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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휴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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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휴움

 

 

가을 밤의 싸늘한 감촉 ―

나는 밤을 거닐었다.

 

얼굴이 빨간 농부처럼

불그스름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굽어보고 있었다.

 

말은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도회지 아이들같이 흰 얼굴로

별들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요점 정리

 작자 : 휴움(Thomas Ernest Hulme)

 갈래 : 서정시. 모더니즘 시

 율격 : 내재율

 표현 : 직유, 의인법

 성격 : 주지적. 감각적. 회화적. 객관적

 어조 :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어조

 심상 : 시각적

 제재 : 가을 밤

 주제 : 가을 밤의 정경, 달과 별이 떠 있는 가을 밤의 싸늘한 정경

 시상의 전개 방법 : 화자의 시선 이동

 구성 :

    1연  가을 밤의 산책 - 서정적 상황의 제시

    2연  가을 밤의 달 - 달의 모습을 형상화

    3연  가을 밤의 별 - 별의 모습을 형상화

 내용 연구

 가을 밤의 싸늘한 감촉 ― : 가을 밤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가을 밤에 산책하러 나온 화자가, 풍겨 오는 싸늘한 냉기를 감각적 이미지로 묘사한 부분

 나는 밤을 거닐었다. : '밤길을'이 아닌 '밤을'이라고 표현함으로 해서 표현에 율동감을 더해 준다. 낭만주의 시가 가지는 애매성을 반대하고 참신한 이미지와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얼굴이 빨간 농부처럼 : 불그스름하게 떠 있는 달을 표현하기 위한 보조 관념이다. 이 표현은 뒤의 '도회지 아이들의 흰 얼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말은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가을 밤의 정서를 표현한다. 이미지즘 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방식을 회피했다. 다만 사물의 모양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제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지즘 시들은 동양적인 시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휴움은 중국과 일본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도회지 아이들같이 흰 얼굴로 : 달과는 상대적으로 하얀 별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 관념이다.

 별들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 별은 가을 밤하늘에 의연히 떠서 빛을 내고 있다. 가을 밤의 경치 속에서 산책을 하는 화자는 생각에 잠긴다. 여기에서 별과 화자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연과의 일체감이 드러나는 표현이다.

 이해와 감상

  "가을"은 영국 이미지즘 시의 한 전형(典型)이되는 시이다. 시적 자아의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대상의 어떤 측면을 지적으로 관찰하는 이미지즘 시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대개 이미지즘 시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충실한 시가 많다. 그래서 이미지즘 시는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이 시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작자의 감정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싸늘한 가을 밤의 정경만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자는 지금 가을 밤의 하늘을 보고 있다. 한밤에 산책을 나온 시인은 맑고 고운 가을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을 보고 있다. 그렇게 바라본 달과 별을 통해 가을 밤의 이미지를 회화적으로 그린다. 이 회화적 묘사는 직유를 통해 형성된다. 가을 하늘에 보이는 '달'은 '얼굴이 빨간 농부'로 표현되었으며, '별'은 '도회지 아이들같이 흰 얼굴'로 표현되어 있다. '빨간'과 '흰'의 색채 이미지의 대조는 가을 밤의 정취를 더해 준다. 이러한 시각적 심상의 제시로 이 작품은 가을 밤의 이미지와 율동을 공감각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런 선명한 색채 이미지의 제시는 화자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한 객관적 관찰을 통해 시인의 감정을 배제하고 대상만 제시하는 이미지즘의 한 전형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을'은 다섯 편밖에 되지 않는 흄의 시 가운데서 이미지즘적인 특질이 가장 잘 드러난 시이다. 가을 밤에 흔히 볼 수 있는 정경을 작가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첫 행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가을 밤에 대한 시인의 정서를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각에 지각되는 감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행은 바깥으로 나가 배회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거기서 발견한 달과 별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얼굴이 빨간 농부'로 표현한 것도 이미지즘의 수법이 드러난 것이지만 울타리 너머로 굽어 보고 있다는 표현도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낸다. 이 같은 양상은 별에 대한 묘사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심화 자료

 휴움(Thomas Ernest Hwlme 1883∼1917)

 영국의 시인. 비평가. 휴머니즘, 자유주의,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고전주의를 제창하기도 했다.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이미지와 지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 인물이기도 하다. "가을" 외에 5편의 단시가 있으며, 사후에 출판된 <사색>(1924)과 <속 사색집>(1955)이 있다. 스태퍼드셔 출생. 반낭만주의 자세를 완강히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1904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퇴학당하고 독학하며 캐나다·벨기에 등을 방랑하였다.

 

 1908년 런던으로 돌아와 <시인클럽>을, 10년 무렵부터 문학살롱을 개설하여 이미지가 분명한 단시(短詩)를 발표해 <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H.L.베르그송의 철학을 신봉하여 그의 《형이상학 서설(1913)》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G.소렐의 《폭력론(1916)》도 번역·출판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전선에서 종군하다가 17년 전사하였다. 낭만주의·인도주의·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종교적 자세와 고전주의를 표방하였다. 그가 죽은 뒤 H.리드가 그의 에세이와 노트를 모아 편찬한 《사색(1924)》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현대의 모더니즘 문학운동 성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지즘 (imagism)

 

 1910년대에 영국·미국에서 전개된 반(反)낭만주의 시운동(詩運動)으로 사상주의(寫像主義)라고도 한다. 처음 이미지즘을 제창한 것은 영국의 철학자이며 비평가인 흄이며, 파운드는 흄의 예술론에서 암시를 얻어 ‘이미지즘’이란 말을 생각해냈다고 한다(흄은 제l차 세계대전에 참전, 전사함). 1913년 《포에트리》지에 F.S.플린트의 <이미지즘>,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몇 가지 금지항목>이 발표되고, 그 다음해 《이미지즘 시인(詩人)》이라는 최초의 시화집(詩華集)이 나왔다. 1915년에는 플린트가 《에고이스트》지에 게재한 <이미지즘의 역사>, A.로얼이 편집한 시화집 《이미지즘 시인들》이 간행되고, 기타 몇 편의 시집이 발표되었다.

 

이 운동의 목표는

 

① 일상어의 사용,

② 새로운 리듬의 창조,

③ 제재의 자유로운 선택,

④ 명확한 사상(이미지)을 줄 것,

⑤ 집중적 표현을 존중할 것 등이다. 이 시운동은 프랑스의 상징주의를 계승한 것이지만, 그리스·로마의 단시(短詩)와 중국·일본의 시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미국에서의 최초의 자유시 및 구어시(口語詩) 운동인 이미지즘에는 T.E.흄, E.파운드를 중심으로 R.올딩턴, J.플레처, F.M.포드, D.H.로렌스 등이 가담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이미지즘(imagism)과 흄

 이 용어는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파운드 자신과 휴움이 1912년 런던에서 조직한 문학 그룹의 여타 회원들에 의해 합의된 문학 원리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이다. 하나의 광범위한 사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즘은 영·미 모더니즘 운동의 전조였으며, 또한 낭만주의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에 대한 명백한 결별의 전조였다. 문체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즘은 보다 엄격하면서도 치밀하고, 또한 객관적인 매개체를 추구하던 후기 상징주의, 즉 전후 세대의 갈망을 표명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하나의 특정한 유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스트는 동양적인 수법으로 짤막한 시각적인 시를 실험·창작하였던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즘과 시의 혁명과 한계

 시에서 기교상의 혁명은 태도상의 변화와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확고하고 선명하며 명확한 이미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휴움의 영향을 받아서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에 런던에 거주하던 에즈라 파운드가 촉진시킨 이미지스트 운동은 시에서 낭만주의의 애매성과 안이한 주정주의를 반박한 운동이었다.

 

 이미지스트들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간에 '사물'을 직접 취급"할 것, "묘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말을 피할 것, "메트로놈의 계기(繼起)"를 엄격하게 준수할 때 허용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운율적 리듬을 사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정확한 심상과 자유롭고 율동적인 리듬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진정한 폭과 감흥을 지니는 시를 창작하는 데는 미흡한 것이었다. 이미지즘은, 짧고 정교하게 조탁되고 묘사를 위주로 하는 서정시에는 적합한 형식이었으나, 보다 길고 복잡한 시를 창작하는데는 아무런 테크닉도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주정주의 主情主義 (emotionalism)

인간의 정신활동에서, 이성(理性)이나 의지(意志)보다도 감정(感情) ·정서(情緖)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주정설(主情說)이라고도 한다.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립되는 말이다.

 

그 발현의 때와 장소는 여러가지이지만, 극도의 합리주의, 과학편중, 비인간적 억압 등에 대한 반발에 의하는 일이 가장 많다.

 

문예작품은 많건 적건 간에 주정주의적인 색채를 띠지만, 특히 초기 낭만주의 문학(루소, 노발리스 등)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주지주의 主知主義 (intellectualism)

지성 또는 이성이 의지나 감정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상의 입장으로 인간의 마음은 지(知) ·정(情) ·의(意)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 중에서 지적인 것, 즉 지성 ·이성 ·오성(悟性)이 지니는 기능을 감정이나 의지의 기능보다도 상위에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감정을 상위에 두는 주정주의(主情主義:情緖主義)나 의지를 상위에 두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대립된다.

특히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지성과 의지의 관계가 문제되었고 지성의 우위를 주장한 T.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주지주의자이다. 이 경향은 좀더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철학, 그 후의 B.스피노자나 G.W.F.헤겔의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인식이 감관(感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는 합리론(合理論)도 넓은 뜻의 주지주의이며 J.F.헤르바르트처럼 모든 심적 현상(心的現象)을 지적인 표상(表象)으로 환원해서 이해하는 것은 심리학에서의 주지주의로 생각할 수 있다.

 

논리학에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한 지성적 통찰과 숙고(熟考)에 입각해서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주지주의적 입장이며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나 의지의 작용을 중요시하는 비합리주의와 대립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주지주의는 주의주의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학에서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서 주정주의와 대립되어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주지주의 문학론은 T.E.흄의 신고전주의이다. 이는 E.파운드에 의해 이미지즘운동으로 발전되었으며, T.S.엘리엇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의 주지주의는 1930년대에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이양하(李敭河) ·최재서(崔載瑞)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김광균(金珖均) ·김현승(金顯承)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낭만주의 浪漫主義 (romanticism)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과 그 문화권인 남북 아메리카에 전파된 문예사조 ·예술운동으로 18세기에 주요한 유럽 국가들은 17세기 프랑스에서 확립된 고전주의를 일반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이성(理性)을 인식의 유일한 수단으로 삼은 계몽주의의 지배를 받았다. 고전주의는 보편절대적인 미(美)의 관념에 입각하여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복잡보다 간명(簡明)함을,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을, 토속성보다 도회성을, 노골적인 것보다 우아함을, 파격보다 균제(均齊)를 중시하는 귀족문화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면서 절대왕정의 이완 및 부르주아지의 발흥과 함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욕구가 분출하는 한편, 계몽주의 그 자체에서도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면이 드러나자 지금까지 경시되었던 감각현상들에서 인간성의 진실을 찾음과 동시에 고전주의가 모범으로 삼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고대(古典古代)로부터 자국의 과거로 눈을 돌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문화의 원천을 찾으려는 기운이 일어났다. 이 무렵에 일어난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사람들의 마음에 환멸감을 일으켰다.

 

계몽주의의 최고의 성과가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제의 타파였는데,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의 취악한 면을 보고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주변이 어지럽게 변하는 데 당혹하였으며, 모든 원리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일체에 대한 불신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정신의 폐허 위에 자신의 심성(心性)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한 것이 낭만주의 정신의 본질이며, 그 결과 자아(自我)에 대한 확인과 그 내부에로의 침잠(沈潛)이 시작되었다. 내면에야말로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1798년 독일의 예나에서는 A.W.슐레겔과 W.슐레겔 형제가 《아테네움:Athen嬉um》지를 창간하였으며, 영국에서는 워즈워스와 S.T.콜리지가 자연의 관조(觀照) 중에 상상력에 의한 우주와의 영적(靈的) 합일감(合一感)을 노래한 《서정민요집》을 간행함으로써 각기 자국 낭만주의의 효시(嚆矢)를 이루었다.

 

한국에서는 1920년대에 낭만주의가 대두하였다. 동인지 《백조(白鳥)》를 중심으로 홍사용(洪思容) ·박종화(朴鍾和) ·이상화(李相和) 등이 중심이 되어 전통적 도덕과 인습에 반발하면서 개인의 가능성과 창조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의 추구는 낭만적 정열이기보다는 낭만적 허무에 빠졌으며, 이 때문에 프로문학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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