일 다 보았네.
우리 댁 세간이야 예부터 이렇던가?
전민이 많단 말이 일국에 소리 나데.
먹고 입는 드는 종이 백여구 남았으니,
무슨 일 하느라 터밭을 묵였는가?
농장이 없다던가? 호미 연장 못 가졌나?
날마다 무엇하려 밥 먹고 다니면서
열나무 정자 아래 낮잠만 자는가?
아이들 탓이던가? 우리 댁 종의 버릇 보노라면 이상하데.
소 먹이는 아이들이 상마름을 능욕하고,
진지하는 어린 손들 한 계대를 기롱한다.
삐뚤린 제급 뫃고, 딴길로 제 일하니,
한 집의 수한[많은] 일을 누가 힘써 할까?
곡식창고 비었거든 창고를 지키는 사람인들 어이 하며,
세간이 흩어지니, 옹기인들 어이 할까?[왜적의 침입으로 인해 국가재정의 파탄]
내 왼[잘못된] 줄 내 몰라도 남 왼 줄 모를런가?
풀치거니 맺히거니, 헐뜯거니 돕거니.
하루 열 두 때 어수선 핀 것인가?[당파의 이익을 위해 상대당과 싸우기도 하고 결탁하기도 하는 어지러운 정국을 보여줌]
외별감[바깥 별감, 지방에서 보내던 임시 벼슬] 많이 있어야 외방사음[바깥 마름을 부리지 않음] 도달화[조선 시대에, 공노비를 부리지 않는 대신에 그 종에게서 세금 받는 일을 맡아 보던 벼슬아치]도
제 소임 다 버리고, 몸 사릴 뿐이로다.[소임을 잊고 제 몸만 살려는 무관들]
비 새어 썩은 집을 누가 고쳐 이으며,
옷 벗어 무너진 담 누가 고쳐 쌓을까?
불한당 구모 도적[왜적] 아니 멀리 다니거든[왜적의 침입에 대한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화살 찬 수하상직[국방의 의무] 누가 힘써 할까?
크나큰 기운 집에 상전[마누라]님 혼자 앉아
긔걸[명령]을 뉘 들으며 논의를 뉘와 할까?
낮시름 밤근심 혼자 맡아 계시거니,
옥 같은 얼굴이 편하실 적 몇 날이리?
이 집 이리 되기 뉘 탓이라 할 것인가?
헴없는 종의 일은 뭇도 아니하려니와[자신보다 아래인 신하나 임금 모두에게 잘못이 있음]
도리어 혜여하니[생각하니], 상전[마누라]의 탓이로다.
내 항것[주인, 상전] 외다 하기 종의 죄 만컨마는
그렇다 세상 보며 민망하여 삷나이다[여쭙니다].
삿꼬기 마르시고[새끼 멈추시고], 내 말씀 드르쇼서.
집일을 고치거든 종들을 휘어잡고,
종들을 휘오거든 상벌을 밝히시고,
상벌을 밝히거든 어른 종을 믿으소서.[임금이 신하를 휘어 잡고, 상벌을 분명하게 하며, 높은 지위의 대신을 신뢰할 때, 즉 임금의 올바른 통치에 의해 국가의 재건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진실로 이리 하시면, 가도[집안의 도] 절로 닐니이다[일어설 것입니다].
이해와 감상
조선 중기에 이원익(李元翼)이 지은 가사. 허전(許唆)이 지은 〈고공가 雇工歌〉에 화답한 가사이다. ‘고공답가(雇工答歌)’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명신이던 이원익이 지었다 하며, 순조 때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잡가 雜歌≫라는 노래책에 실려 전한다.
〈목동문답가 牧童問答歌〉·〈만언사 萬言詞〉·〈사녀승가 思女僧歌〉 등과 함께 문답가 계열의 가사에 해당된다. 〈고공가〉에 화답하는 노래답게 비유적인 표현방법을 주로 썼으며, 제재와 주제, 문체와 기교 등에서도 상응하는 수법을 택하였다.
이 작품은 한 국가의 살림살이(체제와 형편)를 농사짓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하여 제시한 것이다.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에게 왜 ‘마누라’의 말씀을 듣지 않느냐고 비난하고, 이어서 ‘마누라’에게는 ‘어른 종’을 믿으라는 요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은 나라일에 태만한 신하, 곧 허전이 〈고공가〉에서 비난한 바 있는 그런 부류의 신하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고, ‘마누라’는 선조를, ‘어른 종’은 작자 자신을 포함한 당대의 고관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즉, 조선의 백성이 천하에 으뜸인데, ‘드난 종’ 곧 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는 신하들이 텃밭을 묵혀놓은 채, 밥만 먹고 정자 아래서 낮잠만 자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태만함을 꾸짖는다.
그 다음, ‘소먹이는 아이들’ 곧 지방관청의 이속들이 ‘마름’ 곧 지방관청의 수령들을 능욕하니, 한 집 곧 나라의 숱한 일들을 할 자가 없을을 탄식한다. 그리하여 곡식창고는 비게 되고 세간은 흩어지고 살림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탄식한다. 곧 나라의 형편이 궁핍화된 현실을 한탄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외별감’·‘외방마름〔外方舍音〕’·‘도달화(都達花)’ 등 곧 변방을 지키는 무관들마저 맡은 임무에는 소홀하고 제 몸만 사리고 있으니, 누가 힘써 나라를 방어할 것인가! 임진왜란의 상처로 크게 기운 집주인, 곧 선조는 밤낮 근심 속에 편할 날이 없다.
이는 ‘헤아림 없는 종’ 곧 몰지각한 신하들 탓도 있겠지만, ‘마누라’ 곧 임금님 탓이 더 크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집안 일’ 곧 나라일을 고치려거든 ‘종’들 곧 신하들을 휘어잡아 상벌을 밝히고, ‘어른 종’ 곧 작자를 포함한 정승·판서 등을 믿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가도(家道)’ 곧 나라의 형편과 도리가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는 충언(忠言)을 담은 것이다. 〈고공가〉에는 나라가 기운 원인을 신하들의 직무태만으로 단순하게 보았으나, 이 작품은 사태를 보다 자세하게 분석한 다음, 신하들의 충간(忠諫)만 들어준다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雇工歌 및 雇工答主人歌에 對하여(金東旭, 趙潤濟博士 回甲紀念論文集, 196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이원익 李元翼 [1547~1634]
본관 전주. 자 공려(公勵). 호 오리(悟里). 시호 문충(文忠).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저작(著作)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등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절사를 따라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좌랑(戶曹佐郞)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郞) ·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582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를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1587년(선조 20)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기용되어, 대사헌 ·호조 및 예조의 판서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란길에 호종하고,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95년 우의정에 올라 진주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598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을 변호하다 사직, 은퇴하였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영의정을 지내면서 수차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던 중, 1615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는데, 1619년(광해군 9) 풀려나왔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는 80세의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마지막으로 퇴사, 낙향하였다.
그는 1608년(선조 41)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이를 실시케 하였고, 불합리한 조세(租稅) 제도를 시정, 국민의 부담을 덜었으며, 안주목사로 있을 때는 군병방수제도(軍兵防水制度)를 개혁, 1년에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 법제화시켰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기도 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남인에 속했으나 성격이 원만하여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오리문집(梧里文集)》 《속 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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