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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 한국적 미학과 현대적 윤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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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한국적 미학과 현대적 윤리
천이두

 

 

1

황순원은 16세 때(1930)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0세 때는 첫 시집 《방가(放歌)》를 출판하였고, 22세 때에는 두 번째 시집 《골동품》을 출판하였다. 그 뒤 차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26세 때(1940)에는 첫 단편집 《늪》을 출판함으로써 단편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그가 첫 장편소설 《별과 같이 살다》를 출판한 것은 36세 때(1950년)의 일이며, 이 뒤부터 그는 차츰 장편소설에도 노력하게 된다. 시인으로 출발하여 단편작가에로, 거기서 다시 장편 작가에로 이어온 그의 문학적 과정은 꾸준한 심화 확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두 권의 시집인 《방가》와 《골동품》은 대조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방가》에는 소박한 서정성이 짙게 반영되어 있으며, 《골동품》에는 지적인 위트가 반짝거린다. 《방가》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서정성과 《골동품》에서 볼 수 있는 지적인 위트는 서로 상반되는 요소라 할 수 있겠으나, 그 두 가지 요소야말로 그 뒤의 그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씨와 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순원의 문학 세계에서 우리는 예외 없이 아늑한 서정시적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데, 그러한 서정시적 분위기는 또 치밀한 지적 절제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문학 세계에 접근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우선 《방가》와 《골동품》에 수록된 한 두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이것은 시집 《방가》의 첫머리에 실린 <나의 꿈>의 첫련이다. 여기에는 문학 소년적인 의욕과 동경의 자세가 소박하게 표출되어 있다. 다가올 무수한 앞날에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소박한 서정성을 느낄 수 있고, 소년적인 이상주의 내지 낙관주의의 반영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상주의적 자세는 '우리들 참 사내는 다시 등대의 불을 켜놓아/훗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기꺼워함을/ 가슴 깊이 안아야 하지 않는가. 안아야 하지 않는가'(등대) 하는 인도주의적 설계의 피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광란한 궤도를 달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좌절하지 말고 젊은이는 세기의 지침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1933년의 수레바퀴를 힘껏 달리자'(1933년의 수레바퀴)는 사명감의 표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오랑캐의 창과 화살을 막아 물리치던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한 번 싸움에 진 수탉이 항상 쫓기우듯이 / 오늘에는 다만 서러운 눈물의 고장이 되고 말다니'(압록강) 하는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의 표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먼 고향의 참상을 떠올리며 울분에 잠기던 끝에 '그러나 젊은이는 이같이 덧엎친 분위기 속에서, 깊은 바닷속 같은 헤매임에서 / 어떻게든 새로운 빛을 발견해야 하느니'(이역에서)하는 조국 광복에의 신념의 토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소박한 서정성 및 이상주의적인 인간 긍정의 자세는 뒷날의 그의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한 기본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제2시집 《골동품》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적인 위트가 두드러진다. 이 《골동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쥴 르나르의 《박물지》를 연상시킨다. 표현 대상을 어떤 단적인 이미지로 정착시키려는 지적인 자세가 특히 그러하다. 아마도 이 《골동품》 무렵은 작가 황순원에 있어서 지적인 위트, 신선한 이미지의 포착에 모든 흥미가 집중되어 있었던 것 같다.

'종달새'의 인상을 그는 '점은 /  넓이와 깊이와 소리와 움직임이 있다'라고 포착하고 있다. 높푸른 하늘 위로 하나의 작은 점과도 같이 날아오르며 지저귀는 종달새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된다. '반딧불'이 깜박깜박 어둠 속을 흘러가는 인상을 '이곳입니다. / 이곳입니다 / 당신의 / 무덤은'이라고 포착하고 있다. 오늘날은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된 반딧불의 애잔한 아미지가 생기 있게 부각된다. '코끼리'의 인상을 '내 귀가 아프리카  닮은 / 인연을 당신은 / 생각해 본 적이 계십니까'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코끼리의 너풀너풀한 귀의 모양은 확실히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 모양과 비슷하다. 게다가 코끼리의 고향은 아프리카인 것이다. 그의 이미지 포착은 이처럼 섬세하면서도 신선하다.

문학에 있어서 위트란 전혀 관계없는 듯이 보이는 이질적인 두 가지 요소를 한데 부딪치게 함으로써 거기서 뜻밖에 일정한 공통성이 빚어지게 될 때에 생겨나는 심리적인 놀라움을 말한다. 시집 《골동품》의 모든 시편들은 한결같이 이러 위트를 빚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런 지적인 위트가 그의 산문 문학에서 볼 수 있는 바 지적 절제에로 연결되면서 그 예술성을 뒷받침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2

이 두 시집에서 볼 수 있는 바 소박한 서정성과 지적인 절제, 그것은 작가 황순원의 문학 세계를 뒷받침하는 씨와 날인 것이다. 이런 면은 이 작가의 꾸준한 일관성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새로운 실험적 방법을 꾸준하고도 조심스럽게 도입해가고 있다. 문학적 주제의 면에서 보아도 그는 마치 하나하나의 계단을 밟아가듯,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변하지 않는 작가이면서 또 꾸준히 변모하여 온 작가라 할 수 있다.

<별>은 이 작가의 초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우선 착월한 서정시적인 경지를 느끼게 된다. 이 작품에는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찾아 방황하는 한 소년의 마음의 편력이 그려져 있다. 어렸을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이 소년의 기억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기억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지로서의 어머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년의 마음 안에 자리하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현세에서 실체로 소유하고 싶은 완고한 집념에서 그는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집념이다. 저승으로 간 어머니를 이승에서 만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더구나 이 어린 퓨리턴은 그 어머니의 모습과 대체될 수 있는 여하한 현세적인 대상에도 만족하려 들지 않는다. 어머니의 이미지에 비겨 보면 여태까지 예쁘다고 느껴오던 인형의 모양도 금방 미워진다. 그가 알게 된 한 소녀의 아름다움도 어머니의 이미지에 비겨 보면 실망과 멸시의 대상으로 되고 만다. 살뜰하게 쏟는 누이의 사랑조차 어머니의 그것과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린다. 요컨대 소년은 이미지의 세계에 집착한 나머지 실재의 세계는 외면해 버린다.

이미지의 세계에의 집착, 그것은 시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기도 하다. 그것은 황순원의 문학 세계에 일관하는 한 뚜렷한 성격이다.

그런데 그의 문학 세계에서 느끼게 되는 이런 시적 분위기는 다른 한편으로 치밀한 지적 조작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있다. 그의 극도로 절제된 문장 스타일에서 우선 그런 면을 느끼게 된다. 화가로 비유하자면 그는 사실파라기 보다도 인상파라 할 수 있다. 표현 대상의 전모를 낱낱이 묘사해 보이는 작가라기보다도 그 대상의 어느 단적인 인상을 집어내 보이는 작가이다. 사실주의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이른바 세부 묘사를 그는 대담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그 대상을 선명하게 독자의 뇌리에 인상지어 주는 희한한 역량과 매력을 그는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풍기는 이미지의 전달에 주력하는 작가다.

작중 인물을 파악하는 방법부터 그렇다. 작중 인물의 이목구비며 옷매무새며 하는 세부 사항들에 두루 시선을 분배하는 사실주의적 방법을 그는 당초부터 외면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그 인물이 간직하는 단적인 일면, 그 인물의 개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핵심적인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데 주력한다. 영악한 '도섭 영감'(카인의 후예)의 성격이 '카악'하고 가래침을 돋구어 뱉는 행위로써 인상 지워진다. '오작녀'(카인의 후예)의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이 그녀의 '눈꼬리가 없어 보이게 큰 눈' 속에 응집되어 있다. <소나기>에 있어서 청결하고도 애잔한 한 도시 소녀의 이미지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갈밭 사잇길로 사라져가는 그 뒷모습을 통하여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것은 모두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그 단적인 인상의 전달인 것이다.

앞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도 눈을 유리창 속으로 가져왔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말없이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 젊은 여자의 눈은 그림자 속에서도 여느 때의 그 안으로 더욱 더 빛을 담은 그런 눈이었다.  이런 그네의 시선을 이쪽이 감당하지를 못해 자꾸 밀려날 것만 같았다.  <내일>

이것은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가 다방 창가에 마주앉아 애정을 교류하는 장면의 묘사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작가의 시선이 실체로서의 그 두 남녀에게 향해져 있는 게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 쪽으로 향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발자크의 방식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식도 아니다. 사실주의적인 외부 묘사도 아니고 심리 소설에서와 같은 내면의 묘사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분위기 묘사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작가 황순원의 시선은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투영하는 그 그림자 쪽으로, 그 실체의 이미지 쪽으로 돌려져 있다. 그의 문학 세계에 감도는 시적 무드는 이런 분위기 묘사에서 주로 연유된다.

그의 문학 세계에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 지적 장치, 상징적 요소 등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는 수색 작전을 펴고 있는 긴장된 순간에 문득 자기가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 속에 밀폐되어 있다는 착각을 느낀다. 이 때의 그 '유리'라는 것은 이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상징적 장치다. 그것은 말하자면 전쟁이 빚어내는 독소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유리'는 수시로 이 작품에 출몰하여 중요한 등장 인물들의 애잔한 삶의 모습을 뒷받침하는 지적 장치이며, <카인의 후예>에 삽입되어 있는 '큰 아기 바윗골'의 전설은 한의 여인 '오작녀'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효과적인 에피소드이며, <일월>의 대문 대문에 배치되어 있는 꿈의 장면, 드라마의 줄거리,  연극의 장면,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 주인공 '인철'이 파티장에서 조용히 물러 나와 거기 정원의 나뭇가지에 걸어 놓는 가면 등은 이 작품의 주제와 직접 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적 장치이며 효과적인 에피소드이며 또 상징이기도 하다.

3

사실주의적인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그 표현 대상의 핵심적인 일면을 날카롭게 부각시키려는 작가 황순원의 문학적 기법은 그의 작중 인물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말하자면 그는 작중 인물을 부각시킴에 있어서 그를 에워싼 외적인 디테일을 철두철미 생략해 버리고, 그 인간의 핵심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여 왔다. 특히 그의 단편 문학의 성과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점은 인간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입장과 연결된다. 인간에 대한 그의 궁극적 흥미는 시간적.공간적인 외부 조건들이 미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 숙명적 속성에의 추구에 있다. 말하자면 그의 흥미는 시대적.역사적 조건 속에 현존하는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보다도 그러한 외부 조건들이 말끔히 생략된, 그리하여 순수하게 추상화된 인간의 숙명적인 조건 그 자체의 추구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숙명적 속성들이 빚어내는 아련한 페이소스의 분위기를 빚어내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로서의 작가 황순원의 궁극적 흥미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단편 작가로서의 진면목은 바로 그 점에 있다 할 것이다. <별> <독 짓는 늙은이> <잃어버린 사람들> <소나기> 등은 그런 점에서 뛰어난 작품들이다. 이런 점에서 소설은 그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늑한 뮤즈의 놀이터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구체적 존재 양식이 되는 시대적 역사적 조건들을 생략해 버릴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알몸뚱이의 세계다. 본능과 직관의 세계다. 그의 많은 작중 인물들, 특히 단편소설의 많은 작중 인물들이 현대적 교양의 세례를 거치지 않은 토속적 인간상들 (<기러기> <목넘이 마을의 개> <잃어버린 사람들>의 주인공들)이거나, 철들지 않은 어린이들 (<소나기> <별> 등의 주인공들)이거나 한 것도 이런 점과 관련된다. 그들은 이성적 도덕적인 가치 의식이 미칠 수 없는, 훨씬 더 근원적인 데에 뿌리박고 있다.

본능과 직관은 맹목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선일 수도 미일 수도 없다. 그것은 선악 미추가 미분화 상태에 있는 하나의 카오스다. 그것은 도덕적 가치 의식 이전의 원초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러한 작중 인물들에게서는 한결같이 따뜻한 선의의 미덕이 빚어진다. '곰녀'(별과 같이 살다), '오작녀'(카인의 후예), '황노인', 그리고 '쇳네'(기러기) 등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 속성에 대한 작자 자신의 강렬한 긍정적 시선이 거기에 늘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 속성, 즉 본능과 직관에 대한 신뢰, 그것은 황순원의 문학 세계에 일관하는 하나의 기본적 성격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초기의 시편들에서 볼 수 있었던 바 이상주의 내지 낙관주의와 긴밀히 연관되는 면이라 할 것이다.

애들이 다 흩어진 뒤에도 종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잊지 못할 따뜻한 감촉이 목줄기를 째릿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애들은 때가 긴 거울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닦기만 하면 안쪽은 성한 거울일 것이다.   <인간접목>

싸움터에서 오른팔을 잃고 캄캄한 절망 속에 빠졌다가 새로운 희망을 안고 소년원을 찾아온 <인간접목>의 주인공 '종호'는 거기 잡초처럼 모여 있는 전쟁 고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과 같은 생각을 한다. 비록 겉보기에는 잡초일지 몰라도 알맹이는 실상 맑은 거울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천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닦아주기만 하면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유리알처럼 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중 인물 '종호'의 이러한 자세에서 우리는 다름 아닌 작자 자신의 자세의 반영을 볼 수 있다.

황순원의 이러한 본능과 직관에의 확고한 신뢰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체에의 엄숙한 경외의 감정에로 확대되어진다. 그의 많은 작품들, 특히 단편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짐승에의 그의 유별난 관심이 그것을 말해 준다. <목넘이 마을의 개>에 있어서의 '흰둥이', <차라리 내 목을>에 있어서의 '말' 등은 훌륭히 한 작중 인물의 구실들을 하고 있다. <학>에 있어서의 '단정학'은 상징적 장치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와 직결되어 있기도 하다. <이리도>에 있어서의 그 '이리'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존재이다. 이런 짐승들의 맹목적인 액션들은 실상 그의 토속적 인간상들인 '곰녀' '오작녀' 등의 그것과 구분 지을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의 표현 양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한 황순원의 몇 가지 문학적 특질들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뿌리깊은 집착을 반영하는 개개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적 아름다움에의 추구야말로 단편 작가로서의 그의 문학적 관심의 핵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적 여인상에의 추구로써 구체화된다.

물론 그에 있어서의 한국적 여인상은 순수 추상으로서의 여인상, 특정한 시대적 상황 속에 현존하는 여인상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적 역사적인 외적 조건을 말끔히 허울 벗어버린 여인상, 오늘 우리 둘레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만날 수는 없으나 겨레의 호흡 속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온 한으로서의 여인상이다. '곰녀'(별과 같이 살다), '순이'(잃어버린 사람들), '과부', '오작녀'(카인의 후예) 등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읍사> 이래의 한국 서정시의 주조로서 살아온 청상의 여인상을 느끼게 된다. 한국 서정시의 주조가 언제나 사랑의 좌절에서 연유되는 설움의 가락으로 일관하고 있듯이, 황순원의 이러한 여인상들은 한결같이 한의 공간 속에서만 생을 부지하는 인간상들이다. '곰녀'는 평생을 멸시와 배반 속에서만 살아야 했고, '오작녀'의 사랑은 '큰아기 바윗골'의 전설처럼 가슴 안에서만 타는 사랑으로 그쳐야 하고, '순이'의 사랑은 박해와 쫓김 끝에 결국은 열 손가락 깍지 끼고 강물에 투신하는 사랑으로 그쳐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생활을 경영하는 현실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는 시적인 사랑이요 추억의 사랑이다. 그녀들은 모두 시적 이미지로서의 여인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모두 청산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네들은 산문의 한길을 통하여 탐구되어진 서사적 드라마의 히로인으로서의 여인상들이 아니라, 시와 이미지의 오솔길을 통하여 도달한 서정시의 히로인으로서의 여인상들이다. 황순원의 단편 소설에 이르러 한으로서의 한국적 여인상은 한 고전적 패턴을 성취한다.

4

황순원은 지금까지 7권의 장편 소설을 발표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 장편 작가로서의 그의 문학적 주제가 일관성 있게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년), <일월>(1964년), <움직이는 성>(1972년) 등이다. <별과 같이 살다>(1950년)나 <카인의 후예>(1954년) 등은 앞서 말한 바 그의 단편문학이 간직하는 여러 특질들과 너무도 강력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서사적이기보다는 더 많이 서정적이다.

<별과 같이 살다>는 장편 소설다운 서사적 드라마의 전개가 약하다. 개개의 부분들은 그 자체로서는 가기 짙은 토속성과 서정성을 수반하는 아름다운 정경을 형성하고 있으나, 그 모든 부분들이 긴밀한 시퀀스로 연결되어 하나의 서사적 드라마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몇 개의 시적인 단편들을 잇대어 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여주인공 '곰녀'부터가 장편 소설의 주인공이기에 너무도 평판적(E.M.포스터가 말한 바 Flat Character)이다. 눈부시게 변모되어 가는 객관 상황과 탄력 있게 부딪쳐 나갈 만한 성격적 융통성이 없다. 그녀는 황순원의 대부분의 단편 소설의 히로인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한국적 여인상이다. 주어진 시대 현실 속에서 자기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서사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자기 운명(체질) 속에 완고하게 칩거해 있는 정물적 인간상이다. 일제의 암담한 시기에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남의 집 하녀가 되었다가 창녀로 팔려가고, 어느 늙은이의 소실이 되고, 8.15를 맞이하고, 그러기까지 그녀에게는 숱하게 시간이 흐르고 숱하게 다른 객관 상황들이 부딪쳐 들어오지만 그런 모든 조건과 관계없이 그녀는 언제나 완고한 자기 숙명(체질) 속에 칩거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제 자리에 멈춰 있다. 언제나 착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어리석을 뿐이다. 황순원의 단편 문학이 즐겨 다루는 토속적 여인상의 한 전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곰녀'와 완전히 핏줄을 같이하는 여인이 <카인의 후예>의 '오작녀'다 물론 이 작품은 <별과 같이 살다>에 비하면 훨씬 성공한 작품이다. '오작녀'라는 한국적 여인상의 한 전형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탁월한 예술성을 획득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편 소설로서는 역시 비슷한 약점을 간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곰녀'와 마찬가지로 '오작녀' 역시 산문의 대지에 살 수 있는 인간상이기보다는 서정시의 아늑한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인간상, 즉 평판적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8.15 직후의 북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황순원의 작품치고는 현실 고발적 요소가 짙다. 주인공 '박훈'의 모습을 통하여 격동하는 외적 상황 속에서 부대끼며 떠밀리며 살지 않으면 안된 한 지식인의 생태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점도 <별과 같이 살다>에 비하면 훨씬 더 장편 소설에 접근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 있어서 독자의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격동하는 북한의 사회상의고발이다. 그 속에서 고민하는 지식인의 생태가 아니라, 외적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는 '작녀'의 강력한 원시적 생명력이다. '박훈'의 모습은 오작녀의 너무도 강력한 생명력에 가리워, 오히려 그 빛이 희미하다. 작중 상황은 대체로 '박훈'의 시선을 통해서 독자에게 전달된다. '오작녀'조차도 실상은 대체로 '박훈'의 시선에 의하여 관찰되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는 '박훈'의 창백한 자의식의 피사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작중 현실의 표면에 등장하는 '박훈'보다도 그의 자의식을 시선을 거쳐서 독자에게 전달되는 '오작녀'의 모습이 보다 신선하고 강렬하게 독자에게 인상 지워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체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풍기는 시적 이미지의 포착에 있어서 더욱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이 작가의 예술적 특질에서 그것은 연유되는 게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박훈'(그는 산문적 인간이다)을 중심으로 액션을 전개하려던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오작녀(그녀는 시적 여인상이다)와 같은 대상에 부딪침으로써 어느새 시적 이미지의 세계에로 발전해간 것은 아닐까. 아무튼 오작녀에 이르러 황순원에 있어서의 한국적 여인상으로서의 청상(靑孀)의 이미지는 한 극점에 도달한다.

<인간접목>(1957년) 이후 황순원은 서서히 본격적인 산문의 대지에로 문학적 영역을 넓혀 나간다. 사회의 버림을 받고 독버섯처럼 아무렇게나 돋아 오른 전쟁 고아들을 위하여 '어떤 갱생되는 듯한' 보람을 안고 일하는 주인공 '종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단편 문학의 주요한 모티브로 되는 따뜻한 선의의 반영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개개의 소년들의 이야기들이 에피소드처럼 겹쳐져 나간다. 따라서 장편 소설로서의 굵은 뼈대 같은 것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이 소년원과 어쩔 수 없이 관계 지워져 있는 사회적 배경, 가령 거기에 구호의 손길을 뻗는 선의의 원호 단체나 또 거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회의 부정적 측면과의 연대 관계가 간접적으로나마 암시되어 있다. 더구나 종호는 그 어두운 세력과 대결해 나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주체를 포착하려는 이 작가의 본격적인 장편 문학의 주제에로 연결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은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존재 양식, 혹은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의 인간의 소외 의식 등을 본격적으로 추구한 일련의 작품들이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피해의 양상을 그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선한 죄책감 때문에 결국 사람을 죽이고 자살해 버리는 '동호',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방황하는 '현태', '현태' 때문에 몸을 망친 '장숙', 밀고자로서의 자책감 때문에 미쳐 버린 '선우상사', 부상으로 불구가 된 '석기' 등이 모두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전쟁이 주는 피해의 양상은 다양하다. 전사한 '안중사'나 불구가 된 '석기'의 경우처럼 육체에 가해질 수도 있지만, '동호' '현태'등과 같이 내면을 통해서 가해질 수도 있다. '동호'나 '현태'에 있어서의 피해의 궁극적인 계기는 내면(자의식)에서 연유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자의식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의식이 입게 되는 피해란 어떤 형태로든 인간 관계를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순결하고 소심하고 외골수인 '동호'와 매사에 대범하고 담력도 있는 듯이 보이는, 그러면서도 자기 내면의 자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태' 구 사람 사이의 심리적 역학 관계는 이 작품의 핵을 이룬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가해자.피해자의 관계이면서 또 피해자.가해자의 관계이기도 하다.

'동호'의 파멸은 '현태'와의 관계 속에서 입게 된 열등 의식에서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태'처럼 대범하고 대담해질 수 없는 자신의 소심함에 열등의식을 느낀 '동호'는 그 반동으로 탈선의 길로 치닫게 되고, 엉뚱한 곳에서 가해자('옥주'를 죽인)로 되고 만다/ 거기서 이 작품의 제 1 부가 끝난다.

제 2 부는 '현태'가 중심이 된다. 전쟁은 끝났고 그는 이제 건실한 사회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자기 내면과 부딪치게 된다. 그러자 싸움터에서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그것은 가혹한 죄책감으로 되어 그의 자의식을 좀먹기 시작한다. 그의 방황과 타락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지하실의 기록>에서 '지나친 의식은 병, 완전한 병이다. 일상 생활에 필요한 의식이란 대다수의 지식인이 갖는 의식의 반절이나 4분의 1 정도면 족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들은 모두 자의식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현태가 제기한 바 자의식의 전정설(剪定說)은 이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간직하는 과잉한 자의식을 '일상 생활에 필요한' 정도로 조절할 수 있는 한 처방의 제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극은 말하자면 과잉한 자의식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일에 실패한 데서 연유된 비극이라 하겠다.

<일월>은 상당히 실험적인 작품이다.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삽입, 상징적 장치의 설정 등 다분히 지적 조작이 가미된 작품이다. 이런 요소들은 때로는 작품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중 인물의 심리적 움직임을 반영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고,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드라마 줄거리의 도입이 첫 번째 경우에, 주인공 '인철'의 여러 가지 꿈의 장면의 도입이 두 번째 경우에, 그리고 '나미'의 생일 타피장에서 '인철'이 조용히 빠져나와 그곳 정원수에 걸어 놓고 나오는 고깔모자가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이 작품의 총체성과의 관련 아래에서 살펴나가야 하겠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인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동호'와 궤를 같이하는 인물이다. '인철' 역시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그 병은 싹튼다. 이 때부터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외 의식과 부딪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누이 같은 살가운 이해로써 감싸주는 '다혜'가 있고, 정열적인 애정으로 부딪쳐오는 '나미'가 있다. 그러나 그는 '다혜'의 이해나 '나미'의 애정을 그전처럼 스스럼없는 마음으로 감당해 나갈 수가 없다. 그들과 어울려 현실 속의 생활인이 되기에는, 그를 언제나 관찰자로 머물게 하는 또 하나의 자의식의 시선이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음을 스스로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자기 위장의 허위 속에 그 자의식을 매몰시킬 수도 없고, '어머니'처럼 종교에로 도피하고 싶지도 않다. 이 때 그는 '기룡'을 찾는다. 기룡의 모습을 통하여 이제껏 아버지가 쌓아올린 허위의 과장이나 환상 없이 자신의 숙명과 맞부딪쳐 보려는 준엄한 대결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고독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철'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동호'와 상통하는 인물이다. 아니, 동호의 운명이 끝난 자리에서 인철의 운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게 타당하다. 동호가 극복하는 데 실패한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극복하려고 모색하려는 데서 인철의 방황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독'(소외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종착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발점이다. 고독을 고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처리 극복할 수 있는 인간 관계의 새로운 계기를 찾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완고한 자기 고독의 성 안에 칩거해 있는 '기룡'은 인철이 찾아가야 할 도달점이면서도, 새로운 계기(인간 관계의 새로운 모색이라는)를 찾기 위한 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지만 그 외로움이란 인간과 인간이 격리돼 있는 상태에서만 오는 게 아니지 않는가. 서로 부딪칠 수 있는 데까지 부딪쳐 본 처리돼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인철의 결론은 하나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또 하나의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 다시금 '기룡'을 찾아 나서는 인철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룡'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금  그 '기룡'과도 헤어지게 될 '인철' 자신의 또 하나 새로운 삶의 길을 예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나미'네 집 파티에 있어서의 '고깔'은 매우 상징적이다. '인철'이 파티 장소에서 조용히 빠져 나와, 거기 나뭇가지에 그것을 걸어 두고 나오는 것은, 말하자면 문제의 해결 및 새로운 문제 제기를 동시에 암시한다. 이제 '인철'의 고깔(혹은 가면)의 생활은 끝났지만, 알몸뚱이로서의 생활은 이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월>에 이르러 인간 관계의 추구라는 장편 작가로서의 황순원의 문학적 주제는 폭넓게 펼쳐지고 있다.

<움직이는 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하나는 이제까지 이룩하여 온 황순원 자신의 문학적 성과를 하나의 소설 공간 안에서 종합하려 하고 있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특수한 실험적 방법으로 그 작업을 수행하려 하고 있는 점이다.

이미 살펴 본 봐와 같이 황순원이 이룩하여 온 문학적 성과는 두 가지 흐름으로 평행선을 그어왔다. 하나는 단편 작가로서의 그의 성과에서 볼 수 있는 바 토속적인 세계에 상황을 설정하여 거기서 고유한 한국적인 아름다움(청상의 이미지)을 빚어내는 작업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적인 분위기 속에 상황을 설정하여 현대인으로서의 인간 관계의 문제 혹은 인간 고독의 문제를 추구하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예술성의 추구와 현대적인 윤리의 추구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측면은 이제껏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기보다 오히려 이율배반적 상호 배타적 관계 위에 있어 왔다. 그것은 한국 현대 소설의 근본적인 한계점이며, 황순원의 경우에 있어서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소설 공간 안에 병치시켜 나감으로써 그 양자의 종합의 가능성을 모색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작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작자는 영화적인 몽탸쥬의 방법을 빌고 있다. 즉 무수한 도막도막의 장면에로 끊임없이 카메라를 이동시켜 나가면서 그 개개의 단면들의 동시성 내지 등가치성을 반영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리가 먼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놀라움을 빚어내려는, 현대시의 이른바 래디컬 이미지의 방법과 방불하다. 중심인물들인 '민구' '준태' '성호' 세 사람의 각기 차원과 내용이 다른 액션의 단면들은 이런 방식으로 펼쳐져 나간다.

이 세 사람은 각기 오늘날의 한국 지식인의 생태를 대표하는 세 가지 유형이다. 차원과 내용을 달리하는 이 세 가지 유형의 지식인의 액션을 하나의 소설 공간 안에 병치하여 그 액션들의 동시성 내지 등가치성을 추적해 나감으로써 오늘의 한국의 정신적 상황을 점검해 보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궁극적인 초점이라 할 수 있다.

<움직이는 성>을 완결 짓고도 작가 황순원은 <신들의 주사위>라는 일곱 번째 장편을 발표하여 아직도 우리에게 끝없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문학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두고 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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