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 해설 및 감상 / 한용운
by 송화은율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려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 님의 침묵 : 영원한 진리의 말 없는 말. 초월적인 존재의 음성.
* 정수박이 : ‘정수리’의 뜻.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작가 : 한용운(1879-1944) 본명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아명 유천(裕天). 호는 만해(卍海). 용운(龍雲)은 법호(法號). 충남 홍성 출생.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며 등단. 한말에 의병운동을 했으며, 3․1 운동 당시 33인 중의 주동자로 피검되어 3년간 투옥. 승려, 급진적 불교개혁론자, 독립 지사.
그는 당시의 퇴폐적인 사조에 초연하면서, 단 한 권의 시집으로 우뚝한 시사(詩史)의 봉우리를 점했다. 그는 종교적 민족적 전통시인인 동시에 저항시인으로 평가되며, 그의 시는 깊은 사색과 신비적인 특성을 드러냈다. 특히 동인 활동을 거치지 않고 독자적이고도 전통적인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특기할 만하다.
그의 전작(全作)은 『한용운 전집』(신구문화사, 1973)에 수록되어 있다. 장편소설로 「흑풍(黑風)」(조선일보, 1935), 「후회(後悔)」(조선중앙일보, 1936) 등이 있고, 이외에도 『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의 저서가 있다.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님’을 잃은 슬픔과 새로운 신념을 노래한 서정시로서, 시집 <님의 침묵>의 전체 주제를 함축한 표제시(表題詩)로서 서시(序詩)의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의 상징 의미를 알아야 하며 또 화자는 어떤 원리를 통해 ‘님’을 잃은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여 보다 큰 만남을 성취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도록 해야 한다.
▶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 어조 :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 영탄적 어조
▶ 특징 : 불교의 윤회설과 공(空) 사상에 바탕을 둠.
▶ 구성 : ① 기 : 님과의 이별(1-4행)
② 승 : 이별 후의 슬픔(5-6행)
③ 전 : 새 희망에의 의지(7-8행)
④ 결 : 불굴의 의지적 사랑(9-10행)
▶ 제재 : 님과의 이별
▶ 주제 : 님에 대한 영원한 사랑.(존재의 회복을 위한 신념과 희구)
<연구 문제>
1. 이 시와 한용운의 다른 작품『알 수 없어요』의 귀결점은 동일하나 출발점은 다르다. 서로 다른 출발점의 차이를 창작 동기와 비교하여 100자 내외로 쓰라.
☞ 『님의 침묵』은 님과의 이별을 인식하고 그 이별이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데에서 출발하였고,『알 수 없어요』는 아름다운 자연 현상을 통해 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2. 제1행의 ‘아아’와 제9행의 ‘아아’에 함축되어 있는 시적 화자의 정서를 각각 한 단어로 쓰라.
☞ 제1행의 ‘아아’ : 슬픔, 제9행의 ‘아아’ : 기쁨
<해설> 제1행의 ‘아아’는 이별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을, 제9행의 ‘아아’는 헤어짐은 곧 만남이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법열(法悅)을 함축하고 있다.
3. ㉠에 담긴 역설적 의미를 20-30자 내외로 쓰라.
☞ 나는 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하여 님 안에 존재합니다.(또는, 나의 마음은 님 이외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4. 제9행에서 ‘님은 갔지마는’이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주관적 의지에 해당된다. 주관적 의지가 드러난 부분의 처음과 마지막 어절을 쓰라.
☞ 그러나 ~ 믿습니다.
< 감상의 길잡이 1 >
이 시는 ‘님은 갔습니다.’라고 하여 님과의 이별을 확인하는 말로 시작된다. 이어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와 같이 점층적 반복법을 사용하여 이별의 상황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님이 떠나가고 없는 상황을 거듭 확인함으로써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든다. 그런데 제7행에서 이 슬픔은 ‘희망’으로 전환된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이와 같이 이별의 슬픔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만남의 희망으로 역전시킨 구조에 있다. 그렇다면 슬픔을 희망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만남과 헤어짐의 실상(實相)을 깊이 있게 깨닫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듯이, 만남은 곧 헤어짐이요, 헤어짐은 곧 만남이라는 것, 다시 말해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떠나갔다고 생각하던 ‘님’은 사실은 떠나간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 침묵하고 있는 님을 위해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시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님’이 누구이냐에 따라 시의 내용과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님’을 ‘조국’, ‘불타(佛陀)’, 또는 ‘조국과 불타가 일체가 된 존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님’이 지니는 전체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고 일부로써 한정시켜 버릴 우려가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군말』에서 시인은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대로 ‘님’은 위의 해석들을 포괄하는 ‘그리워하는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 감상의 길잡이 2>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刊·1926년)중에서
만약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모르는 외국의 문학 독자가 아무 선입견 없이 「님의 침묵」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틀림없이 아름다운 연시(戀詩)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남성이 아니라 님을 향한 한 여인의 시시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사포의 서정시를 연상하게 될느지 모른다. 그러나 만해가 불교의 승려이며 기미독립운동을 일으킨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님의 침묵」을 사랑의 시로서 읽으려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연시 같으면서도 속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했던 사군가(思君歌)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결과로 님은 님이 아니라 조국을 가리킨 것이며, 침묵은 이별이 아니라 그 조국을 잃은 식민지 상황을 의미한 것이라는 모범답안을 썼다. 그래서「아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님의 침묵」은 기미 독립운동의 좌절을 노래한 삼일절 노래가 되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또 만해의 님은 님이 아니라 니르바나의 마음을 현상화한 부처님이며, 그 침묵은 깨달음을 향한 끝없는 구도(求道)의 길을 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시를 증도가(證道歌)의 하나로 바꿔버린다. 만해의 님은 수많은 비평서 속에서 이렇게 속(俗)과 성(聖)의 양극을 오가는 시계추가 된다.
그러나 정말「님의 침묵」은 기미독립선언문이나 혹은 불교 유신론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서 만해 자신이 직접 대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집「님의 침묵」의 첫머리에 실린「군말」이라는 서시(序詩)이다. 만해는 그 글에서 자기가 시의 키워드로 삼은 ‘님’이란 말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것인 바로「님만 님이 아니라 기리운 것은 다 님이다」라는 구절이다. 무엇보다도 이 시구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만아니라」의 그 조사용법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님을 조국 또는 부처님으로 풀이해온 사람들은「님만 님이 아니라···」를「만」자를 빼고 그냥「님은 님이 아니라···」로 읽어온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님의 침묵」은 연시적(戀詩的) 요소가 전연 배제된 애국시 또는 종교시의 이데올로기로서만 남게 된다. 하지만 만해는 분명히「군말」에서「님은 님이 아니라」라고 하지 않고「님만 님이 아니라」라고 읊고 있다. 그가 말하는 ‘님’ 속에는 일상적인 님[戀人]의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만」이라는 토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영어의 구문형식으로 대치해 보면 보다 명확히 할 구 있을 것이다. 만해의 ‘님’은「not A but B」가 아니라,「not only A but B」로 A와 B는 배제적 관계가 아니라 포함적 관계다.
엄격하게 말해서「군말」에서 나오는 ‘님’의 정의는 그야말로 만해 자신만의 정의가 아니라 한국말의 고전적 정의라고 하는 것이 옳다.
「님」이라는 한국말의 원형적 의미는 황진이의「정든 님」의 그 에로스적 사랑만이 아니라 형님, 어머님과 손님, 선생님이라고 할 때의 그 에필리아적 사랑 그리고 햇님 달님의 자연과 초월적인 존재의 하느님에 이르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모든 대상과 관련된 것이다. 마음 속으로「기리는 것」이면 모두다「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님을 어느 한정된 대상에 국한시키려 하는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인 말뜻은 물론 만해의 그 정의에서도 어긋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의「님」은 한국말 그대로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수용하는 열려진 의미로서의 ‘님’이라는 것을 우리는「군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석가의 님이 종교적 층위에 속하는 것이라면 칸트의 님은 사상적 층위에, 장미화의 님은 자연에, 그리고 마시니의 님은 정치적 층위에 각기 위치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이렇게「님」이란 말을 한가지 층위에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이 종교, 사상, 정치, 자연의 모든 영역을 횡단하고 넘나드는 메타 언어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정녕 궁금하게 여겨야할 것은「님」이란 말의 대상보다는「기리운 것」이라는 그 사투리의 말뜻이다. 그것이 민족이든 중생이든 이성(異性)이든「기리워」하면 모두 다 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도 님이 아닌 것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그것은 너의 그림자니라.」)
사람들은「기리움」을 간단히「그리움」의 사투리라고 풀이한다. 그렇게 아무일 없이 표준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라면 만해는 시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세 살때부터 사전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학습한 그 체험의 말은 시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는 독립운동가요, 승려에서 그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했던 것이다.「님의 침묵」에서 님과 동격을 이루는 그「기리움」은 사랑, 그리움, 찬미, 존경, 연민, 아쉬움 등 가지각색의 감정과 관념의 복합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져 있는 말, 모듬 계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가.「군말」에서 불교도인 만해는 연꽃 대신 장미화나 길잃은 양(羊)과 같은 기독교적 상징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민족운동가인 그가 충무공의 이름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통일한 마시니의 이름을 거명(擧名)하고 있다. 예수도 부처도 산신령도 한국에 오면 예수님 부처님 산신령님이 되듯이, 만해의 ‘님’은 세계의 모든 것을 싸버릴만큼 크고 넓기 때문이다.
님의 뜻보다는 아무래도 그「님」이 누구인지 궁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군말」의 맨 마지막 시행을 정독(精讀)하면 될 것이다.「군말」의 구조는 석가, 칸트, 마시니로 시작하는「그들의 님」에서「너희들에게도 님이 있더냐」의「너희들의 님」, 그리고「나는 해저문 벌판에·······」로 끝맺음하고 있는「나」의 님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리워서 이 시(詩)를 쓴다」의 마지막 대목에서 만해는 나의 님이 누구인지 명시(明示)하고 있다. 만해가 기리워하고 있는 대상은「돌아갈 길을 잃은 어린 양」이다. 그리고 그 기리운 것들은 그에게 시를 쓰게 한다. 그에게 예불을 하게 하는 ‘님’이 있고 독립선언문을 읽게 하는 ‘님’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시를 쓰게 하는 또하나의 ‘님’이 있었던 것이다. 늑대에 잡혀먹히는 양(羊)이 아니다. 길 잃은 어린 양들―미로 위에 서있는 어린 양들[無垢性]은 시를 갈망하는 존재―자기자신까지를 포함한 세계의 독자들인 것이다.
언제나 미로는 시를 요구하고, 시는 또한 미로를 필요로 한다. 한국 고유의 ‘님’이란 말리 있었기에 만해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목소리, 불교 승려로서의 목소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한데 묶는 화성법을 일힐 수 있었다. 이 화성(和聲)을 단성(單聲)으로 만드는 어리석음을 우리는 미로의 어린 양들의 이름으로 단죄(斷罪)해야 할 것이다. <이어령 교수>
< 감상의 길잡이 3 >
<님의 침묵>의 첫 구절,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된 시집 님의 침묵은 마지막 작품인 <사랑의 끝판>의 끝 행, ‘예 예 가요 이제 곧 가요’로 마무리되는 이별과 만남의 존재론적 드라마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시집 님의 침묵에 강한 연계성과 극적인 구조로 배열되어 있는 88편의 시를 대표하면서 나머지 시들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만해시가 갖는 시적 특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님’과 ‘침묵’의 상징 체계가 어떠한 연관을 지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집 님의 침묵의 머리말격인 ‘군말’을 보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중략>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그것이 생명이 있건 없건 간에 만해는 모두 ‘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해의 ‘님’은 그의 영혼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그를 존재하게 하는 원점이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動力)이라 할 수 있다. 자아를 출발시키는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그의 ‘님’은 역사 속에서는 조국이나 민족이며, 진리의 의미로는 참자각의 세계요, 그의 종교적 환경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신앙의 가치요, 그외에도 단순한 연인으로서의 의미 등 다양하게 변모하며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으며, 또한 그 어느 하나만은 될 수 없는 복합적 의미의 ‘님’인 것이다. 가장 포괄적으로 그의 ‘님’을 말하면 인간의 삶을 삶답게 해 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하겠다.
‘님’의 다양한 의미처럼 ‘님의 침묵’ 역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부처의 경지, 피안(彼岸)의 진리 세계,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암담한 조국 현실 상황, 현상으로는 이미 사라지고 본질로서만 있는 영원한 임의 존재 양상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만해의 생애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민족의 삶이었던 만큼 역사적,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는 그의 시가 온당하게 해석될 수만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1행은 ‘님’이 떠난 사실을, 2행은 ‘님’이 떠난 모습을, 3행은 ‘님’이 떠남으로써 파기된 ‘님’과의 약속을, 4행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님’과의 추억을 말함으로써, 1~4행이 ‘님의 떠남’, ‘님의 부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5행은 ‘님’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6행은 ‘님’이 떠남으로써 야기된 슬픔을 보여 줌으로써 5~6행은 ‘님’과 함께 있으면서 ‘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했던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뜻밖의 이별에 대한 충격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1~6행까지는 사랑하는 ‘님’과 이별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슬픔과 괴로움을 묘사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나’라는 접속어에 의해 7행은 시적 상황이 급전하게 되어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이것은 바로 그가 ‘거자필반(去者必反)’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철리(哲理)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8행에서는 ‘거자필반’이라는 재회의 확신을 보여 줌으로써 이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만해에게는 이별이 부정적 이별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을 극복한 긍정적 이별이 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소멸’과 ‘생성’,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결국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9행은 주제행으로 ‘님’이 부재하는 객관적 사실을 ‘마음으로는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주관적 의지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 마지막 10행에서는 현상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본질적 존재로서는 남아 있는 침묵의 깊은 경지 속의 ‘님’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모습을 그리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1~5행에서 ‘만남은 만남, 이별은 이별’이라는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로서만 존재하던 평면적 사고(思考)가 6행에 이르면서부터 입체적인 사고로 변하게 되었다. 만남의 배후에 있는 이별과 이별의 배후에 있는 만남을 설정함으로써 만남은 곧 이별이요, 이별은 곧 만남이라는 역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로 이 역설적이고 입체적인 사유가 5행에서 주제행인 10행으로 전개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또한 ‘님’과의 이별이라는 비탄과 절망의 상황을 소망과 기대의 밝은 공간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님’이라는 존재와 이별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제시하여 인간 정서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별의 한(恨)’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정서를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열어 준 기념비적 작품으로, ‘이별’ → ’이별의 슬픔과 고통’ → ‘희망적 기다림’ → ‘만남’에 이르는, ‘소멸’ → ‘모순․갈등’ → ‘생성’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드라마이다. 따라서 이별은 만남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며, 생성의 존재 원리에 해당한다. 결국 만해는 국권 상실도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소멸에 불과한 것으로 더 큰 의미의 광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현실적 고통이며 역사적 시련으로 인식함으로써 194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금도 변절하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운 실천적 지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4 >
이 작품이 말하는 바 `님의 침묵'은 작중 인물 `나'의 삶에 절대적일 만큼 소중한 어떤 것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킨다. 제6행(`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까지는 그러한 상실의 경험에서 오는 슬픔을 노래한다. 이 부분에서 님은 지극한 사랑의 대상인 연인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님은 `나'에게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맹서를 하였고, 님의 입술에 닿았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았다. 그러나 그 님은 떠나가고 말았다.
제7행 이하의 부분은 이러한 이별에서 오는 절망과 슬픔을 새로운 희망과 기다림으로 극복하는 믿음의 노래이다. 이와 같은 시상의 바탕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끊임없는 생성, 변화를 거듭하며 따라서 영원한 만남과 밝음이 없는 것처럼 영원한 헤어짐과 어둠도 없다는 불교적 깨달음이 놓여 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님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님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 때의 님을 꼭 조국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님을 조국이라는 말로 바꿔 넣으려 하면 여러 가지 해석상의 무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시가 노래한 `님이 없는 시대'는 분명히 참다운 정의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시대이며, 식민지 시대와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꺼지지 않는 참다운 가치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것을 위한 헌신적 사랑과 믿음을 노래한 데에 이 작품의 근본되는 뜻이 있다. [해설: 김흥규]
< 감상의 길잡이 5 >
이 시는 연 구분이 없이 사설조의 산문체로 되어 있다. 여성 화자의 경어체의 사용, 우리말의 유려한 구사, 고도의 상징적 수법, 불교적 사상의 심화 등은 이 시를 뛰어난 서정시로 만드는데 총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이 시의 ‘역설적 구조’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희망, 헤어짐과 만남은 하나라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줌으로써 상징성을 더한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적 의지의 표현으로 시상의 깊이를 더해주는 결정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시는 ‘이별-이별 후의 슬픔-희망으로의 전이-만남’이라는 극적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묘미를 느끼게 한다.
<맥락 읽기>
1. 애기하는 이는?
☞ 나
2. 지금 내게 어떤 일이 생겼나?
☞ 사랑하는 님이 떠났다. 이별하게 됐다.
3. 어떤 심정인가?
☞ 슬픔에 빠져있다.(6행)
4. 계속 이별의 슬픔 때문에 절망감에 빠져 있는가?
☞ 아니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붓는다.(7행)
5. 감정이 바뀌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계속 슬프기만 하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7행)
☞ 님은 떠났지만 반드시 만날 것이라고 확신하므로(8행)
☞ 님을 다시 만날 것을 확신하므로 화자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구나.
6. 님을 다시 만날 거라는 확신, 님에 대한 사랑이 강하게 드러난 곳은?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9행)
7. 이런 확신을 가진 나는, 님이 오는 그날까지 어떻게 기다리는가? (어떻게 해야 님이 빨리 올 수 있는가?)
8. 그런 자세가 나타난 부분은?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생각해 볼 거리>
1. 님과의 만남이 내게 영향을 미친 행은?
☞ 4행.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2. 님과의 만남을 왜 날카로운 키스라고 표현했을까?
3. 내 운명을 바꿔놓고, 살아가는 태도를 바꿔놓은 님은 과연 누구일까?
또 이 시가 1926년에 쓰여진 시라는 걸 감안해 본다면, 과연 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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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