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花史)
by 송화은율화사(花史)
도(陶)
도나라 열왕은 성은 매(梅)고 이름은 화(華)며, 자는 선춘(先春)으로, 나부 사람이라.
그의 선조 중에 상나라를 도와 공을 세운 자가 있었는데, 그 선조가 고종의 재상이 되어, 도 땅에 봉을 받았다. 그런 후 중세에 초 나라의 대부 굴원이 쫓긴 바와 같이 되어 합려성으로 피하게 되자, 이 때문에 자손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다.
몇 대가 지나 고공사에 이르러서 무릉의 도씨 딸을 얻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왕은 그 큰 아들이었다.
도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덕이 있어, '그 여자가 시집가는 날이면, 반드시 그 시가를 빛나게 할 것이로다.'라고, 어느 시인이 칭송한 바라, 그 여자는 일찍이 요지(瑤池)에 가서 놀다가 왕모가, 붉은 열매를 하나 주는 것을 받아먹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왕을 낳을 때에,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그 향기는 달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아니 했다.
그러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향해아(香孩兒)라고 불렀다. 성장하여 그는 영자하고 수려했으며, 성질이 박질한데다가 풍채는 아결하였고, 선조의 유훈을 이어받아 그 덕이 높아서, 원근을 막론하고 그의 풍문을 듣고는, 노인을 이끌며 어린것을 데리고 와서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하던 차에, 등륙이 만물을 방자하게도 학살함에, 천하가 다 원망을 하여 마지않게 되자, 고죽군인 오균과 대부 진봉 등이 그를 추대하고 왕으로 세움에 따라, 합려성을 도읍으로 하고 국호를 도라하고, 목덕으로 왕이 되어, 축월을 세수로 삼고, 다섯을 상용의 수로 쓰고, 색은 백을 숭상하였더라.
가평 원년 동 십이월에 사제를 지내고, 붉은 매로 초목을 매질하고, 가평이라 건원했다. 그는 열두 달을 일년으로 하고, 일월은 시에서 달을 달리하고 날을 말한 것을 좇은 것인바, 이 뒤에서도 다 이것을 본 받았다.
이년에는 계씨를 왕비로 맞아들이었다. 왕비는 월성 출신으로서 정숙하며 요조한 덕이 있고, 여공에 근면하여 왕의 덕화에 돕는 바가 되었기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 여자를 주나라의 태사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사신(史臣)인 나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해 두는 바이라.
'집과 나라의 흥망은 부부간에 비롯되는 것이매, 시에 갈담의 읊음은 나라가 새로 일어날 징조였고, 산의 뽕나무로 만든 활의 예언은 집안이 망할 징후였도다. 도왕에 도씨의 모친이 있고, 또한 계씨 왕비를 얻었으니 그 흉성은 마땅한 일이었도다.'
라고.
삼년에 오균을 배하여 재상을 삼았다. 균의 자는 차군이고, 초나라 상주사람이었다.
그는 청허하며 과욕하고, 곧은 절개를 지킴으로써 호를 원통처사라고 했다. 그는 어렸을 때, 상강이란 곳에서 오 땅에 옮겨 살고, 왕과 더불어 죽마(竹馬)지우가 되었던 바, 등륙이 그의 어진 소문을 듣고는 고죽군으로 봉했다.
등륙의 난리가 일어나자, 오균도 동왕에게 진언하기를,
'등륙이 음탕·자학하며 만민을 괴롭히니, 그 품성이 미치는 곳에 떨지 않는 사람이 없고, 인민이 시들며 만물은 얼고 주리어 천하가 다 갈상지탄을 하고, 해내에 운예지망이 간절하오니, 비록 주옥의 구실을 지닌 가멸함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멸망은 곧 목전에 있는 것이로소이다. 이제 공은 밝은 덕이 있고, 명성이 높으며, 호걸을 영도하고 있는 터이오니, 이 기회에 합려에 의거하여 널리 여러 영웅을 모으면 누구라 어깨를 으쓱거리며 와서 술잔을 따르지 아니하리까. 원컨대, 신은 촌토를 얻어 공훈과 이름을 죽백에 남기고자 하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공은 매우 기뻐하고 그를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라도 자네가 없을 수 없다.'
라고.
게다가 공은 그를 배하여 재상을 삼고 다시 천호를 봉해 주었다.
이것을 사신은 이렇게 평했다.
'옛날 제왕의 흥성에는 반드시 보좌하는 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상나라 탕왕 때의 유신에 있어서나, 제나라 환공 때의 관중에 있어서나, 한나라 고조 때의 소하에 있어서나, 또 소열왕 때의 제갈량이 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군주는 어진 사람을 만나면, 마땅히 강물에서 배를 얻은 것같이 여기며, 또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같이 여기며, 오로지 어진 사람을 써서 모진 자를 물리치고, 뿐만 아니라, 일단 어진 자에게 일을 맡기면 그를 의심치 말고, 군주는 보필의 효험을 나무랄 따름이니라. 신하 된 자가 충정의 절개를 다한다면 나라 일은 이루어질 것이며, 왕업은 창성할 것이 아니겠는가. 도왕이 오균의 말을 듣고는 왕을 도울 재능이 있음을 알고, 그를 옆에 두어 영구한 계획을 세우는 데 참예시키었으매, 그에게 일을 하고자 하는 뜻이 크게 있었음을 이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랴. 이에 비추어 본다면, 후세의 임금은 어진 사람을 쓰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면서도 나무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사년에 진봉, 백직 등이 등륙을 대파하여 준 것이었다.
등륙의 난리에 조정의 신하가 많이 포위를 당했던 것인데, 그 때 충두 등도 또한 적중에 빠져 위험이 심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안색을 변치 않고 굴하지 않아, 적이 감히 해를 가하지 못했다. 왕은 그들의 지조가 굳음을 기쁘게 여기고, 이에 조서를 내려 특별히 포상하고, 각각 벼슬을 올려 주었다.
오년 춘이월에는 성이 같은 사람들을 봉하여 벼슬을 내리었다. 아우 예를 대유공으로 삼고, 악은 양주고, 사촌동생 영은 서호공, 조카 방은 파공으로 삼고, 이 밖의 나머지는 죄다 후백에 각각 봉했으나,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의 조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오호라! 나는 외롭고도 약한 몸으로서 선조의 유열을 이어 옛 나라를 새로이 일으키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나, 이것은 마치 넘어진 고목에 새싹이 돋아난 것과 같아서, 요행하게도 과질이 끊임없이 면면하도다. 이제 나는 봉례를 밝혀 분토를 하노니, 각기 본토에 가서 그 포모를 심고 본손과 지손이 백세에 길이 경사를 많이 누릴지니라.'
육년 겨울 시월, 왕이 오 땅에 출유했을 때, 경정산에 올라가서 호인에게 퉁소를 불게 하고, 진의 음악을 가다듬게 해서 그것을 들었다. 그 풍유소리를 못 마땅하게 여긴 왕은 돌아가 물에 소세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죽어갔다.
왕비가 어려서부터 진병이 있어서 아들을 낳지 못하였기에, 오균은 왕의 아우 양주공을 맞이하여 그의 뒤를 잇게 했으니, 이가 독 동도의 영왕이었다.
사신인 나는 이렇게 평한다.
'오호라! 열왕의 덕은 크고도 아름다웠도다. 왕은 어진 신하를 얻어 천하를 바로잡고, 어진 장수를 써서 변방을 다스리어 싸움이 없이도 동화시켰고, 싸우지 않고도 이겼으며, 동성을 봉하여 그 은혜를 길이 하고, 충절한 신하를 포상하여 그 풍성을 높이었으니, 옛날 은주의 정치라 하더라도 더함이 없었도다. 그러나, 왕은 질박하고도 간략하게 나라를 세우자마자 죽어서 간책에 실릴 가언과 선행이 아주 적었으니, 어찌 애석타 아니하리오!'
동도(東陶)
영왕의 이름은 악으로 고공사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 열왕은 어렸을 때에 여러 아우들과 암께 놀다가 오동나무 잎을 오려서, 그들에게 보이며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내 이것으로 너희들을 봉하여 주리라.'
후에 즉위하게 되어 그는 이 말대로 실행해 주었다. 천하의 기름진 땅을 골라서 두 아우에게 봉한 것이니, 그중에서도 특히 양주공에 대한 은총은 깊었다.
왕은 양주공이 입조할 때면 매양 손을 잡고 화악루 자신의 이름과 열왕의 이름을 따서 화악루에 올라 잔치하며 즐기었다. 이 누의 이름은 열왕 자신의 이름과 열왕의 이름을 따서 화악루라 한 것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열왕의 아우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있으나, 또 이런 것이 있었다. 열왕이 양주공을 봉지로 돌려보냄에 있어서 작별 시를 지은 일이 있었으니, 그 시는 이러했다.
우리들 가지끼리
꽃시적이라 되어 오면
너 나 다 함께 즐기건마는
때 가서 꽃 지고 시들면
그대와 헤어져 이별을 하니
한 많은 그 시름 어디다 풀고
이 얼마나 다정스러운 노래인가. 그의 아름다운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열왕도 죽었다. 그 뒤를 영왕이 즉위했다.
중화원년 춘 이월에 왕은 도읍을 동원으로 옮기었다. 이 때 승상 오균이 이러한 상소를 올리었다.
'선왕이 나라를 평정하고 도읍을 이곳에 정한 바, 이 땅은 금성탕지이며 천부의 곳으로서, 지방은 비록 작으나 만족히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원은 그렇지 못하여 사방으로 적을 맞이할 곳이오니 덕이 있으면 흉할 것이로되, 덕이 없으면 망하기 쉬울 뿐이로소이다. 주나라가 도읍을 동도로 옮기자 나라 세력이 약해져서 떨치지를 못하였삽고, 한나라가 도읍을 동경으로 옮기고서는 난리가 자주 꼬리를 물고 일어났사오니, 도끼자루를 구하는 데는 그 도리를 물고 일어났사오니, 도끼자루를 구하는 데는 그 도끼에 알맞음을 어긋나지 말 것이매, 지난날의 거울 됨이 이에 있나이다.'
그러나 왕은 이러한 상소를 듣지 아니했다.
'나는 다만 동쪽으로 가고자 할 따름이라. 어찌 답답히 이곳에만 오래 살까보냐.'
왕은 그 날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마저 동도라 했다. 인월로 세수(歲首)를 삼고, 고공사를 추존하여 태왕이라 하고, 천하에 특사령을 내렸다.
삼월에 왕은 동각에 나가 공사인 하손, 맹호, 임보, 소식 등을 친히 시험하였는데, 이중 임보의 글 가운데,
소영횡사수청천, 암향부동월황혼이라는 구절을 발견하여 감탄했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울릴 장한 것이로다!'
왕은 임보를 장원으로 뽑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절계지라 하는 것이었다.
삼년에 왕은 오균을 벼슬에서 밀어 버리고, 그 대신에 이옥형을 승상으로 삼았다. 옥형은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그는 글을 보내어 오균은 비꼬아 이렇게 썼다.
'춘하추동 사시절은 때가 되면 가느니라.'
오균은 이것을 보고 옥형의 심술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날로 행장을 차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산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다.
그는 떠나기에 앞서 진봉과 백직등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그 시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절개 좋은 송백도
도리의 고움을
당하지는 못하리라
옥형이 이것을 듣고 격분해서 왕에게 참소했다. 그는 이런 글을 써 보낸 오균이 미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균은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오나,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사오니 모반할까 염려되나이다.'
왕은 이러한 옥형의 말을 믿고, 즉시 오균을 나입해다가 황강이란 곳으로 귀양 보내 버리었다. 그리고, 옥형의 벼슬을 올려 승상으로 삼았다.
옥형의 자는 성경이라 했는데, 그는 당나라의 승상이었던 임보의 후손으로, 타인을 시기하고 남을 모함하기를 좋아했다. 그러기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조상의 풍이 있다고 비난한 것이었다.
사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동하면 소인이 진축하게 되고, 충언을 거부하면 어진 사람이 물러가고야 마는 것이니 어찌 임금된 몸이 이것을 거울로 삼아 경계하지 않을 손가. 어느 사람이 나에게 물어 말하되, 오균은 국가의 원로로 단지 옥형의 풍자하는 말을 듣고서 거취를 즉결하고, 그 날이 지남을 기다릴 것도 없고 벼슬자리에서 떠나가 버렸으니, 그는 어찌 자기의 말이 왕한테 용납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을 하고 떠나가는 소인에 가깝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리오, 라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오균이 어찌하여 옥형의 한 마디로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랴. 그것은 즉 옥형이 도읍을 옮길 때에 틈을 탔고, 오균은 도읍을 옮김을 반대하고 왕을 충간 했다가도 거절을 받은 날에, 미리 깨닫고 피하려 했던 때문이고, 그리고 또 그들 서로의 용납할 수 없는 형편은 마치 훈유지동기와 같고, 벼와 피가 한 논에 있는 것과도 같았으니, 그가 떠나간 것이 어찌 다만 처비지성금으로의 자모지투서일까보냐. 그가 떠난 것은 곧 공자가 조그마한 죄라도 덮어쓰고 떠난 이치와도 같은 것이니, 어진 사람의 하는 바를 일반 보통 사람의 소견으로는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니라.'
사월에 궁인 도요요(桃夭夭)를 죽였다. 이씨부인이 후궁 중에서 제일로 왕의 사랑을 받았는데, 요요가 입궁함에 따라서 그 얼굴이 반반한 것을 보고 혹시 사랑을 잃을까 걱정이 되어, 늘 요요를 미워하다가 그것이 그만 병이 되고야 말았다.
왕은 그 여자를 불쌍히 생각하고, 요요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하여 안심케 했으나, 부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부인이 죽자 왕은 슬픔을 금하지 못하고, 언제나 거소에 와서 화령향, 회몽초를 태우며 추념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이씨부인은 승상 옥형의 누이동생이었다. 매비가 폐되고 춘초궁에서 죽었다. 애당초 왕이 표매시를 읊으니, 오균이 동성끼리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충고했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매씨를 왕비로 삼았는데, 비는 어진 덕이 있어서 언젠가 왕이 구슬 한 말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를 아니했다. 비가 한창 사랑을 받았던 이때에 왕이 새로이 애비 양귀인을 취하게 되어서는, 매비에 대한 사랑이 식게 되고 마침내는 춘초궁에서 죽으니, 왕은 그 죽음을 슬피 여겨 친히 명복을 비는 글을 지어 후하게 장사 지내 주었다.
그 후 왕은 양귀인을 왕비로 삼았다. 양비는 절세가인(絶世佳人)으로 당시 수해당비연이라고 불리었다. 아름다운 자태뿐만 아니라, 또한 가벼운 몸으로 춤을 잘 춤으로써 왕의 총애를 받았었다.
또 이때 백봉거라는 자가 수양공주를 사모했다. 봉거의 자는 상연이라 하고, 칠원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됨이 가볍고도 날카로와 언제나 흰옷을 입고 훨훨 춤을 잘 추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옥요노라고 불렀다.
양서라는 자를 금성의 태수로 삼았다. 양서의 자는 백화로서 양비의 사촌 오빠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방탕하게 놀아 장대에 출입하고, 풍류객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옛날에는 장서가 있었더니 이제는 양서가 있도다.'
하고 놀리기도 한 것이었다.
그는, 그러나 왕후의 친척이었으므로, 발탁되어 고을에 제수되었으며, 그의 부자형제가 모두 다 중요한 자리를 얻어 차지했으니, 가문에 빛이 나고 별안간 권세가 강성해져서, 그것은 마치 당나라 때의 양국충과도 같았다.
오월에는 전임 승상 오균이 적소에서 죽었다. 이때에는 진봉, 백직 등이 이미 자리에서 물러가 버리고 도의 옛신하들은 거의 없었다.
사신은 이 때의 일을 이렇게 평했다.
'왕은 성품이 검소하여 처음에는 나라를 다스림에 밝더니, 옥형을 승상으로 삼고, 오로지 양비를 사랑하게된 뒤로부터는 임금의 마음이 태만해지고, 토목공사 일으키기를 시작하여 장성을 쌓고, 궁궐을 사치롭게 하고, 피향정, 승로반을 지어, 왕이 도읍을 옮긴 당초에는 토방 초당에서 살더니, 이때에 와서는 주실옥대에다 사치함을 극도로 하니, 어시호 상하가 다 이 풍습을 따르게 되어, 누구라 할 것 없이 화려한 것을 다투어 존중하여, 내외가 서로 미인을 끼고 앉아 여자의 말에 매혹되어 나라 정사는 쇠퇴해 가고야 말았다.'
사년에 밀의 사람인 황범이란 자가 도당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그는 흉노의 별종이었다.
그들은 곤륜산으로부터 중원에 흘러들어 산곡사이에서 틈을 엿보며 살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틈적(闖賊)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추장은 군정에 힘을 써서 날로 두 번씩이나 관부에 나가 호령함이 엄한 데다가, 또한 군기가 정밀하고 예리하였다.
그런데, 그들 도당은 여러 곳에서 봉기하여 출군하여서는 약탈을 일삼고, 진영으로 돌아와서는 성벽을 굳게 지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들에게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들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촉주 두견이란 자가 제(帝)를 칭하고, 항주라고 했다. 그리고, 백봉거가 죄가 있어서 죽음을 받았다.
춤을 잘 춘다고 해서 왕의 은총을 받았던 백봉거는, 그의 친구로서 노래를 잘 부르는 율류라는 자를 천거하였는데, 이 사람은 금의공자라고 불리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듣기가 좋았던 고로, 왕은 매우 그를 사랑하여, 날마다 많은 시인, 비빈, 또는 이원제자들과 더불어 후궁에서 놀았기 때문에, 그가 부르는 노래는 옥수와 후정화가 있었다.
백봉거와 율류 두 사람은 항상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노랑 옷을 입은 자는 공자요 흰 옷을 입은 자는 옥노다!'
하고 비난삼아 놀려 주었다.
봉거는 왕의 사랑과 신임을 믿어 교만하고 방자하여, 자기의 도당을 끌어들이매, 그들은 제멋대로 궁액에 출입하며, 때로는 금원에서 유숙하며 궁인 액각, 봉선, 계관 등과 간통하다가 발각되자 봉거 또한 중매를 한 죄로 연루되게 되어 스스로가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별당과 궁궐의 담을 넘어 도망가는 것을 궁문감인 정이 그들은 모조리 잡아 죽이었다.
삼월에 승상 옥형이 죄가 있어서 벼슬을 빼앗기고 죽음을 받았다. 옥형은 이씨부인이 죽은 뒤에 왕이 양비만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차차 권세를 잃게 되자 심중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였던 것인데, 그 기색을 왕이 알고는 명을 내려 그의 벼슬을 빼앗고, 자결하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해 여름 사월에 밀(密)의 난적이 동경에 쳐들어 오자 이비장이 그들을 맞아 싸우다가 패전하고 생포되었는데 이때 금성태수 양서가 그의 장수 석우를 보내어 그와 그의 휘하 장병 천여 명이 적을 대파하고 쫓으니 왕은 기뻐하며 야서를 대장군으로 삼아 세류에 둔병케 하고 황률을 막객으로 하여 머물게 했다.
전에 양서는 남몰래 불복의 뜻을 품고 조정과 다투는 것이었으나 양비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것을 막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종실인 남창위 매복이란 자가 이렇게 상소해 왔다.
'신이 보건대 요즘 난망의 징조가 여러가지로 싹터 나서 나무에 불이 붙고 연못에 바람이 일어나서 위험이 절박할 뿐이 아니오라 음양이 또한 각각 그 본도를 잃어서 때가 아닌데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나무에 인면의 요기가 있고 풀에 이상한 잎이 나니 이것은 무슨 형상이리오. 지금 대장군 양서가 재상의 지위에 있는데다가, 왕후와 친척인 몸으로서 세력을 믿고 그 횡행하고 공이 있음을 빙자하여 교만하고 방자하여 환란을 일으키려고 함이 조석간에 있사오니 그 형상을 보지 못하시거든 그 그림자라도 살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현재, 안으로는 어진 장수가 없고 , 밖으로는 적의 나라가 많으매, 즉 촉주가 황제라 칭하고, 하의 요황이 무도하게도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며 또 밀 땅의 사람들이 오만한 데다가 감히 대국에 반항하고 있사오니 이것들은 국환됨이 지극한 데다가 자꾸만 커지는 화가 집안에 있음에는 어찌 하오리까. 원하옵건데, 대왕께서는 속히 이것을 방비할 것을 꾀함으로써 후회됨이 없게 하옵소서. 신은 금지옥엽(金枝玉葉)의 몸으로서 태어나서 밝은 조정에 발을 들여 큰 혜택을 박고 또 많은 은총을 입고 있는 터이오라, 조정의 형세가 기울어짐을 염려한 나머지 지성을 참지 못하고 감히 이신지책을 펴 올리오니 성명은 추요를 부찰하시와 조금이라도 생각하옵기를 복망하나이다.'
왕은 그러나 이러한 상소를 들어 주지 아니했다. 난리가 나리라고 앞을 내다보고 있는 매복은 이 때문에 성명을 황매라고 고치고 산주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를 아니했다. 오월에 대장군 양서가 그의 장수 석우를 시켜 왕을 강성에서 죽였다. 석우는 랑의 사람으로 원래 진나라 성과 같고 비렴의 후예였다.
그는 용맹하며 힘은 나무를 꺾고 집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소리를 질러 꾸짖으면 천 사람이 죄다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때 양서는 이러한 그를 보내어 선봉을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자 그 군세는 비바람 같아 대거 동경을 쳐들어가니 성중이 진동하여 상하가 모두 벌벌 떠는 것이었다.
왕은 이 때문에 강성으로 달아났다가 오월에 죽고 말았다. 당시 조정 백관중에는 왕을 따라 죽은 자가 많았고 양비는 도성문을 나가다가 발을 진흙속에 헛디어 그만 빠져 죽었으니 도나라는 열왕으로부터 불과 십여 년만에 망하고야 말았다.
왕을 이토록 몰아 죽인 석우는 다시 양서마져 내쫓고 요황을 낙양에서 맞아 임금으로 세우니 이 분이 곧 하나라의 문왕이었다. 사신은 이렇게 평했다.
'영왕이 도읍을 동경으로 옮기면서 빛이 내렸다고 환영함이 없지도 아니했으나 마침내는 사치로 나라가 망하였으니 오균의 선견지명이 점친 것과 다를 것이 없도다. 그리고 또 이상스럽게도 영왕의 세대가 마치 당의 현종 때와는 매우 같았도다. 즉, 옥형의 간계는 임보와 같고 양서의 종횡은 양국충과 같고 밀인의 난리는 토번의 난과도 같으며 석우의 일은 안록산의 난리와 같고 매비를 폐하고 양비를 사랑한 것이며, 처음에는 낡은 정치를 했다가도 뒤에 가선 어리석은 정사를 일삼은 것은 개원 때와 천보의 난과 같았으니 어찌 이다지도 지극히 닮았단 말인가. 생각건대, 일년 열두 달을 십이회지수로 미루어 보면 삼월은 곧 진지회요 당나라의 역년을 요임금 때로부터 헤아리면 또한 진사의 회에 불과하니 그 기수가 서로 같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도다. 나는 이 내력을 보는 후세 사람이 반드시 당시의 역사를 지은 자가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여길까 하여, 이에 써두어 알아 주기를 바라는 바로다.'
하(夏)
하나라 문왕의 성은 요이요, 이름은 황이고, 자는 단으로서 항주 사람이었다. 옛날에 신인이 있어서 경도에서 나와 상자하에 은거했는데 옥루자라는 자가 있어서 이름이 세상에 났고 그후 몇 대에 자수자에 이르렀으니 이 자수자가 곧 왕의 아버지였다.
중화의 초에 언동리에서 난 왕은 어렸을 때부터 기특한 기질이 있었고 차차 자라서도 얼굴이 악단과 같았으며 풍채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대단했기에 고을 노인들이 칭찬한 바였다.
도말에 나라 안의 습속이 사치스러웠으나 왕은 홀로 빛을 머금고 세상에 나타나지를 아니했다. 그는 일찍이 나부산에 놀다가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길에 있음을 보고는 칼을 빼어 버리고 후에 다시 그곳에 오니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 아들은 백제의 자손이었거늘 이제 적제의 자손이 베어 죽였도다!'
그리고는 그 여자는 별안간 사라져 버렸다. 이로부터 그는 마음속으로 홀로 좋아하며 내가 왕이 된 다라고 자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당나라 명황 즉 현종 때에 향공으로서 낙양에 들어가서는 계속 낙양에서 살고 있었는데 도나라가 망하게 되자 석우들이 표를 올려 왕위에 오르기를 권한 것이었다.
그 표문에는 대략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엎드려 아뢰옵건데 우리 임금은 천지개벽 초의 영웅으로서 크고 먼 것을 세울지어다. 환원에도 도리의 상서가 있었음은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흉할 징조였으며 뜰에 명협의 서기가 나매 누구라 요임금을 받들 뜻이 없었을 것이리요. 지금 천하가 다 천지의 도를 따라 하의 세대가 대신할 것을 바라나이다.'
왕은 즉위하여 낙양을 도읍으로 하고 토덕으로 왕이 되어 사월을 세수로 정하고 붉은 색을 숭상하고 감로원년 여름 사월에 남훈천에 나가 제후의 조회를 받았다.
신후유, 회후, 동백, 미자, 기주, 태주, 소주, 재주, 도림, 계림 등의 모든 군장이 각각 맹세해 오니 구백이 넘는 나라를 다스림에 주옥과 비단이 휘황하게 궁전 안에 가득했다.
이리하여 담로의 시를 부르면서 잔치하고 석우를 풍백에 봉하여 남이라는 성을 내리고 그 조서에 이렇게 썼다.
'훈훈한 제 때를 찾아서 나의 만민으로 하여금 다 각기 잘 지내도록 바람 불지니라. 내 이에 그대를 봉하여 주매 무한 히 즐거워하노라.'
그리고 위자를 왕후로 봉하고, 화예를 부인으로 삼아 가까이 모시게 했으며, 김대위를 승상으로 삼았다.
김대위의 자는 미춘이라 하여 왕과는 원래 본관이 같은 이족으로 광릉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성중에 기이한 꽃이 피었는데, 그것은 씨가 없이 난 것으로 붉은 잎에 금색의 허리를 두르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어느 지혜로운 자는 이렇게 말했다.
'후일에 꼭 현명한 재상이 날것이로다.'
그러자 과연 김대위가 승상이 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화상이라고 일컬었다.
이년에는 천하에 조서를 내려 도의 후손을 찾아 마침내 영왕의 손자 옥매를 발견하고 그를제후에 봉하여 도왕을 봉사케 했다. 도나라가 망하자마자 모든 매씨가 몰락했으나 옥은 성명을 거꾸로 붙여서 옥매라 하고 민간에 숨어 있었다. 그 모습만은 그대로였으나 풍채는 시들어 옛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 해에 백부, 괴부, 자미원, 한림원, 봉래관 등을 설치하고 이것들에다 글을 잘하는 방정한 선비들을 두었는데 필관은 사필의 재주가 있으므로 한림원을 주관하고 형초는 가시가 있어서 아부하는 풍이 없기에 백부에 두고 척촉은 겸양의 덕이 있고 위족은 해를 보는 정성이 있어서 임금을 아끼고 덕을 보필할 수 있겠기에 봉래간에 있게 하니 이 모두가 적재적소가 되어 조정은 밝고 문물은 찬란하여 기록할 만한 것이었다.
감당을 태주의 백으로 봉하고 또 상무부로 형양태수를 삼았다.
팔월에는 왕이 친히 태학관에 행차하여 제사지내고 여러 학생들과 더불어 강론을 하니 행단, 괴시에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고 그들은 모두가 훌륭한 선비들로서 이 나라의 우렁찬 부흥을 설명해 주고 있는 듯했다.
이때, 온거처사 의란이란 자는 왕이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나오지를 아니했다. 의란의 자는 줄지라 하고 호는 구완선생이라 했다. 그는 뛰어난 덕이 있어서 벼슬살이를 구하지 아니했으며, 그의 덕명은 원근에 펴져 자자했다.
상산처사인 주지라는 자와는 그는 친한 친구로서 사이가 매우 좋았다. 주지의 자는 연지요, 호는 삼수선생이라 했다.
이 두사람은 언제나 같은 방에서 동거했고, 성격과 취미도 같아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지란지계라고 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왕이 비단을 보내려 몇 번 청했으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아니하고 그의 문하생인 굴질, 연년, 감초, 석죽, 원목 등만을 보내어 벼슬에 있게 했다.
굴질의 자는 지영이라 했고 연년의 자는 창양, 감초의 자는 봉미, 석죽의 자는 수의, 원목의 자는 망우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마음이 청렴결백하여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중에서도 특히 석죽과 원목은 빛나는 관록을 지내게 되어 도움되는 바가 많았다.
원목은 일명 홰라고도 했는데,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북당에 받들어 모시어, 한번도 그 옆을 떠난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왕은 그의 효성을 특히 가상히 여기었다.
삼 년에는 해당을 장사에 귀양보냈다. 처음 동도 시내에 무릉의 도라는 자가 국내의 대벌이 되어 문벌이 빛나고 자손이 번성하였으며 또한 외척으로서 사치함을 극도로 했다. 그런데 벽도라는 자가 있어 성질이 고결하였더니 늦게는 유덕함을 즐겨 그의 벗 백설향과 더불어 일세에 이름이 났고 그들은 한가지로 청백함을 고집하자 여왕이 매우 이들을 사랑하여 둘을 다 옥당에 임명해 두었다.
이외에 또 유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위성의 손으로 일명 손이라고도 했다. 유는 어렸을 때, 이미 영명함이 제도보다도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칭찬했다. 그런데 당파가 나누어져 일가 안에서도 중립하여 불편한 자가 있고 해서 이를 삼색이라 한 바, 혹은 홍백으로 나누고, 이외의 자를 황당이라고 불러서 조정에는 색목이 완연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영왕은 이것을 금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에 이르러서 홍당, 백당 이외의 여당이 있어 또 하나의 당을 이루었고 왕 역시 홍당에서 나온 관계로 황당 일파만을 오로지 등용하려 하니, 김대위, 위족등이 합심하여 번갈아 충간하고 화해에 힘썼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홍당이네 백당이네 하는 따위 당론은 없게 되었으나 그래도 백당이 왕성하여 해당은 기운을 내지 못하고 조정을 비방하니 김대위가 왕에게 주달하여 귀양 보냈던 것이다. 이때 황당중에서도 성밖으로 쫓겨나고, 출장이라는 오명을 받은 자가 있었다.
사신은 이렇게 평했다.
'홍당, 백당의 폐는 당나라의 우리와 송나라의 천락에 비하여 다름이 없다. 그러나 김대위가 성심을 다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했으니 그야말로 재상된 자가 거울로 삼아야 하지 아니하리오. 그리고 또 말하거니와 당나라 문종은 언제나 하북의 도적을 쫓기는 쉬우나 조정 안의 붕단을 없도록 하기는 어렵다. 라고 역사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탄식됨을 금 할 수 없게 하는 바다. 당화의 폐가 역란보다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하겠지만, 당파를 타파하는 것이 적을 제재하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것은 어찌 옳다고 하리요. 하의 왕이 한사람의 어진 보좌의 신을 가지고도 능히 일세를 조화시켜 화평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밝은 임금이 세상에 군림하는 바에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서경에 무편무당이 왕도탕탕이라 하였고 또 군자의 덕은 풍이요 인의 덕은 초라 했으나, 군자의 덕이 더하는 바에야 어찌 소인들이 없어지니 아니할 것이요.'
오년에 풍백이 입조하자, 왕의 은혜가 가장 큰 지라, 그의 출입이 비상했다. 어느 날 왕이 시신에게 풍백은 어떠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대위가 이렇게 대답했다.
'풍백의 사람됨은 절조의 변함이 무상하여 기쁘면 거짓불고 화가 나면 바람을 일으키어 만물을 꺾으니 그는 태평한 세상에서는 능한 신하라 할 수 있고 난세에서는 간웅이라 할 수 있나이다. 선왕께서도 강성의 변을 보시지 아니 하였나이까.' 왕은 이런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기하는 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풍백을 신임하여 그의 소녀를 취하여 궁녀로 삼았고 이로부터 정사에 태만하여 아주 사치만 기암괴석을 널리 천하에 구하고, 그것으로 어원의 산을 만들어 아름다운 나무와 풀을 심기도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어원은 한없이 아름답고 가지 가지 나무와 풀이 동공에 푸르러 인풍이 그 밑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향각과 백보란을 지어 한갓 양국충의 옛제도를 모방하는 데만 힘썼다. 때때로 이런 곳에서 만화회를 열어 병풍을 삼으니, 이것 또한 당나라의 유풍이라 해서 좋았다.
사신은 이에 대하여 이와 같이 기록했다.
'심하도다! 미인이 사람을 해침이여. 그것이 마음 속에 있은즉 사람의 마음을 좀먹고 신변에 있은즉 몸을 망치고 집안에 있은즉 패가하고 나라 안에 있은즉 나라가 멸망하여 아주 사치하고 방종한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고 태만하고 안락의 습성이 이것 때문에 일어나 아첨을 좋아하고 곧고 바른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이 때문에 커지며 재물을 탐내고 인민을 박대하는 정치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며 또한 어찌 삼갈 바가 아니리요. 문왕의 영명한 군주로서도 종말에 이러한 것이 미인의 해가 아님이 아닌 것이매, 옛날 중국 하나라 걸왕의 포림과 수나라 양제의 채화를 진실로 괴이하다고 생각할 바 아니로다.'
에 여러 차례나 왕의 뜻에 거슬린 바 되어 싫어하자 이것을 기회로 간신들이 그를 없애려고 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느 극악한 간신이 이 위대한 충신을 왕에게 이렇게 참소했다.
'형초는 비록 마음이 곧다는 이름이 있으나 기염이 대성하고 어두운 곳에서 오래 살고 있사와 금은채단의 뇌물을 많이 받았나이다.'
이런 비난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왕은 분격하여 그를 죽였다. 이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자는 모두가 아깝다고 했다.
이때 녹림적 섭청의 난이 일어났다. 그의 군병이 쳐들어오자 몇 달도 못 가서 천하가 다 그들에게 호응하고 홍백의 도당들도 이에 뛰어든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소녀는 평소에 재치있고 권모술수에 능해서 왕이 크게 기뻐하고 언제나 그 여자의 슬기로운 지혜를 볼 때마다 껄껄껄 웃으면서 신기롭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 여자의 아버지인 풍백은 더욱 신임을 받았다. 이때 충신 위족이 이렇게 간했다.
'풍백은 아침에는 굴복하였다가도 저녁에는 모반하는 것을 언제나 반복해서 무상하오며 소녀의 성질은 질투가 많아 가까이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그의 누이 봉십팔과 더불어 어지신 임금님의 옥체를 위태롭게 하려 꾀하오니 대왕께서는 이들을 삼가셔야 하올 줄로 여기나이다. 신은 진심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을 버릴 수가 없는지라 이토록 만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어제의 홍안이 이제는 이미 늙었나이다.'
위족의 말은 너무 간곡하고 눈물에 젖어 있어서 왕은 꾸짖지도 못하고 빙글빙글 웃는 것이었다. 육년 여름 오월에 왕은 후원에서 놀다가 생각지도 않은 들사슴에게 물리었다. 이 때문에 그의 불행한 취후는 한 걸음 다가왔다.
간악한 소년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사슴에 물려 신음하는 왕에게 양약 대신 독약을 올리었다. 왕은 그것을 마시고 마침내 죽어 갔으나 그가 임금이 된지 불과 육년의 해가 지났을 뿐이었다. 대하는 망한 것이었다.
김대위가 위족 등 충신들과 함께 위변을 일으켜서 풍백과 싸웠다. 그러나 이 간악하고도 강포한 풍백은 이들 위대한 충신들을 죄다 죽이고 또한 나라를 망친 다음, 계주백을 맞이해 다가 왕을 삼았다.
이때 녹림적들은 도처에서 대성했다. 따라서 나라는 매우 혼란하고 위태로왔다. 옛말과 같이 노래를 불러도 백성은 따르지 아니했으나 아무튼 수중군이 전당에서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가 곧 남당의 명왕이 되었다.
당(唐)
당나라 명왕의 성은 백이고 이름은 연이으로서 자를 부용이라고 했다.
그의 선조에 장십장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화산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 이름은 함담이라 했고 애초에는 야야계에서 살았다. 모친 하씨는 빛이 아름다운 꽃을 가진 창포를 보고 그 꽃에 혹해서 그것을 입에 넣어 삼켰는데, 이때 임신해서 왕을 낳은 것이었다. 왕의 얼굴은 잘생기고 아름다워 마치 천신과도 같았고, 어딘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숭정하고 거룩한 점이 있었다.
고견 청백하고 한없이 깨끗하면서도 그러나 한쪽으로 더럽고 추잡한 것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너른 아량으로 용납하는 관후한 덕도 있었다. 그는 온갖 미덕의 표본 같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는 물을 좋아하고 물속에서 살았다. 그러기에 그를 수중군자, 또는 수진인이라고 불렀다.
하나라가 망한 처음에, 나라에 왕이 없어서, 상주사람인 두약과 백지들이 그를 추대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는 말하자면 수덕으로 왕이 된 셈이어서 흰색을 좋아하고 칠월을 세수로 삼고 전당을 도읍으로 정하여 나라 이름을 남당이라 불렀다.
사신은 이렇게 말했다.,
'도나라는 목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고, 하나라는 토덕으로 왕이 되어 붉은 색을 숭상했으며 당나라는 수덕으로 왕이 되어 흰색을 숭상했던 것이니 이런 일의 연유는 감감하니 알수가 없다.'
덕수 원년에 정전의 법을 만들고 전폐를 쓰기 시작했다. 이 해에 예의 포악한 풍백은 그의 왕인 계주백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 이름을 금이라 하고 서북 땅을 합쳐 차지했다. 이 때문에 녹림적들도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었다.
왕은 두약을 승상으로 삼았다. 그 조서에서 왕은 이렇게 써 놓고 있었다.
'그대는 맡은 바를 잘 보살펴서 그대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이며, 동시에 이 당나라의 이름을 떨치게 하라.'
두약은 옛날 당나라의 어진 재상이었던 두여회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어진 피를 받아 훌륭했고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칠월에 왕은 수정궁으로부터 나와서 추향전에 행차했다. 여기서 여러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이때에 불행하게도 천하는 모두가 녹림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만 당 나라만큼은 깊은 개울에다 높은 성을 쌓아 올렸기로 그들의 해를 면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가 다 격양가를 부르고 태평했으며, 나라는 점점 살찌고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때 수형의 돈이 많아 거만에 달하고, 강과 연못의 물고기가 얼마든지 있어서 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을 정도였고, 상하의 백성들이 저마다 길쌈을 하기에 힘쓰고 조석으로 주옥을 헤아리는 데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삼년에 야야계의 사신 김량이라는 자가 위급한 보고를 올려 왔다. 그 급보는 이러했다.
'적병이 야야계에 처들어 와서 우선 아압지를 쳤나이다. 그 적들은 모두가 다 사당주를 타고 목란의 삿대를 저으며 부용의 옷을 입고, 채릉곡을 부르고 있사온데, 그 모양과 거동이며 보장이 우리나라 사람과는 매우 같았기로, 처음에는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노래 소리를 듣고서야 적인 줄 알았나이다. 그 노래를 적사오면 바로 이러하옵나이다.'
하고, 표문에는 따로 그들의 노래를 정중하게 써 놓고 있었다.
연잎 비단치마가
한 색인데, 부용 붉은 볼이
두 갈래로 피었구나
아무렇게나 연못에 들어가도
보이지 않고, 노래듣고서야
비로소 사람 온 줄 아느니라
그리고, 또 표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편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이 그들의 칼에 맞아 죽고, 또 쓰러져 피를 흘렸나이다. 현명하고 인자하신 대왕께옵서는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와 어서 대군을 내시어 구원하옵소서.'
왕은 놀라고 분격했다. 왕은 표문을 다 읽고나서 이렇게 소리쳤다.
'우리나라의 지세는 험악하고, 지경이 천연의 돌과 연못과 물로 되어 있고 게다가 성을 높이 쌓아 올렸는데, 어떻게 이놈들이 그것을 넘어올 수 있단 말인가!'
왕은 즉시 대장군 백빈에게 조서를 내려, 이 무법한 적병들을 처서 없애라고 엄명했다.
조서를 받은 백빈은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웠다. 이 때 군졸 중에 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는 입으로 바람을 불 수 있는 신기한 요술쟁이로, 그는 자기의 특기를 이용해서 물에 무서운 파도를 일으켜서, 적선들을 순식간에 파멸의 혼란에 몰아 버리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들은 서로 자기 배를 부딪치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목숨만 살려 도망쳐 버리고야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왕은 국토의 방비에 힘을 썼다. 적병이 쳐들어온 것도 이러한 튼튼한 방비가 없는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는 이번 기회에 알았다. 자연의 요새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백빈은 적을 격파하고 나서 강원의 요처 요처에 질예를 부설하고 돌아왔다. 또, 마료로 하여금 복파장군을 삼아 적병의 불의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로부터 외부의 도적들이 감히 강변에 들어와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마료는 마원의 후예였기로, 그 는 이 선조의 빛나는 이름인 복파장군호를 이어받았다.
한 도사가 묘법경을 가지고 왕을 찾아왔다. 그는 어전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설경을 하면 사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연에 잉태되어, 극락세계에 화생하옵나이다.'
왕은 기뻐했다. 그래서, 중 말대로 즉시 수륙도장을 열었다. 여기서 쓰인 비용만 하더라고 억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로부터 불교에 깊이 귀의한 왕은 날마다 좌우의 모든 신하들과 아침 저녁으로 한 번도 빼지 않고 설경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나라의 정사는 전폐하다시피 되어 버렸다.
한림학사 문조라는 자가 청포에 엎드려 충간했다.
'불교는 과연 무엇이오니까? 그들은 잘못된 교리와 간특한 말로써 세상을 속이며 백성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올시다. 제왕의 도는 다만 유가의 경서만을 지켜야 할 따름이어늘,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불법을 믿으시고 패엽을 옳은 경서라 믿으시오니까. 인생은 마치 나무의 꽃이 좋은 자리에 떨어지면 귀한 것이 되나, 더러운 곳에 떨어지면 천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이것은 곧 자연의 진리오니, 그렇거늘 어찌 인과설을 믿어 이 유일하고 참된 도리를 버리겠나이까.'
그러나, 왕은 이런 충간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불교에 너무도 열렬히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조는 백빈과 동본이성의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역시 성질이 고견하고, 문장이 또한 능하여 왕을 많이 도운 것이었다.
이 때 첩여인 반씨가 다른 비빈보다도 왕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왕이 연꽃을 연못에 늘어 놓고, 반씨로 하여금 그 위를 걸으라고 이 렇게 말했다.
'걸음마다 연꽃이 나는 듯하도다!'
이와 같이 왕은 반씨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육랑이라 불렀다.
이때의 어느 아첨 잘하는 자가 옆에 있다가,
'사람들은 육랑을 연꽃과 같다고 하오니, 신은 연꽃이 육랑과 같다고 여기오니다.'
하고 왕의 기쁨을 사서, 왕은 대단히 좋아했다.
사신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했다.
'아첨도 그만하면 일가를 이루는구나! 그런 말은 단풀을 씹는 것보다도 더 달고, 그런 아첨은 나무를 칭찬하는 것보다도 더하니 어찌 슬픈 일이라 아니하랴.'
사년에 강리라는 자를 상주에 귀양보냈다. 강리는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 자는 채채라고 하였다.
성질이 고경하여 직간으로 왕의 뜻을 거스르자, 공자 가란이란 자가 이것을 기회로 그를 왕에게 참소하여 마침내 귀양보내게 한 것이었다. 강리는 적소로 향하면서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소를 지어서 스스로 원망했다.
오년에 왕은 방술사 두생의 말을 들어 백로를 마시고는 병이 나서 좌우 신하들을 불렀으나,
좌우 신하들도 역시 이슬을 마시고 입을 놀리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분을 참지 못하고 다만 연꽃을 부르면서 죽어갔다.
처음, 왕이 동리처사인 황화라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 했으나, 황화는 사양하고 받지를 아니했다. 그는 권세를 싫어하는 도덕이 높고 학문이 깊은 군자였다.
이 때 금인이 녹림적을 몰고 당나라를 포위했다. 그것이 몇 달이 가자 성내의 백성들은 다 굶주리고 말라서 죽어 버리었다. 두양과 백빈같은 위대한 충신들도 또한 이 난리에 죽었고, 이렇게 해서 당나라는 겨우 오 년 뒤에 망해 버리었다.
황화의 자는 금정이라 하고, 사람됨이 매우 의젓하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어떻게 보면 산중 깊이 은신하고 있다는 도사나 또는 신비한 선인같기도 했다. 높은 덕이나, 깊은 학문이 또한 그를 더욱 빛나게 해주어서, 그는 정말 이세상 사람 같지 아니했다.
황화는 원래 전세에 도나라 왕을 섬겨 왔기 때문에, 그 절개를 지키면서 율리에서 살고, 혼자서 어디까지나 자기를 지켜 왔다. 그것이 너무나도 굳세고 자랑스럽기 때문에 제 아무리 강포한 금인(金人)들도 그를 침범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이 위대한 덕행가를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하며, 만절 선생이라 불렀다. 그것은 그의 영예스러운 별호였다.
사신은 이러한 역대의 변천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지켜보며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삼대의 흥망이 눈 깜박하는 사이였고, 사군의 존망이 또한 눈 깜박하는 사이였다. 동원에 잠깐 놓인 것같고 어찌 보면 남가일몽(南柯一夢)이 아닐 수 없다. 아침에 등산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는가 하면, 저녁엔 서산에서 집을 찾아 늦게 돌아가는 산새를 보는 것 같고, 아쉽고 슬프기 한이 없구나, 그 옛날 은허를 노래 부른 맥수가도 주나라의 서리도 이만큼 슬플 수는 없으리라. 삼대 사군의 남가일몽 같은 흥망성쇠를 생각하면 이 붓끝이 공연스레 떨리는 것 같고, 정말 슬프고도 또 슬플 뿐이다.
돌이켜 보건대, 하왕이 옥매를 찾아서 도를 계승케 하였으니, 그 덕이 자랑스럽기만 하고, 당이 삼각지전을 세운 것은 더구나 히든 일이 아니었던가. 아! 오늘날 세상에 남아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만초, 모란, 부용류 등을 보는가 아니 보는가. 이것들이 하, 당의 후손들이라며 날마다 감개가 무량할 것인가. 아! 그들이야말로 하·당의 유손임에 틀림이 없도다.'
사신은 이와 같이 기록해 놓고, 또 한번 전체를 통틀어서 결론을 내리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이 세상 천지간에 인간은 다만 한 가지뿐이나, 꽃에는 수천 수백의 종류가 있으니, 사람이 어찌 꽃의 수와 같다고 할 것인가?'
하고 사신은 감동해서 소리쳤다.
우주 자연을 보면, 하늘은 꽃으로써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사시절(四時節)을 행하고 있다. 이 꽃으로써 사람은 봄이 왔다, 여름이구나, 가을이다, 벌써 겨울이다, 하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인간이 꽃만큼 성실하고 정직할 수 있을 것인가. 꽃만큼 믿을 수 있고 절개가 굳을 수 있을 것인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을 자로 재는 것보다도 더 정확하게 알려 주는 꽃만큼 인간에게 신의(信義)가 있을 것인가.
꽃은 피고 진다. 봄의 따뜻한 햇볕에 피고, 가을의 모진 바람에 용감하게 떨어져 간다 그렇건만 그들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아! 얼마나 숭고하고 고결한 덕행의 실천자들인가. 그 어진 마음은 또한 어진 인간보다도 더욱 어질고 순수하다.
꽃은 또 어디서고 자라고 핀다.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자갈밭이나 바위 틈이라도, 뿌리가 뻗을 만한 곳은 어디든 마다 않고 자라나 꽃을 피워준다.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이토록 공평하고 관대하고 자기 희생의 정신이 있을 것인가. 꽃처럼 공평 무사한 마음이 있을 것인가.
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공평하나, 그것은 우주의 참된 본질이다. 자연과 같이 살고 자연과 같이 죽는 진실한 충신이다. 말없이 자기를 지키고 죽어 가는 만고(萬古)의 어진 충신(忠臣)이다.
그러나, 이렇게 숭고하고 아름다운 꽃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약삭빠르고 몰염치하고 신의가 없을까. 한 가지 보잘 것 없는 자그만 재주라도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대대손손(代代孫孫) 영화와 부귀를 누리려 하고, 남을 짓밟고 할퀴고, 물어뜯고, 때려 엎어서 자기를 그 위에 올려 세워, 남의 송장 위에 공명을 다투고, 후세 만대에 자기의 빛나는 투쟁의 역사와 명예를 남기려 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기를 살리고 내세우려는 추악한 투쟁에서 살고 죽어 간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에 이런 욕망이 있을 것인가. 꽃은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군사와 같다. 군자는 인간의 꽃이다. 그런지라, 송나라 염계 선생은 뜨락의 풀은 매지 않고, 내 뜻도 이와 한 가지일지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던가.
참된 군자는 선생과 같이 화초의 미덕을 본받으려고 애쓰는 법이다. 꽃의 덕을 닦고, 꽃처럼 결백하고 어질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말과 공을 앞세우는 자에게 진실한 덕성의 완성이 있을 것인가'
하고 사신은 최후로 이와 같이 자기 말을 맺었다.
요점 정리
연대 : 선조 때(16세기)
작자 : 임제(작자에 대하여는 인조∼숙종 연간의 남성중(南聖重)이라는 설과 연대 미상의 노긍(盧兢)이라는 설 등 세 가지 설이 있다.)
형식 : 의인체 소설, 한문 소설
성격 : 우의적, 연대기적, 서사적
주제 : 꽃나라 흥망성쇠의 역사
의의 : '화왕계' 및 가전체와의 계승관계
출전 : 백호집
줄거리 : 매화(梅花)·모란(牡丹)·부용(芙蓉)의 세 꽃을 의인화(擬人化)하여 각각 도(陶:겨울)·동도(東陶 : 봄)·하(夏:여름)·당(唐:가을)나라의 군왕으로 삼고, 계절에 따른 여러 꽃을 중신(重臣)·간신(奸臣)·역신(逆臣)·은일(隱逸) 등으로 비유하여 국가의 흥망성쇠를 그렸다. 각국이 망한 뒤에는 작자가 사신(史臣)이 되어 그 정치를 비판한 작품이다.
내용 연구
청백 : 청렴결백
관후 : 너그럽고 후함
두약, 백지 : 모두 식물이름으로 의인화됨
세수 : 해의 첫머리, 설
정전 : 중국의 하, 은, 주 3대 때 실시되던 토지제도, 정자형으로 9등분한 농지 중 중앙의 한 구역은 공동경작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고, 8구역은 사전(私田)으로 하던 제도
녹림적 : '녹림'은 푸른 숲이라는 뜻외에 도둑의 소굴이라는 뜻도 있음, 여기서는 나뭇잎을 의인화한 것.
조서 : 임금의 뜻을 널리 알리고자 적은 문서
수형 : 하천을 관장하던 관직
거만 : 재물이 막대함을 이르는 말
격양가 : 풍년이 들어서 농부들이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를 일컫는 말.
남가일몽(南柯一夢) : 한갓 허망한 꿈, 또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와 영화를 일컬음
당나라 덕종 때 광릉이란 곳에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집 남쪽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그 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때 보랏빛 옷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서 괴안국(槐安國) 임금님의 명령으로 당신을 모시러 왔습니다." 라고 했다. 분이 그 사자(使者)를 따라 느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커다란 성문 앞에 다다르니 '대괴안국'이라고 금글자로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국왕은 분에게 자기 딸을 주어 사위를 삼았다. 분은 여기서 친구인 주변(周弁)과 전자화(田子華)를 만났다. 분은 그들을 부하로 삼고 남가군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태수가 된 지 20년, 백성들은 모두 안정된 생활을 즐기며 분의 덕을 칭송하였고, 임금도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단라국(檀羅國)이 쳐들어왔을 때, 대장인 주변은 적을 얕보아 패하더니 등창을 앓다가 죽었다. 분의 아내도 병으로 죽어, 그는 태수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 분은 느티나무 아래서 잠이 깨었다. 모두가 꿈이었다. 나무 밑둥에는 과연 큰 구멍이 하나 있었다. 파 보니 개미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커다란 개미 두 마리가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의 서울이며, 커다란 두 개미는 국왕 부처였다. 또 한 구멍을 찾아 들어가니, 남쪽 가지 사십 척쯤 올라간 곳에 또 개미떼가 있었다. 여기가 분이 다스리던 남가군이었다. 분은 구멍을 원래대로 고쳐 놓았다. 이튿날 아침 가 보니, 구멍은 밤에 내린 비로 허물어지고 개미도 없어졌다.
은허 :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에 있는 은나라의 유적
맥수가 : 은나라의 신하 기자가 은이 망한 후, 주나라 때에 은나라의 폐허 속에서 보리만은 잘 자라남을 보고 한탄하며 지었다는 노래이름.
서리 : 망국의 성터가 황폐하여 기장과 같은 식물이 자라 쓸쓸한 광경
하왕이 옥매를 ~ 계승케 하였으니 : 하왕이 매화에게 왕위를 물려준 사실을 말함.
삼각지전 : 왕이 선왕을 공경하는 의식, 주나의 무왕이 우, 하, 은 3대의 후손을 봉하여 '삼각(三恪)'이라 한 고사에서 나옴.
유손 : 망한 나라의 자손
이해와 감상
조선 중기에 임제 ( 林悌 )가 지은 의인체 한문소설. 1책. 필사본. 작자가 남성중 (南聖重)이나 노긍(盧兢)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임제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이 작품은 1958년 중간된 ≪ 백호집 白湖集 ≫ 별책 부록 ≪ 남명소승 南溟小乘 ≫ 에 수록되어 있다.
〈 화사 〉 는 식물세계를 의인화하여 사건을 전개한다. 역사서술방식인 본기체(本紀體)에 의하여 편년식으로 서술하였다. 〈 화사 〉 의 내용은 봄 · 여름 · 가을 등의 세 계절에 피는 꽃 중에서 매화 · 모란 · 부용 등 세 꽃을 군왕으로 하였다.
철 따라 피는 꽃 · 나무 · 풀들의 세계를 나라와 백성과 신하로 삼아서 사건을 진행시킨다. 매화는 도(陶), 모란은 하(夏), 부용은 당(唐)이라는 왕국을 통치한다. 도국은 6년 동안 통치되고 이어서 동도국(東陶國)이 시작된다.
동도국의 왕은 매화의 동생인 악( 冒 )이다. 5년 동안 정사를 보다가 장군 양서(楊絮)가 보낸 석우(石尤)에게 살해된다. 그리고 석우가 또 양서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요황(姚黃 : 모란의 별칭)을 낙양에서 옹립하니 이가 곧 하의 문왕이다.
하는 6년 동안 통치되었다. 그러나 하왕이 후원에서 야록(野鹿)에게 물려 죽자 망한다. 녹림적(綠林賊)이 치성(熾盛)하게 되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왕을 선언하였던 계주백(桂州伯)에게 돌아가지 않고 수중군(水中君, 蓮)에게 귀부한다., 그가 전당(錢塘 : 연못)에서 즉위하여 남당명주(南唐明主)가 된다.
남당명주는 이름을 백련(白蓮)이라 하여 5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방사(方士) 두생(杜生)의 말을 듣고 백로 ( 白露 )를 마셔 병을 얻고 말았다. 또한, 좌우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이슬을 마셔 벙어리가 되어버려 말을 못하게 된다., 왕이 분을 참지 못하여 하하(荷荷)라 말하고 죽어버린다. 이밖에 많은 꽃과 나무들이 나온다.
〈 화사 〉 는 매 · 죽 · 모란 · 연 등 많은 꽃들로써 영주(英主) · 현신(賢臣) · 우군(愚君) · 간신(奸臣)을 말하였다. 여러 제도 · 지명 · 인명 등을 모두 화훼(花卉)에 관련된 글자들로 모아 중국 역대역사에 비겨서 서술하고 있다.
〈 화사 〉 의 특색은 중요한 대목 끝에 ‘ 사신왈(史臣曰) ’ 이라 하여 작자의 사평(史評)을 달고 있는 점이다. 이는 곧 역대왕정의 잘잘못과 신하들의 충불충 등이 미치는 응보관계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하여, 당대 현실사회의 부정을 풍자하고 이상사회를 희망하는 작자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연은 불교의 상징과 같으므로 이를 끌어다가 혹세무민하는 사설(邪說)로 논단(論斷)해놓음으로써 숭유배불정신을 고취하고 왕도정치의 구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명나라 병중존(甁中尊)이 지은 동명의 소설 〈 화사 〉 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체재 · 내용 등이 상이하므로 상호간의 관련성은 희박하다.
또, 설총 ( 薛聰 )의 〈 화왕계 〉 가 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 주제나 상징적 수법에 있어서 직접적인 관련성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규장각본을 비롯하여 장서각 · 국립중앙도서관 · 충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각각 필사본이 전한다.
≪ 참고문헌 ≫ 白湖集, 元生夢遊錄과 林悌文學(黃浿江, 韓國敍事文學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72), 花史論(鄭學成, 한국한문학연구, 1981), 林悌와 그의 文學(蘇在英, 古小說通論, 二友出版社, 1983).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가전과의 관계
'화사'는 옛 역사책을 본받아, 연 월에 따라 사건을 기술하였고 간간이 작가가 사관의 입장에서 소견을 가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꽃이나 초목을 인간 사회의 인물로 의인화하여 꽃 나라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가전 문학 체제를 계승한 것이다.
가전 문학의 작가는 사물의 속성을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러나 '화사'는 궁극적으로 자연 사물보다는 인간 사회와 역사 즉, 왕조의 흥망이라는 사건의 표현에 초점이 놓여 있다. 화사에 등장하는 화초는 인간 사회의 일반적 심상이 투영된 자연물들이다.
역사와의 대응관계
작가의 시대적 상황과 일치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작품 속의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이조도 실제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작가의 의식
화사에서 작가는 봉건적 이념을 아무런 회의없이 수용하고 있으며, 작가는 서술자의 논평을 통해 관료 사회에 대한 회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며, 이러한 것은 당시대인의 작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임제(林悌)
1549(명종 4) ∼ 1587(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 풍강(楓江) · 소치(嘯癡) · 벽산 ( 碧山 ) ·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 ( 成運 )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는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 찼다.
임제가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 때에 ≪ 중용 ≫ 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임제는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에 합격하였다. 이듬해에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 서도병마사 · 북도병마사 ·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 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 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임제는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사람들은 임제를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임제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과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로 지기(知己 ; 친구 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에 여러 아들에게 “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 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 고 한 뒤에 “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 ” 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임제는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 수성지 愁城誌 〉 · 〈 화사 花史 〉 · 〈 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이밖에 시조 3수와 ≪ 임백호집 ≫ 4권이 있다.
≪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 白湖集, 林悌의 初期詩에 대하여(심호택, 백강서수생박사화갑기념논총 한국시가연구, 형설출판사, 1971), 林悌論(蘇在英, 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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