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간추린 오딧세이 3 / 호메로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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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와의 이별

 

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의 궁전에 머물고 있을 동안 신들은 심부름꾼인 헤르메스를 요정 칼립소에게 보내기로 했다. 헤르메스 신은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칼립소의 섬으로 날아갔다. 헤르메스 신이 칼립소가 사는 동굴 앞에 사뿐이 내렸을 때 칼립소는 동굴 안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칼립소가 이리저리 손을 놀릴 때마다 순금으로 만든 북이 베틀 위에서 반짝거리고는 했다. 화로에서는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는 삼나무와 백단나무 타는 향기가 진동했다. 동굴 주위에는 오리나무, 백양나무, 향긋한 냄새가 나는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새매나 올빼미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는 생명을 새로 얻기나 한 것처럼 흔들거렸다. 잘 익은 포도가 달린 포도 덩굴이 동굴 입구에 이르기까지 나란히 뻗어 있었다. 네 개의 샘에서 물이 흘러 꽃이 만발한 풀밭을 적셨다. 인간이 사로잡혀 있을 만한 곳으로는 그보다 나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헤르메스가 이르렀을 때 오뒤세우스는 동굴 안에 없었다. 그는 해변에 나가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이나 틈만 나면 그 곳으로 나가, 이루어질 수 없는 항해의 꿈에 잠기고는 했다. 조국의 바위산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가슴이 아려 왔다.

헤르메스 신이 들어가자 칼립소는 베틀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들였다. 아름다운 천이 깔린 의자를 권하고는 신들만 먹는 먹거리. 마실 거리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내놓았다.

칼립소가 헤르메스 신에게 인사했다.

"황금 지팡이를 드신 헤르메스 신이시여. 어느 신께서 오신들 저의 마음이 이렇게 반가움으로 가득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로 오셨는지요? 헤르메스 신께서 일없이 저희 집에 오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앞에 놓인 것을 드시고 좀 쉬십시오."

헤르메스 신은 앞에 놓인 것을 먹고 마심 뒤에 자기가 온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를 이리 보내신 분은 신들의 아버지이신 제우스 신이시랍니다. 나는 트로이아에서 9년동안이나 싸워 이긴 영웅 오뒤세우스 일로 심부름을 왔어요. 그대가 오뒤세우스를 이 곳에 머물게 하고 있다지요?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오뒤세우스 일행은 신들의 미움을 샀답니다. 처음에는 포세이돈 신의 미움을 샀고, 두 번째로는 태양신 휘페리온의 미움을 샀답니다. 두 분 신들은 오뒤세우스 일행을 괘씸하게 여겨 폭풍 같은 재난을 그들을 괴롭히신 것이랍니다. 그 결과 패거리는 모두 죽고 말았지요. 오로지 오뒤세우스만 바람과 물결을 타고 그대의 섬으로 온 것이랍니다. 그대는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인간을 7년이 라는 세월 동안 이 곳에다 두셨지요? 이제 제우스 신께서는 그대가 이 자를 풀어 주어 제 갈길로 가게 하기를 바라십니다. 오뒤세우스는 여기에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간 뱃사람들과는 운명이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

그러자 킬립소는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바람 부는 날의 백양나무 가지처럼 떨며 소리쳤다.

" 너무하십니다. 저를 질투하시다니. 저 높은 올림포스 산에 사시느라고 차가운 비도, 인간 세상의 슬픔도 모르시는 신들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는 해변으로 밀려와 기진맥진해 있는 오뒤세우스를 거두어 이 동굴로 데려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사랑하고 그를 거두어 왔습니다. 오뒤세우스가 바랐다면 저는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베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을 풀어 주어야겠군요. 신들의 뜻이니 이루어져야 겠지요. 다스리시는 분들은 신이시니 저는 복종해야겠지요? 이제 그분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드리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렵니다. "

" 그러세요. 한시바삐 그러세요. 서둘러 그렇게 하세요. 제우스 신께서 기다리시다가 화를 내시는 일이 없도록, 한시바삐 말입니다. "

화로 곁에 앉아 있던 헤르메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흔적도 없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칼립소는 슬픔을 억누르며 바닷가로 나갔다. 오뒤세우스는 늘 그래왔듯이 바위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흐리고 벌겋게 핏발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울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칼립소가 우뒤세우스의 어깨에다 가볍게 순을 올려 놓으며 말했다.

" 이제는 우실 필요도 없고, 이 곳에서 세월을 허비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제가 그대를 풀어드릴 때가 왓습니다. 이제 그대를 기다리는 여인에게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내 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나는 신들의 뜻에 따라 이렇게 해야 합낟. 기왕 그렇게 할 바에야 나는 온 마음고 정성을 다해 그대를 보내렵니다. "

오뒤세우스가 무거워 보이는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그대가 나를 놓아 준다고 하나, 내가 이 곳을 떠날 방법이 도무지 없지 않소?"

" 내가 연장과 나무를 마련해 줄 테니 쪽배를 하나 지으세요. 쪽배를 지으면 거기에다 빵과 물과 포도주를 실어 드리겠어요. 그리고 순풍을 보내어 쪽배의 돛을 부풀게 하겠어요……."

칼립소는 슬픔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집 화로 앞에 앉기까지 수많은 재난이 그대 앞을 가로 막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그것이 두려우시면 내 집에서 나와 함께 머물러도 좋습니다. 나는 그대가 날마다 아내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그대의 아내는 다시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오뒤세우스가 그 말에 응수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내 아내 페넬로페의 아름다움이 그대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때가 되면 죽어야 할 팔자를 타고 태어난 인간을 무슨 수로 영원히 사는 신들이나 요정의 아름다움에 겨루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돌아가고 싶소. 뱃길을 가로막는 재난과 위험 앞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버티고 싸움으로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오."

다음 날, 칼립소는 목수 연장을 가져다주고는 쓸 만한 나무들을 보여 주었다. 그는 바닷가 가까이에 서 있는 나무 스무 그루를 찍어 넘어뜨리고는 조그만 쪽배를 만들고, 제일 길고 곧은 전나무는 배 한가운데 세워 돛대로 삼았다. 칼립소가 가져다 준 튼튼한 무영천으로 그는 돛을 만들었다. 칼립소가 통가죽을 가져다 주자 그는 이것을 가늘게 자르고, 몇 개씩 모아 꼬아서 밧줄과 마룻줄을 만들었다. 나흘 동안 준비한 그는 닷새째가 되자 쪽배 밑에다 통나무를 깔고는 쪽배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칼립스는 물과 포도주가 가득가득 든 가죽 부대와 먹을 것을 실어 주었다. 오뒤세우스가 험한 뱃길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옷도 한 벌 마련해 주었다. 이윽고 둘은 마지막 입맞춤을 나누었다. 입맞춤이 끝났을 때 칼립소는 홀로 동굴 쪽으로 갔고, 오디세우스는 바다로 향했다. 돛은 칼립소가 보내 준 순풍에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순풍이 불어 올 동안 오뒤세우스는 키만 잡고 있었다. 섬이나 지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태양을 보고 방향을 잡았고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그는 칼립소가 가르쳐 준대로 큼곰자리를 왼쪽에다 두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런 식으로 열 이레를 항해했다. 열여드레째 되는 날 그의 눈에 멀리 희미한 산 그림자가 보인 듯했다.

그가 곧 낯익은 땅을 밟게 되며 힘겨운 고생도 끝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머리카락이 푸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이디오피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모습을 보았다. 포세이돈은 자기 아들을 장님으로 만든 오뒤세우스를 다른 신들이 도와주고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난 그는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켰다 검은 구름장이 하늘을 덮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쪽배를 때렸다. 이어서 북쪽에서 광풍이 몰아쳐 왔다. 광풍은 돛대를 부러뜨리고 돛을 찢어 바다로 내동댕이쳤다. 키를 잡고 있던 오뒤세우스도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도가 그의 몸을 삼켰다. 칼립소로부터 받았던 옷의 무게가 그에게는 죽음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필사적으로 파도위로 떠올라 공기를 마시거나 수면 아래서 마신 소금물을 뱉거나 했다. 쪽배의 파편을 찾아 허우적거리던 그는 마침내 쪽배의 몸체에 기어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밀려든 파도에 쪽배는 갈매기 깃털처럼 일렁거렸다.

오뒤세우스가 쪽배의 몸체에 달라붙어 파도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본 바다의 여신 이노가 험한 파도를 헤치고 왔다. 바다의 여신 이노는 흡사 물 속에서 속구 치는 갈매기 같았다. 이노는 빛나는 너울을 벗어 오뒤세우스에게 던져 주면서 소리쳤다.

"옷을 벗어요. 그 옷의 무게 때문에 몸이 자꾸만 가라앉고 있어요. 대신 그 너울을 허리에 감으세요. 그 너울이 그대를 지켜 줄 거예요. 그리고 쪽배는 버리고, 아까 본 육지를 향해 헤엄쳐 가세요. 육지에 이르거든 내 너울을 바다로 던지세요. 고개는 육지로 돌리고 노을을 뒤로 던져야 해요."

바다의 여신 이노는 이 말을 남기고는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간 산 같은 파도가 덮쳤다. 쪽배는 산산히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뒤세우스는 쪽배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하나에 의지해서 옷을 벗어 던지고는 너울을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바다에 몸을 맡기고는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이 때 아테나 여신이 그를 도우러 왔다. 아테나 여신은 북풍만 두고 다른 바람은 모두 잠재웠다. 북풍을 잠재우지 않는 것은 그 바람이 머나먼 육지 쪽으로 헤엄쳐 가는 오뒤세우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밤 이틀 낮 동안이나 아테나 여신의 북풍이 오뒤세우스의 몸을 육지 쪽으로 밀고 갔다. 사흘째 되는 날 육지가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자기 시작했다. 오뒤세우스는 바위섬을 향해 계속해서 헤엄쳐 갔다. 하지만 바위섬에 이른 순간, 바위섬에 부딪쳤다가 튀어 오르는 파도가 그를 휩쓸어 버렸다. 그가 바위 한 귀퉁이에 매달려 몸을 도사리지 않았더라면 바다에 떠다니던 나무 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났을 터였다. 그가 바위에 매달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위섬에 부딪쳤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는 파도는 자꾸만 그의 몸을 바다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세 차례나 역류에 휩쓸려 바다로 끌려 나갔다가는 다시 헤엄쳐 와 바위에 붙어야 했다. 마침내 그는 그 바위 위로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한동안 해안선을 따라 헤엄치면서 접근하기 쉬운 지점을 찾았다. 그러다 넓은 강이 바다와 합류하는 잔잔한 해변을 만났다. 곧 그의 발이 부드러운 모래에 닿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물에서 나와 얼굴을 모래에 댄 채로 해변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림 그는 이노로부터 받은 너울을 허리에서 풀어 바다에 던졌다. 이노가 가르쳐준 대로 바다로부터 돌아선 채 던졌다. 그리고는 강변을 따라 육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래 걸을 힘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올리브 나무 고목의 가지가 뒤엉켜 있는 숲에 이르렀다. 곧은 가지와 잔가지가 지붕처럼 뒤엉켜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었다. 그는 그 가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바닥에는 낙엽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는 거기에 드러누워 낙엽으로 몸을 덮었다. 그의 의식이 다시 가물거렸다. 아테나 여신이 와서 그의 눈을 감겼다. 그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나우시카 공주

 

오뒤세우스가 강둑의 올리브 나무 밑에서 낙엽을 덮고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을 즈음, 그 나라 왕궁의 공주 나우시카 역시 잠을 자고 있었다. 나우시카의 꿈속으로 아테나 여신이 공주의 친구, 선장의 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공주의 친구는, 어떻게 보면 초조해 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장난하는 것 가튼 표정으로 침대 머리맡에 앉아 말했다.

"나우시카, 너는 정말 네 엄마의 한심한 딸이구나. 방에 널린 이 많은 옷가지를 좀 보아라. 이 땅의 귀족 청년들이 모두 너에게 눈독을 들이는데, 이래 가지고 시집은 제대로 갈 수 있겠니? 결혼식 때 혼수가 들어오고 손님들이 선물을 줄 것이니 옷이 또 얼마나 늘어나겠니?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강으로 빨래하러 가자. 수레에다 빨랫감을 싣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나우시카는 간밤에 꾸었던 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우시카는 그 나라 왕인 아버지에게 달려가, 빨랫감을 싣고 강으로 빨래하러 가야겠으니 나귀가 끄는 수레 한 대를 빌려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두 마리의 나귀가 끄는, 아주 잘 달리는 수레를 한 대 빌려주었다. 하녀들은 빨랫감을 수레에다 실었고 어머니인 왕비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딸과 하녀가 멱을 감은 뒤에 몸에 바를 올리브 기름도 한 병 마련해 주었다. 나우시카는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고는 수레를 천천히 강변으로 몰았다. 하녀들은 걸어서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은 강변에 이르렀다. 강변에는 물이 아주 맑고 얕아서 빨래하기에 좋은 데가 있었다. 나우시카와 하녀들은 나귀를 풀 밭에 풀어 주고 빨래를 시작했다. 하녀들은 흐르는 물속의 넓적한 바위에 빨랫감을 올려놓고는 발로 밟고 나서 맑은 물에 헹구고 강변 조약돌밭에다 널어 태양과 바람에 말렸다.

옷이 마를 동안 공주와 하녀들은 가죽공으로 공놀이를 시작했다. 돌림노래를 부르면서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였는데, 돌림 노래의 선두를 맡은 사람은 바로 공주였다. 이들의 놀이터에 아테나 여신이 살며시 끼어들었다. 물론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우시카가 하녀 하나에게 공을 던지자 아테나 여신은 일부러 이 공이 그 하녀를 빗나가 강 가장자리의 물 위에 떨어지게 했다. 그러자 하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올리브 나무 밑에서 잠들어 있던 오뒤세우스가 깨어났다. 공주 일행의 놀이터는 오뒤세우스가 잠을 자던 올리브 나무에서 창을 던지면 바닥에 떨어져 꽂힐 만한 거리에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오뒤세우스는 반쯤 몸을 일으킨 채 가만히 처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적의 기습을 받은 가까운 마을 여자들의 비명 소리이거나 성질 고약한 주인에게 얻어 맞는 하녀들의 비명소리이거니 했다. 하지만 정신이 또렷해지면서부터는 처녀들이 놀이하면서 지르는 환호성으로 들렸다. 처녀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올리브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알몸을 가린 다음 천천히 걸어나갔다.

하지만 맨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오랜 고생으로 얼굴은 험악하기 짝이 없었으며, 멋대로 자란 머리카락과 수염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서려있었다. 처녀들에게 그는 덤불 속에서 튀어나온 사자같이 무시무시한 존재로 비쳤을 터였다. 하녀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우시카공주는 다가오는 오뒤세우스를 침착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뒤세우스는 공주에게 다가가 공주의 무릎을 어루만지며 애원하고 싶었지만 공주가 두려워 할까 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공주에게 말했다.

"젊으신 아가씨. 여신이신가요, 아니면 인간 세계의 여느 아가씨인가요? 여신이시라면 틀림 없이 저 초승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이실 테지요. 인간 세계의 여느 아가씨라면, 아버지와 어 머니와 오라버니 들은 참으로 복이 많으신 분들입니다. 그대같이 아름다운 처녀가 춤을 추 는 것을 보고 참으로 자랑스러우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행복을 누리실 분은 역시 아가씨에게 사랑과 결혼 선물을 안기고 아가씨를 모셔가는 젊은이일 테지요. 나 는 아가씨같이 완벽하게 아름다우신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 델로스 섬에서 한번 본 적 은 있습니다. 아폴론 신의 제단 옆의 샘물을 마시며 자라는 어린 종려나무가 그렇게 아름 답게 보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움을 청할 데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따뜻 한 마음씨입니다. 여러 날 바다의 폭풍에 시달리다 여기에 닿은 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어 떤 신께서 저를 이 해변으로 데려다 주신 것일 테지요. 그러나 저는 여기가 어디인지, 어떤 불행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자비를 베푸시어 헌 옷 한 벌만 주시고, 가까운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신들이 아가씨에게, 아가씨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를 베푸시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러자 공주가 대꾸했다.

"나그네여, 나쁜 분 같지는 않구려. 말씨를 보아하니 교양 있는 분이신 것 같군요. 우리 나라의 해변으로 그대를 보내신 분은 사람을 고르시어 행복과 슬픔을 베푸시는 제우스 신임에 분명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알몸을 가리실 옷을 얻으실 수 있을 테지요. 그리고 제가 그대를 마을로 안내하여 지극한 환영을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바로 이 섬나라 파이아케아를 다스리시는 알키노스 왕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공주는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출현에 놀라 멀찍이 도망쳐 저희들끼리 모여 수군대고 있는 하녀들에게 소리쳤다.

"애들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 이 가엾은 나그네가 보이지도 않느냐? 세상의 배는 한척도 지나가지 않는 섬나라, 신 같은 사람들이 사는 머나먼 우리 섬나라로는 나쁜 사람이 온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분은 운이 나빠 이곳에 오신 나그네이시다. 어서 이리로 오너라. 이분이 알몸을 가리실 수 있도록 옷 한 벌을 가지고 어서 오너라."

처음에는 쭈뼜하던 하녀들이 오뒤세우스 가까이 다가왔다. 하녀들은 오뒤세우스를 바람 한점 불어오지 않는 오리나무 숲으로 안내하고는 마른 옷가지 중에서 겉옷 한 벌을 가져다 주었다. 하녀 중 하나는 병 바닥에 남아 있던 올리브 기름을 따라, 바닷바람에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오뒤세우스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옷을 주시고 기름까지 발라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잠시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 숙녀들 앞에서 목욕을 하고 이 옷을 입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녀들은 오뒤세우스만 남겨 두고 공주에게 달려갔다. 오뒤세우스는 강둑 아래로 흐르는 강물에 온몸과 머리카락에 묻어 있던 소금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오랜 바다 여행에서 부드러움을 송두리째 잃어 버린 피부에는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질렀다. 머리카락도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질렀다. 그러자 히아신스 꽃잎 같은 곱슬머리가 되살아났다. 그런 다음에야 그는 하녀들이 가져다 준 겉옷을 입고는 물에서 나가 강둑에 앉았다.

멀리 떨어진 채 서 있던 나우시카의 눈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강둑에 앉아 있는 오뒤세우스의 모습이 보였다. 공주의 눈에는 오뒤세우스가 그렇게 잘난사람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공주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하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분을 우리 나라의 해변으로 보내신 것은 신의 뜻이 아닐까? 처음에 저분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흉하게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냐? 신들도 저렇게 늠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곳에서 사시게 하여 내 신랑으로 삼았으면 좋겠다만…… 아니지, 이렇게 허튼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얘들아, 저분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갖다 드리자."

그들은 왕비가 마련해 준 음식 중에서 저희들끼리 먹고 마시다 남은 것을 오뒤세우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여러 날을 굶은 터라 맛있게 먹고 마셨다. 그가 먹고 마시고 있을 동안 공주와 하녀들은 햇빛과 바람이 말린 옷가지를 걷어 수레에 싣고, 풀을 뜯고 있던 나귀들을 몰아와 수레 앞에 매었다.

오뒤세우스의 식사가 끝나고, 궁전으로 돌아갈 준비도 끝나자 공주는 수레에 올라 나귀의 고삐를 잡았다. 공주는 오뒤세우스를 가까이 불렀다. 오뒤세우스가 와서 수레 바퀴 옆에 서자 공주가 말했다.

"이제 우리 아버지의 궁전으로 들어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으세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해서 논밭을 지날 동안에는 하녀들과 함께 걸어서 수레를 따라 오세요. 하지만 마을이 가까워지고, 양쪽에 배 짓는 집이 나란히 서 있는 항구에 이르거든 우리 일행에서 떨어져 항구 가까이 있는 백양나무 숲으로 들어가세요. 그 숲이 바로 아테나 여신의 숲이랍니다. 우리 일행이 마을로 들어가고, 궁전으로 들어 갈 때까지 거기에서 기다려야 해요. 만약 제가 밖에서 남정네를 데리고 들어갔다는 말이 나돌면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 일행이 궁전으로 들어갔다고 여겨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자서 들어오세요.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면 궁전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아버지의 궁전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문지기도 없으니까 그냥 들어오셔도 됩니다. 숲 속의 궁전 본채에 이르시거든 바로 큰 연회장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연회장 화로 옆자리는 늘 우리 어머니가 앉으시는 자립니다. 어머니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인채 거기에 앉으셔서 보라색 실로 뜨개질을 하시지요. 바로 옆에는 아버지가 앉으시는 큰 의자가 있습니다. 만일에 아버지가 거기 앉아 계시거든 옆으로 살짝 지나쳐 어머니께 가세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무릎을 어루만지면서 도움을 청하세요.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데 필요한 배를 내어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어머니의 마음만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무엇이든 도움을 베푸실 것입니다."

오뒤세우스는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대답했다.

"시키시는 대로하겠습니다."

나우시카는 채찍으로 노새를 가볍게 때렸다. 수레가 덜컹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오뒤세우스와 하녀들은 수레 뒤를 따라갔다.

백양나무 숲에 이른 것은 해가 서쪽으로 저물녘이었다. 오뒤세우스는 거기에서 하녀들 대열에서 벗어났다. 숲 속에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신전에서 무릎을 꿇고 파이아케아 인들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해주십사고 아테나 여신에게 기도했다. 한동안 신전에 머문 오뒤세우스는 일어나 궁전이 있는 마을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지금쯤이면 공주가 궁전에 도착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 아테나 여신이 그를 맞았다. 여신은 물동이를 든 마을 처녀로 변장하고 오뒤세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뒤세우스는 그 처녀에게 궁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묻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른답니다. 나는 뱃길에서 불행한 일을 당하고 이 곳까지 흘러온 먼 나라 사람이랍니다."

그러자 처녀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제가 길을 가르쳐 드리지요. 저를 따라오세요. 하지만 거리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 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을 사람들 거의가 포세이돈을 섬기는 뱃사람이기는 하지만, 바 다 건너편에 있는 먼 나라에서 온 나그네 뱃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처녀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은 이렇게 말하고는 앞서 걸었다. 오뒤세우스는 처녀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그러나 그가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는 줄 알지 못했다.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몸을 안개의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했기 때문이었다. 궁전 문까지 오뒤세우스를 데려온 여신은 오뒤세우스가 가야 할 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뒤세우스는 여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있다가 여신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신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궁전 문으로 들어선 오뒤세우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궁전 뜰에는 배나무, 석류나무, 사과나무 등 과일 나무가 많았다. 무성한 잎 사이로 반짝거리는 과일들이 보였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도 있었다. 나무들은 가까이에 있는 샘물에 흠씬 젖어 있었다. 땅바닥으로 스며드는 은빛 샘물의 물줄기에서 나는 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잘 어울렸다. 하지만 뜰이 아름다웠다고는 하나 그 뜰이 오뒤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뒤세우스의 앞에는 궁전임에 분명한, 무수한 기둥을 거느린 하얀 건물과 안뜰이 있었다. 그는 그 건물로 다가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지만 오뒤세우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넓은 연회장 안에서 왕은 무수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왕의 옆에는 왕비가 많은 시녀들을 거느린 채 앉아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왕비 바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다음에야 아테나 여신은 모습을 가리는 안개를 걷었다. 그제서야 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였다. 연회장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어오는 것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웬 사람이 하나 난데없이 왕비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침묵을 깨뜨리고 오뒤세우스가 왕비에게 탄원했다.

"왕비마마. 폭풍에 밀려 이 나라의 해변으로 밀려온 나그네가 인사 올립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시어, 저를 고향으로 데려다 줄 배 한 척을 내어 주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제 고 향의 벽난로 앞에 앉아 보았던 이후로 실로 길고도 험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불쌍한 분이 시군요. 우리가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대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면 ……."

왕비가 부드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알키노스 왕이 왕비를 말허리를 잘랐다.

"내 궁전은 어떤 나그네든 다 환영하오. 왕비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음식을 드시 오. 그리고 난 뒤에 대답해도 늦지 않아요."

오뒤세우스는 반짝거리도록 닦은 의자에 앉았다. 하녀들이 손을 헹굴 물을 가져다 주었다. 고기 베는 사람은 쇠고기를 두툼하게 잘라 접시에 놓아주었다. 빵도 있고 과일과 포도주도 있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는데도 불구하고 궁전의 대신들 사이에 섞여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강변에서 공주로부터 음식을 얻어먹기는 했으나 그것은 겨우 허기를 면할 만한 양이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대신들은 모두 자기네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에는 오뒤세우스와 알키노스 왕과 아레테 왕비 이렇게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오뒤세우스는 왕과 왕비에게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가다가 뱃길을 잘못 든 경위, 요정 칼립소의 섬에서 7년 동안 살았던 사연, 칼립소의 손에서 풀려나 쪽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운 사연을 얘기했다. 뿐만 아니었다. 포세이돈의 원한을 사는 바람에 배가 난파한 경위, 파이아케아 해변으로 밀려오기까지의 경위를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해변으로 오른 저는 지친 나머지 올리브 숲으로 들어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 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다가, 가까이서 공주 님과 하녀들이 놀면서 웃고 떠드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저는 공주 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공주 님은 저에게 강변에서 빨아 말린 겉옷 한 장과 먹을 것, 마실 것을 준 것은 물론, 몸에 바를 올리브 기름도 주셨습니 다. 그리고는 궁전으로 오는 길까지 가르쳐 주셨답니다."

오뒤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왕이 혀를 찼다.

"내 딸이 큰 잘못을 저질렀군요. 나그네를 홀로 남겨 두지 말고 내게로 모시고 왔어야 했 던 것을……. 결국 내 딸은 그대가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당사자이니, 이제 그대를 도 와 주고 말고는 내 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오뒤세우스가 재빨리 나우시카 공주를 변호해 주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런 일로 따님을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따님께서는 저에게 하녀들과 함께 마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성과 오래 떨어진 채 살아왔던 나머지 수줍은 마음이 생겨 여성들과 함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따님께서 수레 뒤에다 나 그네를 달고 돌아오면 전하께서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처녀의 아버지는 누구나 질투심이 강한 법이니까요."

알키노스 왕은 오뒤세우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푸근하게 웃었다.

"나는 질투나 하는 사람이 아니오. 그대 같은 나그네도 짐작하듯이 나는 나그네에게도 능 히 딸을 줄 수 있는 사람이오. 그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내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면 나는 그대와 내 딸을 위해 새 집을 지어 줄 용의도 있어요 ……."

왕이 이렇게 말했던 것은, 아직은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처지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만큼 지혜롭고 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왕은 나그네의 얼굴에 근심이 어리고,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대가 기어이 먼 데 있는 그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그대를 위해 배를 마련해 주고 내 왕국에서 가장 힘이 좋은 노잡이들도 그 배에 붙여 주겠소."

왕비 아레테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내일 해도 좋지 않겠어요? 잠자리에 드셔야 할 시각입니다."

왕비는 하녀들에게 명을 내려 왕궁 안의 손님방에 융단을 깔게 하고 부드러운 베개도 가져다주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보랏빛 이불을 덮고 그 날 밤은 편히 잤다."

파이아케아 경기

 

다음 날 알키노스 왕은 배를 한 척 마련하고 오뒤세우스를 떠나 보낼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마을 어귀의 방파제 앞에다 정박해 두게 했다.

한낮이 되자 수많은 신하들이 궁전의 연회장에서 왕과 함께 점심을 들었다. 왕과 신하들이 점심을 들 동안 궁전의 음유시인은 노래를 불렀다. 음유시인은 장님이었다. 그 음유시인은 사람들이 새의 노래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해 새를 장님으로 만들 듯이, 신들이 그의 노래를 더욱 그윽하게 하기 위해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노랫말에 맞게 수금을 뜯으면서 그는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왕 옆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오뒤세우스는 흡사 거센 바람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혹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겉옷을 끌어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알키노스 왕은 오뒤세우스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노래와 수금 반주가 끝나자 왕은 모두 밖으로 나가 노천 극장에서 벌어지는 달리기와 씨름 같은 경기를 구경하자고 제안했다. 사람들은 모두 식탁을 뒤로 하고 궁전 앞의 운동 경기장으로 나왔다. 젊은이들은 서둘러 경기에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왕의 세 아들도 있었다. 세 왕자는 달리기, 씨름, 멀리뛰기, 원반 던지기 등의 경기에 참가했다. 그런데 세 왕자들은 오랜 고생으로 몹시 지쳐 보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몸매가 씨름꾼 같은 나그네도 경기에 참가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왕자 중 하나인 라오다마스가 오뒤세우스에게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경기에 참가하기에는 저의 머리가 너무 복잡합니다."

오뒤세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젊은이들이 오딧세우스를 비웃었다. 그 중의 하나인 에우뤼알로스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우리가 사과해야겠군요, 기껏해야 장사꾼 아니면 장삿배의 선장일 터인 그대에게 씨름을 하자고 했으니......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그대를 운동 선수쯤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이 말에 오뒤세우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의 두 눈 사이가 좁아졌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전쟁과 방랑으로 형편 없는 꼴이 되기는 했소만 내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에 내게 깃들어 있던 것들이 아직 조금은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하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겉옷자락을 걷어 허리띠에 채울 생각도 않은 채 원반 중에서도 가장 크고 무거운 청동 원반을 집어 한 차례 돌려 보고는 그대로 던졌다. 군중들은 활 모양을 그리면서 날아가는 원반을 눈길로 뒤쫓다가 달려나가 원반 떨어진 자리를 살펴보았다. 오뒤세우스의 원반은 그 날 가장 잘 던진 청년의 원반이 떨어진 자리보다 훨씬 멀리 날아가 있었다. 원반 던지기로 다시 기운을 차린 오뒤세우스는 권투든 씨름이든 활쏘기든 자신이 있는 사람은 나서라고 했다. 그러나 자기 나라 젊은이들이 모든 경기에서 차례로 망신을 당할 것 같다고 생각한 알키노스 왕은 정중하게 그 도전을 물리쳤다.

"우리의 자랑거리인 세상에서 제일 가는 재주를 보여 드리지요."

왕은 이렇게 말하고는 음유시인을 불러, 춤꾼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수금을 타게 했다. 사람들이 물러나면서 둥그런 춤판이 만들어졌다. 음유시인은 수금을 들고 그 둥근 춤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춤꾼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수금 소리에 맞추어 춤꾼들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연주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사랑 노래는 여름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두 춤꾼이 반짝반짝 빛나는 공을 하나 들고 나와 춤추면서 공을 던지고 받기 시작했다. 한 춤꾼이 펄쩍 뛰어오르면서 공을 다른 춤꾼들을 둘러싸고 발을 굴러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정말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는 기술이군요. 이같이 훌륭한 기술은 본 적이 없습니다."

오뒤세우스가 혀를 내둘렀다.

춤이 끝나자 알키노스는 신하들을 주위로 불러 모으고는 항구에는 나그네 손님을 태우고 갈 배가 기다리고 있으니, 각자 손님에게 금붙이나 좋은 옷가지를 선물로 줄 것을 권했다. 그는 오뒤세우스를 모욕한 에우뤼알로스에게도 용서를 비는 선물을 내놓을 것을 권했다. 모두가 선물을 내놓는 데 선선히 동의했다.

알키노스 왕 자신은 이름 있는 기술자가 세공한 커다란 금술잔, 왕비가 베를 짜서 만든 훌륭한 겉옷과 속옷을 선물로 내놓았다. 왕비 아레테는 이 선물을 향긋한 냄새가 나는 나무 상자에 넣어 오뒤세우스에게 건데 주었다. 신하들도 차례로 선물을 가져오게 해서 항구의 방파제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에다 싣게 했다. 에우뤼알로스는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고, 칼집은 아주 오래 묵은 상아로 만들어진 청동 칼 한 자루를 선물로 주면서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그네 손님이시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제가 혹시 손님께 욕을 했다면 그 욕은 바람에 날려가 버리기를 빌겠습니다. 모쪼록 신들께서 도우셔서 그대 고국의 항구에 안전하게,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뒤세우스가 그 말으 반다 이렇게 응수했다.

" 나도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대가 주는 화해의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신들이 그대를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저에게 이렇게 좋은 칼을 주셨지만, 그대에게 이런 칼이 여라 자루 생겨 모자람을 느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뒤세우스는 그 아름다운 칼의 끈을 어깨에다 걸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궁전의 하녀들이 그를 욕실로 안내했다. 그는 하녀들이 준비한 약초 향내 나는 물에다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와 연회장으로 들어가던 길에 궁전 기둥 아래 서 있는 나우시카 공주를 만났다. 강둑에서 만난 이래로 그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나라 풍습에 따르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연회장에서 남자들과 식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 첫 만남은 곧 마지막 만남이 될 터였다.

공주가 슬픔에 잠긴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십시오. 순풍이 뱃길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시더라도 저를 너무 빨리 잊지는 말아 주십시오."

오뒤세우스가 그 말에 대꾸했다.

"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기억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아가씨여,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뒤세우스는 이말을 남기고는 연회장으로 들어가 알키노스 왕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계속될 동안 음유시인은 수금을 뜨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 날 밤에는 특별히 트로이아 목마를 노래했다. 그는 머리가 좋고 재간이 무궁무진한 오뒤세우스가 목마를 만들게 한 경위, 그리고 적군의 의심을 사지 않고 트로이아 성으로 그 목마를 끌고 들어간 사연을 노래로 불렀다. 이어서 오뒤세우스를 비롯한 특공대 용사들이 그 목마의 뱃속에 숨어 있게 된 일과 그 날 밤에 목마의 배를 열고 나와 트로이아 성의 성문을 연 경위를 노래로 불렀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의 참성과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무수한 부하들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렀다.

알키노스 왕은 다시 한번 그가 우는 것을 보았다. 알키노스 왕은 손짓으로 음유시인의 노래를 그치게 하고는 수고했다는 표시로 자기 접시에서 멧돼지 고기를 두툼하게 베어 음유시인에게 주었다. 음유시인이 물러앉자 왕은 옆에 있던 오뒤세우스에게 물었다.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노래만 들으면 나그네는 눈물을 흘리는 모양이오. 혹시 트로이아 전쟁 때 가까운 사람을 잃은 적이 있소? 트로이아 군대의 창에 친한 친구가 목숨을 잃기라도 했던 것이오?"

그러자 나그네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이루 셀 수 없이 잃었지요. 제가 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가 하면, 제가 바로 라에르테스의 아들, 이타카 왕국의 왕 오뒤세우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열두 척의 갤리온 선에다 부하들을 가득 싣고 가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습니다만 지금은 나 혼자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연회장 안에 숨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그 긴긴 침묵 속에서, 연회장 한가운데 알키노스 왕 옆에 앉아 있는 사나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가, 수금을 반주 삼아 무수한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대의 영웅이나 신들 이야기를 들었듯이 오뒤세우스 이야기를 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뒤세우스여. 여기에 오기까지 방황하면서 겪은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신이 트로이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사라진 뒤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져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방황할 당시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 이야기에서부터 키르케 이야기, 저승 세계를 다녀온 이야기. 스퀼라와 카립디스 이야기. 태양신의 가축이야기. 그 가축 때문에 부하들과 배를 깡그리 잃은 이야기, 칼립소의 섬으로 간 이야기까지 했다.

새벽이 오기 직전에 잔치와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파이아케아 인들이 선물로 내놓은 금붙이와 훌륭한 옷가지는 횃불이 밝혀진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로 옮겨졌다. 그들은 서물 꾸러미를 노잡이들이 앉는 긴 의자 옆에다 쌓았다. 오뒤세우스는 항구가지 나온 왕과 왕비에게 작별 인사를 햇다. 그는 왕비에게, 금술잔을 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면서 이렇게 인사했다.

"왕비마마, 좋은 운수가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마마의 지아비이신 알키노스왕께서도 행복하기시를 빕니다."

그는 배에 올라 두꺼운 겉옷과 융단으로 몸을 감쌌다. 이윽고 노잡이들이 갤리온 선을 물 위로 밀고는 노잡이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갤리온 선은 머나먼 이타카를 향해 항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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