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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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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3, 1934.4)

 

* 모란[牡丹] :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활엽 관목.(본음은 목단’)

* 하냥 : 한결같이, 줄곧


<핵심 정리>

 

감상의 초점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는 것일 게다. 비록 그것이 나에게 슬픔을 줄망정 그 꿈을 버리지 않겠다는 집념과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정성들여 가꾼 모란, 그것들이 피기를 기다리는 오월’, 화자가 기다리고 또 보내기를 꺼려하는 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오월이 가면 또다시 그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은 시인이 시대 배경을 염두에 두고 노래 부른 것인가?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실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보람과 이상이 꽃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화자가 기다리는 의 의미를 앞에서 말한 것만으로 한정할 수 없다면 그럼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자아에서 큰 이상과 가치의 세계로까지 확대되는 보람과 최고 목적이 에 포용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며 음미해 보자.

 

1930년대 시문학파(순수시파)의 대표적 시인인 영랑은 경향파의 목적시를 거부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하였다. 아름다운 시어, 감미로운 서정,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시문학파 순수시의 특징 : 정서의 순화, 언어의 조탁, 미묘한 음악성

 

성격 : 낭만적, 유미적

어조 : 여성적 어조

표현 : 역설적 표현

구성 :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2)

모란을 잃은 슬픔(3-10)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1-12)

제재 : 모란의 개화

주제 :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연구 문제>

1. ‘모란의 상징 의미를 표현한 시어를 둘 찾아 쓰라.

, 보람

 

2.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때가 되면 모란은 지고 언젠가는 다시 피어나리라는 사실을 이 시의 화자는 알고 있다. 그에 따라 화자는 설움에 잠기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다. 이러한 수동적인 인생관을 반영하고 있는 부사 두 개를 찾아 쓰라.

비로소, 아직

 

3. 모순 형용을 통해, 비애까지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김영랑의 유미주의적 태도가 잘 나타난 시구를 찾아 쓰고, 그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하라.

(1) 찬란한 슬픔의 봄

(2) 봄은 그가 기다리는 모란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덧없이 지기도 하는 계절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찬란하리만큼 승화된 슬픔의 경지로 이해할 수 있다.)

 

4. 에서 한 해삼백 예순 날이라는 표현이 지니는 의미상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라.

한 해는 모란이 한순간에 덧없이 진다는 느낌이 표현된 것이고, ‘삼백 예순 날은 꽃이 필 때까지 손꼽아 기다리는 안타까움과 지리한 느낌(슬픔의 정감적 깊이)이 표현되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1 >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이야기는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1930년대 순수시파의 대표적 시인인 김영랑의 이 시 또한 시를 애송하는 현대인에게 그러한 가치를 깨닫게 한다.

 

모란이 피면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모란이 졌을 때 그 소망이 무너져 삼백 예순 날을 슬퍼하더라도 나는 다시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모란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눈물겨운 것이다. 쉽게 계획하고, 쉽게 좌절하며, 포기하는 듯한 오늘 우리의 현실 속의 인생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 시는 많은 암시를 주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모란의 상징성이다. 꽃은 아름다움이요, 희망이요, 밝음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좌절과 어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 자체가 어느 일면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다양한 모습과 성격을 지닌다.

 

유미주의 작가인 영랑은 모란에서, 그러한 사물의 속성을 통해 인간이 절망하고 시련에 빠질 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해 냈을 것이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일제 강점하에서 이 시가 쓰여졌다면, 암울하고 우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몸부림도 한편으로 느껴지리라.

 

 

< 감상의 길잡이 2 >

이 시는 영랑이 남달리 좋아하던 모란을 소재로 하여 한시적(限時的)인 아름다움의 소멸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비애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모란은 실재하는 자연의 꽃인 동시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대유적 기능의 꽃이다.

 

연 구분이 없는 이 시는 작품 속에 전개되는 시간의 추이로 보아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인 첫째 단락은 12행이며, 미래인 둘째 단락은 34, 과거인 셋째 단락은 510, 현재의 넷째 단락은 1112행으로 첫째 단락의 반복이다. 첫째 단락에서 시적 화자는 모란이 필 그의 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둘째 단락에 이르면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모란이 떨어져 다시 슬픔에 잠기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으며, 셋째 단락은 그가 설움에 잠기게 될 미래의 상황을 증명해 줄 뿐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삶의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오직 모란이 피어 있는 순간에만 삶의 보람을 느끼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모란은 봄과 등가적(等價的) 가치로 그의 소망을 표상한다. 그가 추구하는 소망 세계가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그것이 모란으로 대유된 어떤 절대적 가치의 미()라고 한다면, 시적 화자는 모란이 피어 있을 때는 자신의 소망이 성취된 것으로 생각하여 보람을 느끼다가, 모란이 지고 말았을 때는 봄을 여읜보람을 상실한 허탈감에 빠져, 마치 한 해가 다 지나버린 것으로 생각하는 감상적 유미주의자임을 알 수 있다. 화자의 한 해는 모란이 피어 있는 날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910행에서 볼 수 있듯이 모란이 피어 있는 날을 제외한 그의 나날은 하냥 섭섭해 우는서러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넷째 단락에 이르러 화자는 모란이 피는 날을 계속 기다리고 있겠다는 심경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기다리는 봄이 다만 슬픔의 봄이 아닌, ‘찬란한 슬픔의 봄임을 시인하게 된다. ‘찬란한 슬픔의 봄찬란한 봄이라는 의미보다 슬픔의 봄이 강조된 표현이라면, 표면적으로는 화자가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기대와 희망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란을 잃은 설움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란에 자신의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비실제적 세계관의 소유자인 화자가 한 해를 온통 설움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그의 봄은 결코 절망뿐인 슬픔의 봄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봄은 또 올 것이고, 봄이 오면 모란은 또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슬픔은 다만 모순 형용의 찬란한 슬픔으로 언제까지나 그를 기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줄 뿐이다.

 

모란이 피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설움에 잠겨 있는 화자의 태도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내 마음을 아실 이>에서 보여 준 바 있는 내 마음의 세계를 한층 더 내밀화시키는 것으로, 영랑으로 하여금 외부 사물과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취하지 못한 시 세계만을 펼쳐 보이게 하였으며, 결국 그의 시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감상의 길잡이 3 >

꽃을 뜻하는 한자의 는 풀초 밑에변화한다자를 붙여놓은 글자이다. 민주화니 정보화니 딱딱한 말에 따라 다니는 그 글자가 왜 하필 꽃처럼 아름다운 것에 붙어 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자는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구부리고 있는 것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세처럼 수시로 변화(變化)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다. 어제까지 비어있던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갑자기 티눈같이 작은 봉오리가 틔어난다. 그것이 몽우리지고 부풀어 오르고 터지면서 형형색색의 꽃잎과 향내가 피어난다. 그러다가 어느새 시들어 흔적도 없이 져버리고 그 빈자리에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트고 부풀고 터지고 피고 시들고 지고 열리는 것동사(動詞)로서의 꽃이 바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꽃을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 온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다. 향기롭다와 같이 시화(詩畵) 속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꽃들은 영화(榮華), 가인(佳人)을 수식하는형용사로서의 꽃이었다. 영화(榮華)란 말 자체가 그에 속하는 글자다. ‘은 벚꽃처럼 꽃잎이 자잘하면서 부리져 피어있는 꽃을 나타낸 것이고, ‘는 송이가 크고 그 꽃잎이 화려한 꽃을 가리키는 글자다. 특히 이형용사로서의 꽃을 대표해 온 것이 모란이다. 그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탐스러워 신라 때 설총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귀공명을 상징해 온花中王이다. 그래서 베갯모나 수연(壽宴)의 병풍 속에서 모란꽃은 영원히 질 줄 모르는 꽃으로 수놓여져 왔다.

 

그러나형용사에서동사,공간에서시간으로 새롭게 바꿔놓은 것이 바로 김영랑의 시모란이 핏기까지는이다. 우리가 그 시의 첫행에서 만나게 되는 말도 모란의 색깔이나 그 화려한 꽃잎에 대한 수식어가 아니라피다라고 하는 그 동사이다.「…까지는,아직…」과 같이 시간의 한계와 유예를 나타내는 말을 덧붙여피다라는 동사를 더욱 강렬하게 못질해 놓았다. 그래서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독백 속에서 우리는 모란만이 아니라 꽃이 핀다는 그 동태성과 봄이라는 계절의 지속성을 읽을 수가 있다.

 

피다로 시작된 이 시는 당연히지다라는 거기에서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라는 시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란은피다보다도 오히려지다쪽이 더 강조되어 있어서뚝뚝 떨어져버린이라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뚝뚝은 벚꽃처럼 일시에 폈다

지거나 그 꽃잎이 자잘한 것에는 쓰일 수 없는 의태어이다.)

 

이렇게 피다와 지다의 시간축(時間軸)으로 펼쳐지고 있는 영랑의 그 꽃은 이미목단(牧丹)이라는 한자말보다는모란이라는 보다 부드럽고 약간은 나약하기까지한 토박이말에 더 잘 어울리는 꽃으로 변신한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꽃의 형태도 색채도, 심지어 그 피는 시기마저도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란꽃은 화투에서도 육() 목단으로 나와있듯이 여름 꽃에 속한다. 하지만 영랑은 봄을 극한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란을 봄과 여름의 경계선인 오월에 설정한다. 그래서지다피다의 그 시간차는 한 계절차이 만큼 벌어지게 된다. 필 때는 봄꽃이고 질 때는 여름꽃으로 말이다.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 날/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에서도 필 때보다 질 때의 모습이 더 강조된다. 꽃을 의인화한 표현은 많지만 떨어진 꽃잎을 보고누웠다라고 한 것은 영랑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 꽃이 아니라 꽃의 시체이며 흙에 묻는 매장이다. 비극이나 아이러니의 효과는 그 대조가 크면 클수록 커지는 법이다. 꽃모양이 크고 화려할수록 그것이 져서 사라지는 허무의 자리도 크다.

 

피다지다는 생성과 소멸을 낳는 시간의 모든 비극이고 갈등이며 그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축을 타고 전개되는 영랑의모란에서는 모든 삶의 의미와 정서 역시 그와같은 대립과 모순의 언어로 양분되어 진다.기다림여윔으로, 뻗쳐오르는 보람서운케 무너졌느니, 그리고찬란함슬픔으로 화한다.

 

그러나 영랑은 대부분의 한국문화가 그런 것처럼 시간을 처음과 끝으로 이어진 직선으로서가 아니라 둥근 순환의 고리로 생각한다. 봄은 다시 오고 모란은 계절의 모서리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소망이 좌절로 이어졌듯이, 좌절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진다. 피다와 지다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순환의 고리 속으로, 어쩌면 영원 회귀의 반복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는 것같다. 그것이 돌로 나타난 것이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것이 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이 핏기까지는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봄까지 합쳐서 일년내내 통틀어 운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뻗쳐오르는 보람과 그 기다림의 찬란했던 시간가지도 소급해서 모두 뻬어버린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의 끝행은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첫행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찬란한 시간들이 삼백예순 날의 슬픔 위에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시간의 모순 감정을 통합한 것이 바로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꽃이다. 영랑은 모란꽃을 통해서 봄의 보람을 극한까지 떠받치는 튼튼한 버팀목과 동시에 그 봄의 죽음을 장례하는 가장 화려한 상복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귀족적이고 화려하고 중화적(中華的)이었던목단이 김영랑의 시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향토적인모란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청요리집 같은 모란꽃의 찬란한 빛 속에 슬픔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평면적인 꽃의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은 한국의 시인 영랑이었다.

 

미녀를 맨처음 장미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다 그러나 그 똑같은 비유를 두 번째 사용한 사람은 바보다라는 말이 있다. 영랑은 천년을 두고 부귀영화를 상징해온 중국 문화의 모란 패러다임을 대담하게 바꿨다.형용사로서의 목단꽃동사로서의 모란꽃으로 돌렸다. 그리고공간 속에 수놓여진 꽃시간 속에서 피고 지는 꽃으로 끌어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의미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영랑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 모란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보여 준 것이다. <이어령 교수>

 

 

< 감상의 길잡이 4 >

이 시에서 `모란'은 여러 가지 꽃 중의 하나이면서 지상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지상의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아끼고 보존하려 하여도 영원할 수가 없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 죽어야 하며, 피어난 것은 마침내 떨어져야 한다. 태어남과 피어남이 기쁨이라면 죽음과 떨어짐은 슬픔이다. 산다는 것은 이러한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맛보며 주어진 시간을 누리는 일이다. 김영랑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모란이 피기까지 그는 아직 봄을 기다린다. 아름다운 모란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어난 꽃은 져야 하는 것. 그는 어느 날 모란이 모두 지고 말면 환희와 보람을 잃고 슬픔에 잠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꼭 모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 부분이다.

 

김영랑은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라고 노래한다. , `삼백 예순 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가지 일들로 차 있으며, 우리는 어느 하나에서 슬픔을 맛보더라도 다른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생활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의 모든 관심을 자신의 내면 생활과 아름다움에의 소망으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하는 꽃의 소멸은 곧 모든 보람이 무너지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봄을 기다린다. 물론 그는 다시 돌아오는 봄도 곧 지나가야 하며 새로 피어날 모란도 얼마 있지 않아 떨어지고 만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그 봄은 보람과 환희로만 가득한 계절이 아니라 슬픔의 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맛보아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아름다움을 삶의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그에게 봄은 삶의 유일한 보람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모순 형용은 이와 같은 아름다움에의 환희와 그 소멸로 인한 슬픔이 한데 섞인 그의 심경을 잘 나타내 준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느꼈던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해설: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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