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문예전문지 조선문단(朝鮮文壇)
by 송화은율조선문단(朝鮮文壇) : 1924년 (동인지 아닌) 최초의 문예전문지, 총 26회 발간
* 구성 : 방인근(方仁根)의 출자, 편집 및 경영으로 <이광수 주재(主宰)>라는 표제를 내걸고 출범했다. [개벽]이 박영희, 김기진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문학세력의 동인적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처럼, [조선문단]도 이광수, 방인근, 전영택, 주요한 등을 중심으로 동인적 구성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인지? 문예전문지?
춘원과 늘봄(전영택)과 나는 문예잡지를 하나 하기로 의논되었다. 동인을 네 사람으로 하는데 요한 하나를 더 넣고 자본은 날더러 대라는 것이다
--- 방인근, ‘문단 교우록’ [문예] 제3호(1949)
☞ 최초의 구상은 동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인지적 협소성을 초월하려는 시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간호부터 10호까지는 준(準)동인지적 편집을 보였으나, 그 이후부터 <이광수 주재>라는 표지를 삭제하고 범문단적 문예지로서 체제를 갖추려 했다. { 1), 2) 참조 }
1) 문학창작론, 문학개설류 수록
* 이광수 <문학강화>, 주요한 <시작법>, 김억 <시작법>, 김동인·염상섭 <소설작법> 및 <소설강화> 게재로 문학창작 의욕의 고취와 창작 기술의 향상을 도모
2) 신인 현상추천제 실시
* 최서해, 채만식, 임영빈, 한설야, 박화성, 진우촌, 김병호, 송순익, 계용묵 등
[개벽]과 [조선문단]의 의의
① [개벽]이 ‘문예면’을 두어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 [조선문단] 창간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② 두 잡지가 동인지적 편협성을 초월하려한 최초의 상업적 월간지였다.
③ 이전의 문예지가 단명했던 것에 비해, 비록 중간에 휴간, 정간된 적이 있었으나 비교적 장기간을 누렸다.
④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수준의 <문단적 권위>를 누렸다.
⑤ 1920년대 중반 이후의 한국문단을 양분(兩分)했다.
--- 이에 대한 절충주의는 <문예공론>(양주동)
[개벽]은 사회주의 노선, [조선문단]은 민족주의적 노선을 대변하고 있었다. [개벽]은 [조선문단]지의 문학활동을 <예술지상주의 및 부르조아 문학운동>이라고 공격하자 [조선문단]은 이광수, 염상섭, 박종화, 현진건, 김억, 나도향, 방인근 등이 참여, <작품합평회(作品合評會)>란을 통해 민족주의적 입장을 드러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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