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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에 꽃이 핀다 / 산문 / 윤동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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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에 꽃이 핀다 / 산문 / 윤동주

 

 

개나리, 진달래, 앉은뱅이, 라일락, 미들레, 찔레, 복사, 들장미, 해당화, 모라, 릴리, 창포, 

울립, 카네이션, 봉선화, 백일홍, 채송화, 다알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 코스모스가 홀홀

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여기에 푸른 하늘이 높아지고 빨간 노란 단풍이 꽃에 못지않게 가지마다 물들었다가 귀또리

울음이 끊어짐과 함께 단풍의 세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하룻밤 사이에 소복이 흐니 눈이 내

려 쌓이고 화로에는 빨간 숯불이 피어오르고 많은 이야기와 많은 일이 이 화롯가에서 이루

어집니다.

 

독자제현! 여러 분은 이 글이 씌어지는 때를 독특한 계절로 짐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니, ,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철로나 상정하셔도 무방합니다.

사실 1년 내내 봄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 이 화원에는 사철내 봄이 청춘들과 함께 싱싱하게 등대하여 있다고 과분한 자기선전일

까요.

하나의 꽃밭이 이루어지도록 손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생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

.

딴은 얼마의 단어를 모아 이 졸문(拙文)을 지적거리는 데도 내 머리는 그렇게 명철한 것은

못됩니다.

한해 동안을 내 두뇌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일일이 헤아려 세포 사이마다 간직해 두어서야

몇 줄의 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봄바람의 고미에 찌들고 녹음의 권태에 시들고, 가을 하늘 감상에 울고, 노변의 사색에 졸

다가 이 몇 줄의 글과 나의 화원과 함께 나의 1년은 이루어집니다.

 

시간을 먹는다는(이 말의 의의와 이 말의 묘미는 칠판 앞에 서 보신 분과 칠판 밑에 앉아

보신 분은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것은 확실히 즉어누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루를 휴강한다는 것보다(하긴 슬그머니 까먹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다못 한 시간, 숙제를

못해 왔다든가 따분하고 졸리고 한 때, 한 시간의 휴강은 진실로 살로 가는 것이어서, 만일

교수가 불편하여서 못 나오셨다고 하더라도 미처 우리들의 예의를 갖출 사이가 없는 것입니

.

 

그러나 이것을 우리들의 망봐과 시간의 낭비라고 속단하셔선 아니 됩니다.

여기에 화원이 있습니다.

노트장을 적시는 것보다 한우충동(汗牛充棟)에 묻혀 글줄과 씨름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진

리를 탐구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는지, 보다 더 효과적인 성

과가 있을지를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나는 이 귀한 시간을 슬그머니 동무들을 떠나서 단 혼자 화원을 거닐 수 있습니다.

단 혼자 꽃들과 풀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참말 나는 온정으로 이들을 대할 수 있고 그들은 나를 웃음으로 맞아 줍니다.

그 웃음을 눈물로 대한다는 것은 나의 감상일까요.

고독, 정숙도 확실히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여기에도 또 서로 마음을 주는 동무

가 있는 것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화원 속에 모인 동무들 중에, 집에 학비를 청구하는 편지를 쓰는 날 저녁이면 생각하

고 생각하던 끝 겨우 몇 줄 써 보낸다는 A, 기뻐해야 할 서류(통칭월급봉투)를 받아든 손

이 떨린다는 B, 사랑을 위하여서는 밥맛을 잃고 잠을 잊어버린다는 C, 사상적 당착에

자살을 기약한다는 D.....

나는 이 여러 동무들의 갸륵한 심정을 내 것인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좀더 큰 문제보다 바람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우는 데 지날 뿐일까요.

일반은 현대 하생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으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 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 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

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겠습니다.

 

세상은 해를 거듭 포성에 떠들썩하건만 극히 조용한 가운데 우리들 동산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종전의 X가 있는 것은 시세의 역효과일까요.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履霜而堅氷至("리상이견빙지")-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

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에서 많은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저작 : 연대 미상 ( 연전 시절의 작품 )

발표 : 1948 ( 32... 3주기 ) 11.12월호 < 신천지 >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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