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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 일기(癸丑日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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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 일기(癸丑日記)

 

요점 정리

작자 : 어느 궁녀(宮女)

연대 : 광해군(光海君) 5년(1612) 이후

갈래 : 궁정 수필

표현 : 전아하고 중후한 궁중어 사용

문체 : 내간체, 산문체

성격 : 기록문학, 궁중 수필, 일기체 수필

별칭 : 서궁록 또는 서궁일기

의의

 

1,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 비사를 그린 3대 궁중 문학의 하나이다.

2, 순수 고유어를 써서 문학성이 높으며, 전아 중후한 궁중어가 풍부하다.

3, 조선 중기의 궁정에서 전개되는 인정, 풍속과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출전 : 낙산재 문고 필사본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계축일기'는 광해군 5년에, 광해군이 그 이복 동생 영창 대군의 생모 인목 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서궁)에 가두고, 영창 대군을 강화로 내쳐 죽인 비극을 적은 글이다.

 

이 사건을 목격한 궁중 나인의 기록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건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거기에는 궁중의 생활상과 인정, 풍속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대개 우리의 고전은 한문투가 아니면, 고사 인용 등이 많은데, '계축일기'는 순수한 고유어, 특히 중후한 궁중어를 사용하였다. 영창 대군이 역모하였다는 무고로 인해 쫓겨나는 장면이 섬세하고 사실적인 태도로 기술되어, 피비린내 나는 궁중 비극의 한 단면을 보는 듯 생동감이 있다.

심화 자료

'계축일기'의 내용

인목 대비는 김제남의 딸로, 선조의 첫 왕비 박씨가 선조 33년에 승하하매 2년 후 선조 51년 때 계비가 되었는데, 선조 36년에 정명공주를 낳고, 39년에 영창 대군(영창 대군)을 낳았다. 초비 박씨의 몸에는 일점의 혈육도 없고, 후궁들의 몸에서 자녀를 두었던 바 후궁의 하나인 공빈 김씨의 2남 광해군 휘가 일찍 세자가 되었다.

선조가 57세로 승하하니, 즉시 광해주가 즉위하여 임해군을 죽게 하고, 그 후 무옥 사건이 종종 일어나매, 그의 혐의병은 더욱 심했는데, 광해군 5년에는 마침 서양갑(서양갑) 등의 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명문의 서자들이 천대받음에 반항하고 그 무리를 모아 한 폭력단을 이루어 재물을 빼앗다가 포도청에 잡혔는데, 이이첨이 그 무리의 한 사람인 박응서를 꾀어 인목 대비의 부친인 김제남 부자와 영창 대군과 그 소속 나인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인목 대비는 서궁(서궁:대한문 안에 있는 궁)으로 쫓겨나가 있다가 폐비가 되어 청춘 시절을 다 보내고 늦게야 인조 반정을 만나 복위되었다. 궁중실기 문학으로 본다.

'계축 일기'의 문학적 특징

 

'계축일기'의 내용중 서궁 유폐 사건 이전은 사실(史實) 위주로 치밀한 필치인데 반해, 그 이후는 개별적 일화 위주의 나열식 보고 형식이다. 이것은 두 사람 이상의 작자가 썼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작자는 인목대비 쪽 궁녀이고, 제작 연대는 인조 반정 후이다. 그러므로 내용 중 특히 광해군에 대한 시각은 편파적일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작품의 사실과 허구에 대한 평가의 여지가 있다.

1. 저술의도는 광해군을 패륜아로 몰아서 자신들의 억울했던 지난날을 보다 강하게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줄기로 인물과 사건을 과장하고 편파적으로 표현했다.

2. 인물 설정은 고전 소설처럼 극단적인 선과 악으로 대비된다. 성립 연대가 인조 반정 직후로서 대비는 승자입장이고, 광해군은 패자 입장에서, 자신들을 피해자로 광해군쪽은 가해자로 자신들이 유리한 대로 과장하여 인물을 묘사했다. 왕조실록에 광해군은 포악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고 유약한 여성적 기질로, 인목대비는 꿋꿋하고 남성적인 소유자로 나타났다.

3. 궁녀의 입장에서 사실대로의 서술도 가능했겠지만, 창작 의식이 가미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허구화했으므로, 단순한 제목 그대로의 일기보다는 허구성이 강하다.

계축일기

 

조선시대 수필형식의 기사문(記事文)으로 필사본. 1책. 《서궁록(西宮錄)》이라고도 한다. 1613년(광해군 5:계축년)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궁중비사를 기록한 글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문체와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인목대비 자신이 쓴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계축일기》는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둘러싼 당쟁을 중후한 궁중어로써 사실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묘사보다는 서술에 중점을 두고 있어 당시의 치열한 당쟁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보조 자료가 된다.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모반하려 한다는 무고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으로 쫓겨나 폐비가 되며, 그 뒤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11년 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는 이른바 궁중비사이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중문학으로서 소설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인정 및 생활상을 잘 보여준 점, 한문고사를 피하고 순우리말을 구사한 점, 중후하고 전아한 궁중어와 문체를 남긴 점 등은 다른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광해군

 

조선의 제15대 왕(재위 1608~1623)으로 휘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의(俎)가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정권(戚臣政權)에 대한 의도는 사류사회(士類社會)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책동으로 임해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24년 서인 이귀(李貴)·김류(金帝)·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이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단행하여 이이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옮겨져 1641년(인조 19)에 죽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내치(內治)로는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 호패제(號牌制)를 실시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경 방비와 외교에 주력하였다.

1619년 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지방을 공격하여 명(明)나라의 출병요구가 있을 때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외교정책을 실시하였다.(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영창 대군(1606-1614)

 

조선조 선조의 유일한 적자. 이름은 의. 어머니는 인목대비. 선조가 만년에 얻은 적자로 그 보호를 위하여 조선 중신 7명에게 유서까지 남겼으나, 선조 승하 직후 당쟁의 희생물로 광해 5년 강화에 유배,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됨.

인목대비(1584-1632)

 

선조의 계비. 본은 연안 김씨, 영창대군 사건 이후 서궁에 유배되었다가 인조 반정 후 대왕대비가 되었음.

계축일기(癸丑日記 )

 

조선 중기 작자 미상의 기사문(記事文). 1책. 필사본. 원제목은 ‘ 계 累 일긔 ’ 이다. 인목대비 폐비사건이 시작되었던 1613년(계축년, 광해군 5)을 기점으로 하여 일어난 궁중의 비사(秘事)를 인조반정 뒤 대비의 측근 나인 또는 그 밖의 사람이 기록한 수필형식의 글이다. 작자에 대하여는 종래의 통설인 대비의 측근 나인이라는 설 외에 대비자작설과 정명공주 ( 貞明公主 )와 그의 나인들의 합작이라는 설이 있다.

필사본으로는 낙선재본(樂善齋本) 〈 계 累 일긔 〉 와 홍기원본(洪起元本) 〈 서궁일기 西宮日記 〉 의 두가지가 전하는데, 두 책 모두 원본이 아니며, 내용을 비교해 보면 이전에 원본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 서궁일기 〉 의 내용이 〈 계축일기 〉 외에 다른 것이 합철되어 있어 완전한 이본이라고도 할 수 없다. 또, 이긍익 ( 李肯翊 )의 ≪ 연려실기술 ≫ 에도 〈 서궁일기 〉 가 나오는데, 그것은 현존 〈 서궁일기 〉 와는 다르고, 현존 〈 계축일기 〉 와 같은 이본이 아니었던가 한다. 낙선재본도 6 · 25때 없어졌으므로 ≪ 조선역대여류문집 ≫ 에 영인된 것으로 상고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목대비는 김제남 ( 金悌男 )의 딸로 19세 때 51세인 선조의 계비(繼妃 :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가 되어, 선조 36년 정명공주를 낳고, 39년 영창대군 의(永昌大君 簫 )를 낳았다. 첫째 부인 박씨(朴氏)에게는 혈육이 없었다. 선조는 후궁들의 몸에서 자녀를 두었는데,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소생인 둘째 아들 광해군이 일찍 세자가 되어 세력을 잡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항상 영창대군을 의식하였고, 선조가 57세로 죽자 광해군은 즉위하여 친형 임해군 ( 臨海君 )을 죽였다.

그뒤 무옥사건(誣獄事件)은 계속 일어났고, 광해군의 의심하는 병은 더욱 심해 갔다. 계축년에 서양갑 ( 徐羊甲 ) 등의 사건이 발생되었다. 그 사건은 당시 명문의 서자들이 천대받음에 반항을 하고 무리를 모아 폭력단을 이루어 재물을 빼앗다가 포도청에 잡혔다. 이 때, 이이첨 ( 李爾瞻 )이 그 무리 중의 한 사람인 박응서 ( 朴應犀 )를 꾀어서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배반을 꾀한다고 거짓으로 꾸미어 고소하였다.

그런 조작극으로 김제남 부자와 영창대군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인 덕수궁 안에 있는 경운궁 ( 慶運宮 )으로 쫓겨나가 폐비가 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그뒤 인목대비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청춘을 다 보낸 뒤 11년만에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

〈 계축일기 〉 의 문학적 가치는 〈 한중록 恨中錄 〉 · 〈 인현왕후전 仁顯王后傳 〉 과 더불어 삼대 궁중문학으로서 소설 문학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그밖에 궁중 비사를 그려 일반백성과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그 내막을 알게 하여 후일을 징계하는 역사적 가치도 있다.

이 작품은 작자가 섬세한 여인인 만큼 궁중생활을 속속들이 파고들어서,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인정 · 풍속 · 생활상을 순 우리말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중후하고 법도에 맞는 궁중어와 문체를 후세에 남겼음은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 계축일기 〉 연구에서 작자 문제는 앞으로도 이설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학계에 소개된 인목대비의 술회문과 편지글, 또는 정명공주의 능통한 문장력을 감안하면, 정명공주가 관여했다는 설이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 또한, 종래에 소설로 간주한 견해는 잘못이며, 사실의 기록인 만큼 넓은 의미에서는 수필로 보는 면도 타당하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을 기록문학 또는 수기문학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光海君日記, 朝鮮歷代女流文集(閔丙燾 編, 乙酉文化社, 1950), 校註 癸丑日記(姜漢永, 靑羽出版社, 1957), 李朝女流文學과 宮中風俗의 硏究(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癸丑日記硏究(閔泳大, 崇田大學校, 1977), 癸丑日記新攷(金一根, 國語國文學 55 ∼ 57, 197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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