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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스위프트(Jonathan Swift)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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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스위프트(Jonathan Swift) / 신현철 옮김

 

 

제 1 부

나의 아버지는 노팅엄셔 지방에 조그마한 소유지를 가지고 계셨으며, 나는 5형제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캠브리지의 엠마누엘 대학에 나를 보냈다. 그 곳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열심히 공부에 전념하였다. 얼마 안 되는 나의 학비였지만, 우리 집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으로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런던의 유명한 외과 의사인 제임스 베이트의 견습공이 되어, 4년을 보내게 되었다. 가끔씩 아버지가 보내 주는 얼마간의 용돈으로 나는 여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항해술과 수학 분야의 지식을 배우는 데 썼다.

나는 언젠가는 여행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항상 믿고 있었다. 나는 제임스 베이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거기서 아버지와 삼촌인 존, 여러 친척들의 도움으로 40파운드의 돈을 얻을 수 있었고, 네덜란드의 도시 라이덴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매년 30파운드의 돈을 보내겠다는 약속도 받게 되었다. 그 곳에서 나는 2년 7개월 동안 물리학을 공부하였는데, 오랜 기간의 여행에는 물리학이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라이덴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훌륭한 선생 베이트 씨의 주선으로 에브라함 파넬 선장이 있는 스웰로우 호의 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와 함께 나는 3년 6개월 동안 동부 지중해와 그 밖의 다른 지역으로 한두 번씩 항해를 하였다. 다시 돌아온 나는, 베이트의 권유로 런던에서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여러 명의 환자들을 나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나는 오울드 쥬리에 있는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였다. 주위의 권고를 따라서 뉴게이트 거리에 살고 있는 양말 상인 에드먼트 버튼의 둘째 딸 메리 버튼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결혼 지참금으로 4백 파운드의 돈을 가져왔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베이트 선생도 죽었으며, 주변에 친구도 별로 없었기에, 나의 사업은 점차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왜냐 하면 주위의 동료 의사들이 행하고 있는 사기 행위를 나의 양심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주인공의 성격이 양심적이며, 이상주의자임이 암시된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자만이 세상의 편견과 부패, 무능에 대해서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내 그리고 가까운 몇몇의 친구들과 상의한 끝에 다시 배를 타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커다란 배 두 척의 담당 의사가 되었으며, 6년 동안 인도와 서인도 제도를 여러 차례 항해하여 많은 돈도 모을 수 있었다.

가끔씩 여유가 있을 때에는, 위대한 저자들이 남겨 둔 좋은 책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인공이 공상을 좋아하며 낯선 나라의 풍속과 언어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이는 주인공의 항해와 모험에 대한 복선(伏線)이 된다)육지에 상륙하였을 때에는 그 지방의 낯선 언어를 배우기도 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풍습과 기질을 관찰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손쉽게 모든 것을 익히곤 했다.

마지막 항해에서 별로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바다가 싫증이 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내와 가족들을 데리고 집에서 지내려고 생각하였다. 오울드 주리에서 페터 레인으로 이사를 하였다가 다시 위핑으로 옮겨 갔다. 선원들 가운데에서 몸이 아픈 환자를 찾아 사업을 확장시키려 하였지만, 모든 일들이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점차로 나아지겠지 하면서 3년 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남대양을 항해하려는 앤틸로프 호의 윌리엄 프리처드 선장으로부터 매우 좋은 조건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1699년 5월 4일, 우리는 브리스톨에서 출발하였다(구체적인 일시를 밝힘으로써 이번 항해가 대단히 의미 깊은 항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나라에의 황당 무계한 여행이라는 허구에 그럴듯한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트릭 trick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항해는 무척이나 순조로워 보였다.

남대양에서 겪은 우리의 모험담을 너무 상세하게 이야기를 해서 독자들을 괴롭히는 일은 좋지 않을 것이다.(앞으로 전개될 모험담은 남대양에서 겪은 모험담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이니, 독자들이 이 모험담을 흥미진진하게 읽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한편 이에 액자 소설의 앞 부분이 끝나고 본격적인 이야기로 접어든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다만, 남대양에서 동인도로 항해하던 중에 심한 폭풍을 만나, 밴 디맨스랜드 서북쪽으로 밀려갔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관측을 통해 우리는 남쪽 위도 30도 부근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원들 가운데 열두 명이 힘든 노동과 나쁜 음식 때문에 죽었으며, 그 나머지의 선원들도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그 때는 11월 15일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여름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 날은 아침 안개가 잔뜩 끼어서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선원들은 1백 미터 가량 앞에 있는 바위를 발견하고 피하려 하였지만, 바람이 너무나 거세게 불어 왔기 때문에 배는 암초를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와 함께 6명의 선원이 보트로 옮겨 타고, 간신히 난파당한 배를 벗어났다. 대략 5킬로미터 정도 노를 저어 갔으나, 이미 배가 난파당하기 전부터 완전히 지쳐 있던 우리는 도저히 더 이상은 저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밀려오는 파도에 운명을 맡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30분 정도가 지난 후, 북쪽에서 갑자기 불어 온 돌풍으로 우리가 타고 있던 보트는 뒤집히고 말았다. 나는 배가 파선될 때 뛰어내렸던 사람들이나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보트를 함께 타고 있던 동료들에게조차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 채 바람과 물결에 휩쓸리며 헤엄쳤다. 가끔씩 발을 내려 보았지만, 바닥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완전하게 힘이 빠져 버렸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발이 땅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변까지 이어지는 경사가 너무 완만하게 나 있어서 1천 6백 미터 정도를 더 걸어야만 했다. 그 때의 시간은 저녁 여덟시 가량 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8백 미터 정도를 더 걸어 나갔으나, 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한 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내가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는지 모른다. 탈진한 상태에다가 날씨도 찌는 듯이 더웠고, 배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마셔 두었던 반 병 가량의 브랜디 때문에 무척 졸립기도 하였다. 무척이나 짧고 부드러운 풀 위에 드러누웠다. 평생 동안 그렇게 깊이 잠들어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홉 시간 이상을 그렇게 누워서 잤다.

눈을 떴을 때에는 이미 해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워 있는 동안 나의 두 팔과 다리가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여져 있었던 것이다. 길면서도 숱이 많은 나의 머리카락도 풀리지 않도록 묶여져 있었으며, 겨드랑이부터 허벅지에 이르는 온몸 전체에도 몇 줄의 가늘고 긴 줄이 얽혀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햇볕이 뜨거워질수록 나는 점점 더 눈이 부셨다. 주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처럼 묶여 있는 자세로는 하늘밖에 볼 수가 없었다.

조금 후, 나는 왼쪽 다리 위로 살아 있는 무언가가 움직이며 조심스럽게 가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거의 턱에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눈을 아래로 힘껏 돌려서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12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키의 사람이 서 있었다. 손에는 활과 화살을 들었고, 등에는 전통(箭筒)을 메고 있었으며, 그 뒤로도 같은 크기의 사람 40여 명이 뒤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 놀라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그들은 깜짝 놀라 모두 달아났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들 중 몇 명은 나의 허리에서 뛰어내리다가 다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은 사람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용감하게도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서 몹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손을 높게 쳐들고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뚜렷한 목소리로, "헤키나 데굴!"이라고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으나,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몰랐다.

독자들이 잘 아다시피, 나는 계속해서 불편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운이 좋게도 몸을 뒤척이다가 묶은 것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줄을 끊을 수가 있었다. 나는 왼팔을 움직여서 땅에 박혀 있던 말뚝들을 뽑았다. 그것을 얼굴 가까이 쳐들고 보니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묶여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머리카락을 심하게 잡아당기는 아픔을 느꼈다. 나는 팔을 움직여서 머리의 왼쪽을 묶어 두었던 줄을 조금씩 늦추었다. 그렇게 해서 약 5센티미터 정도 고개를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사람들은 내가 잡기도 전에 다시 도망쳤다. 어디선가 아주 사납고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렸다. 고함 소리가 그치자 작은 사람들 가운에 한 명이 "톨고 포낙!"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나의 왼손을 향하여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바늘같이 조그마한 많은 화살이 손에 박혔다. 작은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많은 화살들을 하늘을 향해 쏘아대었다. 그 모습은 마치 유럽의 사람들이 대포를 쏘는 것 같았다.

많은 화살이 내 몸 위에 쏟아졌지만, 나는 느낄 수가 없었고 단지 몇 개만을 얼굴에 맞았을 뿐이었다. 나는 왼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나기와도 같았던 화살의 대공세가 그치자, 나는 몸이 몹시 아프고 신세가 처량해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묶여 있는 몸을 풀기 위하여 몸부림쳤다. 그들은 먼젓번보다도 더 많은 화살을 쏘아대었다. 몇 명은 창을 들고 허리를 찌르려고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물소 가죽으로 만든 상의를 입고 있었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밤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이미 왼손이 자유스러웠으므로, 나중에라도 몸을 묶은 줄을 손쉽게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정도 크기의 작은 사람이라면, 한꺼번에 군대가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거의 대등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그들은 더 이상 화살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작은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른쪽 귀에서 약 4미터 떨어진 곳에서 작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작업을 하는 소리가 한 시간 동안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나를 묶은 줄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머리를 돌려 보았을 때, 땅에는 약 50센티 높이의 연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곳에는 작은 사람 4명이 올라설 수 있을 만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올라오기 위한 사다리도 두세 개 세워져 있었다.

신분이 높게 보이는 사람이 연단으로 올라와 나에게 오랫동안 연설을 하였으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세 번씩이나 '랑그로 데훌 산.'(이 말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헤키나 데굴.'과 함께 내가 여러 번이나 들은 것이다.)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50여 명의 작은 사람들이 다가와 나의 머리 왼쪽을 묶었던 줄을 잘랐다.

그래서 나는 자유스럽게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연설하고 있는 사람과 그의 행동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중년 정도의 나이로 보였고, 호위하고 있는 다른 세 사람의 하인들보다 키가 컸다.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하인의 키는 나의 가운데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클 것 같았다. 나머지 2명은 그의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는 연설가의 면모를 훌륭하게 보여 주었다. 그는 여러 차례 위협적인 말을 하고 무엇인가에 대하여 약속도 해 주었으며, 나에게 동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나는 몇 마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왼손과 얼굴을 태양 쪽으로 돌려 그것을 증인으로 한다는 행동을 취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팠다. 배를 떠나기 몇 시간 전에 먹은 것 이외에는 음식을 구경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먹을 것을 달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대는 몸짓을 하였다. 후르고(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이 말은 군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나의 의도를 잘 이해하였다.

그는 연단에서 내려와 나의 허리 부근에 사다리를 갖다 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는 바구니가 나의 입으로 옮겨졌다. 많은 음식들은 이 나라의 현명한 국왕이 나의 소식을 듣고 마련한 것 같았다. 나는 먹을 것 가운데에 짐승의 고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양의 어깨나 다리, 그리고 허벅지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양념은 대체로 맛있게 되어 있었지만, 그 크기는 종달새의 날개보다도 더 조그마했다.

나는 한꺼번에 서너 덩어리씩 먹었으며, 총알만한 크기의 빵도 세 개씩을 한번에 먹어치웠다. 작은 사람들은 나의 엄청난 식욕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음식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싶다는 몸짓을 하였다.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 본 그들은 얼마되지 않는 물을 가지고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현명하게도 가장 커다란 물통을 쓰러뜨려 손이 있는 곳으로 굴려와서 뚜껑을 열었다. 그 물은 반 리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나는 단숨에 마실 수 있었다. 맛은 버건의 포도주와 비슷하였지만 더욱 달콤하였다. 두 번째 통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마셨다. 조금 더 달라는 시늉을 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내가 먹고 마시는 일을 끝내자, 작은 사람들은 매우 좋아하면서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나의 가슴 위로 올라온 그들은 함께 어울려 춤을 추면서, '해키나데굴.' 이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했다. 그들은 나에게 두 개의 물통을 아래로 던지라고 하였다. 하지만 던지기 이전에 먼저 밑에 있는 작은 사람들에게 "브라호 미보라!"라고 소리치면서 비켜 서 있으라고 하였다. 내가 물통을 공중에 던졌을 때, 모두가 "해키나 데굴."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몸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나는 손에 잡을 수 있는 40∼50명을 잡아 땅 위로 팽개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 전에 당했던, 소나기와 같은 화살의 기억도 있고 공손하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한 사실도 있고 해서, 그런 유혹을 떨쳐 버렸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경비와 우호로써 나를 대해 준 사람들을 상대로 악의를 가지고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음 속으로 나는 이처럼 커다란 생물을 보고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몸 위로 올라와서 걸어다니는 작은 사람들의 대담함에 놀랐다.

잠시 후 내가 더 이상 먹을 것을 요구하지 않자, 작은 사람들 중에서 국왕의 명령을 전하기 위하여 사절이 나타났다. 그는 오른쪽 다리의 잘록한 부분을 타고 올라왔다. 사절은 10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서 약 10분 동안 연설을 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화가 난 듯한 기색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굳은 결의로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가끔씩 손을 들어 앞 쪽을 가리켰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8백 미터 정도를 가면 작은 사람들의 도시가 있으며, 국왕이 대신 회의에서 이미 나를 그 곳으로 옮겨 가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몇 마디 대답을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풀려 있는 왼손으로(고관과 수행원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그들 머리 위로 조심스레 옮기며) 오른손과 몸, 그리고 머리를 가리키며 자유스럽게 해 달라는 몸짓을 하였다.

그는 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거절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저었으며, 손짓으로 내가 포로로서 끌려가야 한다는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렇지만 고기와 마실 것을 충분히 먹을 수 있고, 또한 아주 훌륭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그들의 뜻을 나에게 알리기 위하여 또 다른 몸짓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여 묶인 줄을 단숨에 끊어 버릴까 생각하였지만, 그들의 화살이 얼굴과 팔에 쏟아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살을 맞았던 자리에는 물집이 생겼다. 그리고 아직도 그대로 박혀 있는 화살이 많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모두 맡기겠다는 뜻의 신호를 보냈다. 후르고와 수행원들은 매우 예의바른 행동을 하면서 즐거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나는 '페플롬 셀란.'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의 왼쪽을 묶고 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굉장히 많은 양의 소변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소변을 보려고 하는 몸짓을 알게 된 작은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그들은 곧 양편으로 갈라져서 큰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오줌 줄기를 피했다. 이보다 얼마간 앞서서 그들은 향기가 나는 어떤 약을 얼굴과 두 팔에 발라 주었는데, 조금 지나자 화살을 맞았던 곳의 따끔거리는 통증이 없어졌다.

배가 부르고 소변도 보았으며, 나를 괴롭히던 아픔도 사라지자 여덟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잠이 들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 있는 의사들이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음식에 수면제를 섞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내가 육지에 이르러 잠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자, 그 사실은 급히 국왕에게 전해졌으며, 곧 대신 회의에서 나를 묶어 두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충분한 고기와 마실 것을 보내고 나서, 나를 그 나라의 서울로 옮겨 갈 준비를 하였다.

이와 같은 해결책은 어쩌면 매우 대담하고 위험스러운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유럽의 어느 왕도 이와 같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그것은 아주 너그러울 뿐 아니라 신중한 것이었다. 만약 작은 사람들이 내가 자고 있는 동안 창과 활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다면, 나는 먼저 화살의 통증에 잠이 깨었을 것이고, 몹시 화가 치밀어 묶어 둔 줄도 끊어 버렸을 것이다. 대항할 능력이 없는 그들은 나에게서 어떠한 용서도 바랄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사람들은 수학이 아주 발달하여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국왕의 장려에 의하여, 이들은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역학을 발전시켰다. 국왕은 통나무나 다른 무거운 것들을 옮겨 가기 위해 바퀴가 달려 있는 기계를 몇 개 만들도록 하였다. 때로는 2미터 70센티미터나 되는 커다란 군함을 목재가 있는 숲 속에서 만들어 3, 4백미터나 떨어진 바다까지 이것을 사용하여 끌어 내기도 하였다.

즉시 5백 명의 목수와 기술자들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것보다 더욱 거대한 기계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것은 땅에서 약 8센티미터 가량 올라가도록 하였으며, 길이가 약 2미터 10센티미터, 그리고 폭이 약 1미터 30센티미터의 몸체에 스물두 개의 바퀴를 달아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들었던 고함 소리는, 이 기계가 도착했을 때 작은 사람들이 지른 것이었으며, 내가 땅에 닿은 지 네 시간이 지난 다음부터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것은 내가 누운 것과 수평이 되도록 옮겨져 왔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일은 나를 기계 위로 올려놓는 것이었다.

이 작업을 위하여 30센티미터 높이의 장대 80개가 세워졌다. 다음에는 나의 목·팔·몸·다리 등을 붕대로 묶고 나서 그 끝에 갈고리를 달아 튼튼한 끈으로 잡아당기기 위해 9백 명의 건강한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 기계 위로 올려진 채 묶이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나중에 듣게 된 것인데, 그것은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내가 수면제로 인해 잠에 깊숙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키가 약 12센티미터 정도인 국왕의 말 1천 5백 마리가 나를 서울로 옮겨 가기 위해 사용되었다.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난 지 네 시간 가량 지난 후에, 나는 매우 재미있는 사건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기계에 어떤 고장이 나서 고치는 동안에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잠이 들었는지 보고 싶었던 2, 3명의 사람들이 몰래 나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 가운데서 호송 장교인 사람이 조그마한 창으로 왼쪽 콧구멍을 찔렀다. 마치 지푸라기로 그러는 것처럼 나의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나는 심하게 재채기를 하였다. 깜짝 놀란 그들이 재빠르게 도망치는 바람에, 나는 그처럼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게 된 이유를 3주일 후에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행진을 계속하였다. 밤이 되자, 작은 사람들은 5백명의 군사를 나의 양편에 세웠다. 절반 정도는 횃불을 들고 있었으며, 다른 절반은 화살을 끼운 활을 들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즉시 활을 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행진을 계속하였으며, 정오에 이르러 우리는 성문에서 2백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신들은 국왕이 나의 몸 위로 올라오는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나를 싣고 온 마차가 멈춘 곳에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수년 전에 그 곳에서 이상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믿음이 강한 작은 사람들에 의하여 불결한 곳으로 판정된 사원은, 모든 장식물과 가구를 옮긴 후 공회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이 건물에서 거주하도록 결정되었다.

북쪽으로 나 있는 커다란 문은 높이가 1미터 20센티미터였으며, 너비는 거의 60센티미터나 되었다. 나는 기어가는 자세로 이 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었다. 그 문의 양편에는 땅에서부터 약 15센티미터 정도의 높이에 조그마한 창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 왼쪽의 창을 통하여 국왕의 제련공들이 마치 유럽의 귀부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회중 시곗줄 만큼이나 굵은 쇠사슬 91개를 넣어서 만들어 낸 36개의 자물쇠에다가 나의 왼쪽 다리를 채웠다. 이 사원에서 마주보이는 길에는 대략 1미터 50센티미터 보다 더 높은 탑이 하나 서 있었다. 이 곳에서 국왕은 여러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나를 보기 위하여 높은 탑 위로 올라왔던 사람은 모두 10만여 명이 넘었다. 그리고 나를 감시하는 병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나의 몸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곧 나의 몸 위로 허락받지 않은 채 올라가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국왕의 제련공들이 나의 몸을 묶고 있던 모든 줄을 풀어 주었다.

나는 내 일생 가운데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가장 비참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내가 일어서서 걷는 모습을 보게 된 작은 사람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던 모습은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왼쪽 발에 채워진 쇠사슬은 약 2미터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나는 반원을 그리며 움직일 수도 있었다. 문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되는 곳에 묶여 있었기에 나는 안으로 기어들어가 사원 속에서 충분히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있었다. <후략> (출처 : 김봉군 최혜실 저 지학문학교과서)


요점 정리

작자 : 스위프트(Jonathan Swift) / 신현철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성격 : 여행기

표현 : 분석적. 풍자적 유머,

구성 : 전체 4부(여기에 인용된 것은 걸리버 여행기 중 1부)

제재 : 소인국, 거인국 등의 나라

주제 :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 -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

줄거리 :

총 4권, 1726년 간행. 주인공 걸리버가 항해 중에 난파하여, 소인국, 대인국, 하늘을 나는 섬나라, 말[馬]나라 등으로 표류해 다니면서 기이한 경험을 한다는 줄거리이다.

 

제 1 부 릴리파트 소인국(小人國) 기행

 

레뮤엘 걸리버는 케임브리지에서 의학과 항해술 및 수학 등을 수학한 뒤, 배의 전속 의사가 되어 항해에 나섰다. 그러나, 난파한 걸리버는 키가 6인치 정도인 소인이 사는 릴리파트 나라에 표류하여 도착하게 된다. 그 나라 또한 치열한 당파 싸움이 있었고, 이웃 나라 블레프스큐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는 국왕으로부터 의식의 공급을 받고, 잠시동안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왕비의 궁전에 화재가 있었을 때 오줌을 누어 불을 끈 사실과, 이웃 나라와의 전쟁에 적극적인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에 속이 검은 정치가들의 책동으로 반역죄의 재판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 그는 이웃나라로 탈출하여, 거기서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제 2 부 브로브딘나그 거인국(巨人國) 기행

 

다시금 항해에 나선 걸리버는 이번에는 거인의 나라에 표류하여 도착하게 된다. 그 나라에서 어느 농부에게 습득되어, 그의 딸 그람다르크리치의 애완 동물이 된다. 걸리버를 구경거리로 내놓아 농부는 수입을 올리지만, 이윽고 그 소식이 국왕에게 전해져 걸리버는 농부의 딸과 함께 왕궁으로 가게 된다.

 

국왕을 향해 영국의 정치와 경제 및 기타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 당시의 영국 현상이 드러나게 된다. 거인국에서는 전쟁이 없는 이상 사회를 목격하게 된다. 사소한 법조문을 가지고 영국처럼 다투지도 않는다. 그런 어느 날 큰 새가 걸리버를 넣어 둔 새장을 물고 하늘로 날아가는데, 그 새는 바다 위에서 새장을 떨어뜨렸다. 때마침 거기를 지나가는 배가 있어 귀국할 수 있었다.

 

제 3 부 바류타(날아가는 섬) 및 바르니바비 나라 등 기행

 

바르니바비 왕국의 상공을 비행하는 섬인 라뷰타 섬에서 걸리버는 이상한 성향의 주민들과 만나게 된다. 그들은 기하학과 음악에 열중하고 사색에 잠겨 있으며, 하인이 몽둥이로 감각 기관을 쳐서 자극을 주지 않으면 사색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 섬의 수도 라가드의 아카데미에서는 오이에서 햇빛을 뽑아내는 연구를 비롯하여 거의 실행이 불가능한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또한 과거 인물의 망령을 불러낼 수 있는 추장이 사는 그라브다 브드립, 불사의 인간이 사는 라그나그 섬 등을 방문한 뒤 제3의 항해는 끝난다.

 

제 4 부 푸임무(마인국) 말[馬]의 나라 기행

 

이 나라의 주민은 언어와 이성을 지닌 말 푸임무로서, 사람의 형상을 한 야후를 가축으로 사육하고 있다. 처음으로 만난 말을 주인으로 하여 걸리버는 그 비호 밑에서 살게 되었다. 허위와 속임이 없는 푸임무의 세계에 마음이 끌려 걸리버는 영주하기를 바라지만, 주인의 친구가 반대하여 할 수 없이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인간 세계에 돌아온 걸리버는 여전한 부패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며, 푸임무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조나단 수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마치 동화인 것처럼 소개되어 왔다. 소인국과 거인국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는 어느 면에서 보면 동화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로운 기지를 통해 반영하고 있는 풍자문학이다.

 

여기에 실린 부분은 작품의 서두이며, 주인공이 기행을 떠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책 읽기와 공상을 좋아하는 주인공은 독자에게 앞으로 벌어질 희한한 사건들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읽어 줄 것을 은근히 권유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일종의 액자소설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이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한 실제의 일이라는 신빙성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8세기 영국의 정치와 종교의 위선적 행동, 권위적 태도,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인간 혐오 사상이 무겁게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향한 소망감이 깔려 있어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교훈적인 문학적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심화 자료

'걸리버 여행기'의 사회적 배경

제 1 부

릴리풋에서 펼쳐지는 일은 영국의 정치, 사회, 종교적인 악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이를테면, 릴리풋 사람들이 '높은 구두 뒤축파'와 '낮은 구두 뒤축파'로 나뉘어 싸우는 것은 영국의 보수당인 토리당과 자유당인 휘그당간의 투쟁상을 풍자한 것이다.

제 2 부

인간 사회와 대조적인 이상 사회를 보여 주며, 인간 사회의 사악성을 냉혹하게 비판한다. 이를테면, 거인국의 왕이 걸리버에게 들은 바 유럽 사회의 음모, 탐욕, 위선 등을 비난하며, 인간들이란 작고 간악한 벌레의 무리라고 경멸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제 3 부

공상과 정치 싸움과 불사(不死)에 대한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의 비참함을 고발, 풍자했다.

제 4 부

인간의 자랑스러워하는 문화란 순수한 동물들의 세계보다도 더 추악한 것이라는 폭로와 고발은, 당시 영국 사회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다 적용되는 인류의 비참한 모습이다.

스위프트(Jonathan Swift)

필명은 Isaac Bickerstaff.

1667. 11. 30 아일랜드 더블린~1745. 10. 19 더블린. 아일랜드의 작가로 1713년부터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 성당 참사원장을 지냈으며 영어 풍자문의 대가이다.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를 비롯해 〈지어낸 이야기 A Tale of a Tub〉(1704)·〈책들의 싸움 The Battle of the Books〉(1704)·〈겸손한 제안 A Modest Proposal〉(1729) 등 유명한 풍자문을 썼다.

초기생애와 교육

할아버지 토머스 스위프트는 헤리퍼드셔 구드리치의 교구신부로서, 청교도혁명 동안(1642~51) 변함없이 왕당파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조너선은 3형제와 함께 왕정복고 뒤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더블린의 킹스인 시종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1664년에 애비게일 에릭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목사 딸이었다. 부모에게서 1666년 5월에 누이 제인이 태어났으나, 1667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 그의 어머니와 어린 누이, 그리고 뱃속에 있던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맡겨졌다. 스위프트는 아버지가 없이 삼촌들에게 의존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못 받은 것은 아니어서 6세 때 당시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이던 킬케니 스쿨에 들어갔고, 1682년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후 몇 년 뒤에 썼다가 그가 죽은 뒤인 1755년에 출판된 미완성 자서전 〈스위프트가(家) Family of Swift〉에서 그는 자신이 '가까운 친척들의 학대 때문에' 낙담하고 풀이 죽어 학업을 소홀히 한 까닭에 1686년 '특별한 배려'로 문학사학위만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실제 대학시절 성적은 평균 정도였으며, 그가 받은 학위도 학생의 성적이 규정에 약간 못 미칠 때 주던 것이었다.

그는 인문학 석사학위 신청자로 1689년 2월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 뒤 더블린에 무질서가 만연하자 대학 당국은 학생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그는 잉글랜드로 피신했고, 어머니를 방문한 뒤에 주로 서리 주 무어파크에 있는 윌리엄 템플 경의 집에서 템플이 1699년 1월 죽을 때까지 지냈다.

무어파크 시절

학식이 풍부했던 템플은 회고록을 쓰고 수필을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서가 필요했다. 스위프트가 무어파크에서 계속 지내지 않고 아일랜드에 2번 돌아갔던 것으로 보아 그곳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일랜드에 2번째 갔을 때 영국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고, 1695년 1월 13일에 사제로 임명받았으며, 1월말 벨파스트 근처 킬루트 교구신부가 되었다.

스위프트가 지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은 템플의 풍부한 장서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던 무어파크에서였다. 또한 여기서 템플 집의 가정부로 있던 과부의 딸 에스터 존슨(뒤에 스텔라가 됨)을 만났다. 그녀는 스위프트가 처음 무어파크에 왔을 때 8세의 검은 머리 소녀였는데, 스위프트가 그녀의 교육을 일부 맡으면서 둘의 사귐이 시작되었다. 하트홀에 들어간 뒤 1692년 템플의 주선으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693년에는 입법 문제에 대해 템플의 조언을 부탁했던 윌리엄 3세와의 협의회에 템플의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되어 켄싱턴으로 갔다.

1691~94년에 6편의 송시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초기시는 한때 혹평만 받기도 했으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호평한 뒤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시에서 산문풍자로 방향을 바꾸어 1696~99년에 무어파크에서 걸작 〈지어낸 이야기〉를 쓰면서부터였다. 1704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이 작품은 '종교와 학문에서 심하게 만연된 부패'를 풍자한 〈이야기 Tale〉, 해학적 영웅체로 쓴 〈책들의 싸움〉, 당시 광신도들의 예배와 설교방식을 조롱한 〈정신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대하여 Discourse Concerning the Mechanical Operation of the Spirit〉라는 서로 연관된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종교인으로서의 활동

1699년 1월에 템플이 갑자기 죽음으로써 스위프트는 다양한 체험을 겪는 불확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그는 더블린으로 돌아가 목사이자, 아일랜드에 재판관으로 오기로 된 버클리 백작의 비서가 되었다. 그뒤 1701, 1702, 1703, 1707~09년에 영국에서 지냈으며, 매력적인 성품과 작가로서의 재능이 런던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그외에 그의 입장이 바뀐 것은 없었다. 그는 무어파크에서 지낼 때 이미 킬루트의 신부직을 그만두었으나, 1700년초에는 더블린에서 멀지 않은 라러코 교구 신부직을 비롯해 아일랜드 교회의 여러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때 출판된 작품을 보면, 그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일어난 일에 모두 깊이 관여했던 것 같다. 여러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테네와 로마의 귀족과 평민 사이의 논쟁과 불화에 대하여 Discourse of the Contests and Dissensions between the Nobles and the Commons in Athens and Rome〉(휘그당의 원칙에 대한 설득력있는 진술인 동시에 두 정당의 자제를 촉구하는 글)·〈종교의 발전과 관습의 개혁을 위한 계획 A Project for the Advancement of Religion, and the Reformation of Manners〉·〈종교와 정부에 대한 영국 교회의 입장 The Sentiments of a Church of England Man with Respect to Religion and Government〉이다. 런던에서 그는 점점 유명해졌다. 종교와 정치에 관련된 평론은 진지하면서도 아이러니로 가득 찼으며, 1704년에 출판된 〈지어낸 이야기〉는 익명으로 발표되었지만 그의 글로 통했다. 1708~09년에 발표한 유명한 〈비커스태프〉 팜플렛을 비롯한 장난스러운 글에서는, 유명한 점성술사 존 패트리지의 죽음을 먼저 예언하고 그뒤 죽은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패트리지의 점술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여러 작품과 리처드 스틸이 1709년 〈태틀러 The Tatler〉지에 실은 짧은 시 〈아침의 묘사 A Description of the Morning〉처럼 침울한 분위기이지만 재미있는 작품들은 조지프 애디슨이 이끄는 휘그파 작가는 물론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스위프트가 휘그당의 정책에 불만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그는 출생이나 교육으로 보아도 휘그파였고, 자신의 글에서 개진한 정치원리도 17세기 휘그파의 전통에 속했다. 한편으로는 영국국교회를 열렬히 신봉했기 때문에 휘그당이 비국교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염려했다. 그는 충성심에서 점점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1710년 9월 7일 다시 런던에 가면서 또다른 중요한 전기가 시작되었다. 로버트 할리(뒤에 옥스퍼드 백작)와 헨리 세인트 존(뒤에 볼링브로크 자작)이 이끄는 토리 내각이 휘그 내각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새 행정부는 프랑스와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영국국교회를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너무나 빨리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스위프트의 반응은 유명한 〈스텔라에게 쓴 일기 Journal to Stella〉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그가 영국에 온 1710~13년에 당시 더블린에 살고 있던 에스터 존슨과 그녀의 친구 레베카 딩글리에게 쓴 편지이다. 빈틈없는 할리는 풍자시인이자 팜플렛 저자인 다니엘 디포와 이미 사귀어 그로부터 귀중한 정치적 도움을 얻었다. 할리는 스위프트에게 앤 여왕의 하사금을 아일랜드 교회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그를 토리 당원으로 만들었다. 스위프트는 이로써 정당보다 교회를 우위에 두기는 했지만, 정부의 성격에 관한 한 깊이 뿌리박힌 휘그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다. 토리당이 옛날부터 주장한 왕권신수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국민 전체로부터 비롯되고 영국의 법에 의거한 최고 권력은 왕과 신하와 평민이 함께 행사해야 하며, 전제정치가 생겨나지 않도록 이들 간에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스위프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토리당을 대표하는 정치작가가 되었으며, 1710년 10월말에 토리당의 기관지 〈이그재미너 The Examiner〉를 맡아 1711년 6월 14일까지 계속 편집했다. 그뒤에는 토리당의 평화정책을 지지하는 팜플렛을 쓰기 시작했다. 평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기 몇 주 전인 1711년 11월 27일에 나온 〈동맹자의 처신 The Conduct of the Allies〉이 마침내 국회에 전달되었다. 각료인 친구들이 그의 공헌을 낮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뒤늦게 1713년 4월이 되어서야 공석이었던 영국의 교구도 아닌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 대성당 참사회장 자리를 보상으로 받았다. 여왕과 많은 세도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불경스럽게 여기고 스위프트가 영국에서 직책을 얻지 못하게 막았던 듯하다. 어떤 경우든지 스위프트처럼 아일랜드 태생인 사람들은 영국에서 참사회장이나 주교가 될 수 없었다.

아일랜드 은둔기

1714년 8월에 앤 여왕이 죽고 조지 1세가 등극하면서 토리당은 권력을 잃고, 영국에서 스위프트의 활동도 끝났다. 그는 아일랜드로 가서 1726, 1727년 영국을 방문한 것을 빼고는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처음에 아일랜드계 휘그파에게 경멸과 무시를 받자 그는 세파에 시달리고 지쳐서 교구에만 은거했다. 그러나 점차 힘을 회복하여 1720년쯤에 공적인 일에 새롭게 관심을 보였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1720~30년대 초반까지 계속 시를 썼다. 이무렵 아일랜드에서 발표한 팜플렛에서는 당시 아일랜드가 직면한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어조와 문체는 직접적인 사실의 제시에서 권고, 유머, 신랄한 아이러니까지 다양했다. 그는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로버트 월폴 경이 이끄는 휘그 내각을 공격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계속 일을 해나갔다. 아일랜드의 낙후성을 주로 영국 정부 탓으로 돌리면서도 동시에 아일랜드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이때 쓴 글 가운데 〈드래피어의 편지 Drapier's Letters〉(1724~25)· 〈겸손한 제안〉이 가장 유명하다. 앞의 작품은 더블린의 M. B.라는 직물상이 쓴 편지 시리즈라는 말이 있으며, 아일랜드에 구리 동전(1/2 페니)과 청동화(1/4 페니)만 제공하려는 영국 정부의 계획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겸손한 제안〉은 공공심이 강한 한 시민이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을 부자의 음식으로 쓴다면 경제여건이 조금 나아지리라고 제안하는 섬뜩한 아이러니가 담긴 충고 편지이다.

스위프트의 사생활과 관련된 몇몇 사건과 이로 인한 추측을 정리해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스텔라는 1700년 혹은 1701년에 아일랜드로 이사온 뒤 레베카 딩글리와 계속 함께 지냈다. 한편 런던에 체류중이던 1707~09년에 스위프트가 바네사라고 부른 또다른 여성 에스터 배넘리가 등장해 1714년에 스위프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 아일랜드로 왔다. 그녀가 스위프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에 대한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실 배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스텔라와 스위프트는 비밀리에 결혼했는가? 오랫동안 나돈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1716년 명목상의 결혼을 했다. 스텔라가 윌리엄 템플의 사생아여서 스위프트가 그녀와 공개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바네사가 아일랜드에 온 뒤로 매우 불안해진 스텔라가 마침내 결혼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텔라와 스위프트가 템플을 아버지로 둔 이복남매이고 그들이 결혼한 직후에 이 사실이 밝혀졌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스위프트와 바네사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스위프트가 단지 그녀의 친구였는지, 아니면 연인이었는지도 의문시된다. 소문에 따르면 이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인정 많은 스텔라가 이 아이를 돌보았다고 한다. 데니스 존스턴의 〈스위프트 연구 In Search of Swift〉(1959)에서는 스위프트의 아버지가 윌리엄 템플 경이 아니라 템플 경의 아버지여서 스위프트와 스텔라는 숙부와 조카 사이이며,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스위프트와 바네사는 친구 이상의 사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추측들 중에 명백한 증거를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는 실제 이 사건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텔라는 1728년 1월에 죽었다. 대표적인 풍자문학 〈걸리버 여행기〉의 초판이 이미 1726년 10월에 출판된 뒤였다. 이 작품을 언제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의 편지에 의하면 1721년쯤에 본격적으로 쓰고 있었고 1725년 8월에 끝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1714년 이래로 영국에 가지 않았다가 1726년에 작품 원본을 갖고 방문했는데, 그는 알렉산더 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의 의도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했다. 트위크넘에 사는 포프를 방문하여 옛 친구들과 만났으며, 그곳에서 출판 준비를 마쳤다. 〈걸리버 여행기〉는 스위프트가 더블린으로 돌아간 뒤 10월 28일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계속 모든 계층의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면서 '화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말년

스위프트의 말년에 대해서는 잘못 전해진 부분이 많다. 그가 말년에 자제력이 부족했고 다루기 힘든 성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미쳤다는 추측도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늘날 메니에르 병으로 알려진 귓병을 앓아 가끔씩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신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1730년대 내내 더블린의 중요한 시민, 아일랜드의 위대한 애국자, 성직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739년 가을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신체적으로 약해져 있었고 곧 마비증세와 실어증을 앓았다. 1742년에는 보호자를 두어야만 했고 1745년에 죽어 세인트패트릭 성당에 묻혔다. 벽면에는 그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새겨졌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R. Quintana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걸리버 여행기

풍자와 유머를 통한 인간 성찰

조나단 스위프트(Jonthan Swift)는 1667년 아일랜드의 더불린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682년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좋지 않았던 듯, 특전졸업을 했고 1689년에는 먼 친척인 서어 윌리엄 템플의 서생이라는 명목으로 무어 파크(Moor Park)에 있는 템플 집에 기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템플이 자기를 밀어 정계에 내보내 주지 않은 데 분개하다가 성직을 임명받고 아일랜드로 부임했다. 그러므로 스위프트의 생애에서 무어 파크 시대는 여러 모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고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템플은 스위프트에게 중요한 일은 맡기지 않았고 그의 정치적 야망을 충족시켜 주지도 않았지만, 그는 종일 도서실에서 고금의 명저를 탐독하여 해박한 지식을 얻었다. 이것이 그의 교양의 바탕을 이룬 것이다. 또한 그 집에서 정계 인사와 면식을 얻고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정치에 대한 야망을 잊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의 직업은 성직자였으나 야망이 정치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양대 정당인 휘그당과 토리당을 전전하면서 예리한 필봉을 휘두르고 신랄한 풍자로 정적을 공격했기 때문에 정계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이러한 그의 정치활동의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최초의 시는 대단한 것이 못되어, 드라이든(Dryden)이 이것을 보고 '여보게 스위프트, 자네는 결코 시인이 되지는 못하겠네.'라고 했다지만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산문인 '서적의 싸움(The Battle of the Books)'과 '통 이야기(A Tale of a Tub)'는 극히 중요한 작품이다. 템플은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논제를 들어 <고전과 근대학문>이라는 글을 썼는데, 고전편을 들었기 때문에 일부의 논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스위프트는 이러한 논전을 풍자와 유머가 가득 찬 필치로 다루고 있다. 고전편에는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영도하에 템플이 지휘관이 되고 근대편에서는 밀턴, 드라이든, 데카르트 등이 참가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고전편이 약간 유리하나 입씨름은 끝나지 않고 미해결인 채 남게 된다.

'통 이야기'는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선원들이 바다에서 고래를 만나면 빈 통을 던져서 난을 피한다는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당시 종교와 정부의 약점을 파고들어 공박하는 패들을 피해야 할 빈 통이라는 암시인 것이다. 이 풍자 작품에서, 어떤 아버지가 피터, 마틴, 재크에게 각각 코트를 물려 주고 절대로 변형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는데 피이터는 카톨릭을, 마틴은 마르틴 루터를, 재크는 비국교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삼형제는 코트가 유행에 맞지 않는 것을 알고 이것을 변형할 구실을 각각 아버지의 유언장에서 찾는다.

스위프트는 피터에게 가혹한 화살을 보내고, 재크는 경멸하는 태도로 대했으며 자기가 속해 있는 마틴은 온당하게 다루었지만 이 역시 그다지 경건한 태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 자체에 대한 풍자인 것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다.

스위프트의 무어 파크 시대는 그와 한평생 기묘한 관련을 지녔던 스텔라를 그가 가정교사로 가르친 시기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템플 가에 기식하고 있던 과부의 딸이었는데, 그는 염세주의자답지 않은 순수한 애정으로 일생을 두고 그녀를 대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아일랜드에서 스텔라와 문서상 결혼한 형식을 취했으나 같이 생활한 일은 없고 밤에는 제삼자가 있는 곳에서만 둘이 만났다고 하니까 어떤 관계였는지 분명치가 않다.

그가 부사제직을 맡아 더불린으로 가고 난 후에도 정치 문제에 관심을 보인 팜플렛을 많이 써서 풍자정신이 왕성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걸작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를 1726년에 발효하지 않았다면 아마 스위프트는 18세기의 미미한 산문가의 한 사람으로서의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불분명)

'걸리버 여행기' 에 대하여

그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모형사회를 빌어서 궁전의 허례, 왕족의 교만, 고관들의 아첨, 정치의 부패, 정당과 종파의 무의미한 싸움, 학문의 편협, 재판의 불공평, 교육의 무능 등등-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문물·관습을 뼈아프게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제 4 부인 말 나라에서는 인간 및 인간성 자체를 매도하고 부인해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풍부한 유머에 미소가 떠오르고 예리한 풍자에 쾌감을 느끼지만 , 한편으로는 자신의 상처가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듯한 아픔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전술한 '서적의 싸움' 또는 '통 이야기'에 비해서 이 작품이 탁월한 것은, 먼저 두 작품은 풍자를 위한 풍자에 그쳤고, 풍자하는 대상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으면 어지간히 무미건조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이 작품에서는 문학적 흥취를 느낄 수 있고, 보다 근원적이고 공통성이 있는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성립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더구나 아무런 역사적 예비지식 없이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해서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동화가 될 수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스위프트의 염세주의는 과연 절망의 표시이며 이것이 바로 그의 생활의 근거를 이루는 정신적 토대였을까? 그의 성품이나 생활태도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명랑하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온화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술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풍자의 목적이 개정에 있지 결코 파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스위프트 자신이 '풍자는 결함의 지적이 아니라 누구나가 고칠 수 있음을 말한다'라고 그의 진의를 시로 읊은 일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결함에 대해 싸늘한 경멸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분노는 언제나 정정당당하고 정의감이 밑받침이 된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스위프트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그 뒤에 숨은 연민까지도 느끼는 것이다.

1728년 정월 어느 일요일 손님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는 스텔라의 부음을 들었다. 몸이 불편해서 장례식에 나가지 못하고 그날 밤은 교회의 촛불이 안 비치는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냈다. 그는 그 후에도 20년을 더 살았으나 승원의 구석진 방에서 적막한 그날그날을 보낼 뿐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현기증과 귀울림(난청)이 있었는데, 이것이 차차 정신착란증으로 악화되어서 정신병자의 고통 속에서 수년을 더 살다가 1745년 10월에 영면했다. 유해는 유언대로 밤중에 스텔라와 나란히 매장되었으며, 유산은 정신병원 설립에 기증되었다.

그는 인류를 향해서 독화살을 쏜 셈이지만, 2백여 년간을 인류를 즐겁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까지도 이 화살을 가지고 놀게 되었으나 이것은 스위프트가 뜻한 바는 아닐 것이다. '이제 분노가 그 가슴을 괴롭히지 않는 곳에 잠들었노라'라고 스스로 묘비명을 붙인 무덤 속에 스위프트의 분노는 고이 잠들어 있다. (출처 : 불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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