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쉽게 씌어진 시 / 해설 / 윤동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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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육첩방: 다다미(疊, 일본식 돗자리)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
  * 침전(沈澱): 가라앉음. 액체 중에 있는 미세한 고체가 가라앉아 바닥에 굄, 또는 그 앙금.


  이 시에는 비 내리는 밤, 남의 나라이자 적국인 일본의 하숙방에 앉아 시를 쓰고 있는 자신에 대해 느끼는 실의와 비애가 담겨 있다. 아울러 궁핍한 조국의 현실을 떠나 와 방황하고 있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자조의 심경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윤동주의 최후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이 시에서조차 부활의 정신과 미래 지향의 기다림이 강렬하게 표출되어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의미 심장한 일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는 구절 속에는 어둠의 현실을 살아가는 치열한 정신과 함께 미래에 대한 신앙적 기다림의 자세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특히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속에는 현실적 생의 한계를 의식하는 지점에서 문득 죽음을 예감하고 역사의 아침을 믿고 기다리는 예언자적 지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에서 두 자아는 아침처럼 밝게 찾아올 시대를 기다리는 ‘최후의 나’와 그러한 자아를 상상하는 또 하나의 현실적 ‘나’를 뜻하며 ‘최초의 악수’는 ‘최후의 나’와 시적 화자와의 만남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만남은 ‘시대처럼 올 아침’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새벽’, ‘아침’, 그리고 ‘봄’으로 표상되는 부활의 정신과 미래 지향의 정신은 윤동주의 예언자적 지성의 탁월한 발현인 동시에 영생과 부활을 믿는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둔 역사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일제의 패망을 예감하고 조국의 광복을 고대하던 암흑의 하늘 아래에서 이 부활의 정신과 미래지향의 역사 의식은 윤동주의 삶과 시를 지탱시켜 주던 가장 큰 힘이었으며 동시에 최후의 정신적 보루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핵 심 정 리 >


1. 시작(詩作) 배경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좌절과 번민, 무력감을 부끄럽게 느끼면서 끝없는 모색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시인의 사명감을 자각해 가는 성찰의 모습을 솔직하고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2. 시상의 전개
  * 제1,2연 - 이국의 육첩방에서 시나 적어 볼까
  * 제3,4연 - 학비를 받고 강의를 들으러 감
  * 제5,6,7연 - 시가 쉽게 씌어짐이 부끄러움
  * 제8,9,10연 - 시대의 아침을 기다리며 위안의 악수를 함
3. 주제 : 이국에서의 고독과 시인으로서의 천명성 확인
4. 제재 : 시가 쉽게 씌어지는 부끄러움  
5. 성격 : 명상적, 고백적
6. 詩語의 의미
  * 육첩방(六疊房) : 작은 방. 억눌리고 암담한 공간
  * 천명(天命) : 하늘이 내린 피할 수 없는 명령       

< 참 고 >
  윤 동 주(尹東柱(1917-1945) : 북간도 출생. 항일 민족 운동의 사상범 혐의를 받고 일경(日警)에 피검되어 2년 언도를 받고 복역 중 옥사했다. 유고 30편을 모아 친구와 아우의 주선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했다. 허망한 존재 의식, 자아에 대한 내적 응시와 분열, 일제의 감시를 받는 강박 관념과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것이 그의 시의 내용이다. 한국 민족의 슬픈 자화상을 간결하게 그린 ‘슬픈 족속’, 자아에의 애증과 내적 갈등을 그린 ‘자화상’, 어린 시절의 회상과 조국의 광복을 염원한 ‘별 헤는 밤’ 등의 수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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