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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어둠의 자식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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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어둠의 자식들 
黃晳暎, 혹은 존재의 삶

 吳  生  根

  

 

황수영(黃秀英)이란 이름을 갖고 있었던 문제아의 시절, 성장기의 젊은이가 겪는 방황과 우울을 그린 (입석부근 <立石附近>)을 써서, 1962년 가을에 《사상계》신인상에 입선한 황석영(黃晳暎)은 그 후 8년 동안 완전히 문학과 결별을 한다. 그 8년 동안, 그는 <세 군데의 학교를 차례로 퇴학당하며 전전하다가, 마침내 어느 공업학교 야간부를 간신히 졸업하고 어느 대학교 철학과를 입학>한 후, 1964년에 가출,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내다가 그때의 제 2 한강교에서 노동을 하고 있던 장교 출신의 제대 군인과 알게> 되고, <계절을 따라 전국 각지를 떠돌며 사는 그 사람의 생활이 몹시 부럽게> 느껴져, 그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 후, <신탄진 공사장, 청주의 아이스케이크집, 진주의 빵공장>을 전전하다가 그와 다투고 헤어진 후,  <칠북이란 곳의 장춘사라는 절에서 불목하니로 얹혀 있다가> 출가를 권유받고, <해운대의 금강사에서 행자로> 지내다가, 어떻게 아들의 소재지를 알고 달려온 어머니에 의해 붙잡혀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은 가시지 않아,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고, 월남에 파병되어 전쟁터에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많은 것을 경험하고 제대한 후, <심한 자기 혐오감>에 빠져서 극도로 폐쇄된 나날을 보내며, <방안에 틀어박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멍청히 일어나 앉아 공상이나 하면서> 지낸다.  <묘하게도 이 시기의 삭막한 생활을 이겨내고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은, 그 무렵 주소만 아는 어떤 상대를 향하여 밤마다 써 갈기던 연애 편지의 힘이었다> 결국 그는 연애 편지의 대상이 된 현재의 부인과 만나게 되어 다시 소설을 쓰게 된 것이고, 그때까지 억압되어 있었던 <자기 표현> 의 욕구가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인칭의 편지 형식으로부터,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삼인칭 세계의 소설 작업으로 확산된 것이다. (그가 이처럼 방황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심판 (審判)의 집》에 실려 있는 작가 연보와 황석영 자신이 어느 날 밤 송도에서 털어 논 고백을 토대로 한 것임.)

 그가 8년 동안 겪은 방황은 문학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이 문학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경험은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문학을 떠나게 되고, 문학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다만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산 것일 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춘기 때의 갈등과 방황이 그에게 퍽이나 길게 연장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경험을 랭보의 경험과 비교해 보면 퍽 대조적이다. 열 여섯 살 때부터 두 번이나 가출하면서, 그 이전만 해도 학교에서는 우등생이며 집에서는 엄격한 홀어머니에게 복종하던 소년 랭보가 반항적이고 불량한 젊은이가 되어, 머리를 길게 기르고 파이프 담배를 피며 옷을 더럽게 입고 부르조와 사회를 조롱하고, 남을 놀라게 하는 재주를 보이며 과격하고 진보적인 정치적 견해를 주장하고, 베를렌느와 방랑 생활을 하던 그러한 랭보의 사춘기 시절과 황석영의 그것은 거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랭보는 그 시기를 보내면서 시를 썼던 반면에 황석영은 문학을 떠나서 방랑하고 있었으며 랭보가 사춘기의 위기에서 벗어날 무렵, 방랑 생활을 중단하고 베를렌느와 헤어진 후, 그토록 경멸하던 사회에서 자기의 삶을 모색하면서 시를 포기했다면, 황석영은 8년이라는 오랜 방황을 끝내면서 튼튼하고 건전한 사회 의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문학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오랜 우회가 끝나고 문학이란 삶의 전체성 안에서 한 사람이 선택한 방법일 뿐으로써 우선 진실하게 살고 열심히 쓰겠다는 생각이 굳혀진 계기가 되었다> 는 그의 태도에서는 삶을 개인주의적이며 탐미적으로 바라보던 사춘기 때 황수영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인 구원 문제에 몰두해 있던 시절의 황수영이  <이웃의 진실>을 깨닫고 한 시대의 보편적인 문제의 중요성을 의식한  황석영으로 어떻게 변모해 갔는지를 살피려면, (입석부근)은 퍽 중요한 자료로 남는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소년기로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전환해 가는 도상에는 어느 누구에게나 위기가 도래된다고 말한다. 물론, 행복하고 원만한 가정에서 별 자의식이 없이 자란 젊은이라면 그 위기의 양상은 은폐되거나 혹은 미약하게 노출됨으로써 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은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더욱이 전후와 같은 혼란기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 시기는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주위 환경을 의식하게 되는 시기이므로, 젊은이가 내면 속에 키워 온 꿈과 실제의 현실을 비교하고 의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갈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대체로 이상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을 느끼게 될 때, 자기 자신을 현실 사회에 적응하려 들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사회를 자기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서 적응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개인과 현실 사회와의 갈등과 단절은 강화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위기를 겪는 개인의 반응은 성격과 현실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반항적 양상을 띤다. 그 위기의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시기는 전위기 (前危機)의 단계, 두 번째는 위기의 단계, 세 번째는 위기의 해결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집중하고 자의식을 많이 느끼며 책을 많이 읽으며 지적인 도취와 열광을 하고 외로움을 잊기 위해 자연에서 고독한 산책과 등산을 즐긴다. 말하자면, 자아의 발견과 의식의 단계인데, 이러한 단계 이후에 심리적인 변화가 급격히 오면서 위기의 사춘기가 된다. 이 시기는 부정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가 있는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기에는 남들을 놀라게 하는 짓을 잘하고 반항적이며 냉소적이고, 자기의 개성을 긍정하는 시기에는 인생과 죽음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를 즐기며, 또한 무의식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서서히 사회에 적응하게 되는데, 어떤 점에서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란 그러한 위기를 어느 한 시기에 완결지어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면서 끝내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존재에 관한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어서, 동시대의 사회와 모순 혹은 마찰을 빚어낸다는 점과, 모든 예술가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영원한 이상주의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물론, 예술가들 역시 작품을 통해서, 작품으로 얻어진 수입에 의해서 사회에 적응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적 갈등을 통해서 적응하는 것이다. 여하간, 사춘기 때의 갈등이 극심했던 황수영 시절의 <입석부근>을 관련지어 생각해 보자.

  (1) 웬일인지 눈물이 나왔다. 내가 학교와 여자뿐인 집안의 폐쇄적인 훈련소에서 그리워했던 것은 야성이었다. 들짐승 같은 놓여난 활기였다. 사내의 긍지였다. 나는 울고 있었다.

  (2) 기관총소리, 벚꽃의 흩날림, 검은 교복 위에 흠씬 젖어 흐르던 피, 환희의 거리, 밀려오는 시민들, 소녀들의 해맑은 이마, 저 모든 것은 벌써 오래 전에 다 지나갔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자가 되어 집과 학교를 떠났다. 거리에는 이미 우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3)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작업은 모험이 아니며, 산과 나를 합쳐지게 하려는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땅 위에 검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듯 불만과 열등감과 자의식을 어두운 생활 속에 끌고 다니고 있다.

 (1)의 예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학교와 집안이 <나>에게 폐쇄적인 훈련소로 의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2)의 예문처럼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자가 되어 집과 학교를> 떠난다. 그것은 반항적인 몸짓이다. 그때는 4.19의 열기가 이미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나>는 닫힌 굴레로부터, 그리고 (3)의 <불만과 열등감과 자의식>의 <어두운 생활>로부터 들짐승처럼 뛰어나와 산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친구와 함께 원시인처럼 동굴 생활을 하면서, 학교와 집안에서 가질 수 없었던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자유와 행복을 누린다. 그대의 자기 자신을 표현한 글에서 작가는 <우등생이 싫었고, 일류 학교의 체제가 지겨웠고, 집에 있는 것이 못 견디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가 집안이나 학교가 싫었다는 것은 집안이나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범생이 되기를 싫어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기에게 모범생을 강요하는 주위의 요구 때문에 열등감과 자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모범생이란 이미지가 가치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또한, 그의 열등감이나 자의식은 <불량소년으로 변모하게 되면서, 내부의 끊임없는 갈망과 약속된 장래에서 이탈된다는 두려움의 간격>이 심화되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나>와 <택>은 동굴 속에서 밤을 보내며 평온한 행복에 잠긴다. <이런 밤에 나뭇잎이 생기고, 줄기가 자라고, 아기가 태어나고, 생명 있는 모든 게 만들어질 거야. 아니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모범생처럼 만들어지는 게 아냐. 창조라고 하는 거다. 저절로, 생겨난다.> 주위의 기대 가치에 순응하는 모범생은 만들어지는 타입이지, 자연스럽고 활기있게 성장하는 타입은 못 된다. 그러므로 황석영의 작중 인물은 자기 자신과 사회와의 갈등을 느끼는 사춘기의 위기를 겪으면서, 집안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생의 인간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의 삶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용기 있는 행위의 출발이다. 그는 동굴과 자연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그러한 행복은 자연으로 도피하는 여유 있는 자의 행복이 아니다. <입석부근>의 중요한 테마가 험난한 바위산을 타고 오르는 젊은이의 내면적 싸움과 사랑을 보여 준 점이란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바위를 타면서 <나>는 험난한 세계에서 어떻게 싸우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적인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물리적인 암벽 작업에 정신을 불어 넣고, 우리의 싱싱하고 자유스러움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랑의 대상을 바위라고 가정해 봤을 뿐>이라는 말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는 모범생이 되어 출세하고 안락한 삶을 누린다는 속물적인 궤도에서 일탈하여 자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얼마나 외롭고 힘든 일인가. 그러한 과정이 결국 8년 동안 계속된 셈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는 창조적인 방황이 어느 한 시기에 한정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라고 단정할 수 있다. 저 8년간의 세월은 학교나 책에서 가르쳐 주는 것보다 몇 배나 생생하고 진실하게 인간의 삶을 가르쳐 주었다. (《심판의 집》 작가 연보)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의 첫 문장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말은 학교라는 체제 속에서 배운 것보다 대지에서의 야성적인 삶을 통해서 배운 것이 많았음을 고백한 것이다. 사실상, 황석영의 작중 인물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사람들이며, 때때로 학생이나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은 비판적으로 그려진다. <섬섬옥수 (纖纖玉手)>에 나오는 가난한 사범 대학생이나 <공대를 나와 유학 가서 석사가 되어 돌아온 훌륭한 집안의 도련님>이 부정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것은 모두 그러한 예에 해당된다. 작가 자신도 자기를 소개하는 이력서를 쓸 때면 의식적으로 학력을 삭제해 버린다. 그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있지만, 지위 상징을 나타내는 의미로 통용되는 출신 학교의 학력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또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우월감을 갖는 태도를 철저히 비판한다. 그러므로, 그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 편에 선다. 학교와 집안을 떠나, 객지에서 지내면서 그는 안일하지 않게 살려는 의지를 가다듬고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깊이 깨닫게 된다. 8 년 동안, 그가 겪었던 폭넓은 경험이 토대가 되고 또한 작가로서 재등장한 후 비인간적인 근로 조건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르포르타지 형식으로 취재한 것이 토대가 되어 그의 작품 세계의 작중 인물들은 <노동자뿐 아니라, 기공 (機工). 소시민. 군인.  여대생. 소년. 갈보 등등의 각계 각층의> 인물들로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한 작중 인물들 중에서 황석영다운 젊은이의 모습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황석영다운 작중 인물의 참된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 우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어린 소년과 소녀의 성격 혹은 태도에 초점을 맞춰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씨연대기 (韓氏年代記)> <아우를 위하여> <잡초 (雜草)> 등에는 어린아이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가 50 년대의 음울한 전후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들은 전쟁의 비극과 혼란을 겪으면서, 행복한 환경을 갖지 못하고, <이탈리아 영화에 나오는 어느 뒷골목 같은> 배경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건강한 의식을 갖고 자란다. <한씨연대기>에서 월남한 의사 한영덕은 고지식할 정도로 양심적이며 꿋꿋하게 살아온 사람이지만, 이데롤로기의 전쟁이 야기시킨 무질서하고 각박한 상황에서 일방적인 피해를 입는다. 그의 딸 한혜자는 <폐허의 잡초 사이에서 자라나 강인하게 성장하는 작고 단단한 열매>가 되고 싶어했다. <이별을 겪고 나서 체념한 사람들이 인생의 새로운 인연에 따라 살아갔는데, 그들의 버려진 기대와 함께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네 이전의 삶을 일종의 우스운 농(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이 말의 중요한 의미는 불행한 전쟁의 와중에서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들이 지난날의 비극을 <우스운 농 (弄)>으로 받아들였으며 강인하게 살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작가가 부여하려는 의미는 과거의 비극을 농담처럼 넘겨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현재와 미래의 삶이 중요하다는 점이며, 또한 어떤 비극적 상황이라도 자기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며 패배하지는 말고 살아야 한다는 윤리의식이다.

 또한 집단 사회에서 한 개인의 윤리 의식과 책임이라는 문제를 추구한 <아우를 위하여>에서 소년은 훌륭한 여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두 가지 문제를 극복한다. 하나는 <첫째 가다 이영래>가 지배하는 교실에서의 폭력적인 횡포를 이겨내는 과정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하나는 <캄캄한 노깡 속에 들어갔다가 기절했던> 공포의 기억을 노깡 속에 다시 들어감으로써 극복하고 만다. <애써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무서워만 하면 비굴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겁쟁이가 되어 끝내 무서움에서 놓여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러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소년은 공포로부터 해방된다. 그것은 스스로 능동적인 체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중요성을 둔다. 이처럼 건강한 의식을 갖고 두려움 없이 단단하게 자란 황석영의 아이들은 사춘기의 위기를 겪으면서 객지의 황량한 벌판에 뛰어든다. 더욱이, 그들이 던져진 현실은 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되어 온 사회적 모순이 가득 차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황하며 절망하고, 때로는 소외감으로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불행한 노동자들과의 연대 의식으로 행복하기도 했던 젊은 작중 인물들은 대략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유형은 <객지 (客地)>에서의 동혁과 같은 인물들이다. 작가가 신탄진 연초 공장에서 들통졌을 때 노동자 합숙소에서의 체험과 간척공사장 얘기를 얽어서 쓴 <객지>는 고향을 잃고 집을 떠난 사람들이 소외된 객지에서 겪는 이야기다.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의 과정은 침착하고 자세하며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밝힌 것처럼 <객지>는 노동자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축소한 것이다. 근대화의 파행적인 경제 성장 정책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부분의 국내 기업이 대자본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축적하지만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을 무시함으로써 기업주와 근로자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생긴다. 그들 사이에는 진정한 이해와 대화가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업주의 자발적인 각성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임금 노동자들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힘을 합해 개선해 가려는 노력은 당연한 일이다. <객지>에서 기업주의 사냥개가 되려는 <간사한 놈들>을 제외하고 생각해 보면 대략 세 사람의 특징적인 노동자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들은 나이든 장씨, 다혈질적으로 흥분 잘 하는 대위, 그리고 동혁이다. 물론, 작가는 동혁의 관점에 서 있다. 장씨는 거의 체념적이다. <남의 일에 관여 않는 게 나이값이란 거였다. 개선이니 진정이니 서명이니 하는 짓들이란 그가 십여 년을 노동판에 굴러다니면서 한 번도 성사하는 꼴을 못 보았다. 이번 일만해도 실패로 돌아갔고 평소에 서기들이나 십장들에게 직접적으로 맞선 자들만이 족집게로 뽑히듯이 잘려 나갔다. >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장씨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는 자기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의식은 인간화되어 있지 못하고 사물화되어 있다. 그는 저 카프카의 <심판>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턱 앞에 앉아 몇 년이고 끊임없이 피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다가 늙어 버린 가엾은 사람과 같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문지기를 무시해 버리는 용기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씨와는 반대로 대위는 두려움을 모르고 부딪치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진정한 삶을 위한 용기라기보다 성급하고, 감정적이며 파괴적인 용기이다. 그는 고지식하고, 다혈질이기 때문에 사태파악을 냉정하게 계산하지 못한다. 대위와 동혁 사이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두 사람의 대조적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좌우간 한판 벌일 수 있다면 나는 개피를 봐도 좋소." 대위가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폭동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동혁이 말했다.

   "개선을 위해 쟁의를 해야지, 원수 갚는 심정으로 벌이다간 끝이 없어요."

  이러한 동혁의 말투는 오랫동안 노가다판에서 분쟁을 겪어 선택의 감각이 예민해진 고참 인부의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격일 따름이었다.

  동혁은 감정적인 폭발로 끝나는 쟁의는 무의미하며 어디까지나 개선을 위한 쟁의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신념과 희망을 갖고 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결실만을 기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먼 미래까지 바라본다. 그러므로, 설사 쟁의가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심한 좌절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기도 한다. 또한 쟁의가 성공했을 경우 직접 혜택을 받지 못해도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데 만족하는 긴 안목을 가지고 있다. <객지>의 문학적 성공은 냉정한 리얼리즘의 기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혁과 같은 긍정적 인물을 창조해 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혁의 모습이 영웅적인 측면으로 확대되지 않았나 하는 우려는 또 다른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간 <어느 곳에 가 있거나 낯설고 두려운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듯>행동을 취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떳떳한 동혁의 모습은 <삼포가는 길>에서의 영달, <섬섬옥수>에서의 아파트 보일러 수리공 상수, <돼지꿈>에서의 근호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작중 인물들은 황석영의 많은 군대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노동자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군인들인데, 아마도 그것은 그의 군대 시절에 겪었던 정신적인 상처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개인적 상처는 월남 전쟁이라는 사회적인 문제화 밀접히 결부된다. 군인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낙타누깔> <탑> <몰개월의 새> <돛> <철길>등인데, 그러한 소설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우울하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군대 안에서건 전쟁터에서건, 혹은 휴가 나왔을 때의 사회에서건, 어느 곳에서나 낯선 이방인의 외로움을 느낀다. 그런 점 때문인지 황석영의 군대 소설들은 대체로 쓸쓸한 분위기이면서 감동적이다. 그 중에서, <몰개월의 새> <탑> <낙타누깔>은 순차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배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몰개월의 새>는 입대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즉 월남에 가지 직전의 이야기이며, <탑>은 월남 전쟁에서 겪은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이고, <낙타누깔>은 월남에서 귀국한 제대 말년 군인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몰개월의 새>는 군인이 되기 전의 외로운 기억을 회상하면서 낯선 땅의 전쟁터로 출발하는 군인의 내면 심리가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나>는 특교대의 출국 명령이 내리기 전 부대를 빠져나와 서울을 다녀온 날 밤 역의 플랫폼에서 보았던 <떠나고 배웅하는 사람들의 풍경>, <키 큰 중위와 짧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회상한다.> 그런데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표출된 참된 사랑을 마련하지 못했던 자의 회한이다. <키 큰 중위와 짧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사랑의 환희를 보여 주고, <나>역시 그러한 사랑을 누리고 싶었지만, 이제 그러한 꿈과도 작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회한의 탐미적인 측면은 황석영에게는 스스로 비판되고 극복되어야 할 것처럼 의식된다. 그런 후, 주인공은 월남의 전쟁터에서 부조리한 전쟁의 본질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탑>에 잘 나타나 있다. 동양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탑을 지키기 위해서 동료들이 생명의 대가를 지불했는데, 그러한 탑이 미군의 불도저로 무너져 버린다는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는 월남전의 본질적 양상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이국 땅에서 피를 흘린 것에 아무런 고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며 나는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절감한다. 죽음의 고비를 몇 번쯤 넘기고 귀국한 군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군인의 명예란 언제나 국가가 추구하는 옳은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거는 데 있다고 나는 믿어 왔다. 그런데 전장에서 돌아온 나는 내 땅에 발을 디디면서 조금도 자랑스러운 느낌을 갖지 못하였다. 나는 갑자기, 국가가 요구하는 바는 언제나 옳은 가치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졌다. 자신이 이 거리를 본의 아니게 방문하고 보니, 마치 침입한 꼴로 되어 버린 불청객인 듯 여겨졌고, 같은 기분이 들었던 그곳 도시에서의 휴양 첫날이 생각되었다.  (<낙타누깔>)

  <나>는 이중적인 갈등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군인으로서 자랑스럽지 못하다는 갈등을 겪으면서, 또한 불청객처럼 자기를 거부하는 듯한 현실과의 마찰을 느낀다. 바로 이러한 갈등과 마찰, 혹은 회한과 외로움이 황석영의 군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일관성이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그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그것이다. 그들은 명령에 복종하기만 한다거나 비판 의식이 제거된 군인이 아니며, 군 복무기간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때우듯이 보내는 군인도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들의 고민은 사회적인 문제와 깊숙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식인으로서의 군인이다. 그러한 군인들의 모습이 진실된 내면을 중심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감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작중 인물들의 유형은 <이웃 사람> <장사(壯士)의 꿈> <가화 (假花)>등에서 보이는 부정적인 인물들이다. 부정적 인물들은 작품의 문학적 실패와도 관련된다. <이웃사람>에는 방범대원을 죽인 날품팔이 노동자가, <장사의 꿈>에는 목욕탕 때밀이가, <가화>에는 카바레 악사가 각각 등장한다. 이 세 작품들이 문학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앞에서 예를 든 두 유형의 작중 인물처럼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며, 사회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상호 관련성의 긴장이 약화되어 있고 어느 한 측면만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기성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소외된 하층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이 사회의 심층적 모순을 밝히려 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보이지 못한다. <이웃사람>은 세상과 이웃에 대한 모든 기대가 좌절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젊은이가 세상에 대한 증오심 혹은 적개심을 노출하고 있다. <세상에서 전과자라는 녀석들 지금 생각해 보니 뭐 별거 아닌 거 같군요. 네 그럴까요? 선생님께서 사무를 보면서 나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구 있을 때, 그때에 선생은 저와 같다 이겁니까? 절대로 그렇진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에 가득 찬 이 독백은 사고 방식이나 생활양식에 있어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그는 희망이 완전히 좌절된 사람의 파괴적인 폭력에 몸을 맡기게 되어 칼을 휘두른다. 그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증오나 폭력에 의존하지만, 사실상, 그의 절망은 희망을 뒤집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하고 학대받은 사람들은 절망할 힘도 갖지 못하고 체념하는 데 반해서 그의 폭력적인 절망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웃사람>의 절망이 절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작중 인물이 사회에 대한 능동적인 투쟁 과정 혹은 사랑을 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의 살인은 자포자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린다. 또한 <장사의 꿈>에서 역시 건강한 육체의 젊은이가 노동의 가치를 포기하고, 목욕탕이나 여관과 같은 서비스 업종에 몸을 파는 그러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작가가 소비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한 노동의 소외가, 결국 산업 사회의 공장이나 광산 혹은 어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수입보다 도시의 소비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훨씬 낫기 때문이며, 그러한 현실을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작중 인물이 자기의 삶에 대한 능동적인 의식이 없이 소비 산업의 이상한 직업들로만 전전해 다님으로써 그 사실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퍽 작위적인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가화>에 나오는 나이트클럽 악사는 <오늘이라도 당장 목을 맬 거야>라고 하면서 절망에 빠지거나 정신적인 혼란으로 방황하는데, 그것 역시 독자의 공감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황석영의 젊은 작중 인물들을 세 유형으로 가르면서 검토해 본 바로는 그들 모두가 이 사회의 허위의식과 부딪치면서 현장감 있는 갈등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때로는 희망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비참하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작가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객지>에서 동혁의 말처럼 <개선을 위해 쟁의를 해야지 원수 갚는 심정으로 벌이다간 끝이 없>는 것은 작가적 태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이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적 이해를 할 줄 아는 작가의  사랑의 태도이다. 황석영의 작품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유형의 작중 인물들, 혹은 그들의 작품이 긍정적인 평가를 얻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빈부의 차가 극심하고, 노동자의 현실은 별로 개선되지 못하며 계층간의 이해가 단절된 현실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황석영은 이러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평등이라는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집중한다. 오늘날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러한 평등의 개념은 모든 사람들이 똑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배의 원칙에 의해서 똑같은 삶의 조건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평등한 조건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가. 황석영은 불평등의 조건이 평등의 조건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작품을 쓴다. <객지>나 <이웃사람>과 같은 작품도 그렇지만, <섬섬옥수>나 양반 의식을 비판한 <산국(山菊)>,청산되지 않은 소작인 제도를 비판한 <종노(種奴)>와 <고수(苦手)>등의 작품 역시 그런 관점에서 씌여진 것이다. 그 중에서 <섬섬옥수>를 중심으로 평등의 문제를 검토해 보자. <콜랙터>라는 영국 소설이 연애 소설이면서 동시에 사회 소설이듯이 <섬섬옥수> 역시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서로 다른 계층의 남녀들이 등장하는데,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실업가의 외동딸 미리를 중심으로 가난한 사범대학생 장환과 <훌륭한 집안의 도련님> 만오와 아파트 관리실의 보일러 수리공인 상수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물론 작가는 노동자에 해당되는 상수 편에 서 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미리와 만오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진 자의 편이고 상수는 갖지 못한 자의 편이다. 그 사이에 있는 장환은 갖지 못한 자이면서도 가진 자의 입장이 되려는 야심 때문에 거의 병적인 분열증에 빠지게 된다. 작가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상류계층의 미리를 통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미리는 거만하고 허영심이 많은 여자이다. 만오 역시 그런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은 삶의 참다운 의미를 생각하며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소유한 사회적 지위나 재산, 학력을 제외시켜 버리면 그들에게 남는 정신적 가치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은 더욱 소유의 영역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소유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은 사물처럼 구속되어 영원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들의 모든 행위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 상수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기보다는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많이 가진 자 앞에서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여자한테 <댁에하구 자구 싶은데, 그냥 갑니다. 혼자서 기분 많이 내슈>라는 상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던지며, 또한 <똥치 같은 게 겉멋만 들어 가지구>라는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그는 사범대학생처럼 <기대와 현실의 엄청난 간격을 메꾸는 동안에 생각도 비뚤어지고 타협도 해 가면서 쥐어 짜놓은 듯한 졸장부로 변해 가는 청년>이 아니다. 작가는 상류 계층 젊은이의 특권 의식이 얼마나 속물적인가를 묘사하면서 이 사회의 불평등한 계층 구조가 허위임을 드러낸다. 인간이 평등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참된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미리가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스스로에게 그러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녀의 사랑을 부정적인 사랑으로 호도해 버린다. 어떤 점에서 황석영의 작품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의지는 강렬해도 우애나 사랑의 의지가 덜 강조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사랑의 의미가 폭넓게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한 사람의 남자가 한 사람의 여자와 일체감을 느끼고 때때로 고민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그러한 사랑의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는 제대한 후 현재의 부인을 만나면서 <사랑의 문제를 관념이나 극단적인 완전주의로 생각하던 것에서, 인생의 문제로 바라볼 능력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말로 미루어보아 사랑이란 삶의 문제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작가 의식이 엿보인다. 그 한 예로서, <삼포가는 길>의 백화와 <몰개월의 새>에서 미자를 떠올릴 수 있다.

  <삼포가는길>과 <몰개월의 새>는 모두 아름다운 서정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 속의 백화와 미자는 술집 작부이며, <관록이 붙은 갈보>들이다. 백화가 순정을 바쳐 사랑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처음으로 팔려 갔던 <갈매기집>에 있을 때였다. 그곳에는 군대 감옥이 보이며, <박박 깎인 군 죄수들>의 모습도 보인다. 출감이 멀지 않은 죄수들이 마을의 제방 공사를 돕기 위해서 내려오는 때도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작업을 나오면 기를 쓰고 찾는 것은 물론 담배였다. 백화는 담배 두 갑을 사서 그들 중의 얼굴이 해사한 죄수에게 쥐어 주었다. 작업하는 열흘간 백화는 그들의 담배를 댔다. 날마다 그 어려 뵈는 죄수의 손에 몰래 쥐어 주곤 했다. 다음부터 백화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 면회실로 그를 만나러 갔다. 옥바라지 두 달만에 그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백화를 만나러 왔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병사는 전속지로 떠나갔다.

  "그런 식으로 여덟 사람을 옥바라지했어요. 한 달, 두 달, 하다 보면 그이는 앞사람들처럼 하룻밤을 지내구 떠나가군 했어요."

  백화는 그런 일 때문에 갈매기집에 있던 시절, 옷 한 가지도 못 해 입었다. 백화는 지나간 삭막한 삼 년 중에서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웠던 시절은 없었다.

  백화의 사랑은 소유의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사랑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상을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사랑이 아니라, 비어 있는 마음으로 주는 사랑이다. 그녀는 상대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떠나 보낸다. 그러나 <그때만큼 즐겁고 마음이 평화로왔던 시절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형태는 <몰개월의 새>의 미자에게도 동일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파월 장병 훈련소인 특교대 근처 갈매기집의 미자는 내일 모레, 당장 떠나는 군인이래도 그가 좋은 사람처럼 보여지면 능동적인 애정을 보인다. 사랑을 받기보다 주려는 사람은 언제나 떳떳하고 자유롭다. 미자는 <나>에게 김밥을 싸들고 면회 오기도 했고, 담배 한 갑을 주기도 한다. 병사들이 떠나는 날, 몰개월의 여자들은 한복 차림으로 꽃이나 손수건을 흔들며 병사들을 실은 트럭에 조그맣고 하얀 선물을 던진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고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 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번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달고 있었던 일이었다.

  백화의 사랑이 백화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삼포가는 길>과는 달리, 미자의 사랑은 상대편 남자 중의 하나인 <나>에 의해서 서술된다. 술집 작부의 순정을 누가 깊이 기억하겠는가. 술집 작부의 표현 방법은 유치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비참한 생활에 빠져 버렸을지라도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유치한 것이 없다는 말이 진실이다. 배운 사람의 세련된 표현 방법, 혹은 세련된 문화 양식이 있듯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진실을 소박하게 표현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이 있는 법이다. 삶을 절실하게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이 참으로 소중한지를 모른다. <갈매기집>의 여자들이 소외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 <소중한 것>이 있는 한, 그들의 삶은 절망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의 사랑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내보이는 몸짓이지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황석영이 보여 주는 사랑은 신문 연재소설이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허위의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가진 것이 없고 억압받고, 가난한 생활을 보내는 사람들의 순정적 사랑이며, 또한 그것은 신파조의 사랑이 아니다.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무엇보다도 감정이 절제되고, 감상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이 삽화적으로만 그려진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진지한 사랑의 고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작가가 사랑의 문제를 관념적으로 추상시키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랑이 결여된 평등의 위험까지도 고려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개선해 나가는 데 무력하다는 의견을 몹시 비관적이며 반문학적인 견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인류가 남겨 놓은 수많은 문학적 유산은 휴지화하여야 될 것이고, 역사 속에서 뜨거운 정신이 쉴새없이 인간의 사고를 개선 발양해 온 사실은 모두 거짓이 될 것이다. 소설은 보여 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수반한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런 뒤에야 오늘의 문학이 후세의 문학에 넘겨 줄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문학은 비생명적이며 반인간적인 여러 요인에 언제 어느 때나 맞서서, 동시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바람직한 인간 조건을 세우는 데 한치라도 가까이 가야 할 것이다. (<<심판의 집>>작가 연보)

 아마도, 황석영처럼 현실 참여적인 작가 의식이 강렬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는 자기의 문학적 행위가 보다 바람직한 인간적 삶에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도시화되어 가면서 소비 문화가 범람하는 현상을 보고, 문학이 오락적 상품이 될 수는 없으며, 또한 대중의 정신을 마취시키는 아편이나 장식물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그는 또한 문학이 많은 대중 독자를 확보하되 야합해서는 안 되고 참된 비판적 의식을 일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은 소외된 사람들이 겪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지향해 가는 과업에 바쳐진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은 개인적 진실보다는 이웃의 진실이나 이웃을 위한 문학이라는 말을 애호하기도 한다.

  여느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작가의 바람직한 입장은 외로움을 자위하면서 대중과 분리되는 상태일 수가 없다. 예술의 민주화가 보편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는 마당에, 작가는 동시대의 대중들과 공통된 기쁨을 느껴야 하며 공통된 고통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시대의 문학은 결코 작가를 고립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중들과 고립되지 않는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모든 인기 작가가 옹호될 수는 없다. 재미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인기 작가라고 할 때, 그 재미를 받아들이는 독자의 정신적 수준에 따라서 혹은 재미의 관점에 따라서 그 재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재미란 읽는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마취시키는 순간적 재미가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각성적 재미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서 비판적 의식을 일깨우는 작가는 인기 작가라기보다 신뢰받는 작가일 것이다. 인기란 아무래도 소비 사회의 상품적 요소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황석영은 의식 있는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작가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측면을 될수록 제외시키고 이웃과 시대와의 관련된 측면을 확대시킨다. 최근에 간행된 《가객(歌客)》이란 소설에서도 <이웃의 일들은 항시 나의 일로 느껴>지며,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는가로부터 그들의 사랑. 증오. 불행. 행복 모두가 나의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웃의 진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 자신의 문학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극히 건강하고 온당한 입장일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이웃과 시대의 진실에 투철하려는 그의 의식은 거의 신념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신념이 문제성을 전혀 내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등(寒燈)>과 <가객>에는 각각 그러한 문학적 신념이 표명되어 있는데 신념을 두드러지게 노출하여 강조하기 위해서 작가가 작품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과 신념은 지식인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작품과 결부된 작가의 신념은 자칫하면 상상력의 확대를 가로막거나 현실의 섬세한 국면에 대한 진실을 놓치기 쉬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태도로서의 작가적 신념에는, 변화하는 개인과 변화하는 현실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끊임없는 긴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신념은 사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정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신념이어야지 기왕의 견해를 고집하는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긴장과 갈등이 제거된다면 황석영의 훌륭한 신념은 공허한 것이 될 우려도 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삶이냐》라는 책에서 인간의 생존 양식을 <소유의 양식(having mode)>과 <존재의 양식 (being mode)>으로 나누고 있다. 소유의 양식은 산업 사회 혹은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 있어서 일반화되어 가는 삶의 태도인데, 그것은  인간을 객체화시키는 삶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나 혹은 정신적인 가치를 소유 개념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한 인간을 끊임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고 비인간화의 사회에서 수동적인 객체가 되어 버릴 뿐이다. 그러한 인간은 결코 타인과 세계화의 관계에 있어서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존재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체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는 대상을 소유하려고 들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열어 두고 비워 두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적이며 인간적인, 그러므로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세계와의 참다운 조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황석영이 지향하는 삶이라든가 혹은 작품을 통해서 고취시키려는 윤리는 바로 그러한 <존재 양식의 삶>이다. 존재 양식의 태도를 지닌 사람은 이웃과 공감을 하며,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기 때문에 참다운 용기와 신념을 가진다.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고 또한 절망하지 않는다. 이러한 말은 황석영 자신이 온전히 그렇다기보다, 적어도 그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는 것이다.

  동혁이란 청년은 어느 곳에 가 있거나 낯설고 두려운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듯했고, 언제나 제집에 있는 것처럼 모든 습관을 지켜 나가리라 작정한 것 같았다. (<客地>)

  동혁의 태도야말로 존재의 양식을 사는 사람의 전형이다. 그는 괴테의 말처럼 대지 위에 자기 집을 세우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점 때문에 그는 언제나 떠날 수 있으며 소유의 대상이 없더라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노동 조건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어도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는 희망을 갖는다. 안락한 가정을 떠난 사람들, 안락한 가정에 갇혀 있지 않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집에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객지>의 작중 인물들이다. 그러한 작중 인물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작가 역시 <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아우를 위하여>)이라고 믿고, 역사의 그늘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현장을 잊지 않는다. 수천 광부들의 죽음의 위협이 누적되어 있는 광산을 찾아가서, 르포르타지를 작성한 수 표명된 그의 견해는 황석영이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에 대해서 분노하며, 무엇을 우려하는지를 결론처럼 압축해서 보여 준다. <구석구석마다 가득 차 있는 저 비인간화 현상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문제일 것이리라. 학대받는자들은 깨달아 그것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있으되 너무 미약하고, 학대를 통하여 누리는 자들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악조건과 악순환을 통해서 저러한 비인간화 현상은 노출되고 살이 쪄서 드디어는 다수를 일종의 윤리적인 공백지대로 이끌어 갈 것이다. 잠깐 외면하고 지나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면역되어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괴어 있는 사회 속에 잠겨 버리는 것은 아닌가>(<客地>의 하늘>). 우리는 황석영의 이러한 비판적 의식이 사랑과 평등의 기반 위에서 정직하게 더욱 심화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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