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창작과비평
by 송화은율창작과비평
: 1966년 발간된 계간지. 1980년 강제 폐간. 1985년 출판사 등록 취소. 백낙청, 주간 염무웅 강제 해직. 주간 이시영 구속(1989), 1975년 봄·여름호 연속 판금. 시집 [국토](조태일), [한국의 아이](황명걸), 이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대설 남(南)] 판금 등으로 수난을 겪기도 함. 소설가 김정한, 이문구, 황석영, 송영, 윤흥길, 조세희, 박태순, 현기영, 시인으로 김지하, 조태일, 민영, 김남주, 정희성 등의 문인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96년 현재 1만 7천여부가 팔리는 국내 최대부수의 잡지이기도 하다.
[문화인터뷰] 창간정신 바탕, 신세대 관심사 적극 수용
백낙청(58, 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씨가 창비를 창간한 66년은 그의 나이 28세되던 해였다. 당시 그는 패기에 찬 권두평론 “문학은 현실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하며, 현실 구성원이 처한 위기(crisis)를 반영해야 하고, 나아가 그 구성원 대다수의 복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창비의 사시(社是)처럼 돼 그후 일관되게 창비가 잘못된 현실에 맞서온 힘이 돼왔다.
▵문 : 30년에 걸친 격동의 세월동안 창비가 나름대로 우리 .사회의 교사역을 자임해 왔는데 자부심이 남다르겠습니다. (이하, 이헌익 문화부차장)
▵답 : 교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창비의 의견을 주장하고 설득해 왔다는 게 보다 정확하겠군요. 70년대 유신하에서는 학교나 언론이 바른 말을 못하는 상황이어서 거기서 못하는 것을 하자는 사명감을 가진 건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수난이 거듭됐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①진지하게 사상을 모색하는 글, ②제대로 된 문학을 소개하는 것, ③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글, 이 세가지가 편집방침이라는 것입니다.
▵문 : 도전적인 편집방향이 알려지면서 창간호에 대한 반향이 컸지요
▵답 : 2천부를 찍었는데 1천 5백부가량 나갔으니까 성공적이었지요.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창간 1년 여가 지난 67년 여름부터 방영웅 씨의 장편 <분례기>가 연재되면서였어요. 고정 독자가 많이 생겼지요. 시인 김수영씨가 생각납니다. 당시 어느 출판사가 유명 문인들을 필자로 망라한 호화판 계간지를 창간했어요. 그때 어느 문인모임에서 김씨가 자신의 글도 실린 그 잡지를 비판하기를, ‘라이터는 론손, 만년필은 파커가 최고하는 식의 하나마나한 글만 실려 틀렸다.’고 했어요. 그때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창비는 생각이 분명해 꼭 성공할 것’이라며 치켜세우던데 그렇게 됐나요.
▵문 : 창비가 40대 이상에게는 어떤 향수어린 대상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만 주독자층일 그 밑세대에게는 딱딱하고 골치아픈 잡지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변화를 줘야되지 않을까요.
▵답 : 창비는 문학·문학비평을 중심으로 문학과 사회과학 또는 문학과 인문과학의 소통문제에 쭉 관심을 둬왔습니다. 그것도 시국문제와 연결해서 다뤘지요. 이재 정치·경제 상황이 많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관심사항도 변했으니 거기에 발을 맞출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시류에 영합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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